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네 뭐하냐?"
나를 애워싸고 있던 무리의 시선이 일제 소리가 나는 쪽으로 향했다.
나는 모세의 기적처럼 벌려진 그 사이에서 작은 얼굴 하나를 보았다.
"아, 여럿이서 하나를 괴롭히면 못 쓰지잉. 쪽팔리게."
그들의 그림자가 내 곁에서 멀어진 후에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서 주저 앉았다.
"이름이 뭐야?"
따뜻한 목소리였지만, 나는 움칫했다.
"도 경수?"
그가 내 명찰을 만지며 말했다.
"나는 백현이야. 변 백현."
나의 턱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상대의 손길에 이끌려 위로 들렸을 때,
눈물이 났다.
"아……."
그는 나와 눈높이를 맞추고 있었으니.
"내 이름 잊지 마. 안 그럼, 죽어."
내 생에 떠오른 것은 태양이 아니라, 너의 이름이었다.
"오빠, 왔다."
어깨에 든 인기척에 놀라 고개를 돌리니, 어제 본 그가 떡하니 서 있었다.
"나, 심심해."
어떻게 찾아 왔을까.
"경수야, 나 심심하다고."
그가 그렇게 말하는데, 어떻게 대답해야할 지 잘 몰랐다.
"어제는 고마웠어요."
어렵게 꺼낸 말이었는데, 상대의 표정은 좋지 않아 보였다.
"나 6반이야, 몰랐지?"
고새 그는 내 책상 옆으로 의자를 끌고 와 턱을 괴며 말을 잇고 있었다.
"미안해요."
"아, 자꾸 이렇게 내외하면, 오빠 운다?"
그가 눈을 비비는 시늉을 하며 이상한 소리를 내더니 벌떡 일어나 내 팔을 붙잡고 밖으로 날 끌어냈다.
"누가 또 괴롭히면, 오빠한테 말해."
나는 바람에 떨어지는 낙엽처럼 그에게 이끌려 복도를 걷고 있었다.
"왜 자꾸 오빠라고 해요."
바닥에 스치는 발소리가 소음처럼 들렸다.
"오빠 싫어? 이건 네가 '요'자 붙이는 것과 똑같은 건데?"
"말도 안 돼."
"경수야, 너는 참 까칠하구나."
그는 내 귓가에서 계속 조잘거리고 있었다.
"아, 딱 좋아."
그가 내 어깨에 저 팔을 올리고 한 말이었다.
"나한테 매정하게 굴지 마. 그러면, 화나니까."
"어찌된 게 넌 허구한 날 피를 묻히고 다니냐."
"아……."
"사내 새끼가 무슨 아야, 가오 빠지게."
그가 상처가 난 내 입술을 만지며 말을 이었다.
"이렇게 예쁘니까 괴롭히고 싶나보지?"
"너는 내가 왜 좋아?"
나의 말에 그는 살짝 당황한 듯 했다.
"누가 좋대?"
"……."
"사랑한데지."
그가 베시시 웃었다.
"너는 내가 죽으면 어떨 것 같아?"
나는 놀라 백현이를 보았다.
"놀랐어?"
"그런 말 장난이라도 하는 거 아니야."
"진심인데."
텅빈 운동장에 내뱉어진 백현이의 말이 야구공처럼 달려와 내 가슴에 턱하고 때렸다.
"아, 죽고 싶다."
"왜 죽고 싶은데……."
"그냥, 사는 게 다 힘들어."
나는 그런 말 하는 백현이가 미웠다.
"내가 있잖아."
백현이 내 말에 나를 꼭 껴안았다.
"그래, 너 때문에 산다, 내가."
"다신 그런 말 하지 마."
"너 없으면, 내가 어떻게 사냐. 살아도 사는 게 아닐 거야."
백현이의 웃는 모습을 보면서도 철렁했던 가슴이 너무나 시렸다.
언젠가 복도를 지나가다 책상에 기대 하염없이 창 밖을 보던 백현이를 본 적이 있다.
백현의 반 친구는 나를 알아 채고 다가와 백현이를 불러 줄 것을 물었지만,
나는 그 모습을 계속 보고 싶어 거절했다.
근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건 너무 이상한 광경이었다.
"너, 우리 반 왔었다며?"
백현이 내 어깨에 제 팔을 걸며 말했다.
"간 게 아니라, 우연히 지나…….""
"왜 내가 좋다고 말을 못 해?"
내가 어깨에 걸친 백현의 팔을 억지로 풀어헤치자,
백현이 저 얼굴을 내게 위협적으로 밀어붙이며 말했다.
"나 보느라, 수업 종 친 지도 몰랐잖아."
"무슨……."
"내가 이렇게 하기만해도 설레?"
백현이 내 허리에 손을 두르는 것에 놀라 뒤로 한 발짝 물러서니 그것을 본 백현은 깔깔깔 웃었다.
"아……."
그리고 나의 반응에 백현이 다시 웃음을 거두고 저 턱을 매만지며 말했다.
"내가 그렇게 잘생겼나?"
그 때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지만, 확실히는 알지 못했다.
남 모르게 세탁기에 들어간 쪽지처럼 험상 궂게 일그러진 사진 속에서도
나의 진득한 침묵을 깨부시고 백현이는 여전히 밝게 웃고 있었다.
나는 그를 한 번 매만졌다가 미간을 찡그렸다.
"뭐해?"
"아녜요, 아무 것도……."
내 손에 미처 감춰지지 못한 것이 불쑥 튀어나와 있으매도 그는 굳이 캐묻지 않았다.
"우리가 같이 산 지도 이 주가 지났는데, 아직도 내가 너를 서먹하게 하는 거야?"
그는 나를 한 시라도 떨어뜨리면 안 될 것처럼 굴면서 날 못살게 했다.
시도때도 없이 내가 있는 방에 고개를 들이밀고 안위를 살폈다.
허나 그의 풀죽은 표정과 말에 나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
이곳에서 벗어날 것이라 난 다짐을 했기 때문이다.
스치는 인연은 운명처럼 다시 만나게 되지만,
어느날 대면한 사람들은 곧 떠나게 된다.
그도 그리 나를 저버릴 것이란 것을.
숲의 새들도 저가 두려울 적엔
저 멀리 도망쳐 사라지곤…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