츤데레 남사친과 능구렁이 남친 사이 2
05 (차근차근, 천천히)
♬♪~
아침부터 요란한 소리를 내며 울려대기 시작하는 휴대폰을 억지로 집어들었다. 방금 잠에서 깨어난 탓에 눈이 침침했지만, 화면 가득 '오세훈'이라는 이름이 떠있다는 것쯤은 확인할 수 있었다. 이새끼는 왜 이 시간에 전화질이야. 아침부터 귀찮게 구는 데 선수네.
"여보세…"
온갖 짜증과 불만을 뒤로하곤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러나, 너무 늦게 받은 탓인지 인사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통화는 끊어져 버렸다. 끊긴 휴대폰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시각은 8시 반이었다. 누구 때문에 잠이 홀딱 달아나긴 했지만 30분만 더 자고 일어나자 생각하며 다시 눈을 감으려던 찰나, 휴대폰에선 짧은 진동이 울렸다. 오세훈에게서 온 문자 메시지였다.
[김종새퀴~~~ 아직도 자냐~~~ 나 지금 너희집 감]
녀석의 문자 메시지 하나로 순간 혈압이 오르는 것도 같았다. 심심하면 PC방이나 가면 될 걸 왜이리 귀찮게 구는 건지, 이쯤 되니 정말 궁금했다. 인상을 잔뜩 찡그리곤 녀석의 문자 메시지를 삭제했다. 어차피 문은 잠겨 있으니까. 오든가 말든가. 와도 절대 안 열어 줘야지.
*
사실 요즘들어 잠을 제대로 못 잤다. 고백하기 전 날의 떨림, 고백하던 날의 떨림, 하루종일 손을 잡고 있던 날의 떨림이 바로 그 이유였다.
'… 나도 좋아해.'
'… 용기가 부족해서… 그동안 말 못했어.'
그날 밤은 정말이지 조금도 잘 수가 없었다. 공원에서 나눴던 대화들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고, 당연하듯 심장은 밤새 두근거렸다. 큰 용기를 내 전한 진심을 받아 주었다는 게 너무도 고마웠고, 기뻤다. 무엇보다, 너도 나와 같은 마음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이 제일 기쁘고 행복하게 느껴졌다. '나도 좋아해.'라며 그동안 꽁꽁 숨겨왔던 제 마음을 수줍게 전해오는 모습 또한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그때의 그 기분을 말로 표현하기란 정말이지 힘들고 어려웠다. 어떤 단어를 선택해 표현을 해야 할지도 막막했다. 이토록 표현하기 힘든 감정은 처음이었고, 이토록 벅차고 설레는 감정 또한 처음이었다. 이제 친구가 아닌 애인. 네가 내 여자친구. 나는 네 남자친구. 우린 연인…. 생각을 하면 할수록 기분이 묘했다. 이런 가슴 떨리는 생각을 할 때면 나도 모르게 베개를 꼬옥 끌어안고 있었다. 좋아서 미치겠다는 심정이 꼭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이상하게도 자꾸 웃음이 나왔다. 밥을 먹다가도 웃음이 나왔고, 샤워를 하다가도 웃음이 나왔다. 개그 프로그램을 봐도 웃지 않던 지난 날의 내 모습과는 상반된 모습이었다. 단지 사소한 것에도 웃음이 지어졌다. 양말 한 짝이 없어졌음에도, 빵의 유통기한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기분이 좋았다. 온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는 효과도 맛보게 되었다. 넓디 넓은 세상이 단 한 사람 만으로 좁아진 것도 같았다.
단지 꽃다발을 선물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들어선 꽃집. 예상처럼 안엔 여러 꽃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꽃에 대한 지식은 별로 없던 탓에 뭐가 좋고 뭐가 잘 팔리는진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종류는 무수히 많았지만, 그 중 정확한 이름을 아는 꽃은 손가락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그 수가 적었다.
'어느 분께 선물하실 건데요?'
'아, 여자친구요.'
'천천히 둘러보세요.'
'여기 이 분홍색 장미는…'
분홍색을 띄고 있는 장미꽃을 가리키며 말했다. '행복한 사랑'이라는 꽃말을 가지고 있어요. 주인 아주머니께서 예쁜 포장지를 꺼내며 말씀하셨다. 꽃말마저 예쁜 장미꽃을 바라보며 나는 너를 떠올렸다. 별거 아니지만 좋아해줬으면, 웃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고마워. 완전 예뻐. 꽃 선물 받아보는 거 처음이야.'
말간 웃음을 지은 채 해사하게 말하는 널 보자 기분이 좋았다. 꽃다발을 품에 안은 채 향을 맡아보는 네 모습이 귀여워 다시 꼬옥 끌어안아 주고도 싶었다. 이렇게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매일이고 꽃을 사주고 싶었다. 오늘은 장미, 내일은 작약, 모레는 안개꽃….
아직 어색한 감이 드는 건지, 내 얼굴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모습이 귀여웠다. 일부러 놀리려던 건 물론 아니었지만, 그 모습이 너무나도 귀여워 자꾸만 장난을 걸고 싶었다. 뚫어져라 바라보면 시선을 피하네. 그럼 계속 쳐다봐야지. 난 눈을 마주하면서 대화하는 게 좋은데, 나만 널 바라보고 있어도 좋아. 한시도 눈을 뗄 수가 없어. 앞치마를 두르는 네 모습, 요리를 하는 네 모습, 다친 내 손가락을 보며 황급히 치료를 해주는 네 모습, 나와 하고 싶은 것들을 하나하나 나열해 말하는 네 모습, 내 어깨에 살며시 기대오는 네 모습을… 조금도 놓치기 싫어.
내 손 안에 꼬옥 들어와 있던 너의 작고 고운 손. 아직 이런 스킨쉽이 어색하긴 하면서도 사실 너무 떨렸어. 손만 잡았을 뿐인데 심장이 미친듯이 두근거렸어. 그리고 나는 또 볼을 꼬집어 봐. 이게 현실일까 꿈일까. 분명 내 손 가득 너의 온기가 느껴짐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확인을 하게 돼.
아직 처음이라 많이 어색할 거야. 내가 네게 하는 말과 행동들이 지난 날과는 달라 많이 낯설겠지. 그래도 괜찮아. 당연한 거야. 처음이라 그래. 내가 노력할게, 점차 익숙해지도록.
그냥 말없이 꼬옥 끌어안고만 있어도 행복하겠다. 24시간을 그렇게 끌어안고만 있어도 좋을 것 같다. 하루종일 붙어있고 싶다. 하루종일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한시도 떨어져 있기 싫다. 언제 어디서든, 문득 고개를 돌렸을 때 네가 보였음 좋겠다. 너도 나처럼 이런 생각을 해주었음 좋겠다. 네가 항상 나를 생각해줬음 좋겠다. 이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네가 보고 싶다. 네 생각을 하고 있으면서도 네가 보고 싶다.
*
행복한 생각에 젖은 채 눈을 꼬옥 감고 있을 때, 갑작스레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 벌써 온 건가 싶어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 썼다. 다시금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순간이었다. 왜 아침부터 찾아와서 사람을 이렇게 귀찮게 하는 건지, 정말이지 이해가 안 됐다.
"……."
초인종 소리가 두 번이나 더 들려왔지만, 미동도 않은 채 이불 속에서 숨을 죽이고 있었다. 포기하고 제발 좀 가라 생각하며 말이다. 그러나 포기를 모르는 오세훈은 초인종으로 연주라도 하듯 계속해서 초인종을 눌러오기 시작했고, 혹여나 다른 집에 소음공해라도 될까 걱정이 돼 신경질적으로 침대에서 내려와 현관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잔뜩 뻗친 뒷머리를 슬쩍 정돈하곤 하품을 하며 현관 문을 열었다. 문틈 사이로 오세훈의 모습이 보여왔다.
"여-"
슬쩍 손을 들어보이며 인사를 해오는 오세훈의 모습은, 마치 제가 학교의 짱이라도 되는 양 온갖 허세를 부리고 다니는 중학교 2학년 남학생과도 같았다. 그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곤 먼저 방 안으로 걸음을 옮긴 뒤 침대에 걸터 앉았다.
"어이구, 남사스러워라. 옷 좀 입고 자라. 맨날 헐벗고 자지 말고."
"몸에 열이 많아서."
들어오자마자 잔소리를 해오는 오세훈에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그리곤 바닥에 놓여있던 하얀 반팔 티셔츠를 집어들었다.
"사진 찍어서 ○○이한테 보내도 되냐. 제목은 김종인 세미 누드… 아니면, 김종인 상반신 노출."
"넌 갈수록 지랄도 창의적이네."
"찍어서 보낸다?"
"아, 보내. 상관 없어."
"… 충격."
손으로 입을 막은 채 꽤나 충격이라는 표정을 지어보이는 오세훈을 애써 무시하곤 주섬주섬 셔츠를 입었다. 그런 나를 보며 혀를 끌끌 차던 녀석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부엌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냉장고 안을 유심히 살피던 녀석은 곧이어 유리컵에 포도주스를 가득 담은 채 방 안으로 위태롭게 걸음을 옮겨왔다. 혹여나 음료가 쏟아질 세라 조심조심 천천히 바닥에 앉곤 시원하게 한 모금을 들이키던 녀석이 말을 건네왔다.
"그래서, 행복하십니까?"
제법 뜬금 없는 말을 해오는 녀석을 바라보며 헛웃음을 내뱉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어 그저 애매한 미소만 지으며 오세훈을 바라보고 있을 때, 다시금 녀석의 입술이 열렸다.
"솔직히 불어. 너희 언제부터 사겼어? 왜 난 어제 처음 안 건데? 이거 존나 배신감 느껴져."
"언젠간 말하려 했어."
"그 언젠간이 도대체 언제… 아니, 그건 그렇다 치자. 이렇게 소리소문없이 고백하는 건 무슨 경우냐. 적어도 나한텐 알렸어야지. 그래야 밤마다 기도를 해주든 뭘 해주든 했을 거 아냐."
"너한테 일일이 다 보고할 필요 없잖아."
"… 와우."
"……."
"내가 지금껏 호랑이새끼를 교육했네. 십구 세… 내 청춘을 바치면서까지 내가 큐피트 역할을 해줬는데…."
"……."
"그래…. 이제 너흰 연인이다 이거냐…."
"이따 카페 가서 버블티나 마셔야지."
"됐어, 인마. 넌 버블티 같은 거 마실 자격도 없는 새끼야."
"너도 사줄까."
"물론이지."
금세 기분을 풀곤 엄지손가락을 들어보이는 오세훈의 모습에 고개가 절로 저어졌다. 하여간 단순한 놈이었다.
"근데 참 신기하다. 그렇게 미루고 미루더니 어떻게 좋아한다 했냐. ○○이가 뭐래?"
"몰라도 돼."
"아."
"나만 알고 싶어."
"… 이거 너한테 쏟아도 되냐."
반쯤 남은 포도주스를 가리키며 말하던 오세훈이 쓰고 있던 스냅백을 벗곤 제 머리칼을 살살 흩뜨렸다. 그리곤 꽤나 진지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다시 입술을 떼기 시작한다.
"어쨌든 축하한다. 아직 믿기진 않지만, 나도 기분은 좋네."
"그래, 고맙다."
"아, 이상해…. 네가 무슨 연애야…. 존나 소름 끼쳐."
"내가 뭐."
"막 우쭈쭈하고 오구오구하고 그러겠지? 아, 속 울렁거려."
"… 상상하지 마."
"오구오구~ 우리 여친, 오늘 왜이리 귀여워? 뽀뽀 한 번 할까?"
"아, 그만 하라고!"
끅끅거리며 웃던 오세훈이 남은 포도주스를 한 번에 들이켰다. 그리곤 한 방울이 옷에 튀었다며 짜증 아닌 짜증을 부리던 녀석이 바닥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그래서, 어젠 데이트 했냐?"
"그냥 집에서."
"뭐?"
바닥에 드러누운 채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오세훈이 상체를 벌떡 일으키곤 꽤나 놀란 표정을 지어보이며 물었다. 그런 녀석을 바라보며 살짝 인상을 찌푸려 보이자, 곧이어 고개를 절레절레 젓기 시작한다.
"남자는 검은 동물이라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구나."
"무슨 뜻이야."
"벌써부터 여자친구 자취방을 들락날락하면 어떡해, 인마."
"내 마음이지. 무슨 상관이야, 네가."
"… 살짝 불안하네."
"뭐가."
"일단 지갑 내놔 봐."
"지갑?"
"그래."
"왜."
"확인할 게 있어."
"무슨 확인."
"있나, 없나."
"뭘…. 아씨, 그냥 꺼져."
"뭘 꺼져. 나 지금 존나 진지해."
무작정 일어나 내 지갑을 찾기 시작하는 오세훈을 보며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예나 지금이나 오지랖 하나는 대단한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황급히 손을 뻗어 책상 위에 놓여있던 지갑을 이불 속으로 숨겼다. 도대체 뭐가 불안해서 저러는 건지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멋대로 음란한 생각을 해놓곤 제멋대로 행동하는 녀석이 한심하기만 했다.
"친구로서 하는 말인데, 아무래도 여자친구 자취방을 그렇게… 네 집처럼 들락날락하는 건 좀 아닌 것 같다."
"아니, 뭘 알고나 말해. 누가 보면 거기서 사는 줄 알겠네."
"그냥 걱정돼서 하는 소리야."
"무슨 걱정. 네가 걱정 안 해도 내가 다 알아서 해."
"그치? 네가 믿음직한 놈이라는 건 내가 유일하게 인정하는 사실이니까."
"유일하게 인정?"
"이래놓고 나중에 뭔 사건 터뜨리면… 친구고 뭐고 없어. 너 다신 안 본다."
"……."
"어렵게 이어진 만큼 잘 사귀라고. 네 여친을 나 대하듯 하지 마. 그랬다간 너 백퍼 일주일 안에 차임."
제법 얄밉게 말을 늘어놓던 녀석이 피식 웃었다. 그리곤 바닥을 나뒹굴던 스냅백을 집어들어 손가락으로 휘휘- 돌리기 시작한다. 굳이 그런 걱정 안 해줘도 내가 알아서 잘 할 텐데. 자취방 몇 번 다녀왔다는 말에 왜 이상한 생각부터 하는 건지 이해는 안 갔지만, 이제서야 조금은 실감이 나는 것도 같았다. 작은 행동 하나에도 많은 생각이 들게 되는 걸 보니, 내가 연애를 하고 있는 게 맞구나. 연애를 하고 있구나. … 묘하다.
"아아아, 나도 여자친구…. 우리 과는 왜 남탕인 건가요-"
"……."
"이번 수강신청 할 땐 교양수업이라도 좀 신중히 생각하고…."
"원래 뭐였는데."
"컴퓨터 뭐시기 저시기."
"… 그건 뭐야."
"요가나 배워볼까… 아님, 포토샵?"
"……."
"내 눈이 높은 걸까, 여자들 눈이 낮은 걸까?"
"네가 병신인 걸까, 여자들이 정상인 걸까."
"… 충격."
넋을 놓은 채 허공을 바라보고만 있던 오세훈이 작게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런 녀석을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젓곤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어느새 10시라는 시각을 나타내주고 있는 휴대폰 시계를 바라보며 침대에 발라당 누웠다.
"야, 라면 좀 끓여 와. 배고프다."
"나 손님이야, 인마."
제법 정색을 해보이는 오세훈을 바라보며 작게 웃어보였다. 그리곤 얼마 안 있어 휴대폰에서 짧은 진동이 울렸고, 서둘러 휴대폰을 집어들어 홀드를 열었다. 문자 메시지가 도착한 것이었다.
[김종이씨, 일아ㅏ났어? 뭐해..ㅠㅠ 밥은 먹었나? 아침엔 빵이나 라면 말고 밥을 먹어야 하는 거 알ㅈ지?]
방금 잠에서 깨어난 건지 텍스트로도 비몽사몽한 상태가 느껴졌다. 눈도 제대로 못 뜬 채 자판을 하나하나 눌렀을 걸 생각하니 너무도 귀여웠다. 아니, 오타난 게 이렇게 귀여울 일인가. 우는 이모티콘은 왜이리 귀여운 거야.
[일어나긴 아까 일어났는데 갑자기 집에 오세훈이 와서. 밥은 이제 먹어야지. 지금 일어났어?]
딱딱하기만 한 문장을 두어 번 읽다 한숨을 내쉬며 전송 버튼을 눌러 버렸다. 어떻게 해야 다정스럽게 느껴질까. 어떻게 해야 부드럽게 느껴질까. 하다 못해 하트라도 붙여 볼까 생각했지만, 그건 너무 부끄러워 금세 접어야만 했다. 그러다 문득, 내게 하트를 붙여 문자를 보내오던 네가 생각나 살풋 웃음이 터졌다. 사실 그 문자를 보자마자 침대 위를 이리저리 굴렀던 것 같다. 사람이 어떻게 이러지. 이렇게 귀여울 수가 있나. 하트를 붙였어. 하트를…. 하트…. 답장으로 똑같이 하트를 보내고도 싶었지만, 생각보다 너무 부끄럽고 쑥쓰러워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평범함의 끝을 달리는 답장을 보내 버렸고, 당연하듯 그에 따른 답장은 오지 않았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미소를 짓고 있을 때, 꼬옥 쥐고 있던 휴대폰에선 다시금 진동이 울렸다.
[응 지금 일어났어.. 씻고 올게! 밥 맛있게 먹고 있어♡]
문자 메시지의 내용을 확인하자마자 끙끙 앓을 수밖에 없었다. 어째 귀엽다니까 자꾸 귀여운 짓만 골라서 하는 것도 같았다. 그저 베개에 얼굴을 묻곤 미친 사람이라도 된 양 웃어보이자, 오세훈의 입에선 작은 욕지거리가 새어나왔다.
"병신인가?"
"아…, 진짜…."
"노답."
"… 진짜 어떡하지."
"핵노답."
"… 세훈아, 라면 말고 밥 먹자."
"아, 세훈이라 부르지 마. 존나 소름 돋아."
천천히 침대에서 내려와 갈아입을 옷과 속옷을 챙겨들었다. 계속 밍기적거리느라 씻지도 않았다는 사실이 방금에서야 떠오르고 말았다.
"씻고 온다."
"영원히 오지 마라."
진심을 다해 독설을 퍼부어오는 오세훈을 애써 무시하곤 포도주스의 찌꺼기만 남은 유리컵을 집어들며 화장실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샤워를 마치고 화장실을 나오자마자 보여오는 광경에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그새 배고픔을 못 견딘 건지, 오세훈은 식탁 의자에 앉아 후루룩 후루룩 라면을 먹고 있었다. 분명 라면 말고 밥을 먹자 했음에도 불구하고 녀석은 꽤나 당당한 모습이었다. 작게 인상을 찌푸리곤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탈탈 털었다.
"아씨, 물 다 튀잖아!"
"밥 먹자니까 웬 라면이야."
"오늘은 왠지 라면이 당겨."
숟가락으로 국물을 한 번 떠먹던 오세훈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런 녀석을 한심하게 바라보다 밥그릇에 밥을 가득 담곤 냉장고 안에서 배추김치를 꺼내 식탁 위에 올려두었다. 그리곤 맞은 편 자리에 털썩 앉아 밥을 크게 한 숟가락 떠먹었다. 아침엔 빵이나 라면 말고 밥을 먹으라 했으니, 꼭꼭 씹어 맛있게 밥을 먹어야지. 얼른 밥 다 먹고 또 연락해야지. 행복한 생각을 하며 젓가락으로 김치를 집어 먹었다.
"궁금하다. 너희 둘 어떻게 연애하는지."
"아직 많이 서툴고 어색해."
"그러시겠지. 손만 잡아도 넌 심장을 부여잡고 허윽… 이럴 거야."
"그 정돈 아니야."
"벌써 잡아보셨나 봐요?"
"그만 해. 묻지 마, 그런 거."
"넌 아마 하나하나 다 공책에 기록해 놓을 것 같아. 몇 월 며칠, 손 잡음. 몇 월 며칠, 뽀뽀함. 몇 월 며칠, 키스함."
"그만 하라 했어."
"네."
저런 이상한 멘트에 얼굴이 달아오르기 시작하는 나도 참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어, 애꿎은 숟가락만 만지작거리며 밥을 한 숟가락 떠먹었다. 그리곤, 다시금 들려오는 오세훈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녀석을 바라보았다.
"아, 나 그 사람 봤어. 고3 때 너희 과외쌤."
"과외?"
"응. 그 분도 이쪽 동네 사냐?"
"몰라."
"요즘 연락 안 했어?"
"연락을 왜 해. 번호도 예전에 지웠어."
내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던 오세훈이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아, 배부르다- 가득 찬 배를 두드리며 말을 내뱉는 녀석의 모습에,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박찬열. 한동안 잊고 있던 이름이었다.
[종인아, 선생님이야. 군대 잘 다녀왔어? 오랜만에 얼굴 좀 봐야지.]
문득, 얼마 전 박찬열에게서 온 문자 메시지의 내용이 떠올랐다. 이미 번호를 지워버린 탓에 누구로부터의 문자인진 알 수 없었지만, 저를 '선생님'이라 칭하는 것에 그게 반찬열이라는 것쯤은 단 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당시엔 답장을 보낼 이유도, 가치도 없어 그냥 삭제를 했었다. 그리곤 원래 이 세상에 없던 사람이라도 되는 양 없는 사람 취급을 하며 하루하루를 보내왔다. 그러나 오세훈의 한마디로 인해 다시금 박찬열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래봤자 몇 분 뒤면 다시 잊혀지겠지만.
*
"너 언제 갈 거야."
"왜? 빨리 갔음 좋겠냐?"
"어."
"그럼 더욱 늦게 가야겠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만나기로 했어?"
"아직."
"아, 뭐야. 이미 약속 잡아놓은 줄 알았네. PC방이나 가자."
"안 가. 이제 게임 안 해."
"… 뭔 소리야…."
"왜."
"네가 게임을 안 하겠다는 건… 아…, 사랑의 힘이 이렇게 위대해요 여러분."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제 스냅백을 챙겨드는 오세훈에게 슬쩍 손을 흔들어 보였다.
"아직 갈 생각도 안 하고 있는데 왜 보내려 해."
"아, 빨리 좀 가."
"왜 자꾸 보내려 하지? 집으로 부르게? … 원래 알고 있던 거지만, 기대 이상으로 존나 음란한 놈이네."
"자꾸 뭐라는 거야. 네 머릿속엔 그런 생각밖에 없어?"
"정답."
푸스스 웃어보이던 오세훈이 현관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런 녀석을 현관까지 배웅해주곤 다시 방 안으로 들어와 서둘러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그리곤 이미 외워버린 전화번호를 입력한 뒤 통화 버튼을 눌렀다. 지루하기만 한 통화 연결음 소리를 듣는 것마저 좋았다.
- 여보세요?
"밥 먹었어?"
- 응, 먹었지. 너도 밥 먹었어? 라면으로 때운 건 아니지?
"네가 밥 먹으라 했잖아. 라면은 오세훈만 먹었어."
- 아, 그래? 잘했어. 내 말 잘 듣네.
"오세훈이 PC방 가자 했는데, 안 간다 했어."
- 엥? 진짜?
"진짜지. 빨리 칭찬."
휴대폰 너머로 작은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를 들으니 더욱 보고 싶어지는 것도 같았다. 이쯤 되니 중증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아무렴 상관 없었다.
"잠깐이라도 볼까. 오늘 바쁘냐."
- 아니, 개강 전까진 한가해….
"나 단 거 먹고 싶어. 카페 가자."
- 그럼 오랜만에 학교 근처 카페나 갈까? 거기 남자 알바생 아직 있나 궁금해.
"뭐라고?"
- 응?
"… 아니, 일단 만나서 얘기해. 내가 연락하면 나와."
알았어. 오늘은 지각 안 할게. 마지막 말을 듣곤 먼저 전화를 끊을 때까지 기다리다 천천히 종료 버튼을 눌렀다. 남자 알바생이 뭐 어쨌다는 거지. 남자 알바생이 아직 있는지 없는지, 그게 왜 궁금해. 있으면 어떻고 없으면 어떤 건데. 박찬열에게 느끼던 질투와는 사뭇 다른 감정이었다. 거기 알바생이 누군데. 왜 궁금하다는 거지. 아직 그 카페에 있다면 뭘 어쩔 건데. 궁금한 게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와 동시에 걱정과 불안도 커져만 갔다. 개강 전이었으니 망정이지, 개강하고 나면 왠지 이러한 걱정도 점점 커질 것만 같았다. 이상한 선배들이 계속 귀찮게 달라 붙는다든가, 혼자 조별과제를 떠맡게 된다든가…. 상상만으로도 엿 같은 상황이었다.
우울한 생각들을 집어치우곤 기분 좋은 생각만 하자 다짐하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챙겨들었다. 너와의 만남을 준비하는 과정은 언제나 설렜다. 네게 멋있게 보이기 위해 옷을 고르고, 머리를 손질하고, 대화 주제를 생각하고…. 너에게 향하는 발걸음은 언제나 행복해. 지금 이 순간 만큼은 온 세상이 푸릇푸릇, 예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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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만에 돌아왔네요! 저 요즘 너무 자주 오는 것 같.. 좋은 거겠죠? 지난 화 추천 수가 20이 넘었다는 쪽지가 와서 너무 놀랐어요.. 이렇게 감동 주기 있나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정말 감사해요♡
다음 편은 페이스북 특별편이에요 :) 지나치게 가벼운 내용이니 내일 이 시간 쯤이면 올 듯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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