츤데레 남사친과 능구렁이 남친 사이 2
12 (여름의 시작)
[김종새끼~ 나 네 자취방 감. 오늘 갑자기 휴강됨. 개이득^^ 예헷 야하잇 야핫]
문자 메시지가 도착하고 정확히 30분이 지나자 울리기 시작하는 초인종 소리에 어슬렁어슬렁 방을 나서야 했다. 텍스트로도 요란하기 그지 없는 메시지와 인터폰 화면에 비쳐오는 오세훈의 모습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저 그 자리에 서 묵묵히 아무런 행동도 취하고 있지 않자, 다시금 초인종 소리가 울려왔다.
"아우, 남사스러워라. 오늘도 역시 반 누드네."
아침부터 내 신경을 긁어댈 녀석을 떠올리자, 멀쩡하던 머릿속이 괜히 어지러워지는 것도 같아 머리칼을 흩뜨리며 신경질적으로 현관 문을 열었다. 열린 틈 사이로 날 보며 제 눈을 가리는 시늉을 해보이던 녀석이 맨 살을 찰싹 때려왔다. 아-! 작게 비명을 내지르곤 발로 녀석의 엉덩이를 찼다.
"잠을 못 잤냐. 눈 밑이 존나 퀭함."
잠을 못 잤냐는 오세훈의 말에 뒷머리를 긁적이며 작게 하품을 해보였다. 잠을… 잘 잘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밤을 꼬박 새웠다. 설렘으로 가득 찬 마음속은 한시도 진정될 리가 없었고, 자꾸만 같은 시간, 같은 상황, 같은 느낌, 같은 분위기를 되새기게 되었다. 마치 고백을 하루 앞둔 그 날처럼, 내 고백을 받아주던 그 날처럼, 처음으로 손을 맞잡던 그 날처럼. 내가 뭘 한 거지. 뭘 했지, 내가. 어제 내가 너한테… 뭘 한 거지.
괜히 입술을 한 번 쓰다듬게 되었다. 뜨겁게 달아올라 밤새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던 입술을, 천천히 혀로 쓸었다. 아직 생생히 느껴졌다. 한껏 머금어진 작은 입술이, 뒤엉킨 혀로 전해져오던 낯선 감각이,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점점 아릿해지던 정신이…. 이래도 될까. 내가 과연…, 네게 이래도 될까. 뒤늦게야 치민 생각이었다. 길고 긴 입맞춤이 끝나고 나서야 스멀스멀 피어나기 시작한 작은 걱정이었다.
'…….'
'…….'
그렇게 한참 동안 서로만을 응시하며 말을 아꼈다. 어느 누구도 먼저 입술을 열지 않았다. 파르르 떨리던 까만 눈동자엔 내 모습이 담겨 있었다. 타액으로 번진 빨간 입술을 엄지 손가락으로 조심스레 어루만져 주자, 부끄러운지 품에 쏘옥 안겨왔다. 그 모습이 고마우면서도 벅차, 작은 몸을 더욱 끌어 안았다. 가슴 가득 느껴지던 체온에 빙긋 입꼬리를 당겨 웃어보였다. 고마워. 미안해. 좋아해. 전하고 싶은 말들이 자꾸만 머릿속을 유유히 헤엄쳤다. 꿈만 같던 시간은 결코 꿈이 아니었다. 손끝으로 만져지는, 코끝으로 느껴지는, 현실이었다. 난 그저 네 향기에, 네 눈빛에 매료가 된 미치광이와도 같았다. 너라는 세상 속 유일하게 초대가 된 손님이 된 것마냥 황홀하면서도 행복했다. 벅찰 정도의 황홀감과 행복감에 젖어있던 내 상태는, 당연하듯 정상은 아니었다.
*
밥을 얻어 먹고자 아침부터 잠깐 들른 거라며 싱글벙글 식탁 의자를 꺼내 앉던 오세훈은 꽤나 뻔뻔하기 그지 없는 모습이었다. 공강이니 좀 편히 쉬고 싶었는데, 왜 또 찾아온 건지…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것조차 짜증이 치밀 것 같아, 바닥을 뒹굴고 있던 티셔츠를 주워 입곤 소파에 늘어지게 누워 TV를 시청했다. 슬쩍 고개를 내밀어 그런 날 뚫어져라 바라봐오는 녀석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곤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밥 달라니까?"
"알아서 먹어. 사실 밥 없다."
"… 아나."
작게 불평을 하던 오세훈이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의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그리곤 멀뚱히 서 내부를 살피기만 하던 녀석은 냉장고에서 요란한 알림 소리가 흘러나올 때가 되어서야 문을 쾅- 닫았다. 그런 녀석을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곤 쿠션에 머리를 기댔다.
"어차피 기대 따위 개미 똥 만큼밖에 하지 않았지만, 기대 이하로 너희 집엔 먹을 게 없네."
"알면서도 찾아오는 넌 도대체…."
"어제 뭐 했냐."
"학교 갔다 왔지."
"말고, 인마. 요즘 데이트 자주 함?"
"하지."
"어제도 했냐."
"아니."
"그럼 어젠 안 만났겠네."
"만났는데."
"그래? 설마 또 집에서?"
"응."
"… 넌 학교보다 걔네 집을 더 자주 간다며? 아예 등교를 거기로 하시지 그래요."
"또 까분다."
"근데 집에서 할 게 있냐. 맨날 뭐 하고 놀아? 뭐, 보나마나 영양가 없는 대화나 나누겠지. 안 봐도 비디오긴 한데, 일단 예의상 물어는 봐줄게."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 얄밉게 말을 건네오는 오세훈을 바라보다 작게 하품을 했다. 그런 날 보며 천천히 고개를 젓던 녀석이 성큼성큼 이쪽으로 걸음을 옮겨오기 시작했다. 바닥에 털썩 앉으며 머리로 TV 화면을 가리는 모습이 꽤나 기분 나쁘긴 했지만, 어차피 TV 프로그램의 내용 따윈 머리에 조금도 들어오지 않았으니 상관은 없었다.
"그래서, 어젠 뭐 하고 놀았냐."
"그냥. 간단히 술 마셨어."
"… 웬 술? 너 술 싫어하잖아."
"마시고 싶다길래."
"… 좀 그렇다."
"뭐가."
"밤은 깊어가는데 한 집에서 연인이 단 둘이 술을…."
이젠 익숙했다. 물론 아무 일도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저런 멘트 하나에 당황해할 필요는 단 1퍼센트도 없었다. 애써 무시하곤 일부러 등을 돌려 소파에 찰싹 달라 붙었다. 그리곤 얼마 안 있어 뒷통수로 오세훈의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너 콘돔은 가지고 다니냐."
"왜 묻는데, 그런 거."
"우리도 이제 다 큰 성인이잖아. 한두 살 먹은 어린 애도 아니고, 갓 성인인 스무 살, 스물한 살도 아니고."
"……."
"스물셋이야."
"근데."
"물론 지금 생각으론 네가 알아서 할 수 있다 생각하겠지."
"……."
"넌 네가 무슨 자제력의 킹이라 생각하는 것도 아니고, 일단 남자로 태어난 이상 어쩔 수 없어."
"알아, 나도. 내가 언제 자제력의 킹이라 했어. 난 그런 말 한 적 없는데."
"속으론 그렇게 생각하고 있잖아. 너 그럼, 상상해 봐."
"뭘."
"같이 술을 마셔, 어제처럼 집에서 둘이. 근데 네 여친이 생각보다 너무 많이 취한 거야. 그래서 막 안기고, 뽀뽀해달라 조르고, 장난 아니야."
"……."
"집에 가야 하는데 막 자고 가래. 존나 정신적으로 힘들게 만드는 거야."
"안 그럴 거야."
"아니, 그냥… 상상을 해보라고, 병신아."
작게 욕지거리를 섞어가며 진지하게 말을 해오는 녀석을 흘끗 바라보며 인상을 찡그려 보였다. 그리곤 그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말을 내뱉었다.
"애국가 몇 번 부르면 돼."
"애국가?"
"응."
"넌 병신 중의 상병신이냐?"
"왜."
"1절 부르다 안 되면 2절 부르고, 또 3절 부르고? 아예 고등학교 교가까지 부르지 그래. 차라리 드넓은 브라질 열대림의 목축업 현장이라도 떠올린다 그래, 새끼야. 존나 마음이 평화로워지겠네."
"아, 무슨 대답이 듣고 싶은 건데."
"내가 예상하는데, 너 분명 그러다 큰코다친다. 애국가로도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 언젠간 들이닥칠 거라고."
"왜 그런 말을 해. 그리고, 본능을 못 참아내는 게 이상한 거 아니냐. 그걸 왜 못 참아. 자기 자신을 스스로 제어 못해?"
"… 지랄도 풍년이구나. 갈수록 지랄이 독창적이야, 너도 참."
나라 잃은 표정을 지어보이며 헛웃음을 내뱉기 시작하는 오세훈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해 보였다. 도대체 왜 저러는 걸까, 싶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길래, 무슨 대답을 듣고 싶은 거길래 이토록 귀찮게 굴어오는 건지…. 정말이지 의아했다.
"존나 자신만만하시네요. 애인이 허벅지 몇 번 쓰다듬어 주기만 해도 이성을 잃으실 거면서."
"그건 너겠지. 나 그렇게 쉬운 놈 아니야. 멋대로 판단하고 말 좀 지어내지 마."
"네 여친한텐 쉽다 못해 무르디 무른 놈이잖아."
"……."
"너처럼 자신감 넘치는 새끼는 처음이야. 같은 남자라는 게 맞나, 싶을 정도로."
"……."
"야, 너 남자 맞지?"
제법 진지한 표정을 짓곤 바지춤으로 시선을 옮겨오기 시작하는 오세훈에게 쿠션을 집어 던졌다. 제게 날아오는 쿠션에 머리를 정통으로 맞곤 작게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을 뒹구는 녀석을 무심히 내려다보다 혀를 끌끌 찼다.
"미친새끼가, 못하는 말이 없어."
"아…, 정통으로 맞았어."
아씨-, 짜증 아닌 짜증을 표출하며 제 머리칼을 두어 번 헝클어뜨리던 오세훈이 이내 자세를 고쳐잡았다. 그런 녀석을 바라보며 무심히 휴대폰을 집어들어 애니팡 게임을 실행시켰고, 얼마 안 있어 녀석의 손에 휴대폰을 빼앗기고 말았다.
"야, 진지하게 얘기 좀."
"뭘 또."
"화내지 말고, 인마. 내가 책에서 본 내용들 너한테 다 말해주는 거잖아."
"너 평소 책 잘 안 읽잖아."
"아닌데? 나 이런 책은 즐겨 봐. 추천해 줄까?"
"됐어."
단칼에 거절하는 내 목소리에 미세히 인상을 찡그려 보이던 오세훈이 큼큼거리며 목을 가다듬었다. 그런 녀석을 바라보며 덩달아 인상을 굳혀보이자, 이내 말을 걸어오기 시작한다.
"솔직히 말해 봐."
"뭘."
"너 어디까지 생각하고 있냐."
"뭘 어디까지 생각해."
"스킨쉽 말이야."
"그런 걸 왜 생각해."
"그럼 생각을 안 해? 왜 안 해? 딱 어디까지라고 미리 선을 그어놓고 연애를 해야지, 인마."
"그니까 왜 그래야 되냐고. 그게 뭐가 중요해. 그냥 서로 마음이 맞고, 원하면… 뭐든 하는 거지."
"뭐든? 끝까지?"
"그래."
"… 대박. 결혼 전까진 지켜준다느니 뭐한다느니 그럴 줄 알았는데. 역시 너도 검은 동물이었구나."
"대신, 서로 마음이 같을 때. 내 욕심만 채우려고 갖는 관계는 관계가 아니잖아. 그리고 본능 같은 건, 사랑하는 사람이 원하지 않는다면 스스로 제어할 수 있지 않을까. 난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
"그냥, 그렇다고. 먼 훗날이겠지만, 어느 누가 더 하고 덜 하다 할 거없이 같은 마음일 때. 최대한 내 사람이 원하는 방향으로. 그렇게 하고 싶어."
무덤덤하게 내 솔직한 마음을 전했다. 조금의 거짓도 없는 진심이었다. 관계를 아예 안 갖겠다 마음 먹은 적은 없지만, 때가 되면, 서로 마음이 맞는 그런 날이 온게 된다면 천천히 하겠다는… 오롯한 진심이었다. 그런 내 말을 묵묵히 듣고만 있던 오세훈은 이내 고개를 두어 번 끄덕여 보였다.
그로부터 며칠 뒤, 왜이리 연인 사이에 있어 '섹스'라는 것에 집착을 하며 내게 충고를 해오는 것이냐 오세훈에게 물었다. 내 물음에 녀석은 꽤나 간단한 답을 해주었다.
'책에서 엄청 강조를 하더라고. 안그래도 요즘 데이트 성폭력 같은 거 많이 일어나잖아.'
'제일 친한 친구한테 애인이 생겼는데, 당연히 조언 좀 해줘야지. 아무래도 내가 그런 쪽엔 좀 빠삭하니까.'
'사실 너보단 ○○이를 위해서임. 난 너보다 네 여친 편이라는 거 알지?'
*
그날 밤은 당연하듯 쉽게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머릿속을 온통 지배하고 있던 술 기운은 이미 달아나 버린 지 오래였다. 머리는 여전히 어지러웠지만, 알코올 때문이 아닌 다른 이유 탓이었다. 늦었다며 집에 가보라는 내 말에, 김종인은 나를 꼬옥 안아왔다. 그저 녀석의 품에 가만히 안겨 입술만 달싹이고 있을 때 귓가를 간지럽히듯 들려오던 목소리가, 며칠이나 지난 지금도 아직 생생히 떠올랐다.
'잘 자.'
그 낮은 목소리에, 여느 때와 같이 부드럽고 따뜻하게만 느껴지던 포근한 품에, 은근히 내 코끝을 자극해오던 달큰한 향에,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워야 했다. 무서운 것을 보기라도 한 것마냥 심장이 두근두근 떨렸다. 그러나, 기분 좋은 떨림이었다. 한참이나 맞대고 있던 입술은 아직 뜨거웠다. 너무나도 부끄럽고 쑥쓰러워, 불과 몇 시간 전 나눴던 입맞춤을 떠올려낼 수가 없었다. 조금이나마 떠올려 보고자 깊이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오히려 머릿속이 백지장마냥 하얗게 변했다. 기억의 조각들을 퍼즐처럼 하나씩 맞춰나갈 때마다 마음 한 구석에 자리 잡고 있는 설렘이라는 감정은 점차 가중되었다.
다음 날, 분명 어색해질 거라 예상했던 분위기는 생각보다 담백하게만 느껴졌다. 잘 잤냐-. 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던 목소리에 배싯 웃어보이며 대답을 했다. 아침부터 오세훈이 찾아와서 귀찮게 굴어. 혼내 줘. 떼를 쓰듯 말을 해오는 모습이 귀여워 푸스스 웃어보였고, 곧이어 온갖 짜증을 부리는 듯한 오세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많은 사람들은, 첫키스를 나누고 난 다음 날은 어색함의 극치를 달릴 거라 누누이 말하곤 한다. 그러나, 단 하나도 어색할 건 없었다.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모든 것이 하나도 변함없이, 그대로였다.
그로부터 벌써 며칠이 흘렀다. 이틀 정도 밤을 꼬박 새워 만든 조별과제 PPT는 제법 성공적이었고, 도경수 선배도 나름 만족을 해보였다. 떨리는 마음으로 발표도 했고, 교수님의 평가도 들었다. 길게만 느껴지던 중간고사는 어느새 내일 하루만을 남겨놓고 있었다. 공강임에도 시험을 보러 학교에 나가야 한다는 사실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김종인과 같은 날 시험이 끝난다는 사실이 마냥 기쁘기만 했다. 그동안 시험 기간이라는 핑계로 얼굴을 자주 보지 못해 아쉽긴 했지만, 그래도 내일부턴 다시 한가해질 테니 상관은 없었다. 시험 볼 과목이 두 개나 잡혀있는 김종인은, 고작 한 과목의 시험만을 남겨놓고 있는 나보다 훨씬 늦게 끝날 예정이라 했다. 데이트를 하기엔 시간이 살짝 애매할 것도 같았다. 그건 제법 안타까웠지만, 저번에 실패한 우렁각시 이벤트를 이번 기회에 제대로 해보는 게 어떨까, 라는 생각을 하며 애써 합리화를 해보였다.
[아니야, 안 자는ㄷ데? 나 열심히 공부하고 맀ㅅ어ㅓ...]
짧게 울리는 진동 소리에 흠칫 놀라기도 잠시, 졸음으로 가득한 눈을 비비며 한 손으로 메시지를 입력해 전송했다. 일종의 내기와도 같은 것이었다. 서로 시험 공부를 하자 해놓고 몇 분 간격으로 문자를 보내 상대가 공부를 하고 있는지, 잠을 자고 있는지 확인을 하는-. 그러나,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말짱하던 정신은 어느새 흐릿해지기 시작했고, 김종인의 문자 메시지가 왔다는 걸 알아채지도 못한 채 꾸벅꾸벅 졸아 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곧이어 몇 분 뒤 다시 도착한 문자 메시지에 황급히 답장을 보낸 것이었다. 서둘러 보낸 문자 메시지엔 오타가 가득했다. 이걸 보고 얼마나 웃을까. 얼마나 놀려댈까.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하는 걱정에 한숨을 포옥 내쉬곤 기지개를 켰다.
[ㅋㅋㅋㅋㅋㅋㅋㅋ 좀 쉬었다 해라.]
곧이어, 또다시 부르르 떨며 제 위치를 알리는 휴대폰을 집어들어 방금 도착한 문자 메시지의 내용을 확인했다. 그리곤 살풋 웃음을 지으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얇은 가디건을 챙겨들었다. 자꾸만 밀려오는 졸음을 깨보고자, 편의점에 들러 캔커피를 사오기 위해서였다.
*
제법 완연한 늦봄~초여름의 날씨였지만, 늦은 저녁이라 그런지 조금은 서늘했다. 그나마 편의점이 집 앞이었으니 다행이지, 거리가 조금만 멀었다면 아마 벌벌 떨며 후회를 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주변과는 달리, 편의점은 제법 밝게 보였다. 투명한 유리문 사이론 젊은 남자 알바생 한 명이 보였다. 자리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있는 모습이, 마치 방금 전의 내 모습과도 같이 보여 꽤나 친밀하게 느껴졌다. 작게 헛기침을 하곤 조심스레 유리문을 당겼다. 그와 동시에, 번뜩 잠에서 깨며 인사말을 건네오는 알바생에게 작게 목례를 해보였다.
"어서 오세요."
"안녕하세요."
익숙한 걸음을 천천히 옮기며 음료 코너로 향했다. 제법 넓은 편의점인 만큼 캔커피의 종류는 많았다. 음료와 가격을 비교하며 꽤나 여유롭게 이리저리 훑기만 하다 보니, 캔커피가 아닌 다른 음료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냥 커피 말고 사과주스나 망고주스를 마실까. 커피를 먹었다 밤에 잠을 못 자면 어떡해. 그럴 바엔 과일주스가 나으려나….
"야."
"아, 깜짝아!"
캔커피와 과일주스를 두고 이런저런 것들을 재고 있을 때, 갑작스레 어깨에 누군가의 손길이 닿아왔다. 그 손길에 깜짝 놀라 소스라치게 놀라며 황급히 고개를 돌려보았고, 시선이 향한 쪽엔 꽤나 익숙한 인영이 서있었다. 회색 스냅백을 거꾸로 쓴 채 인상을 팍 구기고 있는 훤칠한 남자…. 오세훈이었다. 녀석의 한 쪽 손엔 컵라면 하나와 삼각김밥 두 개가 들려 있었고, 입엔 봉투를 뜯지 않은 딸기맛 요맘때가 물려 있었다.
"이 시간에 네가 여기 왜 있어?"
"그러는 너야말로 여기 왜 있으세요?"
"너 담배 피워?"
"아니, 왜? 넌 무슨, 창업한 지 꽤 됐는데도 손님이 없어서 나름 크게 확장 공사도 했지만 꾸준히 손님이 없는 24시 편의점 음료 코너 앞에서 그런 소릴 하냐."
"너한테 담배 냄새 나."
"아…, 사실 나 방금까지 PC방에서 죽치고 게임만 하다 왔어. 저녁도 안 먹어서 이런 걸로 때우는 거고."
"… 어쩐지."
"아니 짜증나게, 내 옆이 바로 흡연실인 거야. 신경질적으로 째려봐 주고 싶었는데, 눈만 살짝 마주쳐도 나한테 해코지 할 것 같아서 꾹 참고 롤에만 집중했어."
"PC방에 가지를 마. 담배 냄새도 지독한데 거길 왜 가…."
"참고 하는 거지."
"… 설마 나 몰래 김종인도 담배 피우고 그러는 건 아니겠지?"
"내가 알기론 안 피우는데. 냄새도 싫어하는 놈이 과연 피울까. 그리고 그건 네가 더 잘 알겠지. 뽀뽀할 때 담배 냄새 안 나면 안 피우는 거야, 둔탱아."
끌끌 혀를 차며 얄밉게 말을 해오는 오세훈의 옆구리를 아프지 않게 툭- 치곤 사과주스 캔을 하나 집어들었다. 그리곤 망설임없이 계산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곤 얼마 안 있어, 나보다 빨리 걸음을 옮기며 제가 고른 것들을 계산대 위에 올려놓던 녀석이 내 손에 들린 사과주스를 빼앗아 같이 계산대 위에 탁- 하며 올려놓았다.
"이거 싹- 다 계산해 주세요. 같이."
무슨 속셈인 건지, 휘파람을 불며 내게 피식피식 미소를 지어보이는 모습이 조금은 꺼림칙하게 느껴졌다. 그저 고개를 갸웃하곤 주머니 속에 들어있던 천원짜리 두 장을 꺼내 펼쳐 보였다.
"4,250원입니다."
"자, 계산."
알바생의 한 마디와 함께, 슬쩍 뒤에 있던 내 팔을 잡아 당긴 뒤 계산을 하라 떠미는 오세훈을 바라보며 당황스러움을 내비쳤다. 그와 동시에 알바생의 시선이 내 쪽으로 꽂혀왔다. 당황스러운 마음에 그냥 녀석의 몫까지 계산을 해버릴까 생각도 했지만, 일단 지금 내게 있는 돈이라곤 고작 이천 원이 전부였다.
"너 이러려고 지금…."
"여기요."
어금니를 꽈악 깨문 채 복화술을 하듯 오세훈에게 말을 내뱉었다. 그런 나를 보며 크게 웃음을 짓던 녀석이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곤 제 지갑 속에서 카드를 꺼내 알바생에게 건넸다. 그 모습이 살짝 짜증은 났지만, 천 원 남짓하는 음료의 값을 대신 지불해 줬다는 사실에 고마움을 느끼며 천천히 편의점을 나섰다.
"야, 나 한 입만."
"이거 집에 가서 마실 거야."
"내가 사준 거잖아."
"… 아, 진짜."
고집을 부려오는 오세훈의 모습에 작게 짜증을 내며 음료를 건넸다. 간편하게 캔의 뚜껑을 따던 녀석이 씨익 웃어보이더니, 이내 입을 대지 않은 채 꽤나 길게 한 모금을 마신 뒤 다시 캔을 돌려주었다. 입 안 가득 머금어진 음료 탓에 녀석의 볼은 빵빵하게 부풀어졌다. 제 입술에 촉촉이 묻은 음료를 대충 손등으로 닦아내던 녀석이 인상을 찡그려 보였다. 약간의 탄산이 가미된 음료였던지라, 뒤늦게야 탄산의 톡 쏘는 맛이 입 안을 따갑게 자극해오는 듯했다. 괴로워하는 녀석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곤 음료를 한 모금 마셨다. 톡톡 쏘는 탄산이 기분 좋게 느껴졌다.
"… 아, 뒤질 뻔."
"넌 시험 공부 안 해? 종인이 완전 열심히 하던데."
"무슨 소리야. 나 시험 그저께 끝났는데요."
"… 헐."
"봐봐. 다들 나한테 이렇게 관심이 없어."
"… 몰랐어…."
"김종인 내일 끝나지? 너도 내일 끝나냐?"
"응, 내일."
"아싸, 김종인네 집 놀러 가야지."
"아, 안 돼."
"왜? 데이트 함?"
"그건 아니지만…, 어쨌든 안 돼. 내가 만날 거야."
"… 레알 짜증남."
"… 아, 오세훈아-. 궁금한 게 있는데, 남자들은 어떤 이벤트를 좋아해?"
"뭔 이벤트요."
"그냥…. 막 거창하게 말고, 집에서 소소하게 해줄 수 있는…?"
내 물음에 찬찬히 고민을 하는 듯싶던 오세훈이 이내 머리 위로 전구를 띄우며 눈을 크게 떠보였다. 그런 녀석을 빤히 바라보며 꿀꺽 침을 삼켰고, 이내 굳게 닫혀있던 녀석의 입술이 열렸다.
"몰래 하는 거지? 하긴, 이벤트니까 당연히 몰래겠지. 음, 그렇다면… 귀신 분장."
"……."
"겁나 놀라게 만드는 거야. 아, 재밌겠다. 나랑 같이 할래?'
"그런 거 말고…. 좀 로맨틱한 거."
"되게 까다롭게 구네. 귀신 분장 굿 아이디언데."
"… 다른 거."
"다른 거 뭐…. 이벤트 그딴 게 뭐가 필요해. 김종인 걘 그냥, 네가 집에서 크나큰 남자 와이셔츠 하나만 입고 있어도 환장할 애야."
"… 아니, 그런 거 말고…."
"하다 못해 네가 재채기 한 번만 해도 우쭈쭈- 하면서 오구오구 해줄 놈이라고."
"……."
"이벤트 그런 거 필요 없어."
"……."
"다 좋아해. 네가 해주는 건 뭐든."
제법 단호히 말을 내뱉곤 쓰고 있던 스냅백을 고쳐 쓰던 오세훈이 작게 하품을 해보였다. 소소하게나마 할 수 있는, 남자들이 좋아할 만한 이벤트는 과연 뭐가 있을지 알아볼 목적으로 건넨 말이었지만, 은근한 쑥쓰러움과 설렘만을 얻게 돼 조금은 난감했다. 그런 날 내려다보며 피식 웃음을 짓던 녀석이 곧이어 내 머리칼을 잔뜩 헤집어 놓았다. 덕분에 엉망이 되어버린 머리카락을 슬쩍 빗으며 녀석을 흘기자, 또다시 하품을 하며 쭈욱-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다.
"아, 어쨌든 들어가라. 너 늦은 시간에 밖에서 이러고 있는 거 네 남친이 알면 싫어할 듯."
"어? 아, 그래. 너도 얼른 가. 요맘때 다 녹겠다."
"미친…, 벌써 물렁물렁해."
"다 녹았네~ 축하한다, 세훈아."
"……."
"그니까 얼른 가 봐. 배 안 고파? 저녁 안 먹었다면서."
"갈 거야, 인마. 설마 내가 너 집 앞까지 데려다 줘야 함?"
"아니, 어차피 코앞이야."
"사실 데려다 줄 생각 없었음."
얄밉게 말을 내뱉곤 손을 흔드는 녀석에게 덩달아 인사를 해보였다. 그리곤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직 내용물이 반도 넘게 남은 사과주스 캔의 딱딱한 표면은 여전히 차갑기만 핬다. 편의점에서 뜻밖의 인물을 만나게 될 거라고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금방 다녀올 수 있을 거란 생각에 휴대폰조차 가지고 나가지 않았던 나였지만, 오세훈과 짧은 대화를 나누고 나니 의도치 않게 시간이 늦어지고 말았다. 지금쯤 내 연락을 기다리고 있을 김종인이 떠올라, 서둘러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
얼마 뒤 도착한 집 앞엔 누군가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 그림자를 보자,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이렇게 직접 찾아와 얼굴을 보여주면 분명 공부가 더 안 될 텐데…. 그래도 잠깐은 상관 없겠지. 아주 잠깐은.
"뭐야, 언제 왔어? 나 휴대폰을 놓고 나와… 서…."
생글생글 웃으며 엄지 손가락과 검지 손가락을 이용해 김종인의 옷자락을 살짝 잡아 당겼다. 그리곤 얼마 안 있어, 휴대폰을 귀에 가져다 댄 채 허공만을 바라보고 있던 녀석의 시선이 내게 닿아왔다. 그러나, 그 눈을 확인하는 순간 너무나도 놀라 들고 있던 캔을 떨어뜨릴 수밖에 없었다. 바닥을 쿡- 찍으며 저 멀리 나뒹굴어진 캔에선 반쯤 남은 음료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아…, 어쩐지. 집 안에서 휴대폰 진동 소리가 들리더라."
제법 높게 위치한 시선을 마주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김종인이 아니었다. 김종인이라 생각하며 슬쩍 잡아 당겼던 옷자락은, 김종인의 것이 아니었다. 나도 모르게 한 걸음 한 걸음, 뒷걸음을 치게 되었다. 오랜만에 모습을 비춰온 그의 머리칼은 칠흑과도 같이 새까맣기만 했다. 한 줄기 달빛에 물든 눈동자는 제법 옅어 보이기도 했다. 박찬열-. 도대체 무슨 속셈으로 다시 날 찾아온 걸까. 도대체 왜….
"오랜만이다. 더 예뻐졌네. 여자는 연애를 하면 예뻐진다더니, 역시 그 말이 사실인가 봐."
"……."
"도경수 알지? 내 친구거든. 너랑 같은 학교인 걸로 알고 있는데. 게다가, 같은 학과."
도대체 무슨 속셈으로 다시 날 찾아온 걸까. 도대체 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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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여러분.. 제가 크나큰 실수를 저번 화에.. 해버렸군요.. 부제를 왜 하필 그런.. 식으로.. 정했을까요..? 이 엉큼한 독자님들.. ㅇㅅㅁ.. 물론 저도 아, 이게 아닌데.. 싶었어요..ㅎㅎㅎㅎㅎㅎㅎㅎ 제 잘못입니다 :)
다음 편은 찬열이 번외예요 ;) 저녁 시간인데, 다들 맛있는 저녁 드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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