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핀잔
: 같이의 가치 - 프로포즈1
19
***
"으..."
생전 처음 느껴보는 고통에 자연스레 신음이 흘러나왔다. 어떻게 서로를 나눴고 또 어떻게 잠에 들었는지에 대한 기억이 아득했다. 나는 이불을 더욱 파고 들며, 한 손을 뻗어 호석이랄 찾았다. 하지만 넓은 침대 위에는 나 혼자였고, 그의 흔적 역시 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나는 머리 끝까지 덮은 이불을 끌어내려 방 안을 살폈다. 아니. 살피려고 했다. 그러나 호석이는 침대 바로 밑에 앉아 제 예쁜 눈으로 어딘가 불안한 듯,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그에게 뭐하냐고 묻자 그는 되려 '나 손도 들까? 어, 음... 무릎을 꿇까?' 하고 내게 물음을 던진다.
"...손을 왜 들어."
"너 아프게 했잖아.
"...ㄷ, 됐어."
"진짜 안 그러려고 했는데. 예뻐가지고."
"...그 얘기 하지 말자."
"미안해. 네가 울 때 그만 했어야 되는ㄷ"
결국 호석이는 당장 내 손에 잡히는 베개에 한 번 맞고 나서야 입을 다물었다. 의도하지 않게 자꾸만 우리의 시간을 상기시키는 그 때문에 다시 또 얼굴이 타올랐다. 울, 울긴 누가 울어! 참나.
그 날 호석이는 종일 내 곁을 따르며, 내게 입을 맞췄다. 물론 그러다가도 내가 샐쭉하게 저를 쳐다보면 아닌 척 울상을 지었고. 그 표정을 본 나는 다시 마음이 녹아내렸다. 그럼 그 순간을 잡아낸 호석이가 다시 내게 다가왔다. 그 날은 그런 날이었다. 우리가 우리 마음이 가닿을 수 있는 대로 할 수 있는.
**
어느덧 우리는 한국에서부터 함께 세 번째 계절의 변화를 맞았다. 늦봄과 여름 그리고 겨울. 호석이는 그 사이 내 주변인들은 물론 마을 사람들과도 꽤 친해져, 내게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엊그제는 옆 집 아리아의 네 번째 생일이어서 당근 케이크를 사갔는데, 아리아네 강아지가 다 먹어치운 이야기 같은. 아주 사소한 이야기들을. 그는 별 다른 일자리를 구하지 않고 지금의 여유를 즐겼다. 금전적으로 부족한 점도 없었으니, 굳이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호석이에게는 더욱 오래 숨 쉴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스페인 본사에서 주어진 자택근무를 하며, 그와 함께 여유로운 나날들을 보냈다. 아주 행복하게.
그러던 중, 두번째로 함께 맞이하게 된 호석이의 생일이었다. 사실, 처음이라고 해도 무방할 일이었다. 그때의 우리는 제대로 축하해주지도, 축하를 받지도 못했으니까. 당시의 나는 이름도 몰랐던 호석이의 생일을 축하해준다고 길목에서 기다리다가 힘없이 쓰러지고, 호석이는 쓰러진 내가 흘린 선물을 주운 것 뿐이었다. 그러니 뭐. 오늘을 처음이라 해도 괜찮을 듯 했다. 나는 지금껏 잊어본 적이 없는 그의 생일을 모르는 척, 그의 허벅지를 베고 누워 과거 이야기를 흘렸다. 우리의 아주 오래 전. 우리 중 누구도 상처 받지 않았던 고등학생 때의 이야기를. 호석이는 두서없는 나의 과거 이야기에 웃음을 머금고는 내 이야기에 제 이야기를 더해주었다.
"너 그때 완전 단발이었잖아."
"학교 규정이 그랬어! 그래서 성인 되고는 한 번도 단발 안 했어."
"왜?"
"난 단발이 안 어울리는데, 학생 때 엄청 했잖아. 끔찍했어."
"누가 그래. 너 단발 예쁜데."
"거짓말 마. 난 얼굴이 동그래서 단발 별로야."
"나는 너 단발머리 때 반했는데, 너가 자꾸 그때 이상하다고 하면 그거보고 잠 못 자던 나는 뭐가 돼."
"...그럼 지금 나 머리 긴 건 별로야?"
"아니. 이것도 예뻐."
"어째 목소리가 낮아졌다?"
"뭐래. 아니거든."
그가 단발머리인 나를 보고 반했다는 말이 괜히 부끄러웠다. 여고생의 단발은 예쁠 수가 없는데. 나는 문득 내 긴 머리칼을 대충 쓸어내리며 반을 접어보았다. ...단발 한 번 해봐? 아니야. 호석이도 그냥 한 말일 수도 있어. 나는 앉아 있는 호석이의 다리를 더욱 파고 들며 그의 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내일 케이크를 사고 장도 보고 하려면... 그와 좀 떨어져 있어야 하는데.
**
"제이슨 옷 잘 골라주고 와!"
그는 운전석에 앉은 제이슨 옆자리에 앉아 나를 바라봤다. 어딘가 어이없고 언짢은 표정을 한 채로. 하지만 뭐 별 다른 방법이 없는 걸. 나는 호석이에게 손을 흔들며 장난스럽게 손뽀뽀를 날려주고는 그들을 출발시켰다. 제이슨에게는 이미 내 계획을 말해둔 바였다.
*
마을 근처 유명한 제과점에서 케이크를 사고 생일상을 차릴 재료들을 구입해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길목의 미용실이 눈에 들어왔다. 제법 차가운 겨울 바람이 살갗을 자꾸만 스쳐갔다. 덕분에 볼은 한껏 붉어졌고. 더 이상 이곳에 서서 고민하다가는 온 몸이 얼어버릴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나는 두 눈을 감고, 나의 단발을 그렸다. ...그래. 요즘은 화장법도 좋고 머리 자르는 기술도 많이 좋아졌으니까... 괜찮을 수도 있어. 막 어려보일 수도 있고.
나는 잠시 밑에 내려두었던 장바구니와 케이크를 챙겨 미용실로 향했다.
*
[호석 시점]
"제이슨. 옷 혼자 못 사?"
"그럴리가."
"그런데 내가 왜 같이 가야하지."
"러블리가 바라니까. 그냥 대충 셔츠 하나만 사서 가자."
그녀에게 내 생일이라는 걸 밝히지도 못하고 아침부터 제이슨에게 휘둘렸다. 남자 옷 고르는 걸 왜 남자가 해주는지. 순간 제이슨의 취향이 의심스러웠지만 동시에 그녀를 '러블리'라고 칭하는 그에 미간이 찌푸려졌다. 나는 퉁명스럽게 그를 바라보며, 그녀는 내꺼니까 러블리라는 표현은 좀 자제하라는 말을 뱉었다. 그러자 그는 제 어깨를 으쓱이며, 창 밖을 가리켰다. 제이슨의 시선을 따르자 하늘에서는 제법 굵은 눈송이가 내리고 있었다. 눈 오네.
"그만 으르렁대고 얼른 다녀오자."
"좋아."
그녀를 러블리라고 부르는 것만 빼면 딱인 제이슨의 제안이었다. 얼른 다녀와서 그녀와 함께 눈을 봐야했으니, 아주 좋은 제안이었고.
*
제이슨은 제 옷을 골라줄 친구가 필요해서 나를 그녀에게 부탁했다고 했는데, 어딘가 이상했다. 시내에 도착하자마자 보이는 가게로 들어가 걸려 있는 셔츠를 사고는 나왔으니. 이 모든 행동은 채 일 분도 걸리지 않았다. 눈송이는 전보다 더욱 굵어져서 내렸지만, 사납게 내리지는 않았다. 마치 스노우볼의 눈처럼 천천히 따스하게 내렸다. 나는 문득 생각난 스노우볼에 그녀에게 선물이나 하나 할까 싶어 주변을 살폈다. 제이슨이 옷을 산 바로 옆의 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쥬얼리샾이었다. 이제는 찬 공기를 머금어 살갗에 닿는 팔찌가 떠올랐다. 제이슨은 쥬얼리샾을 바라보는 나를 보더니 말했다.
"차에 들어가 있을게. 얼른 고르고 나와."
*
[여주 시점]
"...뭐야?"
"뭐가 뭐야! 빨리 케이크 불어 - "
"기억하고 있었어?"
호석이의 지나치게 당연한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는 내가 좋아하는 웃음을 지으며 두 손을 모았다. 소원을 빌려는 듯 했다. 나는 촛불을 앞에 둔 호석이의 모습이 새삼 예뻐서 가만히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곧이어 그는 소리내어 제 소원을 빌었다.
"아무 일도 없게 해주세요."
"..."
"오래오래 곁에 있게 해주세요."
"...소원은 원래 혼자만 알아야 이뤄지는데."
"소원도 맞는데."
"..."
"다짐이기도 해서."
입 밖으로 꺼내서 말한거야.
너 오래오래 지키면서, 네 옆에 있으려고.
*
"머리 자르니까 고등학생 같아."
"그게 몇 년 전인데. 벌써... 어후. 말도 마."
"진짜야. 예뻐."
"...진짜?"
"응. 또 반했어."
내가 차린 생일상을 먹으며, 내게 다정하게 말을 건네는 호석이었다. 나는 여전히 고등학생 같다는 그의 말에 얼굴을 붉히며, 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그는 정말 진지하다는 듯, 한 번 더 반했다며 내 콧잔등을 제 검지 손가락으로 톡톡쳤다. ...부끄러워. 진짜. 나는 괜히 그의 밥 위로 고기 반찬을 올려주며, 대화 화제를 돌렸다.
"얼른 먹어어."
"그런데 좀 그렇다."
"갑자기 뭐가?"
"야하네."
"...뭐가."
그는 몸을 일으켜 내 쪽으로 제 몸을 숙였다. 그리고는 제 손가락으로 내 목선을 간질였다. 나는 자연스럽게 몸을 뒤로 뺐고, 그는 더욱 내게 가까이 숙이며 목선을 어루만졌다. ...간지러워.
"목선이 야하다."
"...하지마."
자꾸 야하다는 말을 내뱉는 그에 나 역시 괜시리 야릇해져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그는 밥을 먹다 말고 내 앞으로 와, 나와 눈을 맞췄다. 허리를 숙인 그 덕분에 꽤나 가까워진 우리였다.
"나 봐봐."
"...왜애."
"줄 거 있어."
줄 게 있다는 그의 말에 고개를 들자, 그는 사뭇 진지한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그의 손에는 그가 끼고 있는 팔찌와 비슷한 디자인의 팔찌가 들려있었다. 갑작스러운 그의 선물에 당황한 내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자, 그는 '잠시만'하며 내 손목에 제가 들고 있던 팔찌를 끼웠다. 아이를 다루는 것처럼 조심스러운 그의 손길에 나 역시 그의 머리칼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내 생일도 아닌데 내가 선물을 받네. 잠시 뒤, 그는 팔지가 채워진 내 팔을 이리저리 살피고는 내게 물었다. '어때?'하고. 나는 맑게 웃으며 그의 목을 끌어안고는 그의 귀에 속삭였다. 예뻐. 정말로. 고마워. 그러자 호석이는 다행이라는 듯, 나를 더욱 강하게 껴안았다. 그리고는 나와 마찬가지로 내 귓가에 제 목소리를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Love is, above all else, the gift of oneself."
"..."
"사랑은 무엇보다도 자신을 위한 선물이다."
호석이는 제 말을 끝으로 나와 눈을 맞췄다.
"덕분에 매일매일이 생일처럼 행복해."
"..."
"내 선물이 되어줘서 고마워."
"...뭐야. 나 완전 감동이야."
"어. 어? 울지마. 울라고 한 말 아닌데..."
그의 진심이 담긴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러자 그는 안절부절 못하며 내 손을 더욱 단단히 잡아왔다. 하지만 따뜻하고 큰 손은 내 눈물샘을 더욱 자극시키기에 충분했다. 내가 하고 싶은 말들을 전부 다, 대신하고 있는 그였다. 호석이는 나보다 훨씬 더 오래 아팠고, 나를 사랑하기까지 더 많은 용기가 필요했을 텐데. 그는 왜 이렇게 자꾸만 자신이 더 노력할까. 나는 그에게 잡힌 손을 풀어, 내가 준비한 선물을 꺼냈다. 오늘 안에 줄 수는 있을까, 말을 꺼낼 수는 있을까 싶었는데. 확신이 들었다. 나는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반지를 꺼내, 그의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주었다. 그러자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허니 것도 주세요.'하고 예쁘게 웃었다. 순간,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인가 싶어 울먹이는 목소리로 뭐야? 하고 묻자 그는 빨개진 내 코 끝을 살짝 물고는 멀어졌다.
"프로포즈를 왜 너가 해."
"...ㅁ, 뭐ㅇ."
"성격은 급해가지고."
"..."
**
[호석 시점 / 과거]
"팔찌 안에 문구 각인도 해주세요."
"어떤 문구로 해드릴까요?"
쥬얼리 샾 주인은 영어가 가능했다. 나는 내 것과 비슷한 팔찌를 골라 주인에게 건네며, 내 팔찌 속 문구를 보여줬다. 그러자 주인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이내 곧 갸우뚱하고는 나를 바라봤다.
"혹시 오늘 생일인가요?"
"맞아요. 어떻게 아셨어요?"
"<숨 쉬는 한 희망은 있다.> 이 문구를 반지에 각인해달라는 여인이 왔었어요."
"...그래요?"
"자기 애인이 너무 많은 용기를 냈다고, 이제 자신이 해보겠다면서."
"..."
"프로포즈를 할 거라는데."
"...아."
"생일 날 한다고 했으니까, 오늘이겠네요."
"...네."
"좋겠어요."
"..."
"타인의 용기까지 가치있게 생각해주는 여인과 결혼이라니."
"..."
"예뻐요. 두 사람."
***
안녕하세요. 겨울소녀입니다. 오늘은 씩씩하게 프로포즈를 하려 했지만, 호석이에게 들켜버린 여주의 모습이 등장했어요 :) 프로포즈 2탄은 다음 화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ㅎㅎ 암호닉은 천천히 정리해서 올릴게요. 다들 많이 웃으실 수 있는 하루하루가 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