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핀잔
: 같은 세상, 다른 우리
04
"와인이 편해요? 양주나 칵테일도 괜찮아요"
남자와 함께 온 술집은 한 눈에 봐도 고급진 곳이었다. 그는 술집 안으로 들어오는 복도와 길목에서, 꽤 많은 사람들과 인사를 주고 받았다. 대부분은 검은 정장을 빼입은 사내들이었다. 그들은 남자를 향해 허리를 잔뜩 굽혀가며, '안녕하십니까. 형님!' 이라는 멘트를 덧붙였다. 간혹 몸매는 물론이거니와 얼굴까지 이기적인 언니들도 그에게 오랜만이라는 듯, 손을 흔들어 보였다. 남자는 그럴 때마다 능글맞게 제 한 쪽 눈을 찡긋거리며, 웃었고. 무표정일 때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자아내는 남자였다.
남자는 술집 가장 가운데 테이블에 자리를 잡더니, 무슨 술을 마실 건지 물었다. '와인이 편해요? 양주나 칵태일도 괜찮아요.' 하고. 동시에 그는 제 슈트 겉옷을 벗어, 제 옆에 두고는 나를 바라봤다. 나는 그런 그와 시선을 맞추고는 어느새 풀려버린 운동화 신발끈을 묶으며 답했다.
"전 소주요."
그의 낮은 웃음소리가 귓가를 타고 흘렀다. 신발끈을 단단히 묵은 후, 그에게 되물었다. '왜요? 소주는 없어요?' 그러자 그는 '그럴리가.' 하며 언제부터인지 우리 테이블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직원에게 말했다. '일단 소주 열 병. 안주는 알아서.' 직원은 그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소주는 뭘로...?' 하고 묻는다. 그는 내게 답하라는 듯, 내 쪽으로 손을 뻗는다.
"후레시요."
직원은 제 카리깃에 달려 있던 작은 마이크를 통해, '소주 후레시 열 병이요.' 하고 말했다. 직원의 말이 끝나자마자, 마이크를 타고 큰 소리가 넘어왔다.
어떤 미친새끼가 소주를 주문해. 당장 내쫒아!
그는 직원을 향해 제 손을 까닥이며, 몸을 숙이라는 제스쳐를 취했다. 직원은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고, 그는 직원의 마이크를 빼앗아 말했다. '정호석입니다. 소주 주문한 미친새끼가.' 꽤 오랫동안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잠시 후, '금방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라는 목소리가 마이크를 통해 전해졌다.
*
그와 말없이 소주 세 병씩을 비웠다. 그는 잔을 넘기면서도 나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여전히 흥미롭다는 눈빛이었다. 꽤 오래 이어진 정적을 깬 건, 바로 나였다. 나는 새 소주병을 따며 물었다. '뭐 하시는 분이시길래, 사람들이 다들 형님 형님 해요?' 남자는 내 손에 들려있던 소주병을 제가 가져가, 내 잔에 채워주며 답했다. '뭐 하는 사람일 것 같은데요?' 나 역시 그의 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다.
"모르겠어서, 묻는건데."
"그냥 평범한 일해요."
"평범한 일. 뭐요?"
"비밀."
남자는 여고생이 짝사랑 하는 대상을 감추는 것처럼, 제 검지 손가락을 입술 중앙에 대고는 '비밀' 하고 말한다. 아니. 뭐야. 저 남자! 나는 안주로 나온 방울 토마토를 입으로 밀어 넣었다. 사이즈가 안나오는 남자네. 진짜 -. 남자는 토마토로 부풀어 오른 내 볼을 보고는 지금까지 중, 가장 크게 웃어보였다. 사람 무안 할 정도로. 나는 토마토를 가득 머금은 채로, 소리쳤다. '왜 웃어요!' 하고. 하지만 발음은 내 뜻대로 나가지 않았다. 내 외침은 오히려 남자에게 또 다른 장난감을 던져준 듯 했다. 그는 얼굴이 붉어질 때까지 웃으며, 답했다.
"미안해요."
"미안하면 그만 웃죠?"
"...아니. 그게 아니... 아. 진짜 웃긴데."
"토마토 먹는 여자 처음 봐요?"
"네."
"네?"
"한 번에 아홉 개 넣는 여자는 처음 봐요."
"...몇 개인지 셌어요?"
"그냥 보고 있었는데, 아홉 ㄱ..."
"그만 웃으라구요!"
"아. 진짜. 큼큼. 아. 아."
남자는 '아홉 개' 라는 단어에 악센트를 주며 말을 이었다. 여전히 웃음을 머금은 채로. 나는 무식하게 토마토를 아홉 개나 밀어 넣은 조금 전의 나를 탓 할 수 밖에 없었다. 어쩌겠어. 방울 토마토 아홉 개 먹은 여자는 처음 본다는데. 남자는 그만 웃으라는 나의 마지막 외침에 제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정신을 차리려는 듯 해보였다. 목소리도 가다듬고. 나는 방울 토마토가 담긴 샐러드를 멀리 밀어냈다. ...저리가. 너. 남자는 그런 내 행동조차 웃긴 지, 제 눈에 담아냈다. 그리고는 한껏 유해진 얼굴로 물었다.
"그 쪽 진짜 이상한 거 알아요?"
"저요?"
"네."
"뭐가 이상해요?"
"처음 보는 유형이에요. 사람 자체가."
"그 쪽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은 안 해봤어요?"
"우리는 살아온 세상이 다른가 보죠, 뭐."
"어찌됐든 같은 대한민국인 걸요."
"같은 나라에, 같은 시대에 산다고."
"..."
"다 같은 삶을 살지는 않죠."
내가 남자에게 느꼈던 감정을, 남자도 내게 느꼈던 모양이었다. 그는 나를 처음 보는 유형의 사람이라고 칭했다. 참나, 누가 할 말을. 그는 저와 내가 살아온 세상이 다른 듯 싶다며, 계속해서 술잔을 기울였다. 술 진짜 잘하네. 나는 그와 마찬가지로 내 잔을 채우며 답했다. 결국은 같은 나라, 같은 세상이라고. 나는 내 대답을 끝으로 그에게 잔을 들어보이며, 건배를 하자는 제스쳐를 취했다. 그러자 남자는 작은 실소를 내뱉으며, 잔을 부딪혀왔다. 그리고는 빠르게 술을 넘기고 답했다. 같은 나라, 같은 시대에 산다고. 다 같은 삶을 사는 것은 아니라며.
한 순간에 다시금 냉소적인 분위기가 그를 감쌌다.
*
그와 각각 소주 네 병쯤을 비웠을까. 어디가서 술 좀 마시는 축에 속하는 나였는데, 그는 술 좀 마신다. 그 정도를 넘어선 것 같았다. 조금도 흐트러진 게 없으니깐. 나는 자꾸만 올라 오는 취기에 정신을 차리려,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제 정장 자켓을 갖춰 입으며, 내게 말했다.
"정신력이 대단하네요. 꽤 취한 것 같은데."
"...술은 정신력이라고 배웠거든요."
"그래요. 이제 일어나죠?"
남자는 내게 제 손을 내밀었다. 아무래도 잡고 일어서라는 뜻이겠지. 나는 그의 손을 잡으려다가, 이내 곧 스스로 몸을 일으켰다. 물론 처음보다는 괜찮아진 인상의 남자였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호의적으로 변한 건 아니였으니. 나는 그의 손을 지나지며, 말했다. '괜찮아요.'
*
(Boy moment)
"대신 운전해 줄 사람 올 겁니다. 조금만 기다려요."
"...네."
"괜찮은 거 맞...아요?"
"네!"
"깜짝이야."
여자는 자신의 정신력으로 제 몸을 가누고 있었다. 그 옷차림으로 연회장에 나타났을 때부터, 이상한 여자다 싶기는 했는데. 이상하고, 대단한 여자였네. 나는 대신 차를 운전해 줄, 아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얘는 근처라면서 왜 이렇게 안 와. 여자의 얼굴이 확실히 전보다 붉었다. 토마토 같네.
'지이이잉. 지이이잉.'
여자한테 먼저 차에라도 들어가 있으라고 말할까 싶어서, 여자에게 말을 건네려는 때. 손에 들린 핸드폰이 울렸다. 나는 수신자를 확인하지도 않고, 전화를 받았다.
"지하 주차장으로 와서, 내 차 찾으면 되는 걸 왜 전화해. 자식아."
"..."
"내 차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빨리 와ㄹ."
나는 점점 기울기 시작하는 여자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여자는 금방이라도 넘어질 것 같았다. 나는 여자의 어깨를 감쌌다. 그리고는 아이에게 빨리 오라고, 언성을 높이는데.
그 순간 주차장 끝에서 걸어오는 남자가 보였다. 검은 모자와 검은 마스크까지 쓰고는, 한 쪽 손에 총을 든 남자였다. 나는 멀리 떨어진 인영을 확인하기 위해, 눈을 찌푸렸다. 우리 쪽의 사람이 아니였다.
수화기 너머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번호는 확인하고 전화를 받으셔야죠. 형님."
"..."
"적도 많으신 분이, 그렇게 대책 없으시면 되나."
내게로 가까이 다가오는 남자였다. 남자는 내게 제 한 쪽 손을 흔들어 보였는데, 그 손에는 휴대폰이 들려있었다. 아마 나랑 전화하고 있는 대상이 자신이라는 거겠지. 나는 정장자켓에서 총을 빼려다가, 내 가슴께에 제 몸을 기대 안겨 있는 여자를 보고는 행동을 멈췄다. 여자를 위해서라기 보다는, 여자가 봐서 좋을 상황이 아니였다. 말이 흘러 나갈 수도 있고. 어느새 꽤 가까이 다가온 남자였다. 남자는 마스크를 벗으며, 기분 나쁜 웃음을 활짝 지었다.
아. 시발. 저 새끼야?
상대를 확인하자, 더욱 더 간단히 끝날 상황이 아니였다. 나는 황급히 여자를 조수석에 앉히고는, 운전석으로 향했다. 자켓에서 총을 빼들어, 한 손에 든 채로.
차에 올라타자 갑작스러운 움직임 혹은 낯선 분위기에 뒤척이는, 여자가 내게 물었다.
"...왜 거기 앉았어요."
"설명 할 시간 없ㅇ"
"술 먹고 운전하면 안 되는 거, 몰라요...?"
여자는 제법 엄한 표정으로 차 키를 뽑으려 들었다. 나는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또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행동을 저지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잊고 있었다. 내 다른 한 손에는 총이 들려 있었다는 걸. 여자는 제 손등에 닿아오는 총구에 놀란 듯 했다.
"...이게, ㅁ... 뭐ㅇ"
"얽혔어요."
"...아니. 무ㅅ"
"그 쪽."
"..."
"이미 얽혔다고."
"...네?"
"나랑."
"..."
"우리 쪽 사람들이랑."
나는 마지막으로 우리 쪽으로 빠르게 다가오는 남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새끼랑.' 여자는 우리 쪽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는, 남자를 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그녀의 의자를 뒤로 눕히며, 답했다. '이대로 있어요. 가만히.'
*
안녕하세요. 겨울 소녀입니다.
저는 오늘 오랜만에 여유로운 하루를 보냈어요. 늘어지게 자고, 지금도 맥주 한 캔을 옆에 두고 글을 쓰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마음의 여유가 가득했던 하루였으면, 좋겠어요 -
다정한 사람들
- 암호닉 신청 했는데, 없으신 분들은 말씀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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