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정국은 남자를 좋아한다
w. 정국학개론
며칠째 전정국과 제대로 얘기해 본 적이 없었다. 예전도 그랬지만 지금은 더 그런 것이, 전공 수업 시간에만 잠시 얼굴을 비추고는 어딜 그렇게 돌아다니는 건지 과실에 가만히 앉아있는 모습을 며칠째 보지 못했다. 요 며칠 간 전정국과 친해졌다 생각한 건 나뿐이었는지 전정국은 겨우 얼굴을 마주할 수 있는 수업 시간에도 나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괜히 섭섭한 마음에 과실에서 온몸을 축 늘어뜨리고 있는데 내가 왜 이러는지 정확히 파악한 수정이는 이해한다는 듯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너밖에 없어, 수정아.
태형이는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 건지 바빠야 할 와중에도 내 옆에 앉아 내 손을 만지작거리며 피식 피식 웃어댔다. 옆에서 축 늘어진 내가 보이지도 않는 건지 내 손에 시선을 고정한 채 정신은 다른 세계에 있는 것 같았다. 진짜 너밖에 없어, 수정아.
전정국에게 말을 걸어보려던 참이었다. 요 며칠 간 전정국이 나에게 먼저 말을 걸어 준 적이 많기도 했고, 더이상은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정국이 나를 보호막으로 이용했든, 아님 그 모든 게 진심이든 간에, 상관이 없었다. 전정국에게 고백을 하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친구도 뭣도 아닌 사이가 될 게 분명했다. 전정국은 남자를 좋아한다. 나를 좋아할 이유따위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내 안에 나를 가두고 좋아하는 마음까지 꽁꽁 숨기는 건 어리석은 짓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전정국에게서 나를 숨기지 않기로 결정했다.
" 어? 전정국 염색했네. "
" 와, 예쁘다. 갈색이야? "
한참을 전정국 생각으로 머릿속을 채우고 있었을까, 거짓말처럼 전정국이 내 앞에 나타났다. 한층 밝아진 머리색에 눈길이 갔다. 검은색 머리의 전정국도 잘생겼지만, 갈색 머리의 전정국 역시 잘생겼다. 머리색과 함께 표정도 염색을 한 건지 밝은 표정으로 해맑게 웃는데, 그게 또 좋아서 나도 모르게 웃고 있었다. 수정이가 주책이라며 팔을 아프지 않게 당겼다. 좋은 걸 어떡해.
하나둘씩 전정국 머리색에 입을 대고, 태형이는 신이 나서 염색하고 나니 더 호구 같다며, 누구보다도 호구 같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수정이도 냉큼 입을 열어 어디서 염색했냐며, 미용실 한번 잘 골랐다며, 칭찬을 하자 과실에 있는 모두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물론 전정국의 시선도 내게 닿았다.
그 해맑은 웃음이 지지 않고 나를 향해 있었다.
" 잘 어울린다. "
남들처럼 낯간지럽게 머리색이 예쁘다느니, 살갑게 어디서 염색했냐느니, 장황하게 늘어놓지는 못했지만 내가 전정국에게 할 수 있는 최대의 칭찬이었다. 낯간지럽지도 않고, 딱 나답게. 그리고 그 말이 마음에 든 건지 조금 전보다도 더 해사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며 내쪽으로 걸어왔다. 그리고는.
" 그럼 됐어. "
잠시 전정국의 손에 내 머리에 닿았다, 떠났다. 이번에는 조금 더 오래. 두어 번 정도 움직였던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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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점심 같이 먹자고 했잖아. 나랑 먹자. 응? "
" 아, 그게…… "
" 오늘 전정국 약속 있다고 나랑 점심 약속 깼다니까. 이때 아니면 너랑 언제 또 밥을 같이 먹어. "
수업을 마치고 돌아와보니 박지민이 예전처럼 과실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이번 타겟은 전정국이 아니라 나였던 건지 나를 보고는 반갑게 웃으며 달려와서는 하는 말이, 밥을 같이 먹잔다. 옆에 있는 수정이와 태형이의 눈치를 보자 친구인 걸 눈치 챈 건지 조심스럽게 나를 데려가도 괜찮냐고 묻는다. 오랜만의 데이트냐며 수정이에게 어깨동무를 하던 태형이가 수정이에게 등짝을 찰지게 얻어맞고는 울상을 지었다. 내 난감해하는 표정을 잠시 살피던 수정이가 그제서야 입을 열었다.
" 아미가 가고 싶으면 가는 거고, 아니면 아닌 거고. "
선택은 나의 몫이었다. 사실 박지민이 불편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왜 이토록 내게 집착하는지도 잘 모르겠고, 일단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연인이라는 사실이 나를 괴롭게 만들었다. 얼굴만 봐도 기분이 좋지 않은 게 사실이다. 근데도 이렇게 살갑게 대하면 내가 이 해맑은 사람에게 어떤 나쁜 말을 할 수 있을까. 속으로는 그 사람을 참 많이도 까면서, 겉으로는 반가운 척 하는 이중적인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 박지민은 나를 그렇게 만들고 있었다. 그래서 박지민이 좋지 않았다.
" 나랑 밥 먹으면 비밀 하나 가르쳐 줄게. "
" 비밀? "
" 전정국 관해서. "
솔깃했다. 박지민은 왠지 나에 대해 뭔가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혹시 내가 전정국을 좋아하는 걸 눈치 챈 건 아닐까. 그래서 나를 구석진 곳으로 데려가 경고를 주려는 건 아닐까. 아무런 증거도 없이 박지민을 못된 사람으로 몰고는 두려움에 떨었다. 그럼에도 흥미 있는 표정을 숨기지 못한 탓에 박지민은 걸려들었다는 표정으로 내 손목을 잡아 이끌었고, 마지막으로 본 태형이의 표정은 박지민의 표정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그것이었다.
박지민은 예전, 태형이, 수정이 그리고 윤기 오빠와 함께 왔던 식당으로 나를 데려왔다. 여기 지지리도 맛없었는데. 그럼에도 나는 이 곳을 좋아했다. 이 곳에서의 느낌을 잊을 수가 없다. 박지민과 앉은 지금 이 자리. 이 자리에서 저 맞은편 자리에 앉아있던 전정국을 보았다. 전정국이 맑게 웃는 그 모습을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박지민은 와 본 적이 있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메뉴판으로 메뉴를 마구잡이로 정해 시켰다. 내 의사도 묻지 않은 막무가내식의 주문에 살짝 기분이 나빴지만 습관적으로 물을 따르고 냅킨을 깔아 수저를 놓았다.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도 웃는 박지민의 얼굴이 보여 입을 삐죽거렸다. 뭐가 그렇게 웃긴 거야.
" 전정국이랑 똑같다. "
" 어? "
" 냅킨 깔고 수저 올리는 거. "
난 또. 그게 뭐라고. 그래, 그딴 게 대체 뭐라고 이렇게 설레는 건지. 겨우 이런 사소한 행동이 겹친다는 게 얼마나 기분이 좋고 설레는 일인지 난생 처음 알았다. 전정국에게 수도 없이 설레, 이제 가슴이 뛰는 게 익숙해졌다, 싶었는데 제 3자에게서 듣는 전정국의 이야기도 뭐가 그렇게 좋은 건지. 아무래도 중증이다.
" 내가 비밀 알려 준다고 했잖아. "
" 아, 응. 그랬지. 진심이었어? "
" 그럼 내가 너랑 밥 먹으려고 거짓말 친 줄 알았어? "
" 그런 줄 알았지. "
" 아닌데. 진짠데. "
박지민이 내게 어떤 엄청난 비밀을 알려 주려 나를 이렇게도 사적인 자리에 불러냈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지만 그게 궁금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전정국과 가장 가까운 사이인 박지민에게서 듣는 비밀은 확실할 게 분명했다. 혹시나 토를 달면 그 비밀을 알려 주지 않을까 두 손을 부여 잡고 무릎에 살포시 올려 박지민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나를 애태우기로 작정한 건지, 입을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하던 박지민은 그제서야 목소리를 냈다.
" 사실 비밀은 아닌데. "
" ……. "
" 모든 사람이 아는 걸 너만 모르는 거 같아서. "
" ……. "
" 아, 모르는 게 아니라 오해하는 거지, 참. "
무슨 중요한 비밀이길래 이렇게도 뜸을 들이는지, 그게 또 중요한 거라서 뜸을 들이는 게 아니라 그냥 내 피를 말려 죽이기로 작정하고 하는 말인 건지 박지민은 금방이라도 크게 웃을 것만 같았다. 입가에 웃음을 가득 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하는데 그만 참지 못하고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 답답해 죽겠어.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
" 전정국 게이 아니야. "
그렇구나. 전정국은 게이가 아니구나. 아니구나? 머리가 멍해졌다. 뇌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건지, 머리가 복잡했다. 전정국 게이 아니야. 그러니까 전정국 남자 안 좋아해. 그 말은. 전정국이 여자를 좋아해. 그러니까 전정국은 남자를 안 좋아하고, 여자를 좋아하는 거니까 박지민이랑 사귀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전정국은.
남자를 안 좋아해?
" 충격 받았어? 왜 말이 없어. "
내 표정이 꽤 재미난 건지 앞에서 킥킥대며 웃는 박지민이 더이상 기분 나쁘지 않았다. 전정국과 누구보다도 가깝게 지내는 사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박지민이 참 미웠는데, 겨우 그 말에 박지민이 사랑스럽게 보였다. 엄청난 사실이었다. 그러니까. 어쩌면 내 첫사랑이 이루어질 수도 있는 엄청난, 어마무시한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알려 준 박지민에게 뽀뽀라도 해 주고 싶었다. 박지민에게 뽀뽀를 하고 싶은 게 아니라, 정말 그 정도로 박지민이 사랑스러웠다.
" 와, 진짜 충격 많이 받았나 보다. 진짜 그 소문 믿었던 거야? "
" 그게… 그… 그러니까… "
" 말문도 막혀? 귀여운 건 알고 있었는데, 그러니까 더 귀엽다. 아, 나 이런 말 한 거 전정국한테 걸리면 죽는데. "
" ……. "
" 오늘 나랑 밥 먹은 건 비밀. 전정국 걔 자존심 겁나 세서 내가 걔 일에 간섭했다는 거 알면 나 겁나 처맞아. 저번에 종아리 때리는 거 봤지? "
" ……. "
" 알았지? 비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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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듣는 교양 수업이었다. 늘 지루한 수업이었지만 나름 꿀강이라는 선배들의 조언에 나만 수강 신청에 성공한 수업이었다. 중국어에는 하나도 관심이 없었지만 한자라면 나름 자신이 있었다. 어렸을 적 학습지에서 본 한자들이 새록새록 생각이 났다. 수업은 늘 그렇듯 쉬운 고사성어부터 시작해 어려운 고사성어로 끝이 났다. 마침 수어지교를 배우고 있었다. 고등학교 때 이미 배운 성어인 거 같은데, 펜에 힘을 주어 한자를 또박또박 써나갔다. 언젠가는 제출해야 할 과제를 미리 해 두는 셈이었다.
한참을 펜에 힘을 주어 한자를 쓰고 있는데, 수업에 늦게 들어온 건지 조심스럽게 문이 열렸다, 닫혔다. 교수님과 나를 포함한 학생들은 그리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미 그런 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수어지교를 열 번, 모두 쓰고는 힘을 주었던 손이 아파 흔들고 있는데, 방금 들어온 학생이 자연스럽게 내 옆을 차지한다. 빈 자리 많은데 왜 내 옆자리를.
" 전정국? "
" 안녕. "
전정국이다. 밝은 갈색 머리로 물들인 전정국이 늘 그랬던 사람처럼 해사하게 웃으며 나를 향해 인사했다. 어쩐지 열아홉의 그때로 돌아간 것 같아 기분이 묘했다. 내 옆자리. 전정국. 웃는 얼굴. 인사. 하나 다른 게 있다면 비교적 단정하지 않은 전정국의 머리색. 여전히 너는 잘생겼고, 눈이 부셨다. 눈을 살짝 찡그렸다. 눈이 부신 전정국 탓이라고 생각했다.
괜히 두근대는 마음에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전정국에게 고백하리라, 내 마음을 숨기지 않고 표현하리라, 굳은 결심을 하면 뭘 하나. 정작 전정국이 바로 옆에 있으면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게 되는데. 눈이라도 마주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어쩐지 정색하는 전정국의 얼굴보다도 웃는 그 얼굴이 더 적응이 되지 않았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전정국이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자꾸 너무 빠르게 뛰었다. 얼굴로 피가 쏠리는 것 같아 두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댔다. 전정국은 옆에서 뭘 하는지 내 노트와 펜을 가져가 몸을 숙였다. 아무래도 뭔가를 쓰는 것 같았다.
몇 초 지나지 않아 전정국은 노트를 내쪽으로 밀었다. 그리고.
나 친한 여자애가 한 명도 없어.
응?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인데. 기억을 더듬었다. 어렴풋이 남은 기억 한 자락에 전정국이 있었고 아마 전정국의 입에서 나왔던 말인 것 같다. 나 남중 나와서 친한 여자애 한 명도 없어. 내 예상대로라면 다음 대사는.
나 친한 여자애가 한 명도 없어.
그러니까 나랑 친구해.
아마 눈이 동그래져 있을 게 뻔했다. 노트를 보고 슬며시 고개를 들자 전정국과 눈이 마주쳤다. 조금만 더 가까웠다면 코가 닿을 수도 있는 거리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교수님의 시선이 잠시 여기 머물렀던 것 같다. 아무래도 빨개진 얼굴을 전정국에게도, 교수님께도 들킨 것 같아 부끄러웠다. 전정국은 여전히 고개를 살짝 숙인 채 킥킥댔다. 뭐가 그렇게 즐거운 건지, 누가 박지민이랑 친구 아니랄까 봐 웃는 모습도 똑같다. 밉지 않은 눈으로 전정국을 흘겨보면 전정국은 숙였던 몸을 들고는 순식간에 내 왼쪽 어깨를 잡아 끌어당기고는 내 오른손에 제 오른손을 겹쳐 올린다.
나 친한 여자애가 한 명도 없어.
그러니까 나랑 친구해.
그래.
똑같은 레파토리. 괜히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이번에도 전정국이 먼저 다가와 주었다. 나는 늘 벽을 치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전정국이 그 벽을 부숴버렸다. 열아홉, 그때의 실수를 번복하지 않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 노력이 무색하게도 전정국은 나보다 훨씬 더 많은 노력을 하고 있었다. 눈물을 그렁그렁 단 채로 전정국과 눈을 맞췄다. 그 어느때보다도, 어쩌면 열아홉, 그때의 전정국보다도 따뜻한 눈을 하고 있는 스무 살의 전정국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나 친한 여자애가 한 명도 없어.
그러니까 나랑 친구해.
그래.
고마워.
전정국은 남자를 좋아한다
w. 정국학개론
후하후하후하후하 정국이 번외를 끝내고 여주와 정국이의 행쇼를 위해 바로 달려왔어요! 정국이와 여주의 관계 개선을 위해 몹시 노력했슴다! 왠지 분량이 좀 적어 보이는 건 기분 탓인가요... 8ㅅ8 열심히 쓴다고는 썼는데 역시나 머릿속에서 필터링을 거치지 않고 바로 적은 글이라 매끄럽지 못할 수도 있는 점 반성하겠슴다... 하지만 많은 독자님들의 댓글을 읽으면서 너무 빨리 오고 싶었어요 8ㅅ8! 자, 전 이제 다시 다음 화를 위해 머리를 열심히 굴리다 돌아오겠슴다! 글 읽어 주신 분들 모두 감사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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