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첫사랑이였다.
- 영화 '건축 학개론' 中
'양
아
치
의
순
정'
15
사랑이 올까요
권순영은 나를 못본 체 하며 바보처럼 자리에 서있는 나를 스쳐 지나 남은 한자리. 내 앞자리에 아무렇지도 않게 앉아 마저 얘기를 나누는 사람들 틈에서, 제일 먼저 도착한 나보다 자연스럽게 말을 나누기 시작했다.
"안앉으세요?"
그래. 너는 나를 모른척, 하였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른체 어느새 시간은 늦은 오후를 가리키고 있었고, 우리는 차례대로 카페, 식당, 호프집. 함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난 여전히 테이블 끝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권순영은 이제 꽤나 멀리 떨어진 자리에 앉아 분위기를 즐겼다.
어쩌면, 차라리 이게 더 나을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주씨, 어디 아파요?"
...이현우라고 했었나, 몇시간째 별 다를 말 없이 권순영만 바라보고 있는 내게 간간히 말을 던지는 사람이였다. 어색하게 그런거 아니라며 괜찮다는듯 애써 입꼬리를 올려주니 남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표정이 안 좋은데."
꽤나 걱정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얼굴에 결국, 작게 웃음을 짓자 따라 환해지는 얼굴이였다. 술 조금만 마셔요. 알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연신 끄덕이자, 예쁜 미소를 한 번 짓고 다시 고개를 돌리는 남자였다.
"......"
"......"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차가운 맥주잔만 만지작 거리고 있었을까, 고개를 들어보니 말 없이 날 바라보고 있는 권순영과 눈이 마주쳤다. 얼마만에 제대로 마주하는 눈일까, 녀석의 눈동자 속에 비춰진 내 모습에 아랫입술을 말 없이 깨물었다.
"또, 또 깨무네."
"...아."
"여주씨 자세히 보니까, 이거 습관이죠?"
내 턱을 살짝 잡아당기는 느낌에 놀라 남자를 쳐다보니 미간을 구긴체 상한 내 아랫입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수치스러운 기분에 고개를 살짝 비틀자 그제서야 턱에서 손을 뗀 남자가 시선을 옮겨 내 눈을 바라보았다. 남자의 눈동자에 내 모습이 비춰졌다.
그리고 느꼈다.
난 너의 눈동자 속에 비춰질때가 가장 예쁘구나, 순영아.
"...얌마, 너 어디가 권순영."
"...잠깐 바람 좀 쐬러."
우당탕, 요란한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남자와 나. 누구라 할 것 없이 시선을 돌렸다. 그곳엔 뭔가 화나보이는 권순영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머리를 헝클이고 있었다. 가게를 나가는 뒷모습에 나도 모르게 두툼한 내 겉옷을 챙겨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가게요, 여주씨."
"...어, 그러니까 잠깐 화장실 좀."
황급히 따라 나온 가게 밖엔 그 어디에도 권순영은 보이지 않았다. 겉 옷도 안 입고 나가서 추울텐데. 계절치고 가벼운 녀석의 차림이 생각이나 애꿏은 아랫입술만 깨물고 있었을까 갑자기 누군가 손목을 잡아, 가게 바로 옆 골목 안으로 나를 끌어 당겼다.
"......"
"......"
손으로 입을 틀어 막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비명이 나올 것 같았기에. 점점 세지는 압력에 손목이 아려왔지만 그 마저도 좋았다. 그냥, 내 앞에 권순영이 있다는게. 좋았다.
"...너는."
"......"
"...사람을 미치게 하는 능력이 있어."
"......"
"그때나 지금이나."
표정이 없었다. 툭, 내팽겨치듯 풀려난 내 손목엔 빨간색 자국이 물들었겠지만, 상관 없었다.
"다신 보지 말자 했잖아."
"너는 그런 말 할 사람이 아니니까."
"...뭐?"
"넌 그런 차가운 말,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니까."
"......"
"......"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야. 나 원래 ㅇ,"
"...적어도."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헛웃음을 짓던 녀석이, 치고 들어 온 내 말에 말 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눈 앞이 금세 뿌옇게 흐려졌다. 떨리는 입술을 보이기 싫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그러자, 거짓말처럼 천천히 올라 온 녀석이 손이 내 턱을 약하게 당겨 입술을 놓아주었다.
"...좆 같았거든."
"......"
"...3년이나."
"......"
"지금이나."
"...적어도, 너는 내 앞에서."
결국 터져버린 울음에 고개를 숙인체 흐느꼈다. 내 양 어깨를 두 팔로 잡아오는 느낌에 더욱 더 쉼 없이 울었다.
"...너는."
"......"
"...적어도, 내 앞에선. 그런 말 안했으니까."
응, 맞아 못해. 말을 마치자 마자 나를 가득 품에 안은 녀석이 내 어깨위에 고개를 묻었다.
"3년동안 힘들지 않았어."
"......"
"길었던 그 시간도 너로 채워지는 걸 보고."
"......"
"그냥 난 너구나. 이 생각 밖에 안했어."
"......"
"허탈했지."
"......"
"다시 봤던 그 날도."
"......"
"넌 변함없이 예뻤으니까."
"......"
"죽을 만큼 노력했어."
"너한테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세상이 뭐라해도 널 지켜줄 수 있는 강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너는 이를 갈았던게 아니였다. 잘나 보이고 싶었던건, 더더욱 아니였다. 너는 어른이였다. 죽음과도 같았을 그 속에서 행복을 추구했다.
"아, 근데 무섭더라."
"......"
"다시 보는 그 날. 아직도 아니라고 할까봐."
"......"
"...아직도, 난 아니라고."
"......"
"...그럴까봐."
"처음부터 아니였어."
"...어?"
"난 너한테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니까."
"......"
"...지금봐도 그래."
"......"
"...나한텐 너가 하늘이라서 그래, 순영아."
"......"
"나는 남을 사랑하는 법도 모르고, 나를 사랑하지도 않아."
"...근데, 이제 그런거 모르면 어때. 세상이 뭐라해도 권순영이 지켜준다는데."
내 인생의 용기였다. 나도 이만큼의 용기를 가진 사람이였구나, 너는 또 다시 느끼게 해주었다.
"좋아해."
"......"
"순영아."
"......"
"3년전 그때도, 지금도, 앞으로도."
"......"
"좋아해."
말을 마치자 마자 급하게 겹쳐오는 입술에 천천히 눈을 감았다. 제 목에 팔을 두르는 나를 더 꽉 안아 오는 손길이 좋았다. 앞으로 내가 가는 길이 진흙탕이면 어떨까. 같이 빠져주는 사람이 있고, 같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는데. 어디든 함께라면 그건 꽃길이 아닐까. 22살의 난, 너를 다시 만난 난, 비로서 어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