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에서 돌아온 뒤로는 너무 놀라서인지 열병이 나 끙끙 앓았다. 그 일이 있고나서는 권순영씨의 집에 있는 모든 수인들까지도 멀리하게 되었는데, 아무래도 내가 있던 세계에선 볼 수 없었던 것들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긴 모양이었다. 덕분에 병든 내 수발은 권순영씨가 맡게 되었다. 솔직히 이 사람도 같이 있는 것조차 꺼려졌는데 그나마 권순영씨가 제일 사람처럼 생겼기에 받아들이는 건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여담이지만, 족제비는 굉장히 상처받은 표정을 했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
“…….”
내 옆에서 물수건을 갈아주는 사람은 권순영씨라는 얘기다. 어젯밤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심신이 고단해서 까무러치듯 잠들었고 아침 또한 비몽사몽 일어났다가 권순영씨가 준 한약을 먹고 약기운에 잠이 들었다. 굉장히 정신없이 약기운으로 보낸 하루였다. 어느새 빠르게 다가온 저녁에 권순영씨는 저녁을 먹자며 몸을 일으켰다.
“저녁먹자.”
“…….”
“상 가져올게.”
전에 생각했듯 이곳에서 의지할 사람이라곤 권순영씨밖에 없었다. 저자의 일이 있고나선 겁에 질렸다. 잠을 잘 때도 권순영씨의 존재를 확인하고 나서야 잠에 들었고, 심지어 손에는 권순영씨의 도포끝자락을 말아 쥐어야 안정감이 들었다. 그 정도로 겁에 질린 상황에서 갑자기 그가 몸을 일으키자 심장이 쿵,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갑자기 그 초록색 괴물이 다시 나온다거나 그 비스 무리한 것들이 갑자기 이 집에 소리 소문 없이 들어와서 날 잡아먹으려 한다면, 더 최악의 상황으로 그 때 권순영씨가 내 옆에 없어서 구해주지도 못하면 어떡하지. 불쾌한 상상들 때문에 이미 눈가엔 눈물이 그렁그렁 매달렸다.
“..가지 마요.”
“…….”
그가 잠시간 날 뚫어져라 쳐다봤다. 얼굴은 이미 터질 듯이 화끈거렸다. 싫다고 빽빽 소리 지를 땐 언제고 가지 말라고 칭얼거리는 게 내가 생각해도 웃겼다. 저자의 일이 있고 나서 그가 좋아졌다는 건 절대 아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내가 겁에 질려서, 이건 정말 목숨이 달린 문제니까 그에게 매달리게 됐다. 진짜 기분 엿 같다. 내 몸 하나 스스로 지킬 수도 없고, 남 도움 없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가. 기분 진짜, ..별로다.
무안하기도 하고 우울하기도 한 그런 복합정인 감정은 내 눈물을 더 부추겼다. 그런 우울한 기분과 달리 그의 바람 빠지는 듯한, 그 픽-하는 소리를 내는 웃음은 꽤 기쁜 듯이 들렸다.
“오늘 왜 이렇게 어리광을 부릴까.”
“…….”
“아기같이.”
더 달아오를 수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얼굴은 계속해서 붉게 열이 올랐다. 열병이 난 탓도 있지만 단지 열병 때문만은 아닌 듯 했다.
그가 일으킨 몸을 내 앞으로 숙여 쭈그려 앉았다. 그리고는 약간의 미소서린 얼굴로 눈을 맞추며 느리게 입을 열었다.
“아가.”
“…….”
“대답해야지.”
“..싫어요.”
내 삐딱한 대답에도 그는 불쾌한 기색이 하나도 없었다. ‘혼자 있기 싫어?’ 다정함으로 싸맨 말투로 내게 물어오기에 고개만 한번 주억거렸다.
“약 먹어야지, 밥 먹으려면.”
정말 아기를 어르고 달래는 말투로 날 보챈다. 진짜 이상한 사람. 아파서 기운이 없어 말도 못하고 입술만 달싹였다. 열로 바싹 마른 입술 때문에 입을 여는 것조차 힘이 부쳤다. 그런 내 상태를 아는 모양인지 권순영씨는 네, 아니오처럼 고개를 끄덕이고 가로젓는 걸로 대답할 수 있는 물음을 건넸다.
“그럼 같이 갈까.”
“…….”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낮게 웃는 소리가 귀속을 울린다. 아프면 원래 이렇게 얌전해지나, 하고 중얼거리는 말에 고개를 푹 숙였다. 아까부터 사람 속 간지러운 말만 해댄다. 평소 같았으면 잔뜩 눈을 흘겼을 테지만 지금은 그럴 힘도 없다. 그가 내게 좀 더 어깨를 붙여온다. 내 엉덩이 바로 밑의 허벅지에 팔을 밀어 넣더니 단단히 받친다. 그리고는 들어올린다. 저번에는 공주님 안기더니 이번에는 정말 꼭 밥을 먹은 아기를 소화시키는 모양으로 안아 올렸다. 긴장감에 빳빳하게 굳은 몸을 느낀 건지 권순영씨가 흐흥, 하고 낮게 웃었다. 그 덕분에 내 볼 위로 그의 숨결이 훑고 지나가며 간지럽힌다.
“힘 빼고 기대도 괜찮아.”
“..싫어요.”
겨우 꺼낸 말은 틱틱거리는 말이다. 오늘 그에게 한 말이라곤 싫어요가 다인 것 같은 느낌. 이건 진짜 무슨 심보냐면, 절대 내가 당신을 좋아해서 어리광을 부리는 게 아니라는 것을 절대적으로 어필하려는 뭐 그런.. 하여튼 그런 류의 투정이었다. 투정이라기 보단 자존심을 위한 투쟁..?
투쟁은 굉장히 금방 끝났다. 왜냐면 진짜 몸이 힘들어서 몸을 빳빳하게 하는 것도 더 이상은 무리였다. 힘이 풀려 그의 어깨에 옆얼굴을 기댔다. 또 낮게 웃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그는 남은 손으로 내 이마에 손을 짚어 열을 한 번 더 잴 뿐이었다. 내가 아프긴 진짜 아픈 모양이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숨을 색색 내쉬면서 더운 김만 뿜어내는 걸 보면. 눈가에도 열이 올라 눈을 감았다. 아예 그를 향해 몸을 틀어 고개를 어깨에 파묻었다. 진짜 계속 설명하기도 억울한데, 진짜 몸이 힘들어서. 진짜로.
그런 내 움직임을 눈치 챈 권순영씨는 가만히 남은 손으로 등을 토닥였다. 잠깐 고개를 뒤로 빼 내 얼굴도 확인한 후에 다시 내 뒤통수를 지그시 눌러 다시금 어깨에 얼굴을 파묻게 했다. 생각 외로 다정한 몸짓에 의외라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여튼 느릿한 걸음으로 부엌에 도착했고, 권순영씨는 날 가만히 의자에 앉혀두지 않고 조리대 위에 앉혔다.
“……?”
물음표를 띄고 올려다보는 내게 권순영씨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미지근한 물을 유리잔에 따라 내게 건넸다. 주는 대로 안 그래도 목이 탔던 지라 물을 마시고는 꽤 입상태가 편안해져 아까보다는 수월하게 말을 물을 수 있었다.
“왜 여기에 앉혀요.”
“그냥.”
대답은 또 굉장히 무미건조하다. 맘 같아서는 진짜 완전 많이 째려보고 조리대에서 내려와 방으로 도망 가버리고 싶지만 혼자 있는 게 무섭기도 하고 힘도 없다. 그냥 그 말은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렸다. 그냥이라는 말도 뭐, 영양가 없어서 흘렸다고 하기도 뭐하지만.
그는 날 조리대에 앉혀두고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냥 저기서 당근을 가지고 와 죽에 넣는다든지 죽에 소금을 뿌리며 간을 본다든지, 그냥 요리를 할 뿐이었다. 왔다갔다 움직이다가 눈이라도 마주치면 아주 잠깐 눈꼬리를 접으며 눈인사를 할 뿐이었다. 구경하다가 그것도 무료해져 조리대 밑으로 늘어진 발을 앞뒤로 교차시키며 흔들거렸다. 꽤 부산스러웠던 소리가 멎어 옆을 돌아보자 나를 구경하고 있던 권순영씨와 눈이 마주쳤다.
“진짜.”
“…….”
“얌전하네.”
아까부터 자꾸 얌전하단다. 평소에도 짱 센 권순영씨가 무서워서 대들지도 않고 흘겨보고 쏘아보는 게 다였는데 그게 그렇게 억울했던 모양이다. 나 참.
그가 가까이 와서 손을 조리대에 얹는다. 팔 사이에는 내 무릎이 자리 잡고 있다. 꼭 그에게 갇힌 꼴이다. 갑자기 훅 다가온 그가 날 당황시킨다. 아니 무슨 밑도 끝도 없이 갑자기 예고도 안하고 오냐. 그렇다고 언짢은 건 아니었다. 이 사람은 그냥 뭐든 의도하지 않고 훅훅 치고 들어오는 사람이니까. 짜증나긴 하지만 받아들일 만은 했다. 그냥 멀뚱멀뚱 날 쳐다보는 권순영씨의 눈을 나도 그냥 마주보고 있었다.
“손.”
개도 아니고. 손, 하며 애완견 다루듯 하는 말투에 없던 힘을 모두 짜내 눈을 흘겼다. 그런 내가 웃긴 듯 또 피식 웃는다. 늘어진 내 손을 끌어당기며 소매를 내리고 글씨를 확인한다. ‘아직 잘 있네.’하는 말이 왜인지 아쉬운 투다. 그가 고개를 오른쪽으로 살짝 돌려 끓지 않은 죽을 확인한다. 죽 끓으려면 시간 좀 남았는데. 하며 눈을 맞춘다. 살살 눈웃음을 치는 모양새가 수상쩍어 엉덩이를 슬금슬금 뒤로 뺐다.
그의 눈치를 힐끗 보자 뭐가 웃긴지 아직도 눈을 동그랗게 휘며 웃고 있다. 그냥 뭔가 이런 상황이 즐거운 것처럼 보인다. 그러더니 안쪽으로 훅 치고 들어오더니
촉-
?!?!?!?!?
뽀뽀도 아니고 뭔가 촉-하고 왔다갔다. 아니, 존나.. 방금 혀가....
“…….”
진짜 결혼사기 당한 사람마냥 얼빠진 채로 있는데 권순영씨가 씨익 웃는다. 아니 시발.. 방금 전에 혀로 핥고 간 거 맞지. 착각이 아니라는 듯 약간 아랫입술에 아주 조금 촉촉하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당황해서 힘이 없다는 것도 잊어 늘어진 몸을 꼿꼿하게 일으켰다. 권순영씨는 장난스런 웃음으로는 대충 상황을 무마하려 들었다.
“저기요.”
“응.”
“방금 뭐한….”
“아.”
그는 모르는 체 하다가 이제야 눈치 챈 척 아,하고 작게 탄식했다. 그러더니 그냥 무시하고 끓고 있는 죽이 담긴 냄비 뚜껑을 들어 확인을 했다. 아니, 시발 진짜. 내 말 끝까지 안 들어. 짜증이 확 차올라 오른쪽 다리로 그의 허벅지를 찼다. 꽤 힘껏 찬 것 같은데 아무렇지도 않은 듯 날 힐긋 보고 끝이었다. 그러다가 중얼거리며 말 한마디를 뱉었다.
“어쩐지 말 잘 듣는다했어.”
“…….”
빨리 나았으면 좋겠다. 완전 힘차게 때릴 자신 있는데. 지금이야 이렇게 생각하지만 정작 권순영씨가 무서워서 때리지 못할 걸 알고는 있다. 열이 올라 붉어진 볼을 손으로 식히며 눈을 감았다. 죽이 보글보글 끓는 소리가 들린다. 권순영씨가 다가와 내 엉덩이 밑을 한손으로 단단히 감는 게 느껴져 눈을 뜨자 다른 한 손으로는 죽과 밑반찬이 담긴 작은 쟁반을 들고 있다. 힘 짱 세. 피식 웃음을 흘리자 권순영씨는 그저 그런 나를 한 번 돌아보고 끝이다. 이러고 어떻게 돌아가려나. 힘들 텐데. 권순영씨는 그런 내 걱정을 무시하듯 날 안은 팔의 손을 튕긴다. 그러자 슉, 내 방으로 금세 옮겨졌다.
“……?”
아무렇지도 않은 태연한 표정의 권순영씨가 황당하다. 아니, 아까는 안아들고 걸어가더니 지금은 무슨. 내가 빤히 쳐다보는 걸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권순영씨는 무시했다. 완전 프로무시러.
“그냥.”
“…….”
“아까는 얌전하니 귀여워서.”
“…….”
“지금은 무거워서.”
몰랐는데 생각보다 사람 속 긁는 거 잘한다.
.
.
.
그가 죽을 떠먹여 주는 걸 손을 쳐내고는 밥을 마저 먹었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권순영은 요리를 잘한다.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고역을 치르는 일은 없었으니. 밥을 먹을 때면 맞은편에 앉아 내 먹는 모습을 관음구경하는 권순영을 바라보자 갑자기 뭔가 뻘쭘해져 말을 걸었다.
“원래 겸상을 잘 안 하나 봐요?”
“아니. 하는데.”
“근데 왜 나 먹는 모습 구경해요?”
따끈한 죽을 먹으니 입이 풀리는 지 아까보다는 훨씬 편하게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아니면 아까 먹은 약기운이 돌아서일지도 모르고. 권순영씨는 고개를 삐딱하게 하고는 ‘네가 싫어하니까.’란다. 엥, 내가 그랬나. 밥을 먹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눈을 맞추자 픽 웃는다.
“너, 첫날에 완전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었잖아.”
맞긴 한데, 겸상이 싫어서 그런 건 아니었는데. 뭐 그렇게 받아들였으면 어쩔 수 없고. 무심하게 마지막 숟가락을 들어 그릇안의 죽을 싹싹 긁어 담았다.
권순영씨가 심드렁하게 묻는다.
“왜. 이제 밥 같이 먹을까.”
“아니요.”
“…….”
“제가 오늘 아파서 어리광 좀 부렸다고 착각 하지 마요. 지금 의지할 거라곤 권순영씨밖에 없는 거 아는데, 남 없이는 아무것도 못하게 만든 것도 권순영씨잖아요.”
“안 해, 착각.”
“그럼 됐고. 원래 아프면 제가 어리광부리는 타입이니까 조금만 받아줘요.”
“그래.”
정말 무미건조한 대화였다. 무언가 갑자기 우리 사이에 차가운 공기가 내려앉았다. 일부러 의도하고 한 말이니 이 분위기가 언짢거나 어색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를 상처 입힌 것 같아 조금 기분이 좋은 것 같기도 하고. 비록 그의 표정변화 없는 얼굴은 감정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요계 3
밤이 찾아왔다. 안 왔으면 좋겠는데. 어두워지자 긴장은 고조됐다. 낯선 것들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커진 것 같다. 아.. 씨, 얘네 밤 되면 막 흑화하고 각성하고 그러는 거 아니야? 오늘 밤은 혼자 자기가 무서워 옆에서 책을 읽고 있는 권순영씨를 힐긋 쳐다보았다. 존나 본새가 한량 같다. 저 비스듬히 반쯤 누운 모양새가 누가 봐도 기방을 드나들며 담뱃대가 손에 착 감겨있는 요계판 양아치같다고나 할까. 담뱃대 대신에 손가락 사이엔 책이 들려있지만.
“저 졸려요.”
먼저 선수를 쳤다. 약기운이 떨어지려고 하니 다시 눈가가 후끈 거리는 게 느껴져서 지금처럼 그나마 괜찮을 때 잠을 자두는 게 더 좋을 것 같았다. 아, 왜 선수를 쳤다고 했냐면 혼자 자기 무서워서.. 그는 책에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들어 올려 날 바라봤다. ‘그래. 그럼 잘래?’하고 묻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저 어디서 자요?”
“……?”
“어디서 자냐구요.”
그냥 존나 얼굴에 철판 깔기로 했다. 어차피 목숨은 하나인 거, 좀 쪽팔린 게 대수냐. 괴물 안 만나고 조용히 오늘 하루를 마감하면 그걸로도 감지덕지한 거지. 뻔뻔한 내 태도에 권순영은 웃음을 흘렸다.
“어디서 자긴.”
“…….”
“내 옆에서.”
아, 그런 것까지 바란 건 아니었는데. 자연스럽게 읽던 책을 머리맡에 두고 이불 안으로 들어가는 권순영씨를 보다가 에라, 모르겠다 하고 옆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작게 손튕기는 소리와 함께 방안이 어두워진다. 권순영씨의 어깨와 내 어깨가 맞닿아 옷에서 사부작거리는 소리가 난다.
“나 시끄러우면 잠 못자. 얌전히 있어.”
예민함을 잔뜩 뽐내는 그 말에 목석처럼 가만히 누워 있다가 색색 거리는 숨소리를 듣다 잠이 들었다.
손목이 간지러운 느낌에 눈을 떴다. 눈을 뜨자 내 눈 앞에는 권순영씨의 얼굴로 추정되는 희멀건한 게 있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기도 하고 잠에서 막 깨서 눈이 뻐근하기도 하고. 느리게 눈을 몇 번 깜빡이다가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자 권순영씨의 얼굴이 바로 보였다.
“..뭐에요.”
잠에서 막 깨서 내뱉는 말이 갈라졌다. 숨소리와 섞여서 색색거리는 목소리가 나온다. 포박당한 느낌에 고개를 돌리자 내 양 귀 옆으로 권순영씨에게 붙들린 손목이 보인다. 비척거리며 손을 빼내려고 하자 ‘쉬이-.’ 하며 권순영씨가 가만히 있으라는 듯 어른다.
와 씨, 기분 뭐지. 존나 홀린 것 같다. 진짜 말 그대로 홀린 것처럼 얌전해졌다. 내 자의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하여튼 권순영씨는 내 한쪽 손에서 소매를 끌어내리고는 제 이름 석자를 확인했다.
“읽어봐.”
“…궈, 권순영.”
손끝으로 내 손목을 쓸어내리길래 몸을 흠칫 떨었다.
“이거 봐. 글씨 옅어졌지.”
“…….”
어두운 공간에서 검은 글씨가 잘 보일 리가 없었는데 왜인지 권순영씨가 낯설어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시 새겨야겠네. 하고 중얼거린다. 아니 새기긴 뭘 새겨, 이 사람이 밤중에 술을 마셨나.
“좀, 비켜봐요.”
내 말에 권순영씨는 꿈쩍도 안했다. 알고는 있었지만 엄청난 똥고집. 그냥 포기하고 잠을 자려고 눈을 감자 권순영씨가 조용히 허락을 구했다. 속삭이면서, 그럼 새긴다?
“아니 새기긴 뭘 새,”
말을 하다 말고 입술이 턱 막혔다. 원래 제자리인 듯 자연스럽게 입술을 묻어와서. 말을 하다말고 입이 앙 다물어졌다. 아랫입술을 아프지 않게 앙앙 물던 권순영씨가 잠깐 입술을 뗐다.
“벌려봐. 입술, 조금만.”
헉 시발.. 미쳤다. 남사스러운 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몸을 움찔거렸다. 응? 하며 재촉하기에 어이가 없어서 ‘아니, 밤중에 돌았어요?’ 하고 쏘아붙이자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권순영씨가 입술 새를 갈라든다. 숨이 막혀 입이 벌어지자 권순영이 혀를 거칠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권순영씨가 감았던 눈을 반쯤 뜨며 입술을 떼어낸다. 내 볼에 제 입술을 부비다가 귓가로 내려가 속삭인다.
각인하고 싶어,
라고.
“!!!!!!!!!!!!!!!!!!!!!!!”
눈을 떴다. 헉 시발 꿈인가. 무슨 꿈이 이렇게 생생해, 존나 식스센스인줄. 놀란 가슴을 부여잡으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는 눈을 꿈뻑이며 옆을 살피자 권순영씨는 얌전히 색색거리며 잠을 자고 있었다. 하필 그런 꿈을 꿨다는 게 창피해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아! 진짜, 짜증나! 씨이.. 거친 숨을 내뱉으며 권순영씨가 깰까봐 차마 이불 하이킥은 하지 못하고 쪽팔림에 몸부림 치고 있자, 잠에서 깬 권순영씨가 날 따라 몸을 일으킨다.
“밤중에 뭐해.”
“…….”
실제로 마주하니까 더 쪽팔리다. 아니,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고개를 숙이고 중얼거리자 권순영씨는 뒷머리를 긁적이더니 내가 흐트러뜨린 이부자리 끝을 정리했다. 그리고는 날 끌어안고 누우며 ‘얌전히 자자.’ 한다.
꿈이 더 생생하게 떠오른다. 얼굴이 터질 것처럼 화끈거린다. 안겨있던 권순영씨의 가슴팍을 퍽 때리며 고래고래 소리를 내질렀다.
“꺼져!!!!”
“……?”
..하. 진짜 사라져버리고 싶다. 권순영씨는 반동으로 떨어졌던 몸을 다시 내게 밀착해 날 끌어안고는 뒤통수수를 가만가만 쓰다듬다가 이내 등으로 손을 옮겨 토닥였다.
“아프면 어리광 부린다더니 진짜네.”
“…….”
그런 게 아니라구요..
“받아준다고 했으니까 받아줄게.”
“..하아.”
“자장자장.”
시발, 진짜 수치스럽다. 그냥 눈뜨면 이것도 다 꿈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