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핀잔
: 미숙한 감정들의 열매
21
***
"싫다고 했어."
"아아. 왜!"
"왜?"
정말 모르겠냐는 듯 소파에 기댄 채로 나를 바라보는 호석이었다. 그는 누가 보면 내가 혼날 일이라도 한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니, 내가 내 옷 입겠다는데 왜 저래 진짜! 나는 막무가내로 나오는 그에 답답해져, 나도 모르게 입술이 튀어나왔다. 그러자 그는 내게 '어쭈. 입 안 집어넣지?' 하며, 더욱 표정을 굳혔다. ...내가 옷을 헐벗은 것도 아니고, 그냥 어깨 좁 트인 옷 입겠다는 게 그렇게 마음에 안 드나? 짧고 파인 드레스도 아닌데!
*
완연한 봄이 오기 전에 지인들과 조촐한 파티가 있는 날이었다. 그는 누가 봐도 반할 듯한 정장차림을 마치고 소파에서 나를 기다리다가, 내 옷차림을 보고 내가 옷을 갈아입기 전에 자신은 가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평소 노출이 있는 옷을 즐겨 입는 편은 아니지만, 솔직히 오프숄더가 언제부터 야한 옷이 되었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한 번도 이런 일로 싸운 적이 없었던 우리였기에 꽤나 삭막한 분위기만 감돌았다. 마지막까지 제 뜻을 굽힐 줄 모르는 그에 나 또한 마찬가지로 어떻게든 되겠지 하며, 전 날 미리 준비해둔 구두를 신었다.
"그럼 너 오지마. 난 갈거야."
"그래. 그럼."
내 생각과는 다른 대답에 순간 코 끝이 찡해졌지만, 이번 일은 결코 지고 싶지 않았다. 물론 다른 옷을 입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니지만, 지금은 단순히 옷의 싸움이 아니었다. 서로의 괜한 자존심 싸움이었지. 나는 집 앞에서 차를 세우고 우리를 기다리는 제이슨의 차에 올라탔다. 제이슨은 아직 차에 타지 않은 그를 기다렸지만, 나는 제이슨에게 그는 오지 않는다고 답했다. 차를 출발해도 된다는 말까지 덧붙이면서.
*
내 단발 머리를 처음 본 사람들은 저마다의 반응으로 내게 칭찬해주었다. 가끔 머리를 왜 잘랐냐는 물음에 이 자리에 함께 오지 않은 그가 떠올라 심술이 나기도 했지만,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분위기의 파티였다. 나는 안면 있는 사람들과 적지않은 대화를 나누고, 준비된 와인을 들고는 테라스로 나섰다. 분명 부족한 것이 없는 파티였는데, 그 하나 때문에 모든 게 부족해졌다. 나는 테라스에 기댄 채로 와인만 조금씩 들이키고 있었다. 그러자 잠시 뒤, 낯선 남자가 내 옆에 서며 물었다.
"혼자?"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는 와인잔을 의미없이 돌려댔다. 남자는 혼자라는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내 쪽으로 더욱 가깝게 붙어오며 말했다. '뒤에서 보는데 선이 너무 아름다워서요. 특히 목에서 어깨선.' 외국에서는 꽤나 흔한 칭찬이었다. 이곳에서는 더욱이 그랬고. 나는 고맙다는 뜻을 내비치고는 와인잔을 테라스 위에 올려두었다. 그리고는 가볍게 팔을 앞뒤로 움직였다. 옆에 남자가 있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정호석도 아닌 남자가 뭔 남자야... 몸을 움직여서라도 호석이를 잊어야했다. 나는 정호석이 밉다. 하나도 안 보고 싶다. 하면서. 내 옆의 남자는 그런 내 속을 모르겠다는 듯, 흥미롭게 나를 바라봤다. 그러던 중, 조금 컸던 네 번째 손가락의 반지가 내 앞으로 떨어졌다. 언제 한 번 떨어질 것 같더니, 오늘이네. 정호석이 끼워준 반지 아니랄까봐 얘도 나랑 있기 싫나봐. 나는 애꿎은 반지를 노려보다, 그래도 주워야지 싶어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그 순간 나보다 빨랐던 남자의 손이 호석이와 내 반지를 가로챘다. 빠르기도 하네. 하지만 내가 고개를 다 들기도 전에 익숙한 목소리가 내 귓가를 파고 들었다.
"누가 이런 옷 입고 막 숙여."
고개를 들자, 집에서 봤던 옷차림 그대로 근사한 그가 내 앞에 서있었다. 호석이었다. 그는 내 반지를 내게 다시 끼워주며, 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딱히 대꾸할 말이 없어진 나는 눈동자를 아무렇게나 굴렸고, 그는 그런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제가 졌다는 듯 제 한 쪽 손을 내게 내밀었다.
"나 없다고 반지도 막 던지고."
"..."
"아까부터 봤는데 이 남자랑 대화도 하더라."
"..."
"질투나."
"...그럼 일찍 왔어야지."
"그래."
내 말에 바로 순응하는 호석이에 되려 당황한 나는 어?하고 그에게 되물었다. 그러자 그는 '내꺼 보여주기 싫다고 고집부린 내 잘못이지. 뭐.' 하며 내 손을 단단히 고쳐잡았다. 내 옆자리의 남자는 우리의 모국어 대화를 듣다 지쳤는지 자리를 떠났고, 호석이는 내 손등에 짧게 입을 맞추고는 다시금 제 말을 이었다.
"예쁘면 다야. 아주 그냥."
"...예쁘면 더 사랑해줘. 아까처럼 미워하고 혼내지 말고."
"이런 옷만 안 입으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예뻐하지."
"...넌 이게 야해?"
호석이는 내 물음에 마주잡은 손을 제 쪽으로 당겨 답했다. '엄청.' 하고. 그리고는 제 검지 손가락으로 내 쇄골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단발이 괜히 좋다고 했어."
"..."
"고딩 때는 단발이 귀엽더니, 완전 변했네."
"어이없어!"
"남자는 다 똑같아. 시각적인 자극에 제일 약하고."
"..."
"예쁜 여자면 더."
"..."
"그니까 예쁜 건 나만 보여주라."
예쁜 건 저만 보여달라는 말과 동시에 내 코와 제 코를 맞닿게 한 호석이었다. 그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화를 더 낼래야 낼 수도 없는 상황이었고, 뭐 더 이상 화낼 것도 없었다. ...내가 예뻐서 그렇다는데. 뭐.
**
"하나, 둘, ㅅ..."
찰칵.
숫자를 다 세기도 전에 찍힌 사진이었다. 그와 나는 미처 완성하지 못한 포즈와 표정으로 어이가 없다는 듯 서로를 바라보다 웃음을 터트렸다. 왜 또 괜히 우리 둘이 결혼 사진을 찍겠다고 나서가지구! 나는 바람에 날아갈 것 같은 화관을 부여잡고, 다시 카메라를 세팅하러 가는 그를 바라봤다. 어느덧 단정하게 정리한 그의 머리가 군데군데 떠올랐다. 나의 흰 원피스도 바람에 이리저리 날리기 바빴다. 집 근처의 국립공원에서 삼각대 하나 두고 우리 뭐해. 진짜. 어느덧 카메라 세팅을 다시 마치고 내게로 달려오는 호석이가 시야에 들어왔다. 사람들은 우여곡절을 겪는 우리가 신기한지, 우리가 사진을 찍을 때마다 간지럽게 웃었다. 이번만큼은 제대로 된 사진을 찍고 싶었다. 하지만 카메라는 그런 우리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가 내 옆에 자리 잡고 포즈를 취하기도 전에, 심지어 그의 헝클어진 앞머리를 내가 정리해주고 있을 때. 찰칵. 하고 순간을 담아냈다. 결국 또 다시 웃음이 터진 우리였다. 호석이 역시 반복되는 이 상황이 웃긴지, 내 눈을 마주하며 제 눈이 휘어져라 웃어댔다. 물론 그와 함께이니 모든 게 다 괜찮고 이것마저도 행복하지만, 제대로 된 사진이 한 장쯤은 집에 걸려있어야 할 텐데... 우리는 서로의 손을 맞잡은 채로 고민의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그런 우리의 고민이 무색하게 뜻밖의 인물이 우리에게 카메라 앵글을 들이밀었다.
카메라에 가려진 얼굴에 누구인가 싶었지만, 이내 곧 카메라가 내려지고 보인 얼굴은 남준씨였다. 남준씨의 등장에 놀란 건 비단 나 뿐만이 아니었다. 그 역시 믿기지 않은 얼굴이었으니. 그런 우리를 응시하다 대뜸 셔터를 누른 그는 특유의 보조개를 보이며 웃었다. '예쁘다. 너희' 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
뜻하지 않은 남준씨의 도움으로 결혼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된 우리였다. 그는 일이 정리되고 난 뒤, 원래부터 관심 있었던 사진을 전문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남준씨와 잘 어울리는 일 같았다. 남준씨가 이곳으로 오게 된 이유는 호석이의 전화 한 통 덕이었다. 물론, 이곳에 와서도 남준씨와는 끊임없이 연락을 주고 받은 그였다. 그가 남준씨게에게 전화를 건 날은, 파티 옷차림으로 괜한 싸움을 하고 나 혼자 자리를 벗어났던 때였다. 그 날 두 사람은 내 옷차림을 시작으로 갖은 이야기를 나누다가, 결혼 이야기까지 당도했다. 하지만 우리의 결혼 사실을 모르고 있던 남준씨는 어디 밥 먹으러 가는 것처럼 제 결혼 사실을 밝히는 그에 어이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는 그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이 곳까지 와주었고. 확실히 남준씨와 그는 범접할 수 없는 그들만의 세계가 있었다. 같은 흉터를 가진 사람들만의 세계
*
[호석 시점]
"올 줄 몰랐는데."
"그랬겠지. 나도 이 시간에 내가 여기 있을 줄 몰랐다."
남준이와 찾은 곳은 집 근처 가까운 바였다. 오랫동안 목소리만 주고 받다 얼굴을 마주보니 여간 반가운 게 아니었다. 그 사이 남준이의 얼굴은 참 많이 여유를 찾은 듯 했다. 선들이 고와졌다고 표현해야 될까. 과거의 날선 표정은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였다. 나는 주문한 위스키를 마시며, 남준이에게 사과의 말 아니. 혹은 그 비슷한 말이라도 건네야 하나 싶었다. 명징한 이유는 없지만, 나는 지금 너무 행복한데. 혹 그는 그렇지 않을까봐. 내가 도망친 곳으로부터, 여전히 고통 받고 있을까봐. 나는 괜한 위스키만 들이켰다. 그러자 제 두 손가락을 겹쳐 '딱' 하고 소리를 낸 그가 나와 눈을 맞췄다. 언제봐도 편한 눈이었다. 남준이의 눈은.
"늦었지만 결혼 축하해."
"...뭘 늦어. 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그래도 첫 번째로 축하해주고 싶었어."
"그래. 고맙다."
"식은 어떻게 할 예정?"
"그냥 간단하게, 언약식 정도로 하려고."
"너희 답다. 예쁠 것 같아."
"..."
"나는 나중에 엄청 화려하게 할 거야."
"..."
"나 답게."
남준이의 장난스러운 말 덕분에 풀린 분위기였다. 나는 남준이의 말에 가만히 고개만 끄덕이다, 저 답게 화려한 결혼식을 하겠다는 그의 말을 끝으로 옅은 웃음을 머금었다. 그러자 그는 이제야 웃냐며 내게 핀잔을 주었다. 또 동시에 혹시라도 자신이 신경 쓰인다면, 헛수고라고. 그 신경 미래 부인님한테나 줘서 미움을 덜 받으란다. 남준이 다운 위로와 응원이었다. 나는 그의 말에 남은 위스키를 다 마시고는 '어련히 알아서 할까.' 하고 답했다.
"네가 평밤하게 살아서 좋아."
"고맙워."
"나도 그렇게 살 수 있는 거잖아?"
"...당연하지."
"행복하게 살아줘서 고맙다."
"그래."
***
안녕하세요. 겨울소녀입니다! 다음 화면 두 사람의 결혼식 장면이 담아질 것 같아요. 언제나 작품의 완결이 다가올 때면, 아쉽고 또 감사하고 그래요ㅜ! 오늘은 남준이와 호석이의 단단한 유대관계를 보여주고 싶었어요. 같은 흉터를 나눈 자들의 든든한 위로랄까. 마침내 어리고 미숙했던 감정들이 이렇게 열매를 맺었습니다 :) 암호닉은 다음 화에서 완전히 정리해서 오겠습니다! 다들 좋은 밤 되세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