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된다고 했다.
....고 하지만 어떻게 궁에 들어온 것인지도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나는 공황에 빠진 상태였다. 웅장한 성문이 열리고 궁이 모습을 드러낸 순간 나는 멍청하게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한 눈에 다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크기였다. 아니 뭐가 이렇게 커. 넋이 나간 사이에 나와 같이 온 사람들은 모두 말에서 내리고 있어, 나도 정신을 간신히 차리고 땅 위로 내렸다.
"그렇게나 놀랍습니까."
눈을 돌리니 날 쳐다보는 전정국이 보였다. 며칠동안 계속 편하게 말을 주고받다가 황태자의 지위로 돌아온 그는 습관인건지 나에게 경어를 쓰고 있었다. 내가 마땅한 말을 찾지 못해 버벅거리고 있자, 대수롭지 않게 넘긴 그는 고개를 돌리더니 곧 제 옆으로 다가온 어떤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동안 그와 말을 주고 받던 전정국은 먼저 발걸음을 돌려 사라졌고, 그 뒤를 몇몇의 신하들이 뒤따랐다. 어딜 가는 거지. 정말 모르는 곳에 아무도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남겨져 있으니 불안해져서 나는 괜시리 입술을 꼭 물었다. 망할 노므 전정국....
날 혼자 놔두고 휭하니 가버린 전정국을 원망하며 동시에 안절부절하는 사이에 아까 전정국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던 남자가 나에게 걸어왔다. 훤칠하고 잘생긴게 외모에 모든 축복을 받고 태어난 게 아닌가 싶었다.
아까 얼핏 들은 말로는 이 사람 이름이...김석진이랬나? 그랬던 것 같은데. 딴 생각에 빠진 채 그의 얼굴을 구경하고 있던 나는 김석진이 내게 허리를 살짝 굽히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먼저 전하를 보필해주신것에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아, 아닙니다. 오히려 황태자 전하인 줄 모르고 무례를 범했습니다..."
"그것은 전하께서 너그럽게 넘기셨으니 제가 뭐라 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죠."
덩달아 나도 허리를 굽히며 이야기하자 김석진은 다시 허리를 세우고서는 사람좋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일단, 씻으실 수 있게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절 따라오세요."
그리고 옷자락을 펄럭이며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그의 뒤를 따라, 당황해서 머리를 긁적이던 나도 재빨리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
대체 몇 개의 궁이 있는 걸까. 김석진의 뒤를 따라 걸으면서 주변을 살피다보니 지금 가는 곳의 목적지로 보이는 궁을 제외하고서라도 그 뒤로 또 다른 궁의 모습이 두 채 보였다. 원래 황실은 돈이 넘쳐나서 쓸데없이 많이 지어놓는 걸까, 아니면 많은 인원들을 수용해야 되니 많이 짓는 걸까. 그것도 아니면 그냥 황실의 위엄을 높이기 위해?
별걸 다 생각하면서 김석진의 뒤를 쫓아 궁으로 들어선 나는 그가 멈추자 따라 제자리에 멈추어 섰다. 김석진이 손짓으로 한 시녀를 부르자 머리를 단정하게 묶은 그녀가 앞으로 종종 걸어왔다.
"이 분께 욕실을 안내해드려라."
"예."
시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자네는 간다는 소리입니까? 내가 김석진을 바라보자 역시 생각대로 그가 예상한 말을 내뱉었다.
"저는 이만 볼 일이 있어서 가봐야겠습니다."
"아, 네. 감사합니다."
그리고서는 몸을 돌려 바로 궁 밖으로 나가는 김석진의 등을 보고 나는 입을 쩝 다셨다. 전정국과 말을 주고받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하자면 저 사람은 꽤 높은 자리에 올라있겠지? 그나저나 등이 진짜 넓구만. 잠시 바라보던 나는 뒤에서 들리는 시녀의 목소리에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물을 데울 때까지 시간이 조금 걸리는 터라, 그 동안 쉬실 곳을 먼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네."
시녀를 따라 단아한 궁 안을 걸었다. 바닥을 하얀 돌로 깔아놓은 복도는 깨끗하면서도 고급스러운 느낌을 주어서 마치 내가 왕족이 된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궁 안을 돌아다니는 시녀들은 내가 그녀들의 옆을 지나칠 때마다 고개를 숙여 인사하곤 했다. 나도 똑같이 인사해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지만 사실, 고민할 사이도 없이 빠르게 지나갔기 때문에 별 문제는 되지 않았다.
날 안내해주는 시녀의 뒤를 따라 계단을 올라가고 복도를 한 번 꺾어진 후, 문을 열어주는 그녀의 행동에 방으로 들어간 나는 감탄을 할 수밖에 없었다.
"와...."
"욕실은 옆 방인데, 준비가 다 되면 알려드리겠습니다. 차와 다과를 준비해드릴까요?"
그다지 크지는 않지만 품위있는 방 안의 모습에 넋을 놓고 감탄을 흘리다가 다과를 준비해주겠다는 말에 얼른 네, 라고 대답했다. 내 말에 곧장 대답하고 사라진 그녀를 뒤로 하고 나는 의자에 앉았다. 잠시동안 기다리고 있자니 똑똑 하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차와 다과를 준비해온 다른 시녀가 들어왔다. 과자는 달달해서 내 입맛에 맞았지만, 준비해준 차는 조금 썼던 터라 나는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얼른 입을 뗐다.
과자를 집어먹으며 기다리고 있다가 다시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시녀 한 명이 나를 향해 말을 했다.
"물을 데워놓았습니다. 기다리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시녀의 뒤를 따라 옆 방으로 들어가자 조금 전 내가 앉아서 기다리던 방과는 다른 모습이 보였다. 방 안에는 나무로 만들어진 둥근 탁자와 의자 두 개가 놓여 있었고, 벽에는 전신 거울이 달려 있었다. 그리고 왼쪽에 흰 천으로 가려진 입구가 하나 보였는데, 아마도 저 안이 욕실인 모양이었다. 이게 단순히 씻으려고 쓰는 방이라면 대체 다른 방은 얼마나 좋은 걸까. 벽에 정교하게 새겨져있는 새들과 장미꽃 무늬들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나는 뒤이어 들려오는 말에 정신을 차렸다.
"갈아입으실 옷도 곧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네."
"목욕 시중을 도와드릴 아이들을 보내드릴테니, 잠시만 앉아서 기다려주십시오."
멍하게 말을 듣기만 하던 나는, 저 말을 하고 밖으로 사라지려는 시녀를 재빨리 불렀다. 목욕 시중을 드는 사람들이 있다면 내가 여자인 것을 들킬 게 뻔하잖아! 안 돼!
"아니요, 저 혼자 씻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정말 괜찮습니다. 할 일도 많을 텐데 굳이 일을 늘리고 싶지 않네요. 옷만 준비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내 의견을 받아들인 건지 그녀는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방 문을 닫고 나갔다. 딸각, 하고 조용히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완전히 나 혼자만 남게 된 것을 확인한 나는 먼저 입구에 드리워져 있던 흰 천을 걷고 욕실로 들어갔다. 안에는 따뜻한 물이 담긴 큰 욕조와 꽃잎들이 담긴 유리병들이 놓여져 있었다. 물에 띄우는 건가? 병을 열어 꽃 향기를 맡았다.
"향기 좋네...."
코끝을 달달하게 감아오는 꽃향기는 그간 쌓여있던 피곤함을 순식간에 녹여버릴 만큼 향기로웠다. 두어 줌 욕조 안에 뿌린 나는 손끝으로 휘휘 저어 꽃잎들을 풀어넣은 후 옷을 하나둘씩 벗어내렸다. 너덜너덜해진 옷을 한 쪽에 모아두고 온전히 맨 몸이 된 나는 욕조 안으로 한 발을 슬며시 넣었다. 발을 감싸오는 뜨거운 물에 절로 입가가 풀어졌다.
".....뭔데 엄청 좋아."
이 순간만큼은 잘못되어도 아주 단단히 잘못된 상황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그냥 잊기로 마음먹었다. 될 대로 되라지, 뭐. 어차피 이미 들어온 이상 어쩔 수 없잖아? 이러한 내 생각을 오라버니가 알았다면 너는 정말 생각이 없구나 하며 핀잔을 주었을 테지만, 없으니까 됐어.
* *
한참동안 찰랑이는 물 안에서 꽃잎을 띄운 채 놀다가, 향기도 좋고 따뜻한 물에 피곤함도 싹 달아나 나도 모르게 깜박 잠이 들었다. 욕조 안에서 졸다가 미끄러져 머리를 쿵 박고서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깨어난 나는 그제서야 따뜻했던 물이 미지근하게 식어있다는 것을 알고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대체 얼마나 졸았던 거냐."
정확한 시간은 알 수 없었지만 대략 한시간 정도는 졸고 나온 것 같았다. 나 정말 편하게 사는구나. 경계심따위 찾아볼 수 없는 스스로의 모습에 한숨을 푸욱 쉰 나는 물기를 대충 닦았다. 욕실에서 나오기 전에 혹시 방에 다른 사람이 있나 해서 얼굴을 빼꼼 빼고 둘러봤지만 아까와 마찬가지로 아무도 없었다. 들어갈 때는 아무것도 없었던 탁자에 옷이 놓여져 있을 뿐이었다.
"음...."
욕실용 천을 두른 채 탁자로 걸어간 나는 놓여있는 두 가지의 옷을 보고 미묘한 소리를 흘렸다. 왼쪽에는 아름다운 꽃과 나비들이 잔잔히 수놓여져 있는 여자용 의복, 그리고 오른쪽에는 푸른색이 도는 바탕에 나무줄기로 수놓여진 남자용 의복이 있었다. 이렇게 다른 종류의 옷이 놓여져 있는 의도가 뭘까. 불안감이 불쑥 찾아들었지만 나는 애써 넘기기로 했다. 그냥 기분 탓이겠지, 그럴 거야. 나는 오른쪽에 있던 푸른색 옷을 집어들었다.
거울 앞에 서서 옷 매무새를 정리한 나는 문을 돌아보았다. 여기는 아무것도 없는데, 그냥 나가면 되는 건가? 김석진이라는 사람이 내게 한 말을 떠올려보아도 그저 씻을 곳을 안내해준다는 소리밖에 들은적이 없었기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방 안을 서성거리던 나는 일단 밖으로 나가서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야겠다 하고 생각하고 문고리를 돌렸다.
"앗,"
"나오셨습니까."
분명히 아무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아까 나를 안내해주었던 시녀가 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나오자 고개를 살짝 목을 숙이고 말을 건네는 모습에 나는 왠지 미안해졌다. 설마 내가 다 끝내고 나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 이런 줄 알았다면 좀 빨리 나올걸.
"기다리고 있으셨어요?"
"아닙니다. 그것보다 황태자 전하께서 부르십니다."
오래 기다리게 했다는 점에서 미안함을 가졌던 것도 잠시, 전정국이 날 부른다는 말에 다시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아까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 설마 이렇게 끝나는 건 아니겠지 하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막상 부른다고 하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가서 어떻게 말해야 하지? 그동안 몰라뵈어서 죄송합니다 죽여주시옵소서 전하? 아니면 그동안 즐거웠습니다 제 집으로 갈 테니 절 보내주세요...? 말도 안되는 상상을 하며 입술을 질근질근 씹고 있던 날 부른 건 시녀의 목소리였다.
"괜찮으십니까?"
"아, 네. 별거 아닙니다. 전하께서 부르신다고 하니 어서 가죠."
"네."
괜찮은 척, 얼굴 표정을 다듬은 나는 그녀를 재촉했다.
* *
밖은 이제 해가 지는 듯 하늘이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정원을 지나 다리를 건너, 또 다른 궁으로 들어간 나는 시녀의 뒤를 따라 계단을 올라갔다. 마지막 한 칸을 올라선 나는 멈추어 선 시녀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저 방으로 들어가시면 될 겁니다."
"감사합니다."
가리키는 곳을 확인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녀는 나를 내버려 둔 채 도로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나는 시녀가 가리켰던 방을 향해 걸음을 천천히 옮겼다. 아직도 전정국을 보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정리하지 못했던 터라 가까운 그 거리를 걸어가는 걸음은 몹시 느렸다. 문 앞에 서서 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문을 두드리려고 손을 올리던 나는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두드리려던 것을 멈추고 귀를 갖다댔다.
-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만일 전하께서 잘못되셨었다면 저는 그 애를 용서하지 못했을 거에요.
- 단장의 동생이 원래 생각이 없긴 하죠.
- 평소에도 약간 생각이 없는 건 알고 있긴 했지만, 이런 큰 일에서까지 생각이 없는 줄은... 하.
하나는 전정국의 목소리였다. 다른 한 명과 말을 주고받고 하는 것 같았다.
- 다친 곳은 괜찮으신 겁니까?
- 이런 건 별거 아니에요. 별로 아프지도 않고.
- 그래도 흉터가 남으면..
- 흉터가 남으면 뭐 어때요. 하늘이 무너지나, 땅이 꺼지나.
- 전하는 너무 몸을 소중히 하지 않으시는게 문제입니다.
다른 하나는 누구일까? 목소리를 들었던 것도 같은데. 그나저나 내가 남의 대화를 엿듣는 데에 취미가 있었다는 건 몰랐다. 뭔진 모르지만 재미있으니 넘겨버려야지.
- ...도 저 쪽의 피해가 더 커서 당분간은 먼저 공격해올 일은 없을 겁니다.
- 수확은 있었네요.
- 다음이 언제가 될 지는 모르겠지만, 당분간 몸이 완전히 회복하시기 전까지는 직접 나가시지 않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 그거야 내가 알아서 합니다. 그리고,
대화가 잘 들리지 않아 문에 더 가까이 붙어서 숨을 죽이고 듣고 있었을 때였다.
- 이만 가주셔야 겠습니다. 지금 밖에 누군가 와 있는 것 같거든요.
문 앞에 서 있던 나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곧이어 저벅저벅 하고 발소리가 가까워지는 소리가 들렸다. 황급히 뒤로 물러섰지만, 나는 어느새 문을 열고 나온 사람과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방문을 열고 나온 사람은 아까 나를 안내해주었기도 한, 김석진이었다.
그는 나를 보고 눈썹을 들어올리더니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제 발 저린 나는 어색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날 보던 김석진은 고개를 돌리고서는 방 안에 남아있을 전정국을 향해 말을 건넸다. 그럼, 남은 이야기는 다음에 하겠습니다. 그리고 내가 들어갈 수 있게 자리를 비켜주며 말했다.
"들어가세요."
"아, 네...."
내가 들어가자 곧 문을 닫고 멀어져가는 김석진의 발소리를 듣다가,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방 안에 앉아있는 전정국을 바라보았다. 전정국은 의자에 앉아서 턱을 괸 채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은 듯, 약간 굳어있는 표정이었다. 어색하다 못해 굳어질 만큼의 정적 사이에서도 나는 어떻게 입을 떼어야 할 지 몰라 그저 민망하게 가만히 서 있었다. 정적 사이로 전정국이 손가락으로 탁자를 탁탁 두드리는 소리만이 일정하게 들려왔다.
"왜 그 옷을 입고 왔습니까?"
오랫동안의 정적을 뚫고 전정국이 내게 물은 말이었다. 나는 그의 의중을 알 수가 없어서 미간을 살풋 좁혔다.
"무슨 말을 하시는 건지...?"
"특별히 은인에게 어울릴 만한 옷을 옆에 준비해놨는데."
"그건 여자 옷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어울릴 거라고 한 거였는데요."
쿵, 심장이 떨어질 것 같았다. 탁자 위에 놓여져 있던 두 개의 옷이 생각났다. 지금 내가 입은 옷과, 화려한 무늬가 수놓여져 있는 옷. 알고 있는 건가, 그런 걸까.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서 전정국을 쳐다보았지만 그는 여전히 같은 표정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나는 일단 뻔뻔하게 밀고나가기로 했다.
"남자가 입을 만한 옷은 아니지 않습니까. 제 외모 때문에 놀리시는 것이라면 불쾌합니다."
"'불쾌하다'?"
내가 한 말을 그대로 따라한 전정국이 하, 하고 웃음을 내뱉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나에게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무표정인 그 얼굴이 무서워서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다보니 벽에 등이 닿았다. 아차, 고개를 돌려 더 이상 물러날 데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내가 다시 고개를 앞으로 했을 때, 전정국은 이미 내 바로 앞에 있었다. 턱 하고 한 손으로 벽을 짚은 채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이 강렬해서 시선을 피하려고 했으나, 그럴 수도 없게 다른 한 손으로 내 턱을 붙잡아 고정시켜버렸다.
"뻔뻔함에 불쾌해야 할 사람이 지금 누구인데."
그리고 내가 어쩔 사이도 없이 혹여나 가슴쪽이 들키지 않도록 단단히 묶고 있던 앞을 한 손으로 거칠게 헤집어 놓았다.
"여자인걸 숨겼잖아."
그 바람에 칭칭 동여매었던 천 위로 가슴선이 보일 수밖에 없었으리라.
수치심에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전정국이 내 가슴을 계속 쳐다보는 것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나는 그가 헤집어 놓았던 옷을 양 손으로 여몄다. 그런 나의 행동에 그는 시선을 도로 올리고서는 나와 눈을 마주쳤다.
"내가 눈감아주고 있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나?"
"....언,제."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응? 전정국은 고개를 가까이 내게 가까이 한 채 되물었다. 안 들려, 은인. 놀리는 듯한 말투로, 내 귀 바로 옆에서 속삭이는 그의 말에 입술을 피가 날 정도로 세게 깨물고서는 다시 말했다.
"언제부터...."
"목욕하러 갔을 때, 봤지."
나는 숨을 들이켰다. 풀숲에서 튀어나온 게 다람쥐였다고 안심할 게 아니었다. 그 뒤에 누군가가 있어서 도망치려고 나왔던 것이었나. 눈앞이 캄캄했다. 나는 이제 어떻게 되나. 황태자를 함부로 놀린것에다가 기만한 죄까지 추가되어서 목이 잘리게 되나. 주먹을 꽉 준 손이 덜덜 떨렸다.
"왜 이렇게 떨어."
"......"
"내가 무슨짓을 할까 겁나나?"
전정국은 손을 들어 내 목을 쓰다듬었다. 나는 두 눈을 꾹 감아버렸다. 목을 쓰다듬던 손은 어느 새 내려가 쇄골 부근을 만지고 있었다. 점점 옆으로, 아래로 내려가는 그의 손을 떨쳐내고 싶었지만 몸이 굳어버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목숨은 둘째 치고, 곧 닥칠지도 모르는 다른 일이 상상되어 두려왔다. 한 번 쓰이고 비참하게 버려지게 되나.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몸 위를 돌아다니던 그의 손이 사라지고 다시금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렇게 떠는데 내가 뭘 하겠어."
"......."
"그리고 어차피 밤을 보낼 수 있는 다른 여자들은 많은데."
".........."
"은인을 부른 건 그냥 며칠 전처럼 같이 이야기하고 싶어서 불렀을 뿐이야."
웃음기를 담은 목소리로 장난스럽게 말하는 그의 말에 그제서야 긴장이 풀렸다. 긴장이 풀려서 비틀거리는 나를 잡아준 전정국이 놀렸다. 아까처럼, 그전처럼 당당하게 나올 때는 언제고 내가 여자인 걸 알아주니 티를 내는 건가? 화가 났지만 지금은 참는 것 밖에 어쩔 수가 없었다. 전정국은 내 손목을 잡은 채 걸어가 방에 자리하고 있던 푹신한 의자 위에 날 먼저 앉혔다. 그리고 다른 의자에 앉으려던 전정국은 아, 소리를 내며 다시 내게로 돌아왔다.
"그래도 머리는 푼 게 보고 싶은걸."
머리칼을 단정하게 묶어 놓았던 끈을 풀며 그는 중얼거렸다. 탁자 위로 갈색 끈이 부드럽게 던져지고 머리카락이 풀어지는 느낌도 났다. 두어번 정도 내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던 전정국은 다시 의자에 앉은 채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만족스러운 듯 말했다.
"푼 게 더 잘 어울리네."
말끔하고 단정한 얼굴로 웃음기를 담은 채 말하는 그의 얼굴을 왠지 똑바로 볼 수 없어서 시선을 피했다. 그래도 여전히 끈질기게 따라오는 시선때문에 민망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험악했던 분위기가 이렇게 바뀔 수 있다니. 뭐, 아무것도 없이 가만히 있기는 그러니 차나 한 잔 내오라고 할까? 전정국은 계속해서 물어왔지만 나는 그냥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의 그 쓴 맛 나는 차라도 마셔야지 말을 할 수 있겠다, 싶어서. 그럼 그렇게 하고. 맞다.
"그래서 이름이 뭐야?"
"......?"
"언제까지고 은인이라고 부를 수는 없잖아."
나는 망설였지만, 결국에 그가 원하는 답을 내놓았다.
"....이름...."
"이름? 생각했던거와는 조금 다르지만, 좋네."
내 이름을 듣고 콧잔등을 작게 찌푸렸던 전정국은 곧 고개를 끄덕거렸다. 뭐야, 괜찮다는 거야 안 괜찮다는 거야. 쌍생아라 의미있는 이름을 받을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내 이름에 꽤 애착을 가지고 있던 나는 기분이 언짢았다.
"그런데 그동안 은인이라고 하는 게 습관이 되어서."
"...그럼 전하께서 원하시는 대로 부르시던가요."
조금 퉁명스러운 내 대답에 전정국은 푸시식 웃음을 흘렸다. 이제보니 완전 하는 행동이 다 계집애네. 왜 처음부터 알아차리지 못한 건지 웃기기도 하고. 나는 전정국이 웃음을 멈추기만을 기다렸다.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그냥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던 며칠 사이로 돌아온 것 같았다. 전정국은 웃음기를 거두고서는 내게 부드럽게 말했다.
"듣고 싶은 이야기가 많습니다. 오늘은 찾아올 사람이 더 이상 없으니, 편안하게 이야기나 할까요."
전정국은 턱을 괸 채 나를 바라봤고, 나는 그의 말에 따라 다물었던 입을 열었다.
- -
배경이 약간 동양+서양식으로 혼합되어 있다고 생각해주시면 됩니다...!
궁궐 구조는 한옥식이 아닌 서양의 궁궐이랑 비슷하다고 생각해주시면 되어요
오늘도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가끔 여주가 공주가 아니냐고 묻는 분들이 있으신데 여주는 조금 큰 가문의 딸(쌍생아라 외부적으로는 그저 몸이 약한 딸로 알려져 있습니다)입니다
암호닉
♡ 01, 태형오빠, 아침2, 쿡쿡, 음오아예, 현지짱짱, cu호빵, 나연희, 로렌, 야호야호
권지용, ㅈㅈㄱ, 두부, 우울, 방치킨, 버블버블, 레몬사탕, 분홍이불, 코코, 김사장
저저구, 두부야~, 엑스, 자몽에이드, 계피, 미니언, 쿠야, 요괴, 딸기빙수, 우왕굿,
슙, 정국아블라썸, 런, 태태, 종구부인 ♡
++) 큽ㅠㅠㅠㅠㅠ암호닉을 실수로 빼먹어서 다시 추가했습니다.....8ㅅ8 사랑합니다....제가 좀...실수가 잦아요...8ㅅ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