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나빠요 上 링크 : http://instiz.net/writing/2376858
(오늘도 덧붙임은 꼭 읽어주시길!)
선생님, 나빠요
w. 채셔
D. 선생님, 벌써 내 눈에 찍혔거든.
그 날, 꾸역꾸역 태형에게 키스를 해주고 겨우 빠져나온 여주는 급하게 뛰어 교무실로 도망쳤다. 거기에는 사람이 많으니까. 일차원적인 생각이었으나, 방금 학생 신분의 태형에게 키스를 해준 -아니, 해줘야 했던- 선생님으로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선택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태형은 물론이고, 몸을 잘라내도 계속해서 살아남는 빌어먹을 죄책감이 저를 쫓아올 것 같았기에. 교무실로 급하게 뛰어가는 여주를 보던 태형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느긋하게 교실을 빠져 나와 자습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교무실로 가 봤자 어차피 오늘 자습 감독은 김여주인데. 태형은 비웃듯 계단을 하나씩 올랐다. 독 안에 든 쥐나 마찬가지인 여주를, 태형은 이제 어떻게 요리해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태형의 머릿속에 여주의 의사라고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은 제 사람이 될 것이기에.
"아, 진짜…."
교무실에는 사람이 없었다. 다 퇴근을 했거나, 자습 감독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겨우 교무실에 도착해 헥헥대며 숨을 돌린 여주는 제 자리에 앉자마자 욕지거리를 내뱉고 말았다. 달력에 동그라미로 표시된 날짜는 헛것이 아니었다. 오늘 자습 감독이 자신이라니. 여주는 무너지듯 의자에 차마 앉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꿈도 꾸지 못할 만큼 설렘으로 가득 찬 마음으로 들어왔던 신성한 자신의 첫 학교였다. 제 첫 학교 생활이 아무렇지도 않게 태형이라는 남학생 하나에 의해 좌지우지되어가고 있는데, 기분이 좋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니, 사실 최악이었다. 여주는 의자에 팔을 묻고 울어버렸다. 울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았다.
"………."
"…박지민, 핸드폰 내놔."
겨우 울음을 추스리고 세수를 한 뒤에 간단하게 베이스와 입술만 화장으로 찍어 바른 여주는 그대로 자습실로 올라갔다. 벌써부터 이죽거리는 태형의 얼굴에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기분이었다. 이내 몇 번을 천천히 돌다 지민이 핸드폰을 보며 낄낄대고 있는 것을 목격한 여주는 지민의 옆에 서서 손을 내밀며 말했다. 지민이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보았고, 여주는 제 울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부러 표정을 한껏 굳혀보였다. 조금만 방심하면 울상으로 변해버릴 것 같았기에. 지민이 '아, 좆됐다.' 하고 제 얼굴에 맞지 않는 욕을 내뱉으며 조용히 제 폰을 내밀었다. 여주는 가만히 폰을 받아들고 제 주머니에 핸드폰을 넣었다. 공부해. 여주의 짧은 말에 지민이 울상을 지었지만, 여주는 받아주지 않았다. 지민의 장난까지 받아주기에는 너무 지친 상태였으므로.
"………."
몇 번을 더 돌던 여주에게 이번에도 핸드폰 불빛이 눈에 반짝였다. 미련 없이 핸드폰 불빛이 번쩍이는 곳으로 간 여주는 멈칫하고 몸을 굳힐 수 밖에 없었다. 태형이었다. …이걸 뺏어야 해, 말아야 해. 무의식적으로 지민 쪽으로 눈을 돌렸더니, 지민은 음악 없이 공부해야 한다는 사실이 절망적이었는지 책상에 엎어져 힘없이 펜을 놀리고 있을 뿐이었다. 여주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지금 나는 선생이니까.' 라는 생각 하나만으로 여주는 손을 내밀었다. 이내 태형은 푸스스 웃으며 퍽 반항적인 눈길로 저를 바라보았다. 이제는 아무런 의미 없이 올려다보는 눈에도 제가 을이 된 기분이었다.
"폰 내놔."
"………."
태형은 제게 내민 손을 무심코 바라보다 미련 없이 자리를 떠 복도로 나섰다. 김태형, 하고 크게 불렀다 자습실 안의 시선이 여주에게 집중되자, 여주는 미간을 한껏 찌푸리며 태형을 따라 나갔다. 자습실 문을 조용히 닫자, 복도 앞 계단에 태형이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선생님, 미끼 하나는 잘 물어."
"…반항하는 거니?"
"………반항으로 보이나 보죠?"
"사춘기면 상담이라도 받자."
사춘기라. 태형은 사춘기라는 단어를 여러 번 읊으며 단어가 주는 이질감을 몇 번이고 즐겼다. 이내 계단에서 일어선 태형은 다시 고개를 내려 여주에게 키스했다. 단단한 태형의 가슴과 꽤 남자다운 팔에 갇혀 이리저리 움직이지도 못하고 꼼짝없이 키스를 하게 된 여주는 이제 힘 없이 제 팔을 바닥으로 내렸다. 체념이었다. 지쳐서 어떻게 반응할 수가 없었다. 태형은 이내 키스로 번들거리는 제 입술을 소매로 닦은 뒤 제 핸드폰을 여주의 주머니에다 넣어주었다.
"울었어요?"
"…안 울었어."
"어떡하면 좋지."
"……."
"…선생님은 우는 게 예쁘거든요."
그래서 존나 울리고 싶어. 태형은 제 말에 화낼 힘도 없다는 듯 표정만 잔뜩 굳히고 올려다보는 여주의 뺨을 두어 번 톡톡 쳤다. 비웃듯 한 쪽 입 꼬리를 한껏 끌어당겨 웃은 태형은 제 검지로 여주의 볼을 쓰다듬다 유유히 뒤돌았다. 어쩔 수 없어요. 받아들이시든가, 사퇴서 쓰고 나가시든가. 태형의 말에, 한순간 제가 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노력했던 나날들이 제 머릿속에서 한꺼번에 엉키는 듯한 기분이라 여주는 또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나쁜 새끼. 태형을 저주하는 듯한 어투의 말에 태형은 다시 여주 쪽으로 몸을 틀었다. 있잖아요, 생각해 봐. 사퇴서 쓰고 나가면, 다른 학교에서 받아줄까? 1년도 채 안 되서 사퇴서 쓰고 나온 초짜를? 태형의 말에 여주는 입술을 꾹 깨물고 말았다. 이것도 회사 생활이랑 같은 건데. 태형의 말에 여주는 눈을 꼭 감았다. 치욕적인 기분이었다. 또한 제 모든 걸 태형의 구둣발에 짓이겨지는 기분이었다.
"그냥 받아들이는 게 선생님도, 나도 좋지 않겠어요?"
"………나쁜…."
"선생님, 벌써 내 눈에 찍혔거든."
태형은 협박 투로 조금은 거칠게 말을 내뱉었다. 눈빛이 이글거리는 듯 했다. 태형의 눈은 언제 봐도 그 느낌이 달랐다. 어떨 땐 차가워서 제 몸 안의 모든 핏줄이 얼어붙을 것 같은 느낌일 때도, 그리고 지금과 같이 기름에 쩔어버린 몸에 성냥불 하나가 데여버린 것처럼 뜨거운 느낌일 때도 있었다. 어찌 했든 그 이질적인 태형의 눈도 결국은 태형이었다. 태형 그 자체가 여주에게는 공포일 수 밖에. 고개를 비스듬하게 돌려, 눈물을 글썽이며 주저앉아버린 여주를 바라보던 태형은 유연히 자습실 안으로 들어섰다.
E. 새장 속 카나리아를 위해
요 며칠 간 여주에게는 거의 기적 같은 일이 연달아 발생하기 시작했다. 연봉은 3배 이상으로 올라 20년차 근무를 하고 있는 선생님과 급이 비슷해졌다. 학교에서 차도 제공해주었고, 더욱 놀라운 점은 여주를 초짜 이상으로 보지 않던 선생님들이 한껏 꼬리를 내리고 저를 대접해준다는 것이었다. 비단 선생님들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교감과 교장 선생님까지도 여주의 수업 스케줄을 배려해주었다. 며칠 새, 여주는 거의 학교 교무실에서 공주나 다름이 없었다.
"저기……."
"네, 황 선생님."
"나… 생리가 터져서 혹시 한 시간만 대신 들어가줄 수 있을까?"
"당연하죠, 제가 들어갈게요."
"……아, 진짜 미안해. 김 선생님."
아니에요, 라고 간단히 말하며 제 수업 책을 챙기려는데 여선생이 여주의 손을 꼭 붙잡아왔다. 의문스러운 눈길로 여선생을 바라보자, 여선생은 간절한 눈길로 '이거 이사장님한테 말하면 안 돼.'라고 여주에게 부탁했다. 여주에게는 통 닿을 수 없는 말이었기에, 여주는 '네.'하고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저도 모르는 이사장에게 어떻게 말을 한다는 건지, 그리고 이런 걸 말할 수나 있는 위치인지. 여선생은 한참이나 안절부절해 했다. 몇 번이고 괜찮다 말해주곤 여선생의 시간표를 확인했고, 눈에 들어차는 반 번호를 보자마자 여주는 인상을 찌푸렸다. 태형의 반이었다. 생리통이 심한지 책상에 파김치처럼 뻗어버린 여선생을 바라보다 여주는 한숨을 쉬며 교재를 챙겼다.
"그래서, 오늘은 황미영 선생님 말고 내가 들어왔으니까 수업 잘 하자. 알겠지?"
태형의 눈길을 애써 피하며 여주는 수업을 진행했다. 어찌 됐든 이 반이 가장 진도가 느렸으니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꼼꼼히 내용 하나하나를 짚어주며 수업을 끝낸 이후에 여주는 다소 빠르게 반을 빠져나왔다. 그러나 무용지물이었던 것이, 태형의 남자다운 보폭을 이겨낼 수가 없었다. 태형은 순식간에 여주를 잡아 세워 컴퓨터실로 이끌었다. 야, 김태형. 하고 불렀으나 태형은 듣지 않는 듯 했다.
"뭐하는 거야, 너."
"…왜. 더러운가 봐요?"
태형의 말에 입을 닫고 시선을 피하자, 태형은 억지로 여주의 볼을 잡아 제 쪽으로 올렸다. 이내 태형은 뺨을 두어 번 툭툭 치며 '정신 차려요, 선생님.'이라고 일렀다. 왠지 기분이 나쁜 말에 미간을 찌푸리며 태형을 흘겨보자, 태형은 오히려 샐쭉 웃어보였다. 왜, 교무실 사람들이 공주 취급해주니까 진짜 공주 된 것 같아? 그저 태형의 히스테리라고만 생각했던 여주는 태형의 말에 눈을 크게 뜨고 태형을 올려다보았다. 다 알고 있다는 눈치였다. 여주는 갑작스레 소름이 돋는 듯해 팔을 쓸었다.
"공주야."
"……장난 치지…."
"그 자리, 내가 만들었는데."
태형의 말에 잔뜩 굳은 여주는 갑작스레 머리가 핑핑 도는 기분에 눈을 질끈 감았다. 이내 태형의 비웃음이 귓등을 타고 들어왔다. 그 웃음에 더 소름이 돋는 기분이라 여주는 다시 눈물을 가득 달 수 밖에 없었다. 태형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여주의 얼굴을 쓸었다. 태형은 여주의 귓속으로 작게 속삭였다.
"이사장 아들이 누굴까."
"………."
"너, 내 손 안에 있다고."
태형의 여유로움에 결국 여주는 중심을 잃고 무너지고 말았다. 세상을 잃은 듯한 표정에 태형은 여주의 앞에 앉아 머리를 쓸어주었다. 왜 하필 난데. 왜 하필 나였는데. 여주의 한숨 섞인 절망의 말에 태형은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게, 나도 궁금해요. 여주의 볼을 찬찬히 쓸던 태형은 여주를 제 품을 안았다. 태형에게서는 고등학생보다 남성의 짙은 향이 났다.
"그냥 선생님 처음 볼 때부터 울리고 싶었거든."
태형은 여주의 작은 몸을 제 품에 꽉 안으며 왠지 모를 희열을 느꼈다. 제 조그만 행동에도 반항하던 여주가 드디어 제 새장 안의 카나리아가 된 기분이었다. 이내 태형은 천천히 여주의 뒷목에 키스를 했다. 다 가지게 해줄게요. 이내 태형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고등학교에서 쫓겨나면 다시는 학교라는 곳에 돌아오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선생을 천직으로 여겨오던 여주에게 남은 길은 하나 밖에 없었다. 몸을 떼어내는 태형을 바라보던 여주의 눈에 눈물이 맺히자, 태형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여주는, 태형의 깊은 키스에 제 손을 바닥으로 내렸다.
덧붙임
태형이 글을 드디어 끝맺음 했네요.
엉엉... 써놓고 제가 뭔가 써놓은 만큼 쓸 수가 없어서 끙끙댔던 글인데.
이삐들, 혹시 제 단편 글중에 텍본으로 갖고 싶은 글이 있나요?
알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