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d Ocean - K
달그락거리는 유리그릇 소리가 주방을 가득 메웠다. 결국 아픈 학연의 신경을 더 이상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판단 아래 좁은 부엌 안에 나란히 자리 잡게 된 재환과 택운이었다. 무엇을 해야 할 지 몰라 멀뚱히 스마트폰으로 요리법을 뒤지고 있는 재환과는 달리 제법 요리에 능숙한 택운은 냄비에 물을 붓고 죽을 끓일 준비를 했다. 재환이 그를 못마땅하다는 듯 바라보다 입가를 실룩였다. 왠지 다 된 밥에 택운이 끼어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모처럼 제가 선심써서 학연을 위해 죽을 만들어 주겠다는데, 정택운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깟 죽 끓이는 일을 내가 못할리가 있겠냐고. 재환의 째릿한 시선을 느낀 택운이 조용히 고개를 돌려 재환을 바라 보았다. -뭐. 택운의 입에서 특유의 미성이 흘러 나오자, 재환이 기다렸다는 듯 빈정대며 물었다.
" 왜 갑자기 차학연한테 집적대냐? "
" 뭐가. "
" 너 차학연이랑 아무 관계도 아니잖아. 귀찮은 거 딱 질색하는 정택운이, 남을 위해 죽까지 끓여주시겠다? "
" 그건 너도 마찬가지 아닌가? "
천하의 이재환이 일개 고용인을 위해 요리를 하시겠다니, 세상이 멸망하려나 봐? 국자를 들고 냄비 안을 휘휘 저으며 말을 잇는 택운의 모습에 재환이 날카로운 눈을 치켜 떴다. 정말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차학연과 정택운이 만났다는 사실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차학연은 끝까지 내 소속이어야만 한다. 내가 아닌 다른 것에 눈길을 돌리는 꼴이 싫다.
정택운과는 고등학교 때 꽤 친했던 사이였다. 소위 말하는 부자 학교, 명문 사립 학교를 다니며 유아독존의 시기를 보내던 재환에게 택운은 심기에 거슬리던 존재임과 동시에 충격적인 존재였다. 그 동안 재환의 말을 무시하거나 업신여긴 아이들은 없었다. 그러나 택운은 달랐다. 재환을 그 누구보다 편하게 대했으며,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진심으로 상대해 주었다. 그것이 시비를 거는 것이던, 약을 올리던 것이던 간에 재환에게는 충격적이었다. 나를 이렇게 대하는 사람이, 있긴 있구나- 하며. 어쩌면 고등학교 시절, 그 누구보다도 택운에게 많이 의존하며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난 후로는 이야기가 달라졌다. 재환과 택운이 각각 물려 받게 된 회사가 서로 경쟁을 하게 되었다. 라이벌 그룹, 라이벌 대표이사 등등의 호칭을 얻게 되자 자연스럽게 둘의 사이는 멀어졌고, 가끔 연락을 하게 되거나 회의장이나 연회장같은 공개적인 장소에서 만날 때면 자신들도 모르게 날카로운 말투로 빈정대기 일쑤였다. 그 동안 흐른 시간 때문이었다. 바쁜 일정에 쫒기고, 삶에 쫒기다 보니 고작 몇 년 우정이라는 것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 깨닫게 되었다. 누가 이 사회에서 이겨내느냐. 재환과 택운에게는 그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해졌다. 그 시절의 이재환과 정택운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생각에 잠긴 재환의 모습을 훑던 택운이 다시금 입술을 열었다. -야. 이재환.
" 너, 쟤 좋아하냐? "
" ... ... "
" 지금까지 봐 온 네 모습과는 너무 달라서. "
" ... ... "
" 신경 쓰여? "
" ..누가 신경이 쓰인다고! "
" 그럼, 안 좋아한다는 거네? "
그럼, 내가 쟤 좋아해도 되냐? 죽을 젓던 국자를 내려놓은 택운이 냄비 뚜껑을 닫고서 재환에게로 몸을 틀었다.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이야기하는 택운의 모습에서 장난기라고는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다. 재환이 아랫입술을 물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짜증이 솟구쳤다. 차학연을 좋아한다고? 정택운이? 대체 무엇 때문에..?
" 아, 하긴. 너한테 굳이 말 해야 할 필요는 없겠네. "
" ... ... "
" 너는 그냥 쟤 고용주일 뿐이니까. 연애사까지 참견 할 건덕지는 없잖아? "
" 네가 뭘 모르나 본데. "
" ... ... "
" 쟤, 내가 하라는 대로 해야 하는 새끼야. "
이리로 오라고 하면 와야 하고, 저리로 꺼지라고 하면 꺼져야 하는 새끼라고. 지장 꾹 찍었어, 그러기로. 두 쌍의 눈이 허공에서 진득하게 얽혔다. 재환의 손이 택운의 어깨를 밀어냈다. 국자를 손에 쥐었다. 냄비를 열고 휘휘 젓는다. 희뿌연 죽이 걸죽하게 회전했다. 사실, 지금 머리가 멍했다. 왠지 정곡을 찔린 기분이었다. 나는 정말로 차학연을 그렇게만 생각 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나는.. 차학연을.
"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
" ... ... "
" 네가 대신 죽 끓여 줘. 젓는 것 정도는 할 수 있겠지? "
" ..꺼질거면 빨리 꺼져. "
중요한 회의가 있다는 것을 깜빡하고 있었다.
택운이 힐끔 고개를 돌려 학연의 방 안을 바라 보았다. 그 새 잠이 들었는지 벽에 기대어 색색, 학연이 자고 있었다. 고개가 한 쪽으로 꺾인 그 모습이 왠지 귀여워서 택운이 살풋, 웃음을 흘렸다. 바닥에 놓여진 코트를 집어 든 택운이 학연의 몸 위에 그를 조심스레 올렸다. 구두에 발을 꿰어 넣고서 대문을 나섰다. 살이 에일듯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아, 추워.
" 야. 죽 먹어. "
죽을 한 그릇 올려놓은 조그마한 밥상을 품에 안은 채 발로 누워있는 학연을 툭툭 건드렸다. 앓는 소리를 내며 거부하는 학연에게 ' 안 일어나면 얼굴에 죽 부어 버릴 줄 알아. ' 라는 협박을 하는 재환 덕에 결국 학연은 자리에서 일어 날 수 밖에 없었다. 학연이 숟가락을 들었다. 뭔가 먹기가 두려웠다. 침을 꼴깍 삼키며 주위를 휘휘 둘러 보자, 재환이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저를 쳐다 보고 있었다. 아, 알았어. 빨리 먹을게. 인상을 찌푸린 채 입 안으로 죽 한 숟갈을 담는다.
" 어.. "
" ... ... "
" 마, 맛있어. "
재환이 무표정으로 그런 학연에게 약을 던졌다. 밥 먹고 약 먹어. 학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재환을 주시했다. 약을 던진 재환이 바닥에 눕고서 눈을 감았다.
" 나 피곤하니까, 한 시간 뒤에 깨워. "
" ... ... "
" 안 깨우면 죽는다. "
누가 재환 아니랄까봐, 차갑게 툭 내뱉고서 잠을 청하는 것인지 곧 조용해졌다. 학연이 죽을 먹다 말고 재환을 빤히 응시했다. 그 새 얼굴색이 많이 죽어있었다. 피곤에 찌들 만도 했다. 옆에서 누구보다도 가까이 재환을 지켜 봐 온 학연으로서는, 재환이 얼마나 힘든 일과를 보내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끊임 없이 이어지는 회의와 결제 서류, 그리고 갖가지 잡무들. 잠을 잘 틈도 없었을 것이다. 매일 매일, 재환은 그래왔던 것이다.
재환에게 품었던 서운함과 원망은 이미 훌훌 털어버린지 오래였다. 인정하기는 싫었지만, 애초에 재환의 얼굴을 본 그 순간부터 그 감정은 눈 녹듯이 사라졌다. 제 자신도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말이다.
" 추울텐데.. "
역시 피곤했던 것인지 금세 잠이 들어버린 재환이었다. 살금살금 그의 곁으로 다가간 학연이 제가 덮고 있던 이불을 끌어 재환에게 덮어주었다. 시린 자신의 집은, 매일 따뜻하게 지내왔을 재환에게는 잘 맞지 않을 테니까.
재환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본다. 잘 때는 정말 천사같은데.. 눈만 뜨면 그렇게 차가울 수가 없다. 픽, 힘 빠진 미소를 지은 학연이 바닥에 몸을 뉘였다. 두통이 여전히 머리를 강하게 찌르고 있었다.
이불을 덮지 않았음에도 춥지 않았다.
그 동안은 몰랐다. 누군가가 곁에 있다는 것이, 이렇게 따스하다는 것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누군가가 ' 재환 ' 이기에 더욱 따스한 것일지 모른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