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
- 영화 '건축 학개론' 中
'양
아
치
의
순
정'
11
우리는 고작
"......"
초등학생 이후로 처음 느껴보는 두근거림에 손에 쥐어진 6장의 답지를 뒤로 넘기지도 못하고 손 안에서 한참을 만지작 거렸다.
아.
그런 내 행동을 의아하게 바라보시는 선생님의 시선에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5장의 답지를 뒤로 넘겼다. 좋은 점수를 얻어야 겠다는 생각, 낯 간지러워 내 얼굴엔 그만 작은 미소가 그려지고 말았다.
집에 돌아간 후에도 새벽 세시까지 책을 부여잡고 잠을 자지 않았던게 용이였을까, 신기하게도 눈 앞에 정답인 양 번호들이 둥둥 떠다녔다.
'이거는 화자의 심정을 나타낸 시야, 알겠지? 밑에꺼랑 헷갈리면 안된다. 어?'
피곤함에 쩔어 있으면서도 머리까지 부여잡으며 내게 열변을 토했던 너. 고생이랑 고생은 다 한 너를 위해서라도 한없이 못난 난 기필코 좋은 점수를 얻어야 한다. 망설임 없이 펜을 움직였다.
"뭘 그렇게 좌절을 하냐, 니 인생 최고의 점수다 권순영."
"...진짜 3번으로 바꾸지만 않았어도."
처음보는 순영의 모습에 민규가 기가찬다는듯 고개를 저으며 순영의 시험지를 손에 들었다. 그리고 절규했다.
"미친 새끼야 왜 3번으로 쳐 바꾸고 지랄이야!"
"...난 끝났어."
저것만 안 바꿨으면 백점이였잖아! 민규가 가벼운 시험지를 순영의 머리 위에 휘날리듯 던졌다. 어느덧 시험은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내일 시험을 끝내는 기분이 어떠신가."
책상위에 교과서를 척척 쌓아 올리던 여주가 책상위에 굴러다니는 샤프를 잡아 마이크 마냥 순영의 입 앞에 갖다 대었다. 마이크 좀만 떼 주시겠어요? 시청자분들 고막 터지실 것 같은데. 이젠 능숙하게 받아쳐주는 순영의 모습에 여주는 배를 잡고 웃었다.
"마지막까지 열심하 하자."
"당연한 걸 물으세요."
"모르는 거 골라오셨나요."
난 사실 시험에 대한 징크스가 있다. 순영이는 절대 모르는.
'골라왔죠. 어! 나 이거 진짜 모르겠어.'
순영이를 만나기 전, 종종 순영이처럼은 아니지만 내게 간간히 도움을 던지는 아이들이 있었기에, 나는 내 시간까지 쪼개가며 열정적으로 설명을 해주던 때가 있었다. 한 1년전?
'봐봐, 내가 이 부분은 뭐라고 했었지?'
아이들을 알려주면, 나도 공부되고, 아이들도 공부되고. 일석이조라고 생각했었다.
'아, 공집합!'
'오, 그렇지.'
근데 정작 받는 시험점수는, 내가 아닌 나의 설명을 받던 아이들이 올랐고, 난 저번 시험 점수의 반타작 점수를 받아 왔었다. 그때서부터였다. 누군가에게 도움따윈 주지 않겠다는 나의 이기심이.
근데 뭘 어떡해.
문제 하나 맞췄다고 기뻐하는 권순영 얼굴이 좋다는데.
권순영이 웃으면 내 세상이 밝아진다는데, 뭘 어떡해.
침착해라 권순영. 축축해져오는 손바닥을 애써 교복바지에 문댔다. 마지막 기회라는 압박감인가, 좀 처럼 문제가 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끙끙대기만 한참이였을까, 고작 15분 밖에 남지 않은 시간에 입술을 툭툭 깨물었다.
'많은 걸 바라지는 않아,'
'내가 가르쳐 준 만큼의 점수를 기대하지도 않아.'
'너가 노력했다는건 내가 제일 잘 알잖아?'
'순영아, 걍 최선을 다 해. 그럼 돼.'
샤프 뒤를 탁탁 깨물며 웃어오던 너의 모습이 선했다.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다시 한번 펜을 들었다. 좋은 점수도 좋지만, 낮은 점수면 어때. 난 이제 19살인데. 10분 가량 남은 촉박한 시간에도 순영은 작은 미소를 지었다.
야, 앉아 종례 한다잖아! 빨리 놀고 싶음에 지친 아이들이 하나 둘씩 소리치기 시작했다. "야, 피시방 갈꺼지?" 민규의 물음에 순영의 눈은 엉뚱하게 근처에 앉아 있는 여주를 향했다.
아 거기 맛 없다니까. 친구들과의 대화에 정신이 팔린 모습에 순영은 작게 웃음을 뱉었다.
"...어쩌겠냐, 김여주님께서 시간이 없어 보이시는데."
"오랜만에 둘이 가게 생겼네."
민규의 말에 순영이 고개를 돌려 민규를 바라보았다. ...왜, 뭐. 느껴지는 시선에 핸드폰에서 눈길을 돌린 민규가 저를 빤히, 아무 말 없이 바라보는 순영에 당황함을 머금었다.
"...아."
"......"
"...어쩌다보니까, 나도 걔네랑 연락 안...하고 지내게 됐어."
굳이 너 때문에 그런건 아니고, 아 모르겠다. 괜히 뒷목을 긁던 민규가 이내 다시 핸드폰을 투둑거리며 애써 화제를 돌렸다. 뭐 먹으러 갈래.
"치킨 먹을래? 아 맞다 그 부동산 옆에 곱창집 생겼더라. 아씨, 뒤졌네."
"......"
민규야, 너 귀 빨개. 말하면 난리 치겠지. 아예 핸드폰 속으로 들어갈 것 같은 민규의 모습에 순영은 남몰래 작은 미소를 지었다.
우린 고작 19살이기에 단순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