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핀잔
: 우리 술 마실래요?
03
남자는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리고는 자리를 벗어났다. 나 역시 그를 따라 연회장으로 들어가며, 실장님을 붙잡고 물었다. '저 남자, 어느 집 사람이에요?' 남자는 어느새 K그룹 장녀와 와인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실장님은 그의 옆모습을 살피더니,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답했다. '저도 처음 보는 분인데요. 확인 해볼까요?' 나는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나 싶어, 아니라고 답한 뒤 자리를 벗어났다. 연회장 복도로 나서자마자 보인 얼굴은 박비서였다. 박비서는 벽에 기댄 채로 누군가와 통화 중이었다. 나는 그의 뒤로 몰래 다가가, 물었다. '여자친구라도 생긴거야?' 그러자 박비서는 이미 나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듯, '현우거든.' 하고 답한다. 그의 남동생 이름이었다. 나는 그의 전화기를 빼앗아 통화를 이었다.
"현우야!"
"...누구세요."
"뭘, 누구야! 너 점점 네 형 닮아간다?"
"...탄소누나네."
"그래. 누나다!"
"한국 온다더니, 진짜 왔구나."
옛날에는 죽어도 나랑 결혼하겠다고 울고 불고,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던 - 현우였는데. 어느새 귀여웠던 목소리는 꽤 낮아지고, 애교처럼 늘어지던 말꼬리도 사라진 아이였다. 아. 시간 진짜 빠르네. 나는 새삼 세월을 정통으로 맞은 듯한 기분에, 괜시리 마음이 축 가라 앉았다. 그는 제 핸드폰을 가로채며, 현우에게 '나중에 전화할게.' 하고 답한 뒤 전화를 끊었다.
"왜 끊어! 나 현우랑 전화 중이었는데!"
"현우 고 삼이다. 고 삼."
"벌써? 시간 장난 아니게 빠르다..."
"시간은 계속 흐르는데, 넌 어째 여전히 똑같냐."
"뭐가."
"누가 아직도 그런 장난을 쳐."
그는 나를 쳐다보며 못 말린다는 듯, 제 머리를 옅게 흔들었다. 아마도 그가 말하는 '그런 장난'은 저를 놀래키려 뒤에서 몰래 걸어온 나의 장난을 말하는 듯 했다. 얼씨구. 그게 장난인 줄은 알았나보네. 나는 샐쭉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장난인 거 알았으면, 좀 속아주지. 그걸 또 안 받아준다."
"언제는 받아줬나."
"...치. 나 뒤에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나 회장님 옆에서 일한 지, 칠 년 됐어."
"그런데?"
"...무뎌질 수가 없었지. 칠 년동안."
"아빠가 괴롭혀?"
"회장님이 옆에 스물네 시간 계시는데, 어떻게 내가 무뎌지냐. 바보야"
"...아."
내 낮은 탄식을 끝으로 우리의 대화는 끊겼다. 그의 오른 손에 들려있던 무전기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흘렀다. '박비서님! 옥상에 문제가 좀 생겼습니다!' 꽤나 다급한 음성이었다. 그는 바로 그쪽으로 가겠다고 답한 뒤, 내게서 멀어졌다. 치. 박지민이랑 오랜만에 대화하는 거였는데. ...잠깐만. 근데 박비서, 아니. 박지민 쟤 나한테 반말 한 거야? 고등학교 때처럼? 나는 뒤늦게 눈치 챈, 그의 말투에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만 바라봤다. 쟤랑 다시 친구처럼 대화한 게... 고등학교 졸업하고 처음인 것 같은데. 그럼, 헐. 칠 년전이다. 나도 모르게 순간 입에서, '헐. 대박' 이라는 감탄사가 흘렀다. 박지민은 무슨 생각에서인지, 갑자기 제 걸음을 멈추더니 내게로 빠르게 다가왔다. 그는 내 앞에 서서는 나의 눈을 맞추며 말했다.
"머리."
"..."
"긴 게 더 예쁘네"
고등학교 시절에는 학교의 규칙 때문에, 늘상 단발머리일 수 밖에 없었다. 때문에 나는 대학교를 가면 머리를 꼭 기르고야 말겠다고 그렇게 다짐을 했는데, 대학을 갔을 때는 이미 단발머리가 익숙해져버린 상태였다. 덕분에 대학을 졸업 할 때까지도 나는 줄곧 단발을 유지했다. 한국을 떠나서 타국에서 난민 구호자로 일하면서, 처음으로 머리를 자르지 않고 삼 년동안 길렀는데. 예상치도 못한 사람이, 예상치도 못한 순간에. 그 변화를 알아채고, 말을 건넸다. '예쁘네.' 그의 마지막 말, 마지막 단어가 나의 정신을 마구 흔들어댔다. 박지민은 그런 내 속을 아는 지, 모르는 지. 제 말을 끝으로 엘레베이터에 탑승했다. ...이게 무슨 일이야.
*
"...누가 죽어요?"
실장님은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내 귓가에 다시금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미래 건설 외동 아드님이요.' 나는 실장님에게 들은 내용을 다시 정리하며 물었다. '그니깐 지금.이 연회장 옥상에서 미래 건설 외아들이 살해 당했다. 이거죠?' 실장님은 옅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연회장 내 사람들은 이 사실을 다 아는 듯, 저들마다 한 마디씩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그냥 죽음도 말이 안되는데, 살해라니. 나는 복잡하게 흘러가는 연회에 잠시 의자에 앉는데, 문득. 옥상으로 향하던 지민이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박지민은... 괜찮은거야? 나는 연회장 밖으로 나서 엘레베이터로 향했다. 실장님은 그런 나의 뒤를 다급하게 따랐다.
옥상에 도착했을 때는 박지민을 비롯한 회사 사람들이 바닥에 쓰러진 남자의 주변으로, 바리게이트를 세우고 있었다. 그 외 몇몇 오지랖 넒은 사람들은 연회장에서 벗어나 옥상에서 그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제 두 눈을 손바닥으로 가리며, 힐끔힐끔. 피해자는 심장에 정확히 총을 맞은 모양이었다. 하얀 와이셔츠 위로 왼쪽 가슴이 붉었다. 절로 찌푸려지는 눈쌀이었다. 나는 지민이를 부르려던 행동을 멈추고, 멀리 떨어졌다. 안 그래도 바쁜 애. 방해하지 말자. 싶어서.
"누가 그랬을 거 같아요?"
누군가 나의 오른 편에 서며 물었다. 누가 그랬을 거 같아요? 하고. 나는 제법 낯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얼굴을 확인했다. 조금 전 그 남자였다. 와인잔을 보기 좋게 떨어트린. 나는 조금 전 피해자를 본 것과 똑같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자 남자는 제 검지 손가락을 내 미간에 가져대며 말했다. '주름 지겠네요.' 나는 대답 대신 그의 손을 쳐냈다. 그는 내가 흥미로운 듯,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내 말에 대답 좀 해주지?"
"뭘요."
"저 남자. 누가 그랬을 것 같은지?"
"제가 어떻게 알아요."
남자는 피해자를 기리키며 물었다. 저 남자. 누가 그랬을 것 같은지? 나는 그를 향해, 제가 어떻게 알아요. 하고 무심하게 답했다. 그러자 남자는 피해자를 가리키고 있던 손을 엄지와 검지만 남겨두고는 다 접어서, 총모양으로 만들었다. 곧이어 남자는 그 손을 내게로 틀었다. 그리고는 장난스럽게 '빵야' 하고 총을 쏘는 시늉을 한다.
"뭐하는 거예요."
"아니. 범인이 이렇게 쐈을 것 같아서."
"..."
"따라해봤어요."
"이봐요."
"불쌍하잖아. 재벌집 도련님이 총 맞아 죽었는데."
"피해자 앞에 두고 그게 할 말이에요?"
"고양이에 이어서, 사람도 굉장히 좋아하시나봐요. 사람 무안하게 엄청, 화 내시네."
"이봐요!"
"아."
"사람이 기본이라는 것도 없ㅇ."
"정호석입니다."
"...네?"
"인사가 늦었네요."
"..."
"정호석이에요. 내 이름은."
*
더 이상 남자를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를 뒤로 하고, 옥상을 벗어났다. 누군가 나의 뒤를 따랐다. 당연히 실장님이겠거니 생각하고, 엘레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아니, 저 또라이는 자꾸 어디서 나타나는 거야. 나는 아무래도 그를 알아야겠다 싶어서, 실장님에게 정보 좀 부탁하려 몸을 돌렸다. 저, 실장ㄴ.
"뭐예요?"
"뭐가요?"
"왜 여깄냐구요."
"옥상 추워요."
"네?"
"나도 내려가야죠."
남자는 뭐냐고 묻는 내게, 어깨를 으쓱하며 뭐가요? 하고 되묻는다. 여기에 왜 있냐는 물음에는 제 어깨를 쓸어내리는 시늉을 하며, 옥상 추워요. 하고 답하고. 사람 열받게 하는 방법도 가지가지네. 진짜. 딱히 할 말이 없는 상황에 다시 앞을 바라보며, 엘레베이터가 올라오기만을 기다렸다. 엘레베이터 문으로 그와 내 모습이 비췄다. 그는 문에 비친 나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리고는 말했다. '우리. 술 마실래요?' 나는 다시 몸을 틀어 남자를 바라봤다.
"누구요. 나랑요?"
"네."
"내가 그쪽이랑 술을 왜 마셔요."
"우리 할 이야기 꽤 있지 않나."
"참 나."
"나를 너무 미워하는 눈빛이라, 내가 마음이 좀 아프네요."
남자는 제 심장을 부여잡는 듯한 제스쳐를 보이며, 살짝 제 얼굴을 찡그린다. 대체 감이 안 오는 사람이네. 나는 머리를 헝클이며, 말했다. 이봐요.
"이봐요."
"'이봐요.' 가 아니라, 정호석이에요."
"그래. 그렇다고 칩시다."
"그렇다고 치는 게 아니라, 진짠데?"
"...그래요. 정호석씨. 내가 정호석씨랑 술을 왜 마셔야 되죠?"
그는 내 입에서 나온 제 이름이 마음에 드는 지, 미소를 유지하며 답했다. 내게 가까이 다가오며.
"마셔주면, 사과할게요."
"뭘요?"
"그쪽이 좋아 죽고 못사는, 그 고양이."
"..."
"고양이들 쌩까고 그냥 간 거. 사과할게요."
"..."
"나한테 사과 듣고 싶잖아요. 지금."
사람이 능글 맞은 거야, 생각이 없는 거야. 대화를 나누면 나눌 수록 알 수 없는 남자였다. 나는 손목에 걸린 머리끈을 빼내, 머리를 묶으며 물었다.
"누가 그래요?"
"그쪽 눈이."
"사람 눈빛 잘 읽나봐요."
"글쎄요."
남자에게 사람 눈빛 잘 읽느냐고 묻자, 그는 '글쎄요.' 하고 답한다. 나는 다 묶은 머리를 대충 정리하고는, 그에게 한 발 더욱 가까이 다가갔다. 그와 내 사이에는 주먹 하나가 들어갈 정도의 공간만이 남아있었다. 나는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아니요. 그쪽 사람 눈빛 잘 읽어요."
"네?"
"마십시다. 술."
"..."
내 대답에 적지 않게 놀란 듯한 남자였다. 나는 어느새 도착해서 문이 열리는 엘레베이터로 걸음을 옮겼다. 나는 제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 남자에, 열림 버튼을 누른 채로 말했다.
"사과 받고 싶은 거, 맞거든요."
"재밌네요."
"고양이 일도. 아까 와인잔 일도."
남자는 제 넥타이를 제법 헤쳐 풀며, 재밌네요 - 하고 답했다. 나는 빨리 들어오라는 손짓을 하며, 사과 받고 싶은 두 가지 일을 말했다. 고양이 일과 와인잔 일. 그러자 그는 엘레베이터로 걸어 들어와서는, 지하 일 층 버튼을 누르며 말했다. '제 차 타고 갑시다.' 나는 상관없다는 듯, '그럼 그래요.' 하고 답했다.
엘레베이터는 빠르게 내려갔다.
*
안녕하세요. 겨울 소녀입니다.
날이 많이 더워요. 다들 몸 잘 챙기세요!
다정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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