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누스 13
w. 채셔
체육대회 아침, 강압적인 명령에 민윤기의 차를 타고 등교할 수 밖에 없었다. 민윤기는 등교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수트를 입은 민윤기와 운동복을 입은 민윤기의 사이에는 어쩔 수 없는 간격이 있었다. 운동복을 입은 민윤기는 뭐랄까, 조금 더 가까운 느낌이 있었다. 수트를 입을 때는 나에게 너무 멀리 있는 존재 같아서, 다가가기가 어려운데 말이지. 학교에 다 와서 민윤기의 차에서 내렸다. 등교길은 등교하는 아이들로 북적였다. 그리고 영화의 한 장면처럼 내가 나타나자마자 아이들은 나를 향해 수군댔다. 저 년, 저거 봐. 민윤기 차 타고 등교하는 거. 나는 익숙하게 픽 웃어버리고는 교실로 향했다.
"김여주."
현관으로 들어서려는데 누군가에게 손목을 잡혔다. 뒤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정국이. 나의 정국이. 나는 천천히 뒤를 돌아 정국을 올려다봤다. '…너 왜 민윤기 차에서 내려.' 나는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 정국은 얼굴을 굳히고 나를 어딘가로 이끌었다. 그리고 한참을 이끌려 도착한 곳은 남자 화장실 어느 칸이었다. …정국아, 왜 그래. 응? 나는 아이를 달래듯이 볼을 쓸며 정국에게 말했다. 부드러운 얼굴로 저를 쳐다보는 나를 한참동안이나 바라보던 정국은 그대로 나를 변기에 앉혔다. 곧 방송으로, '체육대회가 곧 시작되오니 모든 학생들은 운동장으로 나와주십시오.'하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들의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렸고, 우리의 정적 동안에 복도도 조용해졌다. 정국은 대답을 하지 않고 계속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다시 말할 틈도 없이 정국이는 거칠게 입을 맞췄다. 숨이 갑자기 턱 막혀서 정국이의 가슴을 퍽퍽 때렸지만, 정국이는 떨어지지 않았다.
"너, 민윤기랑 무슨 사이야."
"…갑자기 그건 왜 물어, 정국아…."
"무슨 사이인지 묻잖아."
도대체 내가 모르는 게 뭔데? 나 네 남자친구야. 정국이는 숨을 죽이고 으르렁댔다. 화내는 거 무서워, 정국아…. 나는 그렇게 말했고, 정국이는 이마를 제 손으로 잡으며 눈을 감았다. 나는 살짝 일어나 정국이에게 안겼다. 좁은 공간 때문에, 아슬아슬했다. 정국이는 화장실 걸쇠를 풀고, 또 나를 어딘가로 이끌었다. 도착한 곳은 실험실이었다. 실험실에는 역시 체육대회인 만큼 아무도 없었다. 나 아직 가방도 못 벗었는데…. 밖에서 웅웅대며 소리가 들어왔다. 교장 선생님이 지루한 연설을 늘어놓고 있구나, 하고 짐작했다. 정국이는 내 가방을 벗기고 나를 안아들어 책상에 앉혔다. 정국아, 왜 화났어…? 응? 나는 정국이의 머리를 매만졌다. 내 눈을 응시하던 정국이는 다시금 내 입술을 물었다.
"민윤기랑 너…, 아무 사이도 아니지?"
"……."
"말해. 민윤기가랑 네 관계가 뭔지."
"응, 아무 사이도 아냐…."
이후 정국은 한참 나를 안고 있다가 제 가방에서 반티를 꺼내었다. '어제 나온 건데, 김태형이 주더라.'하며 반티를 나에게 입혀준 후에 제 반티를 꺼내어 입었다. 나는 정국의 허리를 매만지며, '태형이가… 별 말 안 했어?' 하고 물었다. 정국이는 바지를 갈아 입으려다 멈칫, 하고는 다시 바지를 입었다. 꽤나 담담한 태도였다. 너랑 민윤기가 자는 걸 봤대. 이럴 줄 알았다. 정국이 핀트가 나간 시점은 여기였구나. 어제 병원에 민윤기가 있었던 걸 보면 민윤기도 출근을 하지 않았던 거고. 나는 입을 꼭 다물고 그저 바지를 치마 속에 입었다.
"봐주는 거 한 번 뿐이야."
"…응?"
"민윤기. 정리해."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했는데. 너무 티가 났나보다. 아니면 아까 습관적으로 내뱉었던 '선생님….'이라는 단어가 정국이에게 그대로 꽂혀들었을지도. 대답을 하지 않는 나를 정국이는 강압적인 눈길로 바라보았다. 나는 그 눈길에 으응, 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꼭 떠나갈 것처럼, 그렇게 나를 봐서. 정국이는 내 머리를 쓸었다. '기사와 공주' 게임을 한다고 하는 방송은 한참 전에 울렸다. 이제 체육대회에 할 것이 없는 셈이었다. 정국이는 반티를 갈아입은 나를 안으며 말했다. 네가 나 떠날 것 같아서 무서워. 나는 정국의 어깨에 코를 박았다. 정국이 냄새. 나 어디 안 가…. 그렇게 말했더니 소리가 웅웅 울렸다. 정국은 내 어깨에 입을 맞추며 '그럼 나도 어디 안 가.' 하고 말해주었다.
"이렇게 입으니까 커플 티 같네."
"그러게. 우리 정국이, 기분 좋아?"
정국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보조개. 나는 보조개를 엄지로 쓸며 같이 웃었다. 그 말 좋다, 다시 말해봐. 정국은 그렇게 말했다. 나는 정국의 살짝 파인 보조개를 거듭 쓸며 '우리 정국이….' 하고 말해주었다. 정국의 입 꼬리가 다시 호선을 그리며 예쁘게 미소지었다. 결말을 아는 이야기라 지루하고 서글프다고 해도, 잠시동안이라도 행복해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행복했다.
체육대회가 끝나고 나는 다시 민윤기의 차를 탔다. 물론 정국은 없었다. 조수석에 타자마자 정국의 차가웠던 말이 귓가를 맴돌며 양심을 쿡쿡 찔러왔지만. 정국을 보낸 후에 민윤기에게 문자를 보냈고, 민윤기는 곧 내 앞에 차를 댔다. 몸 상태가 약해져있으니, 다시 한 번 와서 검사를 받으라는 의사의 강요 섞인 말이 있어서, 나는 의무적으로 병원에 와야 했다. 민윤기는 우리 반 반티를 입고 있었다. 이렇게 보니까 또 민윤기와 커플티를 입은 것 같아 기분이 이상해졌다. 민윤기는 말없이 핸들을 이리 저리 움직였다. 신호가 바뀌고 민윤기의 차는 멈추어 대기했다. 나는 슬쩍 민윤기의 얼굴을 쳐다보고 말했다.
"…선생님."
"……왜."
"나, 정국이랑 있었어요."
민윤기는 핸들을 꽉 쥐었다. 신호를 받고 민윤기는 아까와는 다르게 조금 더 빠르게 차를 몰기 시작했다. 나는 이런 반응에 약간 놀랐다. 이렇게 몸을 막 쓰는 게 망가지는 게 아니면 뭘까…. 이내 나는 체념했다. 민윤기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야….
야누스
주말이 지났다. 주말 동안 병원을 들락날락거리고, 집에 틀어박혀있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었다. 정국과 때때로 전화를 하고, 어떠한 얘기를 하고…. 월요일에 학교를 왔을 때도 아이들은 똑같은 행동을 했다. 아이들이 속닥거리는 말들 중에는 더러운 년, 걸레, 미친 년 같은 단어가 섞여 있었고, 나는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정국은아직 오지 않았고, 그래서 나는 아이들을 무시하기 위해 아무런 책을 꺼내어 시선을 거기다가 박았다. 미소만 지으며 아이들의 말들을 무시하기에는… 역시나 역부족이다. 특히나 이렇게 혼자 있을 때에는.
"야, 김여주."
"……."
"와, 이 년 무시하는 거 봐라."
계속 책에만 시선을 꽂아두고 있는데, 한 여자 아이가 내 앞에 다가와 섰다. 앙칼진 목소리가 날아 박혀왔음에도 고개를 들지 않았더니 여자 아이는 어이 없다는 듯이 아이들에게 무시하는 꼴을 보라고 말했다. 머지 않아 여자 아이가 더욱 다가와 내 턱을 들어 올렸다. 얼굴은 아는데 이름은 기억나지 않았다. 여자 아이는 '뭘 봐, 이 걸레야.' 하고 비아냥거렸다. 나는 명찰을 쳐다보았다. '네가 이렇게 손 대고 있는데 어떻게 안 봐, 연우야….' 하고 말하니 여자 아이는 뜨악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평소와 같은 말투였는데, 반응은 평소와 너무나도 달랐다.
"너, 민윤기랑 그렇고 그런 사이라며?"
"……."
"말 못 하는 거 보라니까. 이 년 다 가식이야."
너네도 다 가식이었으면서. 나는 말을 속으로 삼켰다. 여자 아이는 곧 내 뺨을 쳐냈다. 마른 몸에서 어떻게 저런 힘이 나오는지 모르겠다. 뺨이 부어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네가 어떻게 알아, 사진이라도 봤어?' 나는 빠르게 말을 내뱉었다. 내 반응에 여자 아이는 '너 뻔뻔하다.' 하고 실소를 터뜨리며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나는 가만히 그 사진을 응시했다. 사진에는 민윤기와 내가 침대에서 키스를 하고 있는 장면이 담겨 있었다. 그 날이었다. 내가 학교를 안 간 날. 울음을 참아내며 떨리는 손으로 내 병원복을 벗겨내던 민윤기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나는, 이제 진짜 타락하고 있구나. …뭐하냐? 곧 구원처럼 정국이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정국, 너 이건 못 봤지?"
연우는 정국의 옆에 서서 사진을 당당하게 건넸다. 정국은 한참동안 사진을 보기만 했다. 그래서 어쩌라고. 그리고 이것이 정국의 반응이었다. 정국은 능숙하게 내 옆자리에 앉고는 빨갛게 부어오른 뺨을 매만졌다. 너 맞았어? 정국이 물어왔지만 나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아이들은 제가 상상했던 결말이 아니었는지 다들 어이없다는 듯이 웃어댔다. 여기저기서 바람 빠진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곧 민윤기가 들어왔고, 나는 일어서 '차렷, 경례.'하고 인사했다. 민윤기는 내 부어오른 뺨에 제 끝없는 시선을 뒀다. '교복 입고 다녀라.', '체육대회가 끝났으니 이제 공부에 집중해라.'와 같은 형식적인 말을 하고는 반을 나갔는데, 시선은 끝까지 내 뺨을 놓치지 않았다. 조례 후 쉬는 시간. 아이들은 여기저기를 움직이며 떠들어댔고, 정국은 내 손목을 거칠게 잡고 어딘가로 나섰다. 정국과 내가 도착한 곳은 텅 빈 강당이었다.
정국이는 화난 것 같았다. 온통 얼굴이 빨갰다. 정국이는 내 손목에 있는 제 손을 풀어내고 나에게 따지듯 물어왔다. …너 내 말이 우습지. 나는 정국이의 볼을 쓸었다. 정국이는 가만히 그 손길을 느끼고만 있었다. 넝마가 된 느낌이었다. 다 헤져버린 느낌. 그래서 아무 것도 어떻게 할 수가 없다. 가만히 정국이를 보다가 '그거 너랑 약속하기 전이야….' 하고 말했다. 그 말에 정국은 허탈한 듯 웃었다. 일그러지는 정국의 볼을 다시금 쓸었다. 웅성거리는 소리에 '존나 사람 갖고 노네.' 하는 말이 섞여있던 걸 들었다.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슬프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만큼 나는 애정이 필요했으니까…. 나는 꿈꾸듯이 정국의 볼을 몇 번이고 쓰다듬었다. 나는 이 와중에도 정국이 웃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네 예쁜 보조개를 보고 싶어….
"다 너 때문이야…."
"……."
"이렇게 집착하는 거, 너 때문이야…."
"…정국아."
"씨발…."
집착한다고 해도 나는 어쩔 수 없어, 정국아. 민윤기는 그만큼 나에게 절대적인 존재니까. 정국이 너무 든든하고 좋아져서, 내가 민윤기를 버리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 아찔한 해방감에 행복했던 적이 있었는데. 세경이의 오빠가 민윤기인걸……. 이제 돌이킬 수도 없어. 정국이는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내 입술을 물고 거칠게 비볐다. 입술이 아파왔지만 나는 정국이의 키스를 그대로 받았다. 제가 생각한 스토리가 아니었는지 정국이는 입술을 떼고 나를 밀쳤다. 그리고 힘겹게 말했다. 네가 나쁜 거야….
"정국아…."
"…김여주 네가, 나쁜 거야…."
민윤기에게 들었을 때처럼 마음이 아려왔다. 정국의 나쁘다는 말이 내 가슴에 와서 쿡쿡 박히는 것만 같아서 나는 주저앉았다. 정국은 내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익숙하게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정국이 엄지손가락으로 눈물을 닦아주는데도 자꾸만 눈물이 났다. 정국은 내 뒷통수를 끌어당겨 볼에다 제 입술을 가져다댔다. 그리고 눈물을 제 입으로 삼켰다. 정국은 볼에서 입술을 떼고 말했다. 울지 마. 예전에도 들은 적이 있는 말이었다. 정국이 이런 말을 할 때면 나는 주체할 수 없는 위안감을 느꼈다.
"나 좋아하지…."
"응. 좋아해, 정국아…."
"무섭다고 했잖아…."
난 네가 눈 감았다 뜨면 사라질 것 같아…. 나는 정국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지금 정국이 네 앞에 있는걸…. 정국의 떨림이 멈출 때까지 나는 세워져 있는 내 무릎에 제 머리를 기대는 정국의 머리를 반복해서 쓸어주었다. 강당에 이렇게 마주앉아 있으니, 우리가 드라마의 주인공이 된 듯 했다. 무심코 본 바닥에 툭툭, 하고 눈물이 떨어져 있었다.
정국아, 울지 마…. 나는 변하지 않을 거야….
야누스 14
w. 채셔
다시 교실에 들어섰을 때는 수업이 시작하기 전 쉬는 시간이었다. 아이들은 우리의 등장에 숨을 죽였다가 다시 떠들썩댔다. 그 중에 8할은 우리의 욕일 거라 짐작했다. 나는 책상에 엎드렸다. 등을 쓸어주는 정국의 손길이 느껴졌고, 그대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내 앞에 앉아 떠들썩거리는 목소리가 내 귓가에 꽂혀들었다. 야, 들었냐? 도연우 민윤기한테 존나 혼났대. 나는 내 주먹을 꽉 쥐었다. 아까 도연우 1교시에 불려갔잖아. 그거 민윤기가 도연우 불러서 존나 막 혼냈다던데. 나는 울고 싶었다. 왜. 왜 도대체.
나는 아이들의 말을 경청했다. 그것도 있잖아. 김성민한테 김여주 건들지 말라고 한 거.' 내가 모르고 있었던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김성민이 김여주 따먹을려고 했는데, 그거 존나 계획 세우다가 민윤기한테….' 뒷 이야기는 아이들의 소음에 듣지 못했다. 뒷 이야기는 아마, 민윤기에게 들켰고, 민윤기는 나를 건들지 말라고 했다- 라는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싶었다. 나는 치마를 꽉 쥐었다. 설마, 내가 상상하는 게 맞는 걸까. 나는 감았던 눈을 떴다. 정국은 아무 것도 듣지 못한 듯 나의 손을 잡아왔다. 그래, 아무 것도 듣지 마…. 나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설마 민윤기가 나를 사랑하는 걸까….
엎드려있던 나를 누군가가 거칠게 잡아 세웠다. 나는 등이 잡힌 채로 어정쩡하게 일어섰다. 정국은 놀란 눈치로 나를 따라 급하게 일어섰다. 나를 세운 사람은 아까 그 아이였다. 정국에게 나와 민윤기의 사진을 내밀었던, 그 아이. 나는 어렴풋하게 떠오르는 이름을 맞췄다. 연…. 그래, 연우. 연우였다, 이름이. 야, 너 같은 년 때문에 내가 민윤기한테 끌려 가야겠냐? 아, 좆 같아서 진짜…. 아이는 높게 손을 쳐들었다. 매섭게 날아드는 손을 보고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몇 초가 지나고, 나는 내가 너무 아파서,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정도까지 왔나 싶어 눈을 떴다.
"너 내가 호구로 보이지?"
"…야, 전정국, 이거 놔."
"뒤에 쳐박혀 있으니까 내가 남자도 아닌 것 같지?"
연우가 제 얇은 손목을 정국에게 잡힌 채로 한껏 당황해 제 손을 빼내려고 하고 있었다. 정국은 다른 손으로 나를 끌어 제 뒤에 세웠다. …그러니까 정국이 적응해나가고 있었다, 제가 있는 곳에. 나는 한없이 넓은 등을 보며 끝없는 위안감과 안도감을 느꼈다. 곧 한 남자 아이가 달려들었다. '썅, 네가 뭔데 내 여친 건들이는데?' 하고 달려드는 남자 아이를 막은 정국의 주먹이 곧 남자 아이의 입가를 세게 강타했다. 남자 아이는 그대로 밀쳐져 풀썩 쓰러졌다. 퍽, 소리가 날 만큼 셌다. 정국이는 패닉이 된 우리 반을 뒤로 하고 내 손을 잡아 반을 나왔다.
"나보고 왜 맞고만 있냐더니."
"…정국아, 괜찮아?"
"맞고만 있지 마. 아, 아니다. 그 전에 내가 죽여줄게."
정국이는 잡고 있는 손을 꽉 잡았다. 나는 정국이의 넓은 등을 보며 또 한 번 생각했다, 정국이의 '기사 해줄게.' 라는 그 말을. 정국이는 언제까지 내 기사가 되어줄 수 있을까. 정국이가, 변하고 있었다. 점차 세상에 적응해나가는 정국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슬퍼지기 시작했다. 또 한편으로는 그것이 고마웠다. 너는 변했고, 나는 변하지 않아. 정국이와 나는 우리만의 아지트가 되어버린 실험실에 들어갔다. 정국이는 나를 안아올려 교탁에 앉히고는 그 때와 같이 제 몸을 푹신한 의자에 맡겼다. 피곤한 듯이 손으로 제 관자놀이를 문지르던 정국이는 이내 나에게 물었다.
"…민윤기한테 왜 끌려갔을까, 도연우 걔."
"…나도 모르겠어."
"모르긴 뭘 몰라. 너 때렸으니까 끌려갔겠지."
정국이는 무심하게 민윤기의 얘기를 꺼냈다. 그러나 무심한 투에서도 불안한 목소리는 여실히 드러났다. 내가 너한테 묻고 싶은 건 하나야. 민윤기가 왜 또 너한테 찝쩍대는지. 정국이는 얼굴에서 손을 떼고 곧은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 눈길에 위축되어 조용하게, '모르겠다니까….' 하고 말 꼬리를 늘였다. 그리고 현실적으로도 그랬다. 숨기는 게 아니라, 정말 나도 민윤기을 모르겠으니까. 왜 나를 그렇게 죽일 듯이 망가뜨리면서도 나를 지켜내려고 할까. 정말 민윤기는 나를 사랑해서 지켜내려고 할까, 라는 의문을 갖기에는 민윤기가 너무 잔인했다.
"민윤기. 아직 정리 안 해서 그런 거지."
"…정국아, 민윤…."
"맞잖아. 왜 자꾸 부정하려고 해."
민윤기랑 정리 안 해서, 민윤기가 지금 너 때렸다고 도연우한테 뭐라고 한 거 아냐. 정국의 목소리가 내 귀를 아프게 퉁퉁 때렸다. 정국이가 나를 못 믿고 있다…. 곧 정국이가 말했던 '집착' 이라는 단어가 온몸으로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불신하는 눈. 굳은 표정. 불안해 하는 생각들. 나는 내가 좋아했던 정국이가 사라질까 두려워졌다. 그래서 곧바로 교탁에서 뛰어내려 정국이의 머리를 쓸었다. '정국아, 왜 이렇게 불안해 해….' 하고 내뱉은 나의 말에는 안타까움이 그대로 묻어났다. 내가 좋아했던 정국이는 분명히 따뜻했는데, 지금의 정국이는 무섭고 차갑다. 나에게 연민을 쥐어주지 마, 정국아…. 그러나 나를 보는 정국이의 눈길에는 아직도 불신의 감정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나는 민윤기에게 벗어나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민윤기에게 벗어나는 것은 그대로 세경에게 벗어나는 것이고, 세경에게 벗어나는 것은 죄책감에서 벗어나는 것과 같으니까. 아직 그렇게 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미치도록 벗어나고 싶었지만, 또 미치도록 벗어나기가 두려웠다. 너는 이 마음을 아니, 정국아. 죄책감에서 벗어났을 때 나는 또다시 가면을 쓰고 살아갈까, 아니면 가면을 버리고 우울하게 살아나갈까…. 나는 그것이 두려웠다. 이제껏 죄책감에 눌려 살아서, 어떻게 살아나가야 할지, 아무 것도 짐작할 수 없는 내 모습이 무서웠다. 한 때 나는 정국이의 옆에 있으면서 문득 나타나는 생동감 있는 나의 모습이 그 모습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하지만 지금, 정국이는 변해버렸는걸.
"키스해줘."
"…정국아."
"왜? 못해줘?'
나를 신뢰하지 못한다는 말투를 담은 그 입술에 나는 내 입술을 내리찍었다. 정국아, 변하지 마…. 나는 또다시 하늘의 누군가에게 간절히 빌었다. 제발 정국이는 변하지 않게 해주세요. 내가 민윤기에게 천천히 벗어났을 때 내가 기댈 수 있는 누군가는 정국이 될 것이라 믿었고, 그 정국은 나를 믿어주는 예전의 정국이었다. 그리고, 세상에 점차 적응해 나가는 정국은 이제 더 이상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 같아서 더욱 두려웠다. 그래서 나는 나를 원망했다. 너무 많은 것을 보여줘버려서, 너무 많이 기대버려서 지금 이렇게 정국이를 믿지 못하게 만든 건 바로 나니까.
"너네 뭐하는 거야, 지금."
문을 거칠게 열고 날아든 목소리에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뭐 하나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없지….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단연 민윤기였다. 고개를 들어 민윤기를 보려고 했지만 정국은 내 뒷머리를 제 큰 손으로 강하게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마치 제 것이라는 표식을 새기듯이 정국은 제 혀로 내 입속을 고르게 헤쳤다. 곧 숨이 턱, 하고 막혀와 정국의 가슴팍을 조심스레 두드렸지만 정국은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내 입술을 물 뿐이었다. 민윤기가 바로 앞까지 오고 나서야 정국은 키스를 그만뒀다. 정국은 민윤기가 앞에 왔다는 것을 깡그리 무시한 채 웃으며 내 입에 묻은 제 타액을 엄지손가락으로 닦아주었다.
"전정국 너는 내가 선생님으로 안 보이나 보지?"
"선생님 짓을 해야 선생님으로 인정을 하죠, 민윤기 선생님."
차가운 목소리를 내뱉는 민윤기에게 정국은 오히려 여유롭게 웃으며 만답했다. 민윤기의 눈길이 전정국에서 나에게로 옮겨졌다. 깊어진 민윤기의 눈빛에는 역시나 너무나도 많은 것을 말하고 있어서 그 뜻을 알아내기가 힘겨웠다. 그래서 나는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뜨려버렸다. 곧 민윤기의 주머니에서 벨 소리가 힘차게 울렸다. 가만히 있다가, 민윤기는 전화기를 꺼내들고는 뒤돌았다.
"네, 선생님. 무슨 일로…. ……예? 세경이가…."
"……."
"우리 세경이가…."
민윤기는 매우 놀란 눈치였다. 나는 귀를 쫑긋 세워 민윤기의 숨죽인 목소리를 읽어냈다. 민윤기의 말에는 분명히 '세경이'라는 단어가 들어있었다. '우리 세경이가….' 하고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를 내는 민윤기의 뒷모습은 분명히 충격과 공포에 사로잡힌 모습을 그려내고 있었다. 민윤기가 문을 박차고 급하게 뛰어나가는 것에 나는, 어떠한 생각도 하지 않고 뒤따라 나섰다.
"가지 마."
벗어나는 것도 잠시, 곧 정국에게 손목을 잡혔다. 세경이가 쓰러진 걸까. 아니면… 세경이에게 갑자기 무슨 일이 생긴 걸까. 뒤에서 들려오는 정국의 목소리는 절벽 끝에 선 것처럼 위태로웠다. 하지만 세경이가…. 민윤기가 내 앞에서 제 페이스를 잃은 적은 없다. 곧 그것은 계산된 행동이 아니라는 말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갔지만, 손목에 잡힌 정국의 손에 힘이 더 들어가서 더 갈 수가 없었다. 나는 뒤돌아 정국을 바라보았다. 예의 그 아릿한 눈길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번에는 내 옆에 있어. 그렇게 말하는 정국의 표정에는 애석함이 들어차있었다.
"세경이가…."
"언제까지 세경이, 세경이 하면서 살 건데?"
"세경이…."
"제발, 좀, 말 좀 들어."
정국의 마지막 말에는 끝내 안타까움이 그대로 묻어 나왔다. 내가 답답하다는 듯이. 나는 항상 정국에게 면죄부를 내밀었다. 세경이라는 면죄부를. 나를 구원하는 밧줄이 내려졌고, 나는 그 앞에 섰다. 나는 한참을 망설였고, 정국은 망설이는 내게 '가지 마…. 응?' 하고 나를 다그쳤다. 세경이와 민윤기. 그리고 정국이. 나는 정국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정국은 내 손목을 잡고 있던 손을 풀고, 그 손으로 내 팔을 만지작거렸다. 정국아, 나는…. 곧 정국은 나를 제 품에 가뒀다. 나는 정국의 가슴팍에서 기나긴 한숨을 뱉어냈다.
그리고 정국의 따스한 손을 놓아버렸다.
"정국아, 미안해…."
정국의 품에서 한 발짝 물러났다. 정국의 눈에는 간절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나는 있잖아, 정국아….
"미안해…."
평생 난 세경이한테서 벗어나지 못할 거야…. 그것은 확신이자 굳은 다짐이었다.
야누스
혹시나가 역시나였다. 병원복을 입고 오빠를 마중한다며 나간 세경이 달리는 차에 뛰어들었다고. 간호사의 말로는 그랬다. 세경이 이렇게 아프게 지내는데, 내가 어떻게 나만 벗어나…. 나는 도저히 져버릴 수 없다. 평생 아픔 받으면서 속죄하면서 살아야 해. 수술실 앞에서 민윤기는 세상을 잃은 것처럼 대기실 의자에 앉아 있었다. 나는 그것을 멍하게 바라보다 다가가 옆에 앉았다. 울었던 건지 민윤기의 눈이 꽤 충혈되어있었다. 나는 잠겨버린 목소리로 '미안해요….' 하고 말했다. 내가 병원에 가지만 않았더라면 이렇게까지는 안 됐을 거야….
"미안해요, 내가…."
"……."
"잘못했어요, 선생님…."
눈물에 흐려지는 목소리를 꾹꾹 눌러가며 또렷이 말했다. 민윤기의 눈에서 눈물이 뚝, 하고 흘러내렸다. 내가 미안해요, 정말…. 내가 상처 낸 것은 세경의 짓이겨진 첫경험만이 아니었다. 내가 이리저리 찔러낸 것은 세경의 할아버지가 갈기갈기 찢어낸 마음이었고, 세경의 순수하디 순수했던 나에 대한 관심이었고, 세상에 대한 세경이만의 따뜻한 애정이었고, 세경의 올곧던 우정이었고, 세경이 그 자체였다.
"내가… 잘못했어요…."
쓰러지듯 내 무릎에 제 머리를 누이는 민윤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곧 민윤기가 머리를 누인 교복 치마의 허벅지 부분이 젖어들었다. 민윤기가 울고 있다. 세상에서 제일 알 수 없다고 원망하던 사람이, 나를 무너뜨리던 사람이 울고 있다. 나는 민윤기의 팔에다 손을 놓고 토닥이며 앵무새처럼 미안하다는 말을 내뱉었다. 나는 눈을 감고 잠시, 행복한 상상을 했다. 그때 내가 집에 세경이를 데려오지 않았더라면…. 나는 세경이와 웃으며 지금껏 예쁘게 우정을 나눠올 수 있었을까. 그리고 나는 민윤기와 사랑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나는, 정국이에게 상처를 주지 않았을까. 부질없는 생각은 꼬리를 물고 물어서 결국은 나를 더욱 아프게 찌른다. 그래봤자 세경이는 지금 자살 시도로 수술실 안에 들어가 있는데. 나는 허탈하게 웃었다. 세경이에게 그날 찾아가지 말았어야 했다. 생각에 젖어든지 머지않아 민윤기의 젖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오고, 세경이 매일 밤마다 발작했어…."
"…잘못했어요……."
"아니, 너 오기 전에도 세경이 사람 아니었어."
"………내가, 내가……."
"……그래서 나는 너 용서할 수가 없어…."
"…………."
"근데 씨발…. 왜 나는 너를 좋아하는 건데, 왜…."
민윤기의 눈물 젖은 고백. 그리고 이제껏 잃어버렸던 퍼즐들의 행방들…. 민윤기는 나와 함께… 무너지고… 있었다.
덧붙임
다음 편이 완결이 될 것 같네요!
많이 아팠던 글. 함께 달려주셨던 사십여 분들 너무 감쟈합니다.
완결과 번외 편이 오고 난 이후에, 메일링 신청을 받을 예정이에요.
오늘도 고맙고 사랑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