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이석민 X 방송PD 너봉
" 나랑 사귈래요? "
실없는 소리 하실거면 일이나 도와주세요. 앞에서 헤실대며 웃는 너에게 대본을 가득 안겨놓고서는 물건 치우듯 옆으로 밀어놓았다.
어느새 온건지 앞서가는 내 옆에서서는 내게 들려있는 박스를 제가 들고서는 온갖 생색은 다낸다.
누가 들어달라고 했나.
" 내가 이거 들어줬으니까, 나 하나만 도와줘요. "
" ...뭔데요. "
" 내 주머니에서 핸드폰 좀 꺼내줄래요? "
이상한 사람이야, 진짜로.
그의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제가 들고있는 상자 위에 올려놓자 고개를 양 옆으로 저어보인다. 그거말고.
이사람이 진짜?
네 손위에 있던 박스위에 내 손을 탕탕, 치자 네가 나를 힐끗 쳐다보고는 막 웃어댄다.
" 웃겨요? 왜이래 오늘 약먹었어요? 약 먹을 시간이 지난건가. "
" 연애 처음해봐요? "
" 뭐라는거야. 도와줄거면 도와주고 아니면 가요, 좀. "
" 그럼 그 핸드폰에 번호 좀 찍어줘, 그럼 갈게. "
" 나랑 친해요? 왜 반말이야. "
친하다 못해 뜨겁게 사랑하는 사이지.
능글맞게 웃으며 내 어깨를 툭 치는 그를 보며 픽, 어이없는 웃음이 나왔다. 자꾸 아무말을 뱉어대는 그를 옆에서 빨리 떼어내고 싶었다.
왜 선배들은 이럴때 안부르고 꼭 나 혼자 있을때만 열차게 불러대는거냐고.
그의 핸드폰에 번호를 아무렇게나 누르고는 그에게 건넸다. 됐죠.
" 번호 이거 아니잖아? "
" 그쪽이 어떻게 알아요. "
" 이미 네 번호 있거든-.
내가 이 바닥에서 아는 사람이 몇 명인데. "
" 하, 그럼 왜 자꾸 쫓아다니는데?"
" 테스트, 테스트. "
소품창고에 다다라서야 그는 박스들을 내려놓고 대본까지 내 손에 다시 건넸다.
빨리 가요 이제. 툭 던진 내말에 네,네-. 하면서 내 머리에 손을 올려 꾸욱 누르더니 손을 흔들며 사라진다.
진짜로 약하는건가, 그런 소문은 들은 적 없는데.
그 뒤통수에 엿을 날릴까 하다가 괜한 짓이다 싶어 창고 문을 열고 박스를 던지듯 놓고는 퇴근길에 올랐다.
카톡,
정적이 감도는 버스 안에서 경쾌하게 울리는 알림소리에 핸드폰을 확인하자 이름 세글자가 뜬다.
[이석민] 내일 또 봐요
[이석민] 싫다해도 소용없어
[이석민] 내가 보러갈거니까
[이석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석민] (이모티콘)
[이석민] 잘자
내 번호 준 사람 누구야, 당장 나와.
***
아씨, 지각이다.
잠을 어떻게 잔건지 알람소리는 내 귀에 전혀 들리지 않았고 시간은 빠르게 지나 이미 8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채 마르지 않은 머리에서 물이 뚝뚝 흘러 입고있는 반팔을 다 적셔버렸다. 회색 티 입고왔으면 어쩔뻔했어.
겨우 잡은 택시에 목적지를 외치고는 그제서야 숨을 돌렸다.
내 친구들은 방송국에서 일하는 나를 부러워한다.
' 연예인 자주봐? 나 티켓 좀 구해다주라-. '
' 나 대기실 구경 좀 시켜주면 안되냐? 너 피디잖아, 피디! '
' 야, 나는 니 근무환경이 제일 부럽다. 너 하는 예능에 이석민 고정됐다며? 부럽다, 부러워-. '
핸드폰을 보고 파운데이션을 대충 찍어 바르다가 머릿속에 떠오른 이석민이라는 단어에 울화가 치밀어올랐다.
뭐? 겸보르기니? 이석민이 다정해? 미친거지.
무슨 타이밍인거지 택시기사 아저씨가 맞춘 라디오에는 이석민의 목소리가 때마침 흘러나왔다.
" 안녕하세요, 이석민입니다. 여러분, 혹시 그런 얘기 알고 계신가요? 여러분의-. "
" 몰라, 이새끼야. "
아차, 무의식중에 튀어나온 말에 택시기사 아저씨가 백미러로 나를 힐끔댔다.
나는 그래서 자연스러운 척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대며 통화하는 척을 했다.
그래-. 모른다고 임마. 어? 뭐라고?
택시기사 아저씨가 시선을 거두자마자 요란스럽게 핸드폰이 울려댄다. 전화왔어요, 전화왔어요-.
기사아저씨의 시선이 다시 내게 닿는다. 오늘 왜이러냐.
***
" 죄송합니다. "
" 혹시 너 지각이 취미냐? 아니면 뭐 장래희망이 방송국 짤리는거냐? "
" 아닙니다. "
오는 길에 차는 또 왜이리 막혔던 건지 정말 속에서 열불이나서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한바탕 잔소리를 듣고 이제 겨우 자리에 앉나 싶었는데,
" ㅇㅇ야, 내가 지금 바쁜 일이 있어서. 니가 SBC 라디오국에서 석민씨 좀 픽업해와라.
촬영장소 바뀌었다고 말씀을 못드려서, 미안-."
" 네-. 아니, 네? "
나도 바쁘다고 뭔가 핑계를 대고싶었지만 마땅히 할 일도 없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라디오국으로 향했다.
매니저도 없어? 아니 대체 매니저는 왜 안데리고 다니는거야?
이것도 나 엿먹으라는 수작인거야?
길가다가 편의점가서 오징어나 씹을까 생각하다가 겨우 참아냈다.
10분여를 걸어 도착한 타방송국의 건물에 들어서자 뇌리에 한가지가 스쳤다. 출입증도 없는데 어떻게 들어가.
그 앞에서 한참을 고민하다가 데스크에 사정을 얘기하자 못믿는 듯한 표정으로 기분나쁘게 나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 그 방송국 사원증이라도 있으세요? "
" 사원증이요? 있죠, 당연히! "
" 그럼 보여주세요, 확인되면 임시 출입증 발급해 드릴게요. "
" 아, 지갑에 있는데. 저 그냥 믿고 들여보내주시면-. "
" 안됩니다. "
뭐하냐, 여기서.
어디선가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제 얼굴을 다 덮을만한 마스크를 낀 그가 이쪽으로 걸어오고있었다.
저게 사람들 다보는데서 왜저래?
급히 데스크 직원에게 고개숙여 인사하고 가려는데 누군가가 내 어깨에 팔을 둘러왔고, 그의 향기가 훅 끼쳐왔다.
미친, 진짜. 왜이래.
" 또 오빠보고싶어서 왔구나? "
놀람과 당황의 조합으로 썩어들어가는 데스크직원의 표정을 뒤로하고 그는 나를 돌려세웠다.
얼굴에 철판을 깐건지, 약물 복용시간이 지난건지.
뭐가 어찌되었든 이석민은 미친게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