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 붉은 참혹상
written by: 규피덴셜
state: 공유, 배포 xX
nick: 테라규, 감성, 씨규빠, 타라, 베긔, 체리펀치, 소라빵, 코알라
붉은 참혹상 -05-
“김성규입니다. 제가 잠시 따로 알려드리고 싶은 사실이 있어서 그런데 다른 곳에서 개인적으로 말씀 드려도 될지…”
“그래요, 그럼.”
대령관에 초대된 중학생의 시선이란 화려한 장식에 눈을 떼질 못했다. 남자치고는 할머니와 함께 계속 살아서 그런지 더 남자다워진 구석보다는 여자처럼 섬세한 성격이 남아있어서 이불에 새겨진 패턴 하나하나 모조리 너무 맘에 들었다. 언젠가 이런 비단처럼 고운 침대에 누워서 잘 수 있다면 좋겠다. 집에 남아있는 할머니 냄새는 이젠 더 이상 눈물나서 못 있겠으니까. 성규는 코 끝이 저려오는 것을 꾹 참고 상민과 얼굴을 마주쳤다. 눈썹을 들어올리면서 앉으라는 듯 의자를 끌어주기에 성규는 가서 곧바로 앉았다.
“제가 따로 대화하기를 요청한 이유는 제가 홍단의 왕관을 훔친 주인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상민 대령님.”
“홍단의 왕관을 훔친 사람을? 것보다 너같이 어린 아이가 홍단의 왕관이 어떻게 생겼는지 어찌 알고?”
성규는 이때다 싶어서 어릴 적부터 이상민 대령에 대해서 읽은 모든 자료와 정보들을 술술 읊어내면서 상민에게 최대한 자신을 어필할 수 있을만큼 어필했다. 벨름 제국의 역사부터 시작해서 어떤 무기를 사용했으며 자기 스스로 분석해본 이상민 대령의 중요성은 어떠한 지 모든 것을 술술 읊어내자 상민의 표정에는 점점 신기해하는 표정이 드러났다. 중간에서부터는 마음을 조금 열었는지 '그래서?'하며 말을 맞받아쳐주기도 했다.
“벨름 제국이 현재 면적 넓이로는 세계 3위에 달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면적으로는 거의 세계 1위인 소네 제국까지 우리 글라디우스의 뛰어난 머리를 써서 전투력을 발휘하면 세계를 정복하는 일 정도야 벨름 제국의 군력으로는 거뜬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침묵이 흘렀다. 상민 대령님이 내 분석을 맘에 들어하지 않으신걸까? 하기야, 중학교 2학년 머리에서 나온 말이 기막힐 정도로 막연하게 느껴지시겠지? 성규는 말이 없는 상민의 표정을 보면서 점점 기가 죽어나갔다. 그렇게 한참을 조용히 시간이 흐르는 동안 상민의 눈동자가 저리로 굴렀다 여기로 굴렀다 하는 것을 마주보면서 성규는 침을 꿀꺽 삼킨다.
“몇 살이라고 했지?”
“열 다섯입니다.”
“아쉽네, 거 참.”
성규는 심장이 덜컥 떨어졌다. '아쉽다'라는 표현이 도대체 어느 부분에서 아쉽다는 소리일까. 분명 추적해보자면 훈련병으로 키우고 싶은데 중학교 2학년인 사실에 노하고 있을 것이 뻔했다. 상민은 입술을 쭉 내밀고서는 혀를 끌끌차대면서 이것저것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런 아이가 훈련병이 된다면 잘만 구슬려도 내 밑에 둘 수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얼마든지 탐을 내도 될만한 남자였다. 여태껏 벨름 제국에서 본 남자 아이 중에 가장 하얬다. 로리콘틱한 성향을 강하게 띄고 있는 상민에게 성규란 정말이지 맘에 쏙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저 하얗고 예쁜 남자라는 것을 떠난 수수한 매력이 돋보이는 소년이었기 때문에.
“저, 저는 훈련병이 되는 것이 꿈입니다! 자, 잘 할 자신 있습니다!”
상민은 웃음을 터뜨리면서 성규를 쳐다보았다. 나름대로 성규가 상민이 아쉬워하는 '그것'에 대해 회심시키기 위해 크게 자신의 다짐을 보였을 뿐인데 상민은 웃긴다는 듯이 자신의 앞머리를 위로 쓸어올리면서 크게 기지개를 켜듯 몸을 쭈욱 펴냈다.
“사관학교 들어가고 싶은거죠? 그래서 지금 홍단의 왕관이 어디에 있는 줄 안다고 거짓말 하신거고요.”
성규는 다시 마음이 휘청거렸다. 홍단의 왕관을 훔친 사람을 말하러 와놓고서는 사관 학교에 들어가기 위해서 자기 어필을 한 셈이라니 성규는 당황해서 눈알을 도록도록 굴려대다가 벌떡 일어서는 상민을 향해 고개를 들어올리면서 말했다.
“오종… 오종혁 훈련병이요.”
상민이 앞을 보던 시선을 성규에게로 내리깔고서는 아무 표정 없이 끄덕거렸다. 마치 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이 여유롭게 성규를 바라보았다. 놀라는 반응을 보일 줄로만 알았는데 예상에 빗나가자 성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갑자기 대령님의 방 문으로 노크 소리가 들렸고 성규는 혹시나 그게 종혁일까봐 마음 조려가면서 벌떡 일어나 문에서 보이지 않는 공간으로 몸을 숨겼다.
“범인을 찾아냈습니다, 대령님.”
“그래서 왕관은요.”
여기, 하며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남과 동시에 상민의 얼굴에 웃음꽃이 핀 것을 목격했다. 그렇게 되면 종혁이 형은 어떻게 되는거지? 나는? 나는 그러면 훈련병이 되기 위해서 종혁 형을 팔아먹은 건가? 그나마 다행인 사실 중 사실은 종혁이 같이 오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성규는 여전히 혼란에 빠져서 주저앉은 채로 머리를 세게 양 손으로 쥐고서는 고개를 다리 사이로 푹 파묻었다. 그새, 걸음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상민이 무엇인가 머리 위에 올려주었다. 직감적으로 깨달은 사실 하나는 이것이 홍단의 왕관일 확률이 크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홍단의 왕관을 쓰는 날이 오다니 싶어서 쭈그려 앉아있던 몸을 펴서 다리를 팔로 쥔 채로 고개를 올려 상민을 쳐다보았다.
“원래 삶을 현명하게 살기 위해서는 조금의 배신도, 조금의 신뢰도 모두 필요한 거죠.”
“…….”
“성규 군은 현명했습니다. 그 현명함 잘 보았어요. 사관학교에서 언젠가 꼭 뵐 수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성규는 끝이구나 싶어서 왕관을 양 손으로 들어올려 상민에게 건네주었다. 건네주면서 왕관의 겉을 몰래 손으로 슥슥 만진다는 것이 상민의 시선에 들어오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런 성규를 보면서 상민은 씨익 웃어주었다. 성규도 따라 웃었지만 속이 쓰린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일어나서 터덜터덜 문 앞으로 걸어가자 홍단의 왕관을 쥔 상민이 성규를 배웅하려는 모양인지 졸졸 쫓아왔다.
“가봐야겠네요. 안녕히 계…”
“사관학교에서 곧 뵈겠죠. 걱정마세요.”
곧? 곧? 곧이란 말에 성규는 우뚝 멈춰 섰다. 저는 중학교 2학년이라 재차 계속 말씀 드렸었는데 불구 곧이라는 표현은 분명히 빠르게 입학할 수 있는 경우가 생긴다는 소리 아닌가? 성규는 정말 날아갈 듯 기분이 좋아졌다. 문 밖으로 나서면서도 입꼬리가 도무지 내려갈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티 내고 싶지 않았는데, 나도 애는 애인가보다. 성규는 생각했다.
*
“제 496군번 오종혁. 앞으로 나온다.”
얼굴엔 핏덩이가 몰린 듯 얼마나 맞았는지 벌어진 상처들과 부어오른 멍자국들이 안쓰럽게 뵈일 정도로 구타당한 종혁은 주춤거리면서 걸음도 바르지 못한 상태로 앞으로 절룩거리며 나아갔다. 종혁의 앞에 서서 고통스러워하는 종혁을 바라보고 있는 인물은 김명근. 바로 명수의 삼촌이자 벨름 제국 내에서 수비와 통신을 담당하고 있는 스쿠툼 부대의 대령이었다. 종혁은 눈 부근도 부어올라 눈도 제대로 못 뜬 채로 앞으로 가서 우뚝 섰다.
“홍단의 왕관을 절도한 죄로 고문형을 받게 된다.”
“…….”
성규가 말하기도 전에 이미 군부대 내에서는 범인이 종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보통 휴가를 냈으면 날씨가 좋고 놀러가기 좋을 봄이나 가을에 내지 쪄죽을 여름이나 얼어죽을 겨울은 피한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지금 무더운 더위를 이기겠다면서 휴가를 낸 것도 이상했고 때마침 없어진 홍단의 왕관은 더더욱이나 종혁을 의심케 만들었다.
종혁은 성규와 대화를 나눈 그 새벽 오전에 용의자로 붙잡혀 쫓겨다녔다. 큰 가방에 들은 종혁의 집과 홍단의 왕관 무게 때문에 종혁은 제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그렇게 종혁은 이틀동안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쫓겨다녔다. 그렇게 잡히자마자 구타를 당하고 종혁은 어찌되었던 홍단의 왕관을 훔친 범인이 되었으니 빼도박도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렇게 꽉 붙들린 채로 종혁은 고문관으로 끌려올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묻는다. 왜 홍단의 왕관을 훔쳤지?”
“…….”
“답하면 고문형은 취소시켜주지.”
“…….”
“이 새끼가 정말… 답답하네.”
김명근의 고개가 돌아가면서 턱이 한번 들어 올려졌다가 떨어지면서 고문을 시작하라는 신호가 떨어졌다. 종혁과 같은 군번으로 훈련병이 된 동기들이 나와서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물통을 들고 오기 시작했다. 투명한 빛깔로 그 안에 비춰지는 액체는 다름아닌 레몬즙이었고, 당연 지금 벌어진 상처 위로 레몬즙을 뿌리려는 게 당연했다. 종혁은 그 이유에 대해서 더 말할 수가 없었다. 물통의 뚜껑이 열리고 종혁은 식은땀을 뽈뽈 흘리며 아무것도 닿지 않음에도 쓰라린 상처들을 내놓은 채로 눈을 질끈 감았다.
“뜨, 흐으… 아악!”
레몬즙 몇 방울이 상처 위로 후두둑 떨어지고 팔뚝을 따라 흘러내리며 상처 안으로 깊게 스며들었다. 그의 비명소리는 고문관 안에서 울려퍼졌고, 종혁은 그 쓰라림에 도망치고 싶었지만 그 옆으로 서 있는 훈련병들 때문에 도망가지도 못한 채 앉아 있었어야만 했다.
“잠깐 멈춰봐요.”
“…예?”
“그거 멈춰보라고.”
문이 소리 없이 열리고 멈추라고 말을 건넨 인물은 다름 아닌 상민이었다. 모든 훈련병들은 명근의 눈치를 보면서도 글라디우스의 총 대령의 말이니 거절할 수도 없고 가만히 한 발자국씩 물러섰다. 그에 상민은 끄덕이면서 종혁 앞으로 와 종혁의 턱을 쥐고 올려들었다. 성규라는 아이가 종혁이 홍단의 왕관을 훔쳤다고 말하고 왕관이 왔을 때 숨었다는 것은 성규가 종혁을 팔아먹은 게 분명해. 상민은 생각했다. 어쩌면 이 놈을 잘 써서 성규를 꼬득일 수도 있을까 하는.
“이름이 뭐죠?”
“오, 오. 오종혁입니다.”
턱을 쥐던 손이 점점 주물거리듯 종혁의 얼굴을 만져대다가 올라와서는 양 볼을 한 손으로 꾸욱 눌러대었다. 우물거리듯 겨우 자신의 이름을 뱉어낸 종혁은 영문을 모른 채로 쓰라린 상처의 고통도 잊은 채로 상민을 올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생각에 잠긴 듯한 상민의 눈빛이 보였다. 종혁은 그에 침을 꿀꺽 삼키며 상민이 무엇을 말할 지 기다릴 뿐이었다.
“훈련을 재개하십시다. 오종혁 훈련병이 좀 필요할 것 같으니까.”
“……! 이상민…! 이 자는 홍단의 왕관을 훔친 절도범인데 어떻게 훈련장에 살려둘 수 있겠어. 이미 얼굴도 팔렸어. 이 자는 끝이…!”
“글쎄. 내가 이 아이를 두고 싶다고요. 김명근 대령님. 군부대 내에서는 아무리 친구지만서도 위아래 지킵시다. 우리의 우정을 잃지 않게끔만요.”
영문을 모른 채로 풀려난 종혁은 끄덕거리면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얼척없고 우발적인 행동으로밖에 안 보이는 상민의 명령에 화가 난 명근은 그 자리에 벌떡 일어난 채로 상민을 노려보았고 그에 상민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명근을 대했다. 여유로움, 그것이 상민에게 있어서 어쩌면 무기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