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d Ocean - M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달리는 것을 멈추지는 않았다. 이미 해는 뉘엿뉘엿 산 너머로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붉게 노을 진 초저녁의 하늘이 학연의 머리맡으로 쏟아지듯 다가와 그의 발 밑으로 기다란 그림자를 늘어 놓는다. 차가웠던 바람마저 정적에 휩싸인, 쓸쓸한 길목을 그렇게 달렸다.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 동안 계속해서 내 자신을 부정해왔다. 그럴 리가 없어. 그래서는 안 돼. 그럴 수 없는 관계잖아, 이재환과 나는. 아버지의 죽음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이재환을, 내가..? 애써 복잡한 공식들을 머릿 속에 늘어 놓으며 한 없이 고민하고 고개를 도리질 쳤다. 그러나 답은 언제나 한결 같았다. 어째서 나는, 이재환을. 그를..
다리가 금방이라도 풀릴 듯 후들거렸다. 무릎에 손을 짚고 숨을 고르다 고개를 들면, 변함 없이 커다란 집이 우뚝 솟아 있다. 저가 그 토록 싫어하던, 그 토록 두려워하던 재환의 집이었다. 학연의 입에서 기나 긴 한 숨이 터져 나왔다. 그 때는 이 커다란 집이 그리도 무서웠는데, 지금 와서 보니 마치 폐허를 보는 듯 외로워 보이기만 하다. 재환이 지금 이 집 안에 있을까. 이 커다란 집 안에서, 혼자 무얼 하고 있을까. 내 머릿 속은 언제나 너로 가득 차 있었는데, 너는 어떠니. 너 또한 나의 생각을 하고 있을까.
터벅 터벅. 학연의 회색 컨버스가 커다란 집 만큼이나 큰 대문 앞에 멈추어 섰다. 망설이다 초인종을 눌렀다.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붉은 색의 버튼을 누르고, 딩동- 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인기척 없는 무반응이 이어질 때 까지. 공기 마저 멈춘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키게 한다. 학연이 또 다시 한 숨을 쉬었다. 집에 없는 건가. 허탈한 미소를 짓고 뒤를 돌다, 이내 아-. 하는 탄성을 질렀다. 아마 나의 기억 상, 재환이 유일하게 문 단속을 잘 하지 않는 곳이 있었다. 주거 침입 죄로 고소 하기라도 한다면 할 수 없는 노릇이겠지만, 어쩐지 강한 예감이 들었다. 재환은 지금 이 곳 안에 있을 것이다. 할 말을, 지금 이 순간 반드시 전하고 싶었다. 간절하게. 정말로 간절하게.
아니나 다를까. 오픈 된 테라스 쪽의 문이 살짝 열려져 있었다. 도둑이라도 들면 어쩌겠다는 거야. 걱정스러웠지만 지금 만큼은 그 허술함이 다행으로 다가왔다. 열려진 베이지 색 테라스 창문으로 주황빛 불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역시나, 재환은 안에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인기척을 내지 않는 점이 의아스러웠지만 듣지 못했거니 생각하고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신발을 벗어 가지런히 두고, 창문을 좀 더 열어 젖혔다. 몸을 우겨 넣어 거실에 발을 디딘 학연이 참고 있던 숨을 후욱-. 하고 몰아 쉬었다. 왠지 내가 도둑이 되어 버린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이재환, 집에 있는 게 맞겠지? 어디 있을까? 눈을 도륵도륵 굴리던 학연이 주먹을 불끈 쥐고서 발끝을 세웠다. 살금, 살금. 익숙하면서도 낯선 재환의 집 안을 천천히 배회하던 학연의 눈에 자주 보아 왔던 방문 하나가 잡혔다. 재환의 방이다.
똑똑.
주먹을 말아 쥐고 노크를 했다. 조금 더 크게 노크해도 역시나 무반응이었다.
큼큼. 들릴 듯 말 듯 작게 목을 가다듬은 학연이 이내 입술을 열었다.
" 저, 저기. "
…….
" 안에 있어? "
…….
" 할 말이 있어서 왔어. 멋대로 집에 들어와서 미안. "
왠지 허공에 홀로 소리치는 듯한 느낌이었다. 창피함에 머리 끝까지 붉게 달아오른 학연이 에라 모르겠다. 하며 문 고리에 손을 얹었다. 재환이 화를 내도 어쩔 수 없었다. 거부해도 어쩔 수 없다. 더 이상은 이 뭣 모를 감정 때문에 괴롭기는 싫었다. 마음을 한 번 가다듬고 다시 한 번 말했다. 들어갈게.
" ……아. "
힘 없는 학연의 목소리가 재환의 방 안을 가득 메웠다. 비 맞은 새끼 강아지 마냥 몸을 웅크리고 있는 저 사람이, 이재환 맞아? 침대 위에서 이불 조차 덮지 않은 채 파리하게 식은 얼굴로 죽은 듯 눈을 감고 있는 재환의 모습에 학연이 급히 달려갔다. 자신이 아팠을 때처럼, 그렇게 재환이 홀로 누워 있었다.
" 재환아. "
" ……. "
" 너 아파? "
……차학연? 별안간 재환의 눈이 뜨였다. 이미 풀릴 대로 풀려 버린 재환의 동공이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헤매다 가까스로 학연을 찾아 내었다. 내가 정신까지 어떻게 되어 버린 건가. 왜 내 눈 앞에 학연이 있을까. 정말로, 미쳐 버렸나 보다. 눈을 감고 있으면 학연의 생각이 나고, 잠이 들면 학연의 꿈을 꾼다. 그러더니 이제 환영까지 보인다. 김 빠진 미소를 자아 낸 재환이 다시 눈을 감았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이렇게 아파 본적도 되게 오랜만인 것 같은데. 체념하고서 다시 눈을 감고 잠을 청하려 했다. 그러나, 그를 비웃듯 방안에서는 다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줄곧 듣고 싶다 생각 해 왔던, 그 목소리가.
" 너, 나한테 옮은 거 아니야? "
" ……. "
" 재환아. 괜찮아? "
" 뭐야. 진짜 차학연? "
진짜 차학연이야? 재환이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순간 머리가 핑 돌았지만 그런 것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따박 따박 물었다. 너 어떻게 여기 들어왔어? 다그치는 듯한 재환의 음성에 학연이 습관처럼 두 눈을 데구르르 굴리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테라스 창문이 열려 있길래, 거기로 들어 왔어.
" 나 분명히 초인종 눌렀는데 답이 없길래! …할 말이 있어서 왔어. "
" 뭔데. "
" 잠깐만. 일단 누워. "
재환이 뭐라고 할 새도 없이 학연이 튀듯 방 문을 열고 나갔다. 그리고 30초 후 다시 헉헉대며 들어 온 학연의 손에는, 물에 적신 수건이 쥐어져 있었다. 재환이 어이 없다는 듯 웃었다. 간호라도 해주겠다는거야, 뭐야.
" 빨리 누워. 이거라도 올리고 있어. "
" 됐어. "
" 너 나 때문에 아픈 거잖아! "
미안하다는 듯 울먹이는 학연의 모습에 재환이 학연 모르게 슬쩍 웃었다. 알긴 아네, 내가 누구 때문에 아픈지. 그럼, 내가 뭐 때문에 이렇게 가슴이 졸여지는지도, 아냐? 아무 것도 모를 게 분명한 학연이 조금은 야속했다.
" 안 아프니까 빨리 말해. 할 말이 뭔지. "
" 그게. "
아니다. 차라리 잘 됐어. 나도 너한테 할 말 있었거든. 고개를 푹 숙이고 어쩔 줄 몰라하던 학연이 재환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할 말이라니?
아파 죽어 가도,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플 때도, 네 생각에 잠이 오지 않았다. 한참을 곰곰히 생각했다. 차학연을 향한 이 감정이 뭘까. 낯선 이 기분은 뭘까, 대체. 내 머리가 나쁘다고 생각 해 본 적은 지금까지 살아 오면서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이상하게 차학연에 관련된 것들에서는 사고회로가 정지 되는 것만 같다. 너는 복잡한 수학 문제 같다. 머리를 아프게 만들지만, 해답을 찾아 냈을 때 커다란 희열을 느끼게 해 주는 어렵고 복잡한 수학 문제.
아마 나는 그 문제의 답을 찾아 낸 것 같다. 이제서야.
" 차학연. 하루종일 네 생각만 했어. "
" 어? "
" 아마, 옛날부터 그랬어. 매일 매일. "
그러나 어쩌면, 애초부터 답이 정해져 있었던 아주 쉬운 문제.
" 항상 내 머릿 속에는, 네 생각 밖에 없었다고. 왜 그럴까? "
대체 왜 그럴까. 너와 나는 언제까지나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일 뿐인데. 아마 네가 빚을 다 갚을 때 까지 그것은 불변으로 적용될 텐데. 재환의 말에 정신이 멍해졌다. 가슴이 무언가에 세게 관통당한 것 같았다. 쓰렸다. 그리고 의문스러웠다. 나도. 하루 종일 네 생각 밖에 나지 않았다. 숨 쉴 때 마다 네 생각으로 머리가 지끈거리는데. 왤까.
아마, 이 감정은.
내 생각이 맞다면.
재환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겉돌았다. 정말 단단히 미쳤나 보다. 내가 뭐라고 말을 하는지, 차학연에게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하나도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 정신 없는 와중에도 붉게 물든 차학연의 얼굴이 귀여워 보였다. 아니, 예뻐 보였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이 느낌이 낯설지 않다는 거였다. 늘 느껴왔던 것처럼 익숙했다.
" 너는 어떠냐고. "
그렇다면.
" 차학연. "
너 또한.
학연의 눈동자와 재환의 눈동자가 공중에서 부드럽게 얽혔다. 왠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그냥, 복받혀 올랐다. 어쩌면 나는 재환이에게 생각보다 더 큰 감정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너의 입에서 나온 그 말을, 내 마음대로 해석해도 되는거니.
그렇다면.
그래, 나도. 나도 너를.
너를, 아마도 사랑하는 것 같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