츤데레 남사친과 능구렁이 남친 사이
17 (너와 내가 주인공인 이야기)
[야, 진짜 미안. 내가 그러려고 그런 게 아니라.. 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어제 저녁에 도착한 오세훈의 문자 메시지였다. 사실 어젠 아무 것도 하기가 싫어 집에 도착을 하자마자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었다. 쉽게 잠은 오지 않았지만, 왠지 무기력하고 우울해 가만히 누워 있고만 싶었다. 그래서인지, 어제 도착한 문자를 오늘 아침이 되어서야 확인을 하게 된 것이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난 그것도 모르고 혼자 안 뺏긴다느니 뭐니 원맨쇼를 한 셈이었다. 오세훈에게 화를 내긴 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녀석이 잘못을 한 건 아니었다. 어차피 언젠간 알게 될 것이었고, 예상치 못한 순간에 어떻게든 마주하게 될 사실이었다. 그저 먼저 알고 나중에 알고의 차이…. 다만, '모르는 게 약이다' 라는 말이 있듯이, 이미 알게 되어버린 마당이었지만서도 차라리 모르고 싶었다. 아니지, 지금 몰라봤자지. 원치 않아도 언젠간 알게 될 사실인데, 지금 몰라봤자….
골대에 골키퍼 있다고 골이 안 들어가는 건 아니지. 그래, 아니야. 아닌 건 아닌 건데, 왜 그 골키퍼가 나일 순 없는 거지. 내가 그 골키퍼가 될 순 없는 건가. 너한테 난 뭐지. 난 뭐지?
"다녀오겠습니다."
"종인아, 밥은?"
"주번이라 일찍 가야 해서요."
밥맛도 없어 엄마에게 작은 거짓말을 하곤 집을 나섰다. 물론 기분탓이겠지만, 오늘따라 앞머리가 가지런히 정돈되지 않는 느낌이다. 운동화 리본끈도 서로 길이가 다르고… 심지어,
"아, 넥타이."
넥타이도 집에 두고 왔다.
어차피 요즘들어 고3은 복장이 불량해도 딱히 터치를 하지 않아 상관은 없었지만, 괜히 찝찝하면서도 화가 났다. 이유없이 자꾸만 짜증이 나고 화도 내고 싶고… 안그래도 하기 싫던 공부, 오늘은 특히 더 하기가 싫었다.
'내가 지금까지 지켜봐온 결과, 넌 너무 답답해.'
'너 고백은 언제 할 건데?'
'너 그러다 놓쳐, 인마. 얼른 잡아둬야지. 걔랑 평생 친구로만 남고 싶어? 연애는 안 해?
'계속 그렇게 뜸만 들이다 다른 남자한테 뺏긴다고.'
'너 백퍼 뺏기게 생겼다.'
고백을 왜 안 하는 거냐면… 그야 아직은 시기가 아닌 것 같으니까. 안그래도 수능, 대학, 진로에 대한 스트레스 때문에 정신 없어 할 애한테 고백을 한다는 건, 막대한 부담감을 안겨주는 것과도 같았다. 최대한 배려를 해 수능이 끝나고나면 멋있게 프로포즈 해볼까 생각도 해봤지만, 이제 그것마저 물거품이 되고 말 듯했다. 이미 다른 사람을 마음에 품은 이상,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귓가에 박혀올 리가 없었다.
"……."
고백을 해서 얻을 수 있는 게 과연 뭐가 있을까. 솔직히 말하자면, 얻는 것보단 잃는 게 훨씬 많았다. 갑작스레 고백을 했다 아예 사이가 멀어져버릴 수도 있는 것이었고, 의도치 않게 남보다도 못한 사이가 되어버릴 수도 있는 것이었다. 아니,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잖아. 일단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반은 실패한 셈 아닌가.
고백… 하고 싶다. 좋아한다 말하고 싶다. 비록 잃는 게 더 많다 할지라도 난 네 마음 하나만 얻으면 되니까 상관은 없는데. 그냥 네 마음 하나만, 내 것이었음 좋겠다. 내꺼 하게 해 줘.
*
주번이라는 핑계를 대고 일찍 집을 나선 탓에,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까진 대략 15분 정도가 남아있었다. 나름 느리게 걸었다 생각했는데, 생각만큼 느리게 걸은 건 아니었나 보다. 그냥 일찍 나오지 말고 여유 좀 부리면서 넥타이나 챙겨 나올 걸, 하는 후회감이 들었지만 그냥 접어두기로 하곤 근처 편의점에 들어가 가나 초콜릿 하나를 구입했다. 이제 좀 먹어볼까, 하면 다 먹고 사라져있을 법한 사이즈가 왜이리 비싼 건지 모르겠다.
"어? 벌써 왔어?"
"아."
"왜이리 일찍 왔어?"
"그러는 너는."
"난 편의점 좀 들리려고…."
"아침 못 먹었어?"
"아니, 먹었지. 초콜릿 사먹고 싶어서."
이럴 땐 타이밍도 잘 맞는다. 내가 초콜릿이 먹고 싶을 때 너도 초콜릿이 먹고 싶을 줄이야. 통한 거지, 이거.
방금 사서 주머니 속에 넣어두었던 초콜릿을 꺼내 살며시 손에 쥐여주었다. 갑작스레 닿는 딱딱한 감촉에 살짝 놀란 건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나를 올려다보는 모습이 귀여웠다. 그러다 문득 어제 일이 떠올라 다시금 기분이 급격히 다운됐고, 그걸 알 리가 없는 넌 헤실헤실 웃으며 초콜릿 껍질을 까는 데에만 열중을 가하기 바빴다. 굳이 먼저 언급을 하고 싶진 않았지만, 왠지 얼굴을 마주하니 괜한 궁금증이 피어오르는 것만 같았다. 좋아하는 사람 있다 했지. 그거 누구야?
"웬 초콜릿? 너 먹으려고 산 거 아니야? 나 줘도 돼?"
"오다 주운 건데 멀쩡해 보이길래."
"… 누군진 모르겠지만 멀쩡한 걸 왜 버린담. 떨어뜨린 건가? 아깝게."
"… 그걸 또 믿네."
"어?"
"아니야."
순진한 건지, 순수한 건지 그냥 뱉은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버리는 모습에 헛웃음이 나왔다. 콩깍지가 씌인 건가, 이젠 이런 모습마저 귀엽다고 느껴졌다. 이러다 상사병이라도 걸리면 어쩌지. 큰일인데.
*
1교시 수업도 어느새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1교시가 뭐였지. 뭘 배웠더라. …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1교시가 뭐였는지, 뭘 배웠는지에 대해선 단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오늘 네가 조금 두툼한 후드집업을 입었다는 것과, 머리를 하나로 깔끔히 묶었다는 것 쯤은 생생히 기억이 났다. 정말 어리석은 생각이겠지만, 국어영역과 수학영역, 그리고 영어영역 대신 너라는 영역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럼 눈 감고 풀어도 백 점은 기본일 텐데.
"헤이."
"어?"
"어제 문자 왜 씹었냐."
"잤어."
"오, 김종인은 일찍 자도 눈 밑에 다크써클이 내려오는 신비로운 능력을 보유하고 있구나."
"넌 어떤 말로든 사람을 빡치게 만들 수 있는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잖아, 새끼야."
"… 아직도 화 안 풀렸냐."
쉬는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마자 내 자리로 와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는 오세훈에게 대충 대꾸를 해주곤 수업 내내 펴두지도 않았던 교과서를 책상 서랍 속에 집어 넣었다. 옆에 멀뚱히 서있기만 하긴 무안했던 건지, 녀석이 내 앞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리곤 필통 속에 들어있던 샤프를 꺼내 깔끔한 책상 위에 무언가를 끄적이기 시작한다.
"뭐하냐."
"너랑 ○○이 이름 궁합 보는 중."
"뭐?"
"… 아, 38퍼센트."
꽤나 아쉽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한숨을 작게 내쉬는 녀석을 바라보며 혀를 끌끌 찼다. 도대체 열아홉이나 먹고 저런 구닥다리 같은 놀이를 왜 하는 건지 이해를 못하겠다. 남들이 초등학생일 때 하던 놀이를, 녀석은 십대의 끝무렵에 다다라서야 즐기고 있었다. 뒷북 한 번 장난 아닌 놈이었다. 여기 비파형 동검 팔아요. 세형 동검이랑 교환 가능합니다.
"낙서 그만하고 싹 다 지워."
"낙서라니."
"낙서 아니면 뭐야. 예술 작품이라도 돼?"
"… 아, 아깝다. 사랑랑이네."
"그딴 것 좀 그만 할 수 없어?"
"아, 알았어. 안 하면 될 거 아냐. 짜식, 존나 쪼잔하게 구네."
"깨끗이 지워."
"알아. 화이트 좀."
"… 병신인가."
"왜? 아, 책상이었지 참."
여러모로 인상을 찌푸리게 만드는 녀석은 오늘도 역시나였다. 저도 민망했던 건지, 어색히 웃음을 짓곤 필통 속에서 지우개를 꺼내 책상 위의 낙서들을 빡빡 지워내기 시작한다. 정말이지 귀찮은 놈이다.
*
오전수업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겠다. 어제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으니 수업시간에 잠이 쏟아질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잠을 자진 않았으나 내내 멍을 때렸기에 수업에 집중을 하지 못한 건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시간은 생각보다 빠르게 흘러갔다. 멍을 때리다 시계를 쳐다보니 어느새 3교시였고, 내내 무기력하게 있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덧 점심시간이었다. 종이 울려도 늦게 마쳐주시기로 유명한 문학선생님이 웬 일인지 오늘은 제 시간에 수업을 끝내주셨다. 그랬기에, 종이 울리자마자 교실을 나설 수 있었다.
"김종인, 점심 맛있게 먹어라."
"어, 너도."
"오늘 닭볶음탕 나온대. 짱신짱쁨."
"그건 뭔 외계어야."
"짱 신나고 짱 기쁘다고."
"… 너 같은 것들 때문에 언어가 파괴되는 거야."
"에이."
"광화문 광장에 세종대왕 동상이 갑자기 사라졌다는 뉴스 속보 뜨면, 긴장 좀 하고 있어."
"왜?"
"노하셔서 너 잡으러 간 거니까."
"… 미친."
지나친 과장까지 섞어가며 꽤나 진지하게 말하자, 오세훈이 똥이라도 씹은 듯한 표정을 지어보인다. 그런 녀석을 애써 무시하곤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그와 동시에 옆 반의 수업이 끝난 건지, 굳게 닫혀있던 교실 문이 활짝 열리며 몇몇 학생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럼 난 간다. 우리말을 끔찍이도 사랑하는 김종인씨."
"꺼져, 빨리."
반찬으로 닭볶음탕이 나온다는 것에 대한 신남과 기쁨을 표현이라도 하듯, 녀석이 댄스 동아리 시절에 즐겨 밟곤 하던 스텝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다시 한 번 더 휴대폰 홀드를 열어 시간을 확인했다. 그리곤 오세훈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나서야 교실 뒷문을 통해 쭈뼛쭈뼛 걸어나와 나를 찾기라도 하듯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작은 아이에게 다가갔다.
"여기."
"어? 너 웬 일로 일찍 나왔냐."
"배고파. 빨리 밥 먹고 싶어서."
실은, 빨리 너 보고 싶어서.
"아아, 그렇구나. 수업 내내 배에서 꼬르륵 소리 났겠네?"
"꼬르륵만 났겠냐. 꾸르륵도 났어."
"꾸르륵이래. 꾸르륵이 뭐야, 어감 좀 봐."
꺄르르 웃으며 말하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렇게 나란히 서서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웃을 수 있다는 게 새삼 좋았다. 수업은 잘 들었는지, 나와 떨어져있는 오전 수업시간 동안 무슨 일은 없었는지. 서로 이것 저것을 공유하며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게 좋았다.
물 흐르듯 자연스레 이어지는 대화에 어제 일에 대한 이야기를 던지면 분위기가 이상해지려나. 궁금하긴 한데, 왠지 물어봤다간 땅을 치고 후회하게 될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야."
"응?"
"반에 괜찮은 남자애 있어?"
"왜?"
"그냥."
"… 글쎄. 아직 말 한 마디도 못 붙여본 애들이 태반이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은 채 다시 이유를 물어오는 모습을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저었다. 그리곤 아무것도 아니라며 뽀얀 볼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자, 삐진 듯한 표정을 지어보인다. 그 모습이 귀여워 부둥부둥 끌어안아주고도 싶었지만, 그럴 수 없이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어야 한다는 게 너무나도 괴로웠다. 내 앞에서 그런 표정 짓지마. 너 진짜 잔인해. 알고 그러는 거야, 모르고 그러는 거야? 가슴앓이 좀 그만하게 해줘.
"그리고 있잖아, 내가 아는 남자애라곤 너랑 오세훈밖에 없어."
"알아, 그건."
"… 아, 응."
"나도 마찬가지야."
"응?"
"아는 여자앤 너밖에 없어."
"… 뻥."
"뭐가 또 뻥이야."
"… 뻥 아님 말고."
단호한 어투로 말하자 바로 수그리며 말을 얼버무린다. 그 모습이 웃기면서도 귀여워 작게 웃어버리자 괜히 얼굴을 붉힌다. 자꾸 귀여움에 또다른 귀여움이 꼬리를 무는 것만 같았다. 귀여워서 깨물어주고 싶다는 표현이 바로 이럴 때 쓰이는 거라는 걸 지금에서야 완벽히 깨닫게 된 듯했다.
귀여운데 괴롭다. 지켜볼 수밖에 없는 게 괴로워. 그래도 좋아. 괴로운데 좋아.
*
'… 글쎄. 아직 말 한 마디도 못 붙여본 애들이 태반이야.'
그럼 누굴 좋아한다는 거야.
'그리고 있잖아, 내가 아는 남자애라곤 너랑 오세훈밖에 없어.'
… 오세훈이기만 해 봐. 아니지? 진짜 최악인 거야, 그건.
"야,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 아."
"뒤에서 몇 번을 불렀는데 왜 뒤를 안 돌아보냐."
"못 들었어."
"됐고, 오늘 PC방 달리자."
"수능 포기했냐."
"수시에 올인."
"다 떨어졌으면 어쩌려고. 경쟁률 장난 아니었다며."
"그냥 굳건히 믿는 거지."
"병신인가."
"아, 어쨌든 PC방 가자고."
"나 오늘 과외 있어."
"오, 네 라이벌 만나겠네."
힘을 내라며 내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주곤 화이팅 제스쳐를 해보이는 오세훈에게 제발 시끄럽게 좀 하지말고 꺼져달라 말하자, 녀석은 제법 쿨하게 제 자리로 돌아가버린다. 사실 오늘 과외수업이 있는 날이라는 걸 망각하고 있었는데, 방과 후 PC방에 가자는 오세훈의 제안에 잊고 있던 사실이 불현듯 떠오르고 말았다. 과외…. 그래, 오늘은 과외수업이 있는 날이었다. 지루하기 그지없는 국어수업을 하는 것보다 박찬열의 얼굴을 보는 게 훨씬 싫었다. 오늘은 또 어떤 가식적인 모습으로 점수를 따려 노력할지 기대가 되면서도 한편으론 불안감이 느껴졌다. 혹시 좋아한다던 사람이 박찬열은 아닐까, 하는 불안감 말이다. 따지고 보면, 좋아하는 사람일 가능성이 가장 높은 인물은 박찬열이었다. 박찬열은, 여자는 물론 남자가 봐도 잘생겼다 느낄 법한 외모를 가졌고, 모든 여자들이 좋아할 만한 다정다감한 성격을 가졌다.
… 씨발, 안 좋아할래야 안 좋아할 수가 없겠네.
기타 연주를 잘하는 사람을 좋아한다길래 기타도 배워보려 했던 적도 있고, 박찬열에게서 풍겨오는 달큰한 향수 냄새에 네가 뿅이라도 가버리진 않을까 걱정이 돼, 뭣도 모르는 향수 전문점에 들어가 테스트만 잔뜩 해보곤 아무런 소득없이 집으로 돌아왔던 적도 있다. 생각해보면 난 노력만 할 뿐, 노력을 해서 얻어진 결과는 항상 만족스럽지가 않았다. 그렇다고 노력조차 안 하기엔 마음이 답답하고…. 뭘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네. 어쨌든, 지금 내 예상으론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 박찬열이라는 거지. 박찬열. 박찬열…. 난 도대체 언제까지 그 이름을 미워하게 될까.
*
잘 넘어가지도 않는 밥을 꾸역꾸역 억지로 넘겼다. 석식에 해물파전과 오렌지맛 푸딩이 나온다며 시끄럽게 떠들어대던 오세훈은, 알고보니 다음주 메뉴를 오늘 메뉴로 착각해 말한 것이었고, 오늘의 진짜 석식 메뉴는 김치볶음밥과 떡볶이였다. 김치볶음밥과 떡볶이를 좋아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은 하루종일 입맛도 없고, 의욕도 없었다. 내일도 오늘 같으면 큰일일 텐데.
야간 자율학습은 질색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만큼은 왠지 야자를 하고 싶었다. 어쩌면 그 아이가 좋아하는 사람일지도 모를 박찬열의 얼굴을 보는 것보단 학교에 남아 야자를 하는 게 훨씬 나을 듯했다. 안그래도 마음에 안 드는 박찬열이 더 마음에 안 들어지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내가 한눈이라도 파는 사이에 둘이 눈이라도 맞으면 어쩌지. 마침 둘 다 서로에게 품고 있는 마음도 같으니, 만약 그걸 확인하게 된다면…
"김종인!"
"어어, 왜."
"내 말 듣고 있어?"
"… 못 들었어."
잠깐 다른 생각을 하다 또 정신을 놓고 있었던 건지, 갑작스레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흠칫 놀라고 말았다. 그니까 지금은… 학교를 나선 뒤 과외수업을 받으러 가는 중이었다. 못 들었다는 내 말에 인상을 작게 찌푸리며 나를 흘겨보는 모습에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이러는 것도 다 너 때문이야. 같잖은 핑계 같은 게 아니라 진짜, 진짜 너 때문이라고.
"무슨 말 하고 있었지. 잠깐 딴 생각 좀 하느라…."
"에이씨, 자랑이야? 말 안 해."
"… 치사하긴."
"너 오늘 좀 이상한 것 같아. 설마 또 감기몸살 걸린 거야? 열 나?"
"아니거든."
제법 걱정스레 물으며 이마에 손을 얹어보려 가까이 다가오는 모습에 괜히 심장이 떨려 몸을 살짝 피했다. 이거 참 중증이네. 심각한 병이라도 걸린 사람 같았다. 지금의 내가.
"… 어? 문자 왔어."
"무슨 문자."
"찬열쌤한테."
"뭐라는데?"
"어.. 오늘 수업 카페에서 하는 거 어떨까? 저번 그 카페에서. 쌤이 음료 주문 해놨어. 이렇게."
"… 막무가내네."
"뭐 어때. 한두 번은 야외수업 하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그리고 음료도 사주시는 건데."
"나도 돈 있어."
"공짜잖아."
"… 언제부터 공짜를 그렇게 좋아했다고."
"공짜를 누가 싫어하겠어. 다 좋아하지."
… 그냥 박찬열이 좋은 거겠지.
뭐가 그리도 신이 난 건지 싱글벙글 웃으며 빠르게 앞장을 서는 모습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렇게 생각을 안 하려 애써도 자꾸만 부정적인 쪽으로만 생각이 치우쳤다. 정말 이러기 싫은데, 자꾸만 나도 모르게 생각이…
"……."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는 생각들을 잠시 접어두고 문득 앞쪽으로 시선을 옮겼을 때, 꽤나 짧으면서도 좁은 교복 치마가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분명 아침에 등교를 할 때도, 점심시간과 석식시간에 급식을 먹을 때도 같이 있었는데 이제서야 치마가 눈에 들어왔다는 건 내가 하루종일 딴 생각에 사로잡혀 주변에 신경을 안 썼다는 것이겠지. 근데… 내가 제일 싫어하는 줄인 치마를 왜 입고 온 건데, 오늘.
멍하니 짧은 치마를 바라보기만 하다, 한 걸음 빠르게 다가가 손목을 살짝 잡아 당겼다.
"야."
"… 어?"
"너 치마 줄였어?"
"어? 아, 이거… 나 치마 드라이 맡겨놔서 입을 게 이것밖에 없더라고…."
우물쭈물거리듯 한 문장을 천천히 늘어놓는 목소리가 조금은 떨렸다. 고등학교 1학년 때였을까, 한창 겉모습을 꾸미는 데에 관심이 쏠려있던 시기였다. 길이가 길고 폭이 넓은 치마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건지, 제법 짧고도 타이트하게 줄인 치마를 입은 채 내 앞에 나타난 모습에 짜증 아닌 짜증을 낸 적이 있다. 도대체 잘 보일 사람이 어디 있다고 치마를 그렇게 줄인 거냐, 치마를 짧게 줄여 다리를 훤히 드러내고 다니면 누가 예쁘다 해줄 거라 생각하는 거냐며 큰소리를 쳤었다. 실은 걱정이 돼서 했던 말인데, 나도 모르게 거칠게 나와버린 말이었다. 그 말에 상처를 받았던 건지, 그날 이후론 줄이지 않은 교복 치마를 꾸준히 입고 나오곤 했다. 근데 그때 그 모습을 지금 또다시 보게 될 줄이야. 그런 모습은 나한테만 보여줘도 충분하단 말이야. 특히 지금은 박찬열도 만나러 가는 건데…
"집에 들렀다 가자."
"집? 왜?"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와."
"에이, 뭐하러 그래. 나 안 불편해."
"보는 내가 불편해서 그래.
"그런 억지가… 어딨어."
"억지 부리는 거 아니야. 좋은 말로 할 때 갈아입고 와."
"… 어차피 곧 수업 시작이야. 집 들렀다 가면 늦는다고."
"너 그런 치마 입고 수업 듣는 것보단 나아."
"왜이리 막무가내야?"
네가 내 입장이었어 봐.
"아, 치마가 그… 아씨, 몰라."
"뭐라고?"
이런 감정이 드나 안 드나. 너도 꼭 한 번 느껴 봤음 좋겠다.
*
"○○이는 바닐라라떼, 종인이는 핫초코. 맞지?"
미리 주문을 해놓은 음료를 하나씩 건네며 박찬열이 웃어보였다. 오늘도 역시나 앞머리를 세웠다. 도대체 언제까지 재수가 없을 예정인 건지 정말 진지하게 물어보고도 싶었다.
박찬열의 맞은편 자리에 털썩 앉곤 문제집을 꺼냈다. 그러나 곧이어 내 옆자리가 아닌 박찬열의 옆자리에 앉는 네 모습에 잠시 행동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렇게 앉는 게 훨씬 편하고 효율적으로 수업을 할 수 있는 것이긴 했지만, 괜히 마음이 불편했다. 네가 짧은 치마를 입고 박찬열 옆에 앉는다는 것 자체가 난 짜증이 난다 이거야.
살짝 식어버린 핫초코를 한 모금 마시곤 입고있던 교복 와이셔츠를 벗었다. 반팔 티셔츠 한 겹만 남아 몸이 살짝 으슬으슬 추웠지만 상관은 없었다. 벗은 교복 와이셔츠를 곧게 펼치곤 살짝 던지듯 건네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빤히 바라본다. 뭘 그렇게 봐. 다리 덮으라고.
*
"종인아, 이해 가지?"
"뭐, 대충."
"하하, 종인이도 이제 내가 많이 편해졌나 보네. 은근슬쩍 말도 놓고."
분명 웃으면서 하는 말이었으나, 백퍼센트 비꼬는 말투였다. 내가 박찬열을 싫어하듯 박찬열도 나를 싫어했고, 내가 박찬열을 재수없게 여기듯 박찬열도 나를 재수없게 여겼다. 그렇다고 이렇게 매번 과외수업을 할 때마다 박찬열과 신경전을 벌이기엔 정말이지 시간이 아까웠다. 짝사랑만 하기에도 아까운 시간을 왜 이딴 쓸모 없는 일에 허비를 해야 하는 건지.
박찬열이 수업에 관해 열심히 떠들어대는 와중에도 내 머릿속은 한결같이 복잡하기만 했다. 왜이리 둘의 모습이 다정하게 보이는 건지 모르겠다. 너와 나 사이에 박찬열이 끼어있는 게 아니라, 너와 박찬열 사이에 내가 끼어있는 거라는 생각도 들면서 어쩌면 내가 제 3자라도 되어버린 것 같다는 갖가지 부정적인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진짜 최악이네. 질투 나니까 박찬열이랑 붙어있지 마. 네 앞에 있는 나는 안 보이나 보네. 나 좀 봐달라고 소리라도 쳐볼까. 난 문제집보다도 너를 더 많이 쳐다보고 있는데, 넌 어떻게 나한테 눈길 한 번을 안 줘.
왜 난 과외선생이 아닌 거지. 나도 너한테 도움이 되어주고 싶은데. 내가 박찬열처럼 말투도 바꾸고 다정다감하게 대해주면, 너도 나 좋아해줄래?
*
집까지 데려다 주겠다는 박찬열의 호의를 완강히 거절하곤 단 둘이 카페를 나섰다. 밖은 벌써 어둑해져 있었고 꽤나 쌀쌀해진 가을 밤 날씨에, 겉으로 드러난 맨살을 비볐다. 이런 어색한 분위기를 의도하려 했던 건 아닌데, 과외수업의 시작을 전후로 갑자기 분위기가 확 다운되어버린 듯했다.
"이거 가져가."
"아."
한참을 고요함 속에서 허우적거리기만 할 줄 알았지만, 갑작스레 침묵을 깨우는 목소리에 고개가 절로 들어졌다. 애써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와이셔츠를 건네오는 모습에 작게 탄성을 내뱉곤 와이셔츠를 받아들었다. 왠지 지금 나랑 있는 이 순간을 많이 불편하게 여기는 듯했다.
"야, 아깐 미안."
"……."
"미안하다고."
"내가 입고 싶어서 입고 온 거 아니야."
"……."
"보기 싫은 거 알겠는데, 그렇게 화낼 필요는 없잖아."
"……."
"넌 내가 뭘 하든 마음에 안 들어?"
"뭐라는 거야. 그런 뜻이 아니잖아."
"맨날 그런 식이잖아. 네 마음에 안 들면 막무가내로…. 난 그러려고 그런 게 아닌데."
천천히 옮기던 걸음을 멈추더니 갑작스레 고개를 떨구는 모습에 너무나도 당황스러웠다. 몰랐는데, 내심 신경을 많이 쓰고 있었던 것 같다. 시기가 시기인지라 안그래도 예민해져 있을 애한테 신경쓸거리를 하나 더 안겨준 셈이 된 것만 같았다. 적어도 나때문에 눈물 흘리게 하고 싶진 않았는데, 오늘도 그만 울려버리고 말았다.
"… 아, 잠깐…"
일단 달래줘야 할 것 같아 주머니 속을 뒤졌다. 하필 이럴 땐 손수건도 없다. 고작 동전 몇 개와 휴대폰밖에 들어있지 않은 교복 주머니를 뒤로 하곤 대충 손으로 눈물을 닦아내 주었다. 그동안 쌓아왔던 섭섭함을 이제와서 한방에 털어내기라도 하듯 서럽게 우는 모습에 괜히 마음 한 구석이 저릿했다.
"미안."
"……."
"그만 울어. 내가 잘못했어."
어떻게 달래줘야 할지도 막막해 쭈뼛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어정쩡하게 서서 지켜보고만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고개도 들지 못한 채 훌쩍이고 있는 작은 아이를 어설프게 끌어안아 주었다. 이래도 될진 모르겠지만, 지금 이 순간은 그냥 이러고 싶었다.
"……."
목적은 달래주는 거였는데, 눈치없이 자꾸만 빠르게 뛰기 시작하는 심장 때문에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손은 어디다 둬야 하지…. 기껏 해봐야 내 가슴팍까지밖에 오지 않는 머리에선 향긋한 샴푸 향이 풍겨왔다. 원래 몸집이 이렇게 작았었나, 품에 쏘옥 들어오네.
부드럽게 등을 토닥여주었다. 마치 어린 아이를 달래주기라도 하듯, 그렇게.
네가 누굴 좋아하든 그냥 신경 안 쓸래. 네가 다른 사람이 아닌 나를 좋아하게 되도록 내가 노력할게. 보채지도 않고, 그냥 천천히 기다릴게.
네 마음 내킬 때, 그 때 나한테 와.
너와 내가 주인공인, 끝 없는 이야기를 한 줄 한 줄 써내려가고 싶어.
내가 너 많이 좋아해. 진짜 많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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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언제 행쇼 하냐는 분들....... 저는 정말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행쇼.. 아직 멀었네요. 저도 쓰면서 정말 답답하지만...... 이미 프롤로그에서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얘네 수능이 끝나도... 졸업을 해도... 행쇼는.. 안 해요.... 아마 이 작품은 고등학생 이야기까지가 시즌 원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아요! 달달한 연애는 시즌 투에서 합시다. 아주 멀게 느껴지지만 그리 멀지도 않을 거예요. (아마?)
벌써 일요일도 몇 시간만을 남겨두고 있어요.. 안돼..... 내일 학교 가요..... 윽...... 독자분들도 오늘 하루 잘 마무리 하시고 기쁜 월요일을 맞읍시다!
스폰지밥/러블리/두부/종이니/기화/핫초코/공삼이육/네네스노윙/지블리/로운/똥잠/알콩/아가야/Paper/세젤빛/꽯뚧쐛뢟/얍얍/늘봄/종이페이퍼/고구마/도비/똥강아지/두둠칫/복숭아/윤아얌/불가/제인/스누피/나니꺼/엑소더스/가그린/남사친/다예/가락/너눈/XoXo/봉봉/댜니/하리보/사랑둥이 님 ♡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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