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치 노래가 먼저 나온다면 ↑이거 먼저 틀어주세요 젭알.간절히 부탁.)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 - 영화 '건축 학개론' 中 '양 아 치 의 순정' 13이 밤의 끝에서 산을 오르고 올라, 도착한 숙소엔 다들 짐도 풀지 않고 지쳐 하나둘씩 드러눕기 시작했다. "아아-" 앓는 소리가 넓은 거실을 울렸다. 한참을 천장만 바라보며 가쁜 호흡을 고르고 있었을까, 어느덧 정신을 차린 아이들이 하나 둘 몸을 일으켜 신이 나 펜션을 둘러보기 시작했다.눈 맞은 강아지들 마냥 이리저리 넓은 숙소를 뛰어다니는 모습들이 퍽이나 웃겨 자리에 앉아,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지도 않고 헛웃음을 흘렸다. 똑똑. 정갈하게 울려퍼지는 노크 소리에도 2층으로 넘어 올라간 아이들 대신 뻐근한 몸을 일으켜 문을 열었다. "......""...현수가 점심밥 먹을꺼래. 너가 여자애들 데리고 나와야 될 것 같아.""...어."할 말이 끝났음에도 돌아가지 않는 모습에 문고리만 잡은체 눈을 깜빡 였을까, 뒷머리를 매만지던 녀석이 코를 작게 긁적거렸다."이따가 밥.""......""...내 옆으로 와서 먹어."가을치고 추운 날이였다. 얼어 빨개져 있던 볼에 다른 의미의 상기가 시작되었다."...천천히 좀 먹어라."나의 말에도 불구하고 점점 더 빨라지는 속도에 혀를 끌끌 차며 그 앞에 물이 담긴 컵을 놓았다. 밥을 먹는 도중 건물 안에 실내 수영장이 있다는 민수의 말에 너도 나도 애 마냥 입에 밥을 쑤셔넣기 시작했기 때문이다."여주야, 너 근데 검정티 있어?""왠 검정티."쌩뚱맞은 소리에 젓가락을 입에 물자, 크게 고기를 입에 넣은 주연이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비치잖아."...아." 긍정의 대답을 하진 못하고 탄식만 내질렀을까, 주연이가 그저 못 산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야 권순영! 너 혹시 검정티 챙겼어?""어."그럼 나 좀 빌려줘! 애교섞인 혜지의 말에도 그저 입안에 담긴 음식만 우물거리던 권순영이 무심히 숟가락으로 어느덧 바닥을 보이는 접시를 싹싹 긁으며 말했다. 싫어. "여주 입혀야 돼." 생각보다 깊은 수영장에 권순영이 건네 준 검정티를 입은 체(안 입으면 자기 안 간다고 협박함) 발만 첨벙거리고 있었을까, 갑자기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드니 물개 마냥 흠뻑 젖어 날 보고 웃고 있는 김민규가 보였다. 불길한 기운에 어색하게 웃으며 슬슬 몸을 뒤로 뺏지만 나보다 상대적으로(누가봐도) 팔이 긴 김민규에게 발목이 잡히고야 말았다. "…야, 안돼 진짜 김민규 안돼 제발!""뭐가 안 됩니까, 뭐가." 간곡한 여주의 부탁을 가볍게 무시하고 여주를 어깨에 거꾸로 얹은 체 수영장 물 속을 이러저리 활보 하는 민규에 아이들이 하나 둘씩 흥미를 가지고 그 둘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오지마 개새끼들아 오지마! 수영장 넓게 울려 퍼지는 여주의 말을 가볍게 웃어 넘기는 아이들이였다. 개새끼들. 물은 키가 큰 민규에도 불구하고 민규의 가슴팍까지 차올라 있었다. 물이 무섭다는 여주의 말에도 불구하고 민규는 팔에 힘을 풀어 그대로 여주를 물 속에 빠뜨렸다. 망했다. 내 예상대로 바닥에 발이 닿지 않았다. 팔 다리를 허우적 거려봤지만, 수중 위로 올라가기는 개뿔. 오히려 애들이랑 멀어져가는 기분이 들었다. 물 속에서 미세하게 아이들의 웃음 소리가 들렸다. 겁이 난 탓일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뭐야, 쟤 누구야?" 음료수를 잔뜩 안고 돌아 온 순영이 수민에게 물었다. 쟤? 여주. 사태에 심각성을 모르는 아이들이 웃으며 말했다. 야! 김여주 빨리 올라와! 다르게 순영의 얼굴은 굳어 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새끼들아 뭐하고 있어 김여주 빠졌잖아! 한아름 안고 있던 음료수들이 바닥으로 곤두박칠 치며 그대로 순영은 물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어쩔 줄 모르고 눈을 질끔 감은 체 주먹만 꽉 쥐고 있는 그 몸을 물 속에서 안아 올렸다. 콜록거리는 소리 사이로 간간히 흐느낌이 있었다. "…응, 여주야 괜찮아." 제 어깨를 꽉 쥐고 있는 손에 일단 여주를 안은 체 물을 헤쳐 구석으로 발을 옮겨 굳어 있는 몸을 좀 더 높게 올렸다. 제 등을 토닥이며 괜찮다는 순영의 말에 어느정도 정신을 차린 여주에게 아이들이 달려왔다. 미안해 죽겠다는 민규의 표정에 그제서야 긴장이 풀린 여주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지금 웃음이 나오지. 말은 그렇게 하면서 자기도 그제서야 긴장이 풀렸는지 작은 미소를 짓는 순영에 여주가 젖은 그의 머리를 작게 털었다. 고마워. "솔직히 아까 낮에 설렜지.""뭐?""권순영 말이야." 비누 냄새 가득한 화장실에서 젖은 머리를 털며 나온 여주에게 아이들의 시선이 쏠렸다. 얘네 또 시작이네. 거실 한 가운데에 앉으며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흘리는 여주에 자기들이 더 난리를 피우며 소리를 질렀다. 허리를 단단하게 받치던 팔, 공포심에서 헤어나오지 못할때 귓가에서 조용히 다독여줬던 목소리. 왠지 모르게 화끈 거리는 얼굴에 제 감정을 인정하려 입을 열려는 순간. "…솔직히 권순영 멋있지 않냐." 두 볼이 여주의 눈에만 보이게 살짝 상기 된 나혜의 입이 열렸다. "사실 나도.""멋있긴 하더라." 벌린 입술이 어정쩡하게 멈춰졌다. 난 사실 권순영 좋아하는데. 혜지의 목소리였다. 들 뜬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마냥 같이 좋아해 줄 수 없었다. 그래서 미안했다. 수줍은 혜지의 얼굴, 여자가 봐도 예쁘장한 얼굴이였다. 혜지는 부럽도록 감정에 참 솔직했다. 아무 소리 내지 못하는 입술이 부끄러워 깨물었다. 야, 남자애들 불러올래? 아이들이 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의 눈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지, 그 얼굴이 그려지는 것 같아 고개를 숙여 쓴 웃음을 지었다. 언제 누군가 그랬었다. 아이들의 마음을 털어보면 비로서 보이는건, 반장인 민수도, 빼어나게 얼굴이 잘생긴 민규도 아닌 권순영이라고. "……"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들어오는 아이들 사이에서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옆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도,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어디 아파? 조용히 귓가를 속삭여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그제서야 고개를 들었다. "아직도 진정이 안됐어?""아니야, 괜찮아." 애써 입꼬리를 올려 웃어보았다. 피곤해서 그래, 피곤해서. 이어지는 여주의 말에 순영이 축축히 젖은 여주의 머리를 살살 털어주며 말했다. 너무 피곤하면 들어가서 자. 걱정하지 말라는듯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는 여주의 모습이 이뻐보며 그제서야 순영은 여주를 따라 웃음을 지었다. 순영의 미소에도 여주는 기분 좋게 웃을 수가 없었다. "진실 게임 할래?""아이고, 식상해라." 순영이 빈 페트병으로 바닥을 두들기며 은지를 놀렸다. 야, 그럼 너가 정해봐. 주먹을 쥔 은지의 반응에 킬킬대던 순영이 마이크 마냥 페트병을 잡고 입을 열었다. 자! 그럼 진실 게임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뭐야 권순영!" 장난끼 가득한 아이들의 비난속에서 순영은 에라 모르겠다. 페트병을 힘차게 바닥에 돌렸다. 페트병의 끝은 지루함에 턱을 괴고 앉아있던 민규를 가리켰다. 뭐야, 나야? "내가, 내가 질문할래.""……""우리반에 좋아하는 사람 있지." 뻔한 세진의 질문에 민규가 코웃음을 쳤다. 쟤 없는데. 다 안다는듯 웃으며 작게 중얼거리는 순영에 여주가 턱을 괸 체 민규를 바라보았다. 피곤함 때문인가, 살짝 풀린 여주의 눈과 민규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어, 있어." 김민규가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잠이 확 달아나는 기분이였다. 할 말을 잃은체 자신을 바라보는 여주의 시선을 못 느낀건지, 민규는 양 옆에서 제 어깨를 잡아오며 난리를 피우는 제 친구들에 시선을 돌려 그저 장단을 맞춰 줄 뿐이였다. 당황스러운건 여주 혼자만이 아니였다. 순영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분명 민규의 눈이 여주에게 향해 있었다. 당황스러움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여주의 모습. 순영의 손에 살짝 주먹이 쥐어졌다. "야, 다시 돌린다." 애꿎은 입술을 깨물었다. 페트병은 여주를 가리킨 체 정확히 멈추었다. 내가 할래. 민규가 손을 번쩍 들었다. 순영의 얼굴에서 미소는 사라진지 오래였다. "너도 좋아하는 사람 있지." 놀란 토끼눈으로 김민규를 바라보았다. 저새끼 대체 무슨 생각으로…. 당혹함에 입술을 가만히 냅두지 못하는 여주에 민규가 남들 몰래 작게 입을 움직였다. '야, 그냥 말 해.' 민규가 또 다시 한쪽 눈을 감았다 떳다. 여주의 입에서 헛웃음이 나왔다. 김민규 진짜. 그제서야 작게 미소를 지은 여주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 강하게 느껴지는 시선에도 여주는 쉽사리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그렇게 넘어간 순서에도 순영은 그 시간 내내 여주만을 바라보았다. 페트병의 끝이 순영을 가리켰다. 일제히 아이들의 눈에서 빛이 나기 시작했다. 제 친구들의 눈치에 마지못한 척 혜지가 손을 들고 입을 열었다. …내가 물어볼래. "여기에 좋아하는 사람, 있어?" 두 무릎을 끌어안고 숨을 죽였다. …있다고 하면 난 어떡하지. 두려움에 입술을 깨물었다. 고개를 들어 혜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바보 마냥 겁만 잔뜩 먹은 누구와 달리 확신으로 가득 찬 두 눈을 마주하는 순간, 설명할 수 없는 자괴감에 빠졌다. "어." 무릎을 끌어안은 팔에 힘이 풀렸다. 녀석의 마음을 모를 정도로 눈치가 없는건 아니였다. 여전히 느껴지는 시선 뒤로 난 환하게 밝아지는 혜지의 인상을 택했다. 모두가 잠들고도 남은 시간 새벽 3시였다. 통 오질 않은 잠에 바람이라도 쐬야 하나 싶어 두툼한 패딩을 입고 밖으로 나왔다. 고개를 젖혀 바라 본 하늘엔 수많은 별이 박혀 있었다. 가장 빛나는 별 하나로 주변에 작은 별들이 득실거렸다. 저 멀리 동 떨어진 곳에 개미 눈꼽만한 별이 보였다. 작은 한숨과 함께 옮긴 발걸음은 1분 만에 그 움직임을 멈췄다. "있잖아." 흐릿하지만 혜지의 목소리였다. 본능적으로 벽 뒤에 몸을 숨겼다. 한참을 그러고 있었을까, …이게 뭐하는 짓인가. 하는 생각에 다시 몸을 돌리려는 순간, 선명하게 들려오는 목소리가 내 발목을 잡았다. "나 추운데." 권순영이였다. 뒤로 수줍게 웃으며 미안하다는 혜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있잖아, 순영아.""……""좋아해." 별로 놀랍지도 않았다. 알고 있었으니까, 혜지는 언젠간 권순영에게 마음을 전할껄 알고 있었으니까. 지금아 아니라 내일이였다 해도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내일이였다 해도 난 누구처럼 마음을 전 할 용기조차 없는 겁쟁이일게 분명하니까. 그래도 살살 퍼지는 씁쓸함은 어쩔 수 없나 보다. "미안.""…어?""난 너 안 좋아해." 발을 세워 운동화코로 바닥을 쿡쿡 찔렀다. 물기 가득한 코를 들이 마셨다. "여주 좋아해, 난." 애꿏은 돌멩이를 약하게 밟았다. 녀석의 마음을 모를 정도로 눈치가 없는건 아니였다. 찬 바람 때문일까, 텁텁하게 마른 입술을 깨물었다. 뒤로 흐느끼는 혜지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또 다시 빠져드는 자괴감에 고개를 떨궜다. 난 너에게 줄 수 있는게 아무 것도 없었다. 받을 자격도, 줄 자격도 되지 않았다. 줄 수 있는 단 한가지 마음? 난 너의 마음 앞에 서면 너의 마음에 백 분의 일도 되지 않았다. 가장 빛나는 별 하나로 주변에 작은 별들이 득실거렸다. 저 멀리 동 떨어진 곳에 개미 눈꼽만한 별이 보였다. 넌 별이였다 순영아, 내가 너와 어울릴 수 있을까. 이게 너의 마음에 대한 나의 답이다. 더보기늦게 온 만큼 길게... 안 길...어..?
(다비치 노래가 먼저 나온다면 ↑이거 먼저 틀어주세요 젭알.간절히 부탁.)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
- 영화 '건축 학개론' 中
'양
아
치
의
순
정'
13이 밤의 끝에서
산을 오르고 올라, 도착한 숙소엔 다들 짐도 풀지 않고 지쳐 하나둘씩 드러눕기 시작했다. "아아-" 앓는 소리가 넓은 거실을 울렸다. 한참을 천장만 바라보며 가쁜 호흡을 고르고 있었을까, 어느덧 정신을 차린 아이들이 하나 둘 몸을 일으켜 신이 나 펜션을 둘러보기 시작했다.눈 맞은 강아지들 마냥 이리저리 넓은 숙소를 뛰어다니는 모습들이 퍽이나 웃겨 자리에 앉아,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지도 않고 헛웃음을 흘렸다. 똑똑. 정갈하게 울려퍼지는 노크 소리에도 2층으로 넘어 올라간 아이들 대신 뻐근한 몸을 일으켜 문을 열었다.
"......""...현수가 점심밥 먹을꺼래. 너가 여자애들 데리고 나와야 될 것 같아.""...어."할 말이 끝났음에도 돌아가지 않는 모습에 문고리만 잡은체 눈을 깜빡 였을까, 뒷머리를 매만지던 녀석이 코를 작게 긁적거렸다."이따가 밥.""......""...내 옆으로 와서 먹어."가을치고 추운 날이였다. 얼어 빨개져 있던 볼에 다른 의미의 상기가 시작되었다."...천천히 좀 먹어라."나의 말에도 불구하고 점점 더 빨라지는 속도에 혀를 끌끌 차며 그 앞에 물이 담긴 컵을 놓았다. 밥을 먹는 도중 건물 안에 실내 수영장이 있다는 민수의 말에 너도 나도 애 마냥 입에 밥을 쑤셔넣기 시작했기 때문이다."여주야, 너 근데 검정티 있어?""왠 검정티."쌩뚱맞은 소리에 젓가락을 입에 물자, 크게 고기를 입에 넣은 주연이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비치잖아."...아." 긍정의 대답을 하진 못하고 탄식만 내질렀을까, 주연이가 그저 못 산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야 권순영! 너 혹시 검정티 챙겼어?""어."그럼 나 좀 빌려줘! 애교섞인 혜지의 말에도 그저 입안에 담긴 음식만 우물거리던 권순영이 무심히 숟가락으로 어느덧 바닥을 보이는 접시를 싹싹 긁으며 말했다. 싫어.
"여주 입혀야 돼."
생각보다 깊은 수영장에 권순영이 건네 준 검정티를 입은 체(안 입으면 자기 안 간다고 협박함) 발만 첨벙거리고 있었을까, 갑자기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드니 물개 마냥 흠뻑 젖어 날 보고 웃고 있는 김민규가 보였다. 불길한 기운에 어색하게 웃으며 슬슬 몸을 뒤로 뺏지만 나보다 상대적으로(누가봐도) 팔이 긴 김민규에게 발목이 잡히고야 말았다.
"…야, 안돼 진짜 김민규 안돼 제발!"
"뭐가 안 됩니까, 뭐가."
간곡한 여주의 부탁을 가볍게 무시하고 여주를 어깨에 거꾸로 얹은 체 수영장 물 속을 이러저리 활보 하는 민규에 아이들이 하나 둘씩 흥미를 가지고 그 둘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오지마 개새끼들아 오지마! 수영장 넓게 울려 퍼지는 여주의 말을 가볍게 웃어 넘기는 아이들이였다. 개새끼들. 물은 키가 큰 민규에도 불구하고 민규의 가슴팍까지 차올라 있었다. 물이 무섭다는 여주의 말에도 불구하고 민규는 팔에 힘을 풀어 그대로 여주를 물 속에 빠뜨렸다.
망했다. 내 예상대로 바닥에 발이 닿지 않았다. 팔 다리를 허우적 거려봤지만, 수중 위로 올라가기는 개뿔. 오히려 애들이랑 멀어져가는 기분이 들었다. 물 속에서 미세하게 아이들의 웃음 소리가 들렸다. 겁이 난 탓일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뭐야, 쟤 누구야?"
음료수를 잔뜩 안고 돌아 온 순영이 수민에게 물었다. 쟤? 여주. 사태에 심각성을 모르는 아이들이 웃으며 말했다. 야! 김여주 빨리 올라와! 다르게 순영의 얼굴은 굳어 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새끼들아 뭐하고 있어 김여주 빠졌잖아! 한아름 안고 있던 음료수들이 바닥으로 곤두박칠 치며 그대로 순영은 물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어쩔 줄 모르고 눈을 질끔 감은 체 주먹만 꽉 쥐고 있는 그 몸을 물 속에서 안아 올렸다. 콜록거리는 소리 사이로 간간히 흐느낌이 있었다.
"…응, 여주야 괜찮아."
제 어깨를 꽉 쥐고 있는 손에 일단 여주를 안은 체 물을 헤쳐 구석으로 발을 옮겨 굳어 있는 몸을 좀 더 높게 올렸다. 제 등을 토닥이며 괜찮다는 순영의 말에 어느정도 정신을 차린 여주에게 아이들이 달려왔다. 미안해 죽겠다는 민규의 표정에 그제서야 긴장이 풀린 여주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지금 웃음이 나오지. 말은 그렇게 하면서 자기도 그제서야 긴장이 풀렸는지 작은 미소를 짓는 순영에 여주가 젖은 그의 머리를 작게 털었다. 고마워.
"솔직히 아까 낮에 설렜지.""뭐?"
"권순영 말이야."
비누 냄새 가득한 화장실에서 젖은 머리를 털며 나온 여주에게 아이들의 시선이 쏠렸다. 얘네 또 시작이네. 거실 한 가운데에 앉으며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흘리는 여주에 자기들이 더 난리를 피우며 소리를 질렀다. 허리를 단단하게 받치던 팔, 공포심에서 헤어나오지 못할때 귓가에서 조용히 다독여줬던 목소리. 왠지 모르게 화끈 거리는 얼굴에 제 감정을 인정하려 입을 열려는 순간.
"…솔직히 권순영 멋있지 않냐."
두 볼이 여주의 눈에만 보이게 살짝 상기 된 나혜의 입이 열렸다.
"사실 나도."
"멋있긴 하더라."
벌린 입술이 어정쩡하게 멈춰졌다. 난 사실 권순영 좋아하는데. 혜지의 목소리였다. 들 뜬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마냥 같이 좋아해 줄 수 없었다. 그래서 미안했다. 수줍은 혜지의 얼굴, 여자가 봐도 예쁘장한 얼굴이였다. 혜지는 부럽도록 감정에 참 솔직했다. 아무 소리 내지 못하는 입술이 부끄러워 깨물었다.
야, 남자애들 불러올래? 아이들이 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의 눈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지, 그 얼굴이 그려지는 것 같아 고개를 숙여 쓴 웃음을 지었다. 언제 누군가 그랬었다. 아이들의 마음을 털어보면 비로서 보이는건, 반장인 민수도, 빼어나게 얼굴이 잘생긴 민규도 아닌 권순영이라고.
"……"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들어오는 아이들 사이에서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옆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도,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어디 아파? 조용히 귓가를 속삭여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그제서야 고개를 들었다.
"아직도 진정이 안됐어?"
"아니야, 괜찮아."
애써 입꼬리를 올려 웃어보았다. 피곤해서 그래, 피곤해서. 이어지는 여주의 말에 순영이 축축히 젖은 여주의 머리를 살살 털어주며 말했다. 너무 피곤하면 들어가서 자. 걱정하지 말라는듯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는 여주의 모습이 이뻐보며 그제서야 순영은 여주를 따라 웃음을 지었다. 순영의 미소에도 여주는 기분 좋게 웃을 수가 없었다.
"진실 게임 할래?"
"아이고, 식상해라."
순영이 빈 페트병으로 바닥을 두들기며 은지를 놀렸다. 야, 그럼 너가 정해봐. 주먹을 쥔 은지의 반응에 킬킬대던 순영이 마이크 마냥 페트병을 잡고 입을 열었다. 자! 그럼 진실 게임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뭐야 권순영!" 장난끼 가득한 아이들의 비난속에서 순영은 에라 모르겠다. 페트병을 힘차게 바닥에 돌렸다. 페트병의 끝은 지루함에 턱을 괴고 앉아있던 민규를 가리켰다. 뭐야, 나야?
"내가, 내가 질문할래."
"우리반에 좋아하는 사람 있지."
뻔한 세진의 질문에 민규가 코웃음을 쳤다. 쟤 없는데. 다 안다는듯 웃으며 작게 중얼거리는 순영에 여주가 턱을 괸 체 민규를 바라보았다. 피곤함 때문인가, 살짝 풀린 여주의 눈과 민규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어, 있어."
김민규가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잠이 확 달아나는 기분이였다. 할 말을 잃은체 자신을 바라보는 여주의 시선을 못 느낀건지, 민규는 양 옆에서 제 어깨를 잡아오며 난리를 피우는 제 친구들에 시선을 돌려 그저 장단을 맞춰 줄 뿐이였다. 당황스러운건 여주 혼자만이 아니였다.
순영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분명 민규의 눈이 여주에게 향해 있었다. 당황스러움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여주의 모습. 순영의 손에 살짝 주먹이 쥐어졌다.
"야, 다시 돌린다."
애꿎은 입술을 깨물었다. 페트병은 여주를 가리킨 체 정확히 멈추었다. 내가 할래. 민규가 손을 번쩍 들었다. 순영의 얼굴에서 미소는 사라진지 오래였다.
"너도 좋아하는 사람 있지."
놀란 토끼눈으로 김민규를 바라보았다. 저새끼 대체 무슨 생각으로…. 당혹함에 입술을 가만히 냅두지 못하는 여주에 민규가 남들 몰래 작게 입을 움직였다. '야, 그냥 말 해.' 민규가 또 다시 한쪽 눈을 감았다 떳다. 여주의 입에서 헛웃음이 나왔다. 김민규 진짜. 그제서야 작게 미소를 지은 여주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
강하게 느껴지는 시선에도 여주는 쉽사리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그렇게 넘어간 순서에도 순영은 그 시간 내내 여주만을 바라보았다. 페트병의 끝이 순영을 가리켰다. 일제히 아이들의 눈에서 빛이 나기 시작했다. 제 친구들의 눈치에 마지못한 척 혜지가 손을 들고 입을 열었다. …내가 물어볼래.
"여기에 좋아하는 사람, 있어?"
두 무릎을 끌어안고 숨을 죽였다. …있다고 하면 난 어떡하지. 두려움에 입술을 깨물었다. 고개를 들어 혜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바보 마냥 겁만 잔뜩 먹은 누구와 달리 확신으로 가득 찬 두 눈을 마주하는 순간, 설명할 수 없는 자괴감에 빠졌다.
"어."
무릎을 끌어안은 팔에 힘이 풀렸다. 녀석의 마음을 모를 정도로 눈치가 없는건 아니였다. 여전히 느껴지는 시선 뒤로 난 환하게 밝아지는 혜지의 인상을 택했다.
모두가 잠들고도 남은 시간 새벽 3시였다. 통 오질 않은 잠에 바람이라도 쐬야 하나 싶어 두툼한 패딩을 입고 밖으로 나왔다. 고개를 젖혀 바라 본 하늘엔 수많은 별이 박혀 있었다. 가장 빛나는 별 하나로 주변에 작은 별들이 득실거렸다. 저 멀리 동 떨어진 곳에 개미 눈꼽만한 별이 보였다. 작은 한숨과 함께 옮긴 발걸음은 1분 만에 그 움직임을 멈췄다.
"있잖아."
흐릿하지만 혜지의 목소리였다. 본능적으로 벽 뒤에 몸을 숨겼다. 한참을 그러고 있었을까, …이게 뭐하는 짓인가. 하는 생각에 다시 몸을 돌리려는 순간, 선명하게 들려오는 목소리가 내 발목을 잡았다.
"나 추운데."
권순영이였다. 뒤로 수줍게 웃으며 미안하다는 혜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있잖아, 순영아."
"좋아해."
별로 놀랍지도 않았다. 알고 있었으니까, 혜지는 언젠간 권순영에게 마음을 전할껄 알고 있었으니까. 지금아 아니라 내일이였다 해도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내일이였다 해도 난 누구처럼 마음을 전 할 용기조차 없는 겁쟁이일게 분명하니까. 그래도 살살 퍼지는 씁쓸함은 어쩔 수 없나 보다.
"미안.""…어?""난 너 안 좋아해."
발을 세워 운동화코로 바닥을 쿡쿡 찔렀다. 물기 가득한 코를 들이 마셨다.
"여주 좋아해, 난."
애꿏은 돌멩이를 약하게 밟았다. 녀석의 마음을 모를 정도로 눈치가 없는건 아니였다. 찬 바람 때문일까, 텁텁하게 마른 입술을 깨물었다. 뒤로 흐느끼는 혜지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또 다시 빠져드는 자괴감에 고개를 떨궜다. 난 너에게 줄 수 있는게 아무 것도 없었다. 받을 자격도, 줄 자격도 되지 않았다. 줄 수 있는 단 한가지 마음? 난 너의 마음 앞에 서면 너의 마음에 백 분의 일도 되지 않았다. 가장 빛나는 별 하나로 주변에 작은 별들이 득실거렸다. 저 멀리 동 떨어진 곳에 개미 눈꼽만한 별이 보였다.
넌 별이였다 순영아, 내가 너와 어울릴 수 있을까. 이게 너의 마음에 대한 나의 답이다.
늦게 온 만큼 길게... 안 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