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에디킴, 솔라 - Coffee&Tea (inst)
Elysia Scandal.03
부제 : 전쟁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사람, 어제는 갑부라고 하지 않았냐."
"닥쳐, 나도 이해 안되니까."
"아니 근데 왜 저기..."
아침 일찍 호텔리어들이 모두 홀에 모인 시간, 맨 뒷줄에 서서 소곤소곤 말을 걸어오는 김태형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앞에 봐, 지금 김석진이 우리 쳐다보거든. 어금니를 꽉 깨물고 하는 내 대답에 결국 앞을 본 김태형이 다시금 민윤기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래... 나도 어제 멘붕이었는데 너도 그럴만 하지.
아무리 그래도 구남친과 같은 직장이라니. 사람이 운이 안좋아도 정도가 있는데 난 그 정도를 가뿐히 넘어선 것 같다!ㅎ
한숨을 쉬며 앞을 봤더니 여태 총지배인님께서 말씀 하시는 동안 호텔리어들을 쭉 한번 둘러보던 민윤기와 눈이 마주쳤다. 나와 같은 호테리어 복장을 입은 채, 씨익 웃어보이는 민윤기에 화들짝 놀라 김태형의 뒤로 슬쩍 숨었다.
그 와중에 김태형은 우리 둘이 눈을 마주친걸 봤는지 풉, 하고 비웃음을 터뜨리더니 고개를 돌려 귓속말을 한다.
"아주 난리 나셨구만? 성ㅇㅇ 인생에 새로운 꽃이 피나요?"
"닥치라고 했다. 한 번 꺾은 꽃 다시 안 펴."
내 단호박같은 말에 명언가 나셨다며 크으으으- 하고 오버를 하는 김태형의 정강이를 까야하나 진지하게 생각했다. 진짜 당장이라도 욕을 하고싶은걸 억지로 참으며 등짝을 아프지 않게 갈기고 앞에나 봐. 하고 말 하려는 순간, 여태까지 말을 하던 총지배인님의 목소리 대신 다른 목소리가 홀을 울렸다.
"안녕하세요. 엘리시아 호텔 프랑스 지부에서 한국으로 발령받은 지배인 민윤기입니다."
"하아..."
"쭉 보니까, 제가 온걸 환영하는 분들도 계신 것 같고, 그렇지 않은 분들도 계시네요."
웃으면서 장난스럽게 말하는 민윤기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 저격하는건 변한게 없다. 저거 누가봐도 나 찔리라고 하는 소리잖아. 환영하는 분들은 아마도 맨 앞줄에 서서 민윤기를 하트 뿅뿅 나오는 눈으로 쳐다보고있는 여자 사원들이겠고, 그렇지 않은 분은 뭐, 누가 봐도 단 한 사람. 나겠지? 근데 변한게 있다면, 애가 심각하게 능글능글해다는 것. 사람 적응 안되게...
한숨을 쉬고 숙였던 고개를 들어 다시한번 민윤기에게 시선을 고정하는데 손에 쥔 무선 마이크를 좀 살펴보는 것 같더니 다시 말을 하기 시작한다.
"일단 저는 윤 지배인님께서 다른 호텔로 이직하시면서 생긴 공석을 채울 거고, 여기 계신 김석진 지배인님과 함께 서비스부를 총괄하게 될겁니다."
"......"
에이 호텔이 얼마나 큰데! 나랑 일만 안 겹치면 볼 일이 없을거야... 제발.
"또, 그 중에서도 굳이 뽑자면 아마 VIP고객들 관련 EFL와 컨시어지들을 주로 관리하게 될겁니다."
아... 망한건가... 저건 정확하게 내 일이잖아? 하하.
뭐가 그렇게 좋은지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말하는 민윤기에 절망하며 고개를 김태형의 등에 파묻자 이 새낀 몸을 부들부들 떨며 웃음을 참고있다. ...민윤기보다 이 놈을 먼저 처리하는게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심각한 내 상태는 보이지도 않는지 민윤기는 말을 마무리하는 듯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쓸데없이 긴 말 하지 않겠습니다. 앞으로 제가 프랑스로 보내는 보고서에, 좋은 말만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다들 잘 해봅시다."
민윤기의 말이 끝나자마자 사원들은 기다렸다는 듯 박수를 쳤고 나도 그제야 제대로 서서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박수를 두어번 치다 내렸다. 그러니 역시나 앞에서 영혼을 담아서 좀 치라며 시비를 거는 김태형에 이번엔 참지 못하고 정강이를 까줬다. 제 정강이를 손으로 쓸며 울상을 짓는 김태형을 한심한 표정으로 보다 고개를 드니 민윤기가 그런 우리 둘을 주시하다 모른 척 고개를 돌린다.
이렇게 된 이상, 그냥 최대한 안 마주치고, 모른 척 공적으로만 대하는게 답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하다가 이제 슬슬 일을 시작하자는 총지배인님의 말씀에 서둘러 김태형을 질질 끌고 엘리베이터 앞으로 향했다.
일이나 해야지, 안 그러면 진짜 민윤기... 아니, 민 지배인님한테 홀릴지도 모르겠다.
***
일을 시작한지 벌써 네 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었고, 다가오는 런치타임에 VIP 고객 런치 메뉴 체크를 마치고는 사원들에게 지시를 내려 EFL을 지정해주고 한숨을 돌렸다. 레스토랑에 전화를 걸어 마지막으로 메뉴와 가격을 한번씩 더 체크하고 기지개를 펴는데 저 멀리서 제대로 지친건지 나랑 똑같은 표정을 한 김태형이 걸어온다.
천천히 걸어와서는 초점없는 눈으로 데스크로 들어와 내 옆에 있던 의자에 앉아 나를 멍하니 바라본다. 평소같으면 빨리 뭐 물이라도 달라거나 안마를 하라거나 말같지도 않은 소리를 해댈 시간인데, 오늘따라 조용한 김태형을 한번 더 쳐다보니 축 쳐진채로 앉아 큰 눈만 꿈뻑이고있다.
그에 슬금슬금 옆으로 다가가 야, 정신 나갔냐. 하며 김태형의 팔을 툭툭 치자 천천히 나를 올려다보고 말한다.
"야, 너 EFL 지정 다 끝냈지."
"어? 뭐, 대충..."
"커피 마시자. 나 당장 뭐라도 마셔야겠어."
울상을 지으며 내 팔을 잡는 김태형에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났다. 이게 그, 부산행에서 본 좀비 초기 증상인가. 하고 뻘생각을 하면서 좀비 못지않게 어두운 표정을 한 김태형을 내려다보자 인생을 다 산 것처럼 한숨을 쉰다. 그걸 가만히 지켜보다 상태가 생각보다 심각한 것 같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야, 아주 세상 떠나가겠다 이 자식아. 일어나, 누나가 사줄게."
내 말에 대답할 힘도 없는지 고개를 끄덕인 김태형이 나를 졸졸 따라 데스크에서 나와 엘리베이터를 잡았다. 그 때까지만 해도 나는, 김태형이 이렇게 진이 다 빠진 이유가 그놈의 새로오신 민지배인님 때문일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었다.
김태형과 함께 1층 카페에서 커피를 사들고 올라와 매니저 휴게실로 들어왔다. 침대에 앉자마자 자연스럽게 힐을 벗어던지고 한숨을 쉬니 김태형은 그런 나를 보며 여자가 맞긴하냐고 혼자 중얼거리다가 내 옆에 털썩 앉았다. 그에 뭐 어떠냐는 식으로 김태형을 한 번 쳐다봐주곤 쪽쪽 빨아먹던 아메리카노를 옆에 있던 탁자에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
"야 너 오늘 데스크에만 있었냐?"
"어. 왜?"
"아니, 그러니까 모르는거라고. 아마 너 빼고 룸메이드들이랑 다른 매니저들도 다 알걸. 오늘 민윤기가 어땠는지."
"...왜, 뭔 일 있었어?"
김태형의 입에서 나온 말들은 매우 가관이었다. 오늘은 실로 민윤기의 날이였다며, 신고식을 제대로 했다는 말에 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김태형의 말이 시작할 때 까지만 해도 별 일 아니겠지 하며 무표정이었던 나는 이어지는 말들을 들으며 입을 떡 벌렸다.
"오늘이 호텔 첫 날이라, 처음에는 다들 민 지배인님 스타일을 몰라서 일을 빡세게 하는 척 했는데, 지배인님이 하도 웃으면서 지나다니길래 엄청 유한 성격인가보다. 하면서 애들이 좀 풀린거야."
"...그래서?"
"일단 경호팀, 어제 너 그 4203호 사건 있었잖아. 그 때 빨리 안왔다고 제대로 시스템 점검 한번씩 싹 돌리라고 혼나고."
"나는 빨리 온 것 같았는데... 아닌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인상을 찡그리자 김태형은 끝이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하며 말을 잇는다.
"거기다가, VIP층 말고 일반 고객님들 층도 김 지배인님이랑 같이 돌았나봐. 근데 거기서 어떤 사원하나가 고객한테 실수를 했는데, 위에 말 안하고 그냥 처리하려고 했대."
"...설마,"
"그치. 그걸 딱 걸린거지. 그래서 복도에서 그 사원 애 하나 잡고 교육 제대로 받은거 맞냐, 여기 있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냐. 이러면서... 와, 대박이더라 진짜. 근데, 더 쩌는게 뭔지 알아?"
"...뭔데?"
"오늘 오전 동안만, 사원 애들이랑 매니저들 이렇게 잡아낸게 벌써 다섯 번이 넘어."
"미친."
김태형의 말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아니, 경호팀에다 일반 층까지 싹 돌면서 저 두 사건만 있었던게 아니라, 다섯 건이나 있었다고? 게다가 이 모든 일이 하루도 아니고, 약 네 시간만에 일어난 일이라니.
충격받은 얼굴로 김태형을 쳐다보니 벌어진 내 입을 꾹 눌러 닫아준다. 그걸 옆에서 다 보고있었다고 하니, 김태형이 충분히 피곤할만 했다. 와, 대박이네 진짜. 역시, 사람이 그렇게 자주 웃고 좀 능글거린다고 성격이 다 죽은건 아니었네. 잘못 걸렸으면 진짜 큰일 날 뻔했다. 민윤기가 화내는 상황을 생각하니 소름이 돋는 것 같아 오늘 오전에 VIP 데스크에서만 일을 처리한게 다행이라 생각하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근데 프론트에 네시간 서있는 것도 나름 힘들었다! 어디 앉지도 못하고 가만히 서있다가 서비스 하고, 다시 와서 서있고, 내선전화 다 받아서 처리하고. 나도 나름대로 힘들었다고 합리화를 하며 고개를 끄덕이다, 지가 민윤기 소식을 전한게 좀 뿌듯한건지 아까보다 나아진 표정을 한 김태형의 허벅지 위로 다리를 쭉 펴서 올렸다.
"야, 뭐하냐? 무겁다, 치워라."
"태형아 나 너무 오래 서있어서 다리 아파. 좀 주물러봐."
"응 나도 김 지배인님 계속 따라다니느라 너무 힘들어. 이 무거운 것 좀 치워줄래?"
"아아아아, 빨리... 아이고, 성 매니저님 아파서 쥬금."
고객님들께만 보여주는 내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온갖 애교를 다 피우는걸 본 김태형은 대체 왜 저러는건지 1도 이해가 안된다는 표정으로 나를 본다. 그에 아무렇지 않은 척 손을 뻗어 김태형이 들고있던 커피를 빼앗으려 하니 급하게 손을 빼 피한다.
"태태야 커피 그만 먹고싶어서 그래...?"
"...할게, 용서해줘."
금방 굴복하는 김태형이 웃겨 큭큭대니 마음에 안든다는 듯 나를 흘겨보면서도 종아리에 손을 올려 슬슬 주무른다. 으어, 시원하다. 하며 그대로 침대에 드러누워 한숨을 내쉬는 순간, 노크소리가 들려 눈을 감은 채 들어오세요. 하니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김태형의 손이 멈춘다.
어차피 매니저 전용 휴게실인데, 사원일리도 없고.
그러나 천천히 눈을 떴을 떄 보인건, 오늘 그렇게 호텔 안을 휘젓고 다니신다는 요주의 인물, 민윤기였다.
"...두 사람 지금 뭐 하는겁니까?"
표정이 싹 굳어서는 문 손잡이를 잡은 채 나와 김태형을 내려다보는 그 얼굴에 깜짝 놀라 급하게 다리를 내려 힐을 신고 일어났다. 김태형도 일어나 고개를 숙인 채 손을 모으고 서있었고, 몇 초간 아무말 없던 민윤기는 우리가 대답을 하지 않자 깊은 한숨을 내쉬고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아, 내가 이런 것까지 설명해줘야 하나. 아무리 휴게실이라고 해도, 남녀가 같은 공간에서 이러고 있어도 될거라고 생각해요, 두 사람은?"
"...죄송합니다."
나와 김태형의 죄송하다는 말에도 무거운 분위기가 지속되던 찰나. 내 귓가에 민윤기의 날카로운 말이 한 번 더 꽂혔다.
"...성ㅇㅇ 매니저는 애인도 있다는 사람이, 어제부터 참 좋은 모습 많이 보이시는 것 같네요. 잘 해보자고 말한지 이제 겨우 네 시간밖에 됐습니다. 아직 아무 생각이 안들어요?"
"......"
민윤기의 말에 나 대신 김태형이 움찔해서 나를 쳐다보는게 느껴졌다. 생각해보니까 김태형은 어제 일에 대해서 아는게 별로 없었다. 애인이 있다는건 말 그대로 뻥이었으니, 김태형이 이런 반응인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나는 이해가 안된다. 아니, 왜 굳이 지배인이! 지배인들 쓰는 휴게실, 사무실 두고 여기에 와서 지적하는거야.
말 그대로 휴게실이라서!!! 내가 피곤해서!!! 좀 쉬겠다는데!!! 다리 안마 좀 받겠다는데!!!
갑자기 밀려오는 억울한 마음, 거기다 민윤기의 마지막 발언까지 마음에 드는게 하나 없어 짜증이 확 올랐다. 왜 또 그놈의 애인 얘기를 꺼내, 여긴 호텔인데.
여전히 나를 마음에 안든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다 그냥 나가버리려는 민윤기에, 그냥 질러보자 하는 심정으로 고개를 들어 또박또박 말했다.
"민지배인님."
"네. 할 말 있으면 해봐요."
"...오늘 하루종일 여기저기 체크하시면서 예민하신건 잘 알겠는데요. 방금 말씀하신 것 같은, 제 사적인 얘기는 그만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보시다시피 제 애인이, 그렇게 기분 좋아하는 것 같지는 않아서요."
"......"
내 옆에 있는 김태형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다시 민윤기를 쳐다봤다. 그러니까 지금 내 행동은, 김태형이 내 남자친구인데 민윤기 네가 그딴 사적인 발언을 하니까 우리 자기가 기분 나빠하잖아!!! 와 같은 겁나 헬리콥터맘... 아니, 헬리콥터 여자친구(?) 같은 그런 발언과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호텔에서 사내연애 하면 안된다는 그런 규칙도 없고, 실제로 여기서 호텔리어로 만나 결혼한 커플도 되게 많다. 그러니까 이 상황은, 방금 내 말에 놀라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는 김태형 빼고는 모든게 자연스럽다 이 소리다.
냉수를 한 바가지 뿌린듯 얼음장같아진 분위기에서, 민윤기는 아무 말 없이 우리 둘을 빤히 쳐다보다 기분 나쁜 표정을 지은 채 휴게실 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다.
...뭔가 어마무시하게 잘못 돌아가는 그런 느낌이 든다.ㅎ 전세역전을 해보자고 한 말이 내 무덤을 판 것 같은 기분도 없지않아 있고...
민윤기가 나가자마자 옆에서 느껴지는 살기 가득한 시선에 어색하게 웃으며 슬쩍 고개를 돌리니 역시나 김태형이 고개를 양쪽으로 까딱거리며 되도않는 무서운 척을 하고있다.
"사랑해 태형아. 친구를 위해서 니가 한동안만 고생 좀 하자."
"아니 왜 니네 사랑싸움에 나를 처 넣고 난린데! 진짜 뒤지고 싶ㄴ,"
"아이고, 나가봐야할 시간이네? 이따봐 자기!"
몇 년만에 써보는 건지 모르겠는 '자기'라는 호칭에 김태형이 있는대로 인상을 찡그렸고 그걸 모른척하며 내가 마시던 커피를 들고 휴게실 밖으로 나왔다.
몰라, 민윤기 앞에서만 연기 잘 하면 되겠지 뭐.
이젠 나도 전쟁 선포한거나 다름 없으니, 이왕 시작한거 밀리긴 싫다. 민윤기에 대한 생각을 억지로 정리하며 한숨을 쉬고 다시 VIP 데스크로 향했다. 민윤기 눈에 띄지않게 일이나 열심히 해야겠다. 책잡히지 않으려면 미친듯이 일만 하는 수밖에.
***
Elysia Scandal.03
W.봄처녀
***
디너 시간이 다 되어가는 동안 데스크와 룸을 왔다갔다 하다 갑자기 울리는 내선전화를 받으니 프론트 데스크였다. 1층에서 40층까지 굳이 전할 말이 뭐가 있지. 룸 체크에 뭔 문제라도 있나, 하고 전화를 받았을 때, 내 귀로 들리는 말들에 머리가 멍해졌다.
어제 체크 인 하고, 오늘 체크 아웃해야하는 사람. 그러니까 4203호 쓰시는 그 고객님. 즉, 민윤기 이 자식이 아직 짐을 안 빼셨단다. 참 여러가지 방법으로 사람을 괴롭힐 줄 안다. 대단해.
전화를 내려놓고 데스크에 가만히 서서 머리를 굴렸다.
이걸 해결하려면 두 가지 방법이 있겠지. 첫번째는 김 지배인님께 전화해서 문제를 해결한다. 두번째는 민지배인님. 그러니까 당사자한테 가서 짐을 빼라고 말한다.
방법은 두가지여도 내 선택은 한 가지다. 김 지배인님이 이 호텔에 계신걸 천만 다행으로 생각하며 전화기를 들었다.
여유롭게 김지배인님께 전화를 걸려는데, 내 앞으로 지나가는 두 여사원들의 중얼거림을 듣고 나서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오늘 김지배인님 오후 출장이시래.'
'아, 맞다. 그럼 민지배인님이 오후 내내 혼자 일처리중이신거야?'
'응, 그런 것 같더라.'
쓸데없이 좋은 내 귀야. 왜 저런 말까지 잘 듣고 난리니. 한숨을 쉬면서도 복장을 다시 한 번 단정하게 점검했다. 어쩔 수 없이 두 번째 방법을 선택해야 한다는걸 받아들인지 30초가 되는 순간이었다.
아까 휴게실에서 그런 일도 있었는데 민윤기얼굴을 다시 어떻게 보지, 하면서 머리를 쥐어뜯으며 절망하다가도 빨리 알아봐달라며 한번 더 울린 데스크 전화를 받고는 민윤기의 사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생각해보니 민윤기가 여기서 일한다는건, 이제 한국에서 산다는건데. 그럼 집은 구한건가? 여긴 예전에 살던 곳이랑은 좀 먼데... 아님 직원 숙소 쓰는건가? 혼자 깊어지는 생각에 또 멍을 때리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내 볼을 약하게 두어대 때렸다.
미쳤어. 민윤기 생각은 이렇게 깊어지면 위험한데.
그래! 이미 전쟁 선포한거 당당하게 해야지. 지배인과 매니저 사이는 호텔에서 흔한거잖아? 구남친 구여친 그런 사이는 우리 둘한테 있을 수가 없어! 그렇게 합리화를 마치고, 긴장되는 마음으로 사무실 문을 두드리자 곧바로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들렸고,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문을 열어 들어갔다.
일을 하다가 들어오는 나를 보고는 바로 내게로 시선을 옮기는 민윤기에게 90도로 인사를 하고는 앞으로 손을 모으고 자기 세뇌를 했다. 공적으로. 완전 진지하게 말해야된다.
곧 아까 그 무섭게 정색하던 표정은 어딜간건지 또 다시 능글맞게 웃으며 무슨 일이냐 묻는 민윤기에, 아까처럼 꾸며진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민지배인님, 어제 들어오신 4203호 투숙객 체크 아웃 시간인데 아직 캐리어가 그대로 있다고 합니다. 원래 시스템대로 룸 메이드 시켜서 정리할까요?"
"아, 그거 그냥 두세요. 나 한국에 집 따로 안 구했는데 호텔리어 숙소에도 자리가 없대서, 그냥 그 룸 내가 쓰기로 했어."
"아... 그럼 투숙 기간 늘리는걸로 진행할까요?"
"그냥 내가 프론트로 전화 넣을게. 가봐도 좋아요."
민윤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뒤를 돌아 나오려는데 성 매니저, 하며 다시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섰다. 그런데, 민윤기의 표정이 심상치가 않다. 뭔가 능글맞은 웃음을 짓고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가볍지만은 않은. 저런 표정 하고있으면 내가 겁먹을 줄 아나본데, 정확하다. 나는 지금 쫄았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민윤기의 책상 앞으로 걸어가 가만히 입술을 꾹 닫고 민윤기의 말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진 민윤기의 말은, 나를 당황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냥, 연기 적당히 하라구요."
"...네?"
"일단은 봐줄건데, 적당히 하다가 다시 나한테 와요."
"......"
"나 참을성 없는 거, 네가 더 잘 알잖아."
그 말에 결국 표정이 굳어져버렸다.
지금 민윤기의 입에서 나오는 '연기' 이라는 단어가, 아까 휴게실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건지 아님 그냥 내 태도 자체를 말하는건지 이해가 되지 않으면서도 여전히 웃으며 나를 올려다보는 그 눈을 피할 수가 없어 입술만 잔뜩 짓이겨 물고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런 내 행동이 마음에 안든다는 듯 조금 인상을 찡그린 민윤기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손을 뻗어 내 아랫입술을 풀어냈다.
그 행동에 민윤기는 아직도 넋이 나간 표정을 한 나를 가만히 보더니 우리가 연애할 때 자주 지었던, 너 때문에 못 살아. 하며 말하던 그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내가 방심한 틈을 타 허리를 조금 숙여 가까이 다가와, 귓가에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지금은 진짜 성 매니저님이 귀여워서 봐주고있는거예요. 알았어?"
***
오늘은 민윤기의 질투가 폭발한 날이네요.
질투하는 것도 귀여운건 내꺼라서,ㅎㅎ
김태형도 꾸욥... 저런 남사친 있으면 전 죽어버릴거에요.
게다가 분량도 폭발! 유후!
많은 관심 주시고, 사랑해주시는 모든 독자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사랑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