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여주, 나 봐봐.”
“아.. 나 진짜 너 못 보겠어.”
입술을 떼보니 쇼파더라. 눈을 몽롱하게 뜬 정재현은 다시 내 볼을 감싸왔지만 나는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이제야 얼굴이 화끈해졌기 때문이다. 내 행동에 정재현도 정신이 번쩍 든 건지 입술 새를 작게 벌린 채 느릿하게 손을 내렸다. 정적이 흘렀다. 나는 얼굴을 가리며 쇼파 저 끝으로 몸을 옮겼다. 나 쟤랑 뭐 한 거야. 미쳤어. 미쳤어 김여주!!! 정재현을 등지고 앉아 속으로 백 번은 소리쳤다. 두 눈을 질끔 감았다 떴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이건 꿈도 아니고, 진짜라고. 나 진짜 정재현이랑 키스했다고. 망연자실한 나와는 다르게 정재현은 나를 불렀다. 그 부름에 나는 손으로 더욱 더 얼굴을 가릴 뿐이었다. 지금 얼굴을 마주하면 화끈하다 못해 터질 것 같았다.
“김여주.”
“…”
“나 진짜, 진심이야.”
그런데 쟤는 내 마음도 모르고 저런다. 자꾸 자기를 봐달라는 식으로 말을 던져오니 나는 심호흡을 깊게 내뱉은 후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슬며시 뜬 눈으로 아까 그 자리 그대로 앉아있는 정재현이 보였다. 귀끝은 붉어져있고, 귀끝 못지않게 입술도…. 붉었다. 내 립스틱이 입가에 번져있었다. 아아, 진짜 환장하겠네. 나는 민망함에 눈을 질끈 감고 주먹을 쥐었다. 야! 어쩔거야! 어쩔거냐고! 한마디 내뱉을 때마다 한 대씩 정재현을 때렸다. 머리 위로 푸스스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곧 내 팔목을 잡아채더니 제 쪽으로 나를 끌어당긴다. 그에 나는 그대로 품에 안겨 녀석의 어깨에 얼굴을 묻어야만 했다. 주먹을 쥐던 손도 힘없이 떨궜다. 은연중 이러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나를 달래듯 정재현은 내 등을 작게 토닥였다.
“어쩌긴.”
“..”
“연애 해야지.”
그리고 곧, 장난스러운 말투로 그런 말을 하더니 슬며시 나를 떼어내 눈을 맞춘다. 순간 떨리는 마음에 정재현의 옷자락을 꾹 쥐었다.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 눈만 바라보다 입술을 깨물었다. 장난 같아도 장난이 아니였다. 둘 다 얼굴에 열이 오른 채, 손은 떨리고 목울대가 울렁이면서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지금 고개를 끄덕이면 이제 우린 정말, 친구가 아니니까. 사실 넘을 선은 이미 다 넘어버려서 선택을 하고 말고도 없었다. 돌아갈 곳은 없고, 직진만 있는 길에서 나는 마지막으로 깊게 숨을 내쉬었다.
“언제부터야? ..나 좋아한 거.”
나 혼자 짝사랑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래서 그 난리를 쳤는데.
“너는 언제부터였는데.”
“아 내가 먼저 물어봤잖아.”
내 말에 정재현이 픽 웃었다. 안 그래도 가까운데 제 얼굴을 한 뼘 더 가까이 가져온다. 아까 말 했잖아. 코 앞에서 마주한 정재현은 보조개가 들어갈만큼 웃으며 담담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예전부터 친구 아니였다고.”
“..”
“너가 알면 어이없을 정도로.. 오래 전부터 좋아했어.”
안 그래도 후끈 거리는데 얼굴이 더 뜨거워지는 기분이다. 고인 침을 꿀걱 삼켰다. 누군가에게 이렇게 진솔한 마음을 듣는게 너무 오랜만이라, 근데 그 상대가 다른 사람도 아닌 정재현이라 더 떨리는 것 같았다. 나는 자꾸만 벅차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며 정재현의 옷자락을 쥐고있던 손에 힘을 풀었다.
“우리가 연애를 한다고 쳐.”
“응.”
“..그러다 헤어지면?”
잠시 머뭇거리다 물었다. 제일 걱정하던 미래였다. 정재현은 내 물음에 처음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입가는 여전히 붉은 채 그랬다. 그런 정재현을 바라보다 시선을 떨구려던 참에 정재현은 제 큰 손을 들어 내 양 볼을 감쌌다.
“나 계속 봐.”
묵직한 목소리가 근방을 울렸다. 그 말에 나는 전보다 더 크게 눈을 뜨고 녀석을 바라봤다. 내 볼을 감싼 손이 뜨거웠다. 정재현은 깊게 숨을 한 번 내쉬더니 조용히 말을 이었다.
“너가 생각하는 것보다 내가 널 좋아하는 마음이 커.”
“..”
“안 헤어져. 죽어도.”
날 바라보는 눈빛이 너무 단단해 온 몸을 옭아매는 것 같았다. 아, 저러면 내가 더 할 말이 없잖아. 이미 마음은 다 기울었다. 아니 그냥, 입술 닿는 순간부터 친구는 글러먹은 거였다. 나는 얼굴에 있던 정재현의 손을 잡아 천천히 내리며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꽤 오래 쉰 연애를, 그것도 두 번째밖에 안되는데, 그걸 결국 너랑 하는구나.
“..알았어.”
“뭐라고?”
“아.. 알았다고.”
아마 정수리까지 빨개져있을 거다. 개미만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하자 한껏 진지하던 녀석이 킥킥 웃었다. 보진 않아도 입꼬리가 잔뜩 올라가있다는 걸 안다. 뭐가 알았는데?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미 다 알면서 괘씸하게 장난을 친다. 안 그래도 민망해 죽겠는데 진짜ヽ(`Д´)ノ
“아!! …하자고.. 연애..”
결국 또 질끈 눈을 감고 질러버렸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정재현은 크게 웃으며 또 다시 나를 당겨 안았다. 이렇게 진짜, 완벽하게 친구는 끝이 나버렸다. 우리 이제 연애 하는 거야. 부끄러운 마음에 정재현의 품에 얼굴을 더 푹 묻었다. 별에별 생각이 다 들었지만 그래도 제일 큰 생각은 어쨌든.. 좋다는 거였다. 정재현도 나와 같은 마음이라, 먼저 확신을 줘서, 다행이라는 거다. 혼자 진지하게 고민하고 울던 거 평생 묻어야겠다…(먼산)
“야, 근데 진짜 남자 소개 받은 건 뭐야?”
그렇게 꼭 껴안은 채 부둥부둥 하던 중 갑자기 몸을 뗀 건 정재현이였다. 웃던 얼굴은 어디가고 미간을 좁히며 나를 바라보는데, 너무 잊고 살던 일이라 당혹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정수정한테도 말한 적 없는데 도대체 어디서 듣고 온 거야…(삐질) 내가 입술을 벙긋거리며 당황한 티를 내자 녀석은 더욱 더 인상을 찌푸렸다. 나는 데굴 눈을 굴렸다.
“아 그거..?”
“..”
“그게 받긴 받았는데..”
“받긴 받았다?”
…아니 내가 쪼그라들 일이 아닌데 그렇게 매섭게 보니까 괜히 잘못한 것 같잖아..? 나는 턱을 긁적이며 그날 만났던 남주혁을 떠올렸다. 이걸 어디서부터 얘기해야하나 고민하는 행동이였다. 그러니까.. 너를 좋아해서 마음을 접으려고 받았긴 했는데 말이야..
“..남주혁이였어.”
“..뭐?”
“그때 만난 남자애가 남주혁이였다고. 우리 초등학교 때 같이 학교 다녔던.”
잔뜩 표정을 굳히던 녀석이 멍하게 근육을 풀었다. 어지간히 놀랐나보다. 하긴 나도 그렇게 놀랐는데 너도 놀랍겠지. 남주혁이면 거의 10년 가까이 소식도 모르고 살던 애였으니까. 진짜? 묻길래 그렇다 답을 했는데도 계속 묻는 정재현을 보며 두어번 눈을 깜빡였다. 녀석은 끝내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몇 번 벙긋거리더니 제 뒷머리를 헝클인다.
“야 걔가 예전에 너..”
“..나 뭐?”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튼 둘이 만나서 뭐 했는데?”
“뭐하긴. 그냥 카페에서 얘기하다가 헤어졌지.”
“..남주혁이랑 연락 하는 거 아니지?”
“아니거든. 야, 걱정 하지 마. 걔 내 동기 좋아해. 소개팅도 그냥 홧김에 해달라고 한 거래.”
그리고 걔가 너 보고싶대. 나중에 연락처 줄게.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인다. 정재현은 안도한 건지 아 진짜 김여주…! 라며 괜히 불평 한 마디를 내뱉더니 다시 나를 안아버린다. 이거 완전 막무가내구만? 몇 번을 안겼다 떼졌다 한 나는 입술을 씰룩거리며 정재현의 옆통수를 흘겨봤다. 내가 너 소개 받았다는 말 듣고 얼마나 속상했는 줄 알아? 궁시렁 거리는 소리도 계속 그러면 연애고 뭐고 다 없던 걸로 하자 협박 아닌 협박을 했더니 금세 조용해 진다.
“김여주.”
“왜.”
“여주야.”
“아 왜.”
“고마워. 잘 할게.”
정재현이 나를 더 꽉 껴안았다. 친구가 아니라 애인이라는게 정말 실감이 났다. 좋았지만 티는 못내고 괜히 틱틱거리며 대답했다. 당연히 그래야지. 정재현의 가슴팍에 파묻혀 거의 웅얼거리듯 말했는데도 정재현은 용케 알아들어 바람 빠진 웃음을 내보냈다. 그 후 한참 그렇게 안고 있었던 것 같다. 서로 꾹 참았던 시간이 한꺼번에 터져버린 것 처럼. 걱정하던 건 다 잊은 채 너무 좋아서 주체도 못 할만큼.
아, 미친 건 나야. 자판을 치는데 자꾸 실실 웃음이 나왔다. 한참을 들고있던 핸드폰을 내려놓고 몸을 풀었다.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꾹 참아봤지만 역부족이였다. 힘을 쭉 뺀 채 침대에 철푸덕 누웠다. 형광등이 켜진 천장을 보는데 눈이 너무 부신 나머지 정재현 얼굴이 아른 거렸다. (맞다. 핑계다.) 나 진짜 얘랑 연애 한다고. 그 생각을 하니 또 헛웃음이 나와 괜히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러다 문득 든 생각에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 그래도 이제 남자친군데.. 핸드폰에 정재현 석자로 저장해놓는 건 좀 그렇겠지?^^
“으음..”
뭐로 바꾸지. 핸드폰을 처음 산 그날부터 정재현은 항상 정재현이였는데. 수정에 들어가 이름 석자를 지우는 것도 새삼 기분이 이상했다.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 타자를 두들겼다. 남자친구. 아냐, 구려. 다시 타이핑을 했다. 재혀니♥. …아 이건 더 구려. 몇 번을 썼다 지웠다 반복했다. 어쩜 이렇게 하나같이 마음에 안 들지?
“…ㅋ”
그냥 정재현 하자^^♡
정재현의 바람대로 오랜만에 같이 등교를 했다. 학교에서는 티 내지 말자고 오면서 새끼 손가락까지 걸었다. 소문 나봐야 좋을 건 하나도 없다는 걸 둘 다 알았다. 그래도 원래 그랬던 것처럼 정재현은 자연스럽게 내 강의실로 향했다. 나는 가방을 고쳐메며 그런 정재현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건물 안으로 들어오니 아는 얼굴들이 보여 계속 인사를 하며 지나갔다. 선배 안녕하세요. 어 여주 안녕. 재현 선배 안녕하세요. 어 안녕. 정재현이랑 둘이 걸어갈 때 자주 있던 일인데도 스스로 찔린다는 게 이런 건지 괜히 가슴이 콩닥거렸다. 그렇게 걸어가다보니 강의실이 금방이었다. 나는 대충 인사를 하고 들어갈 생각으로 손을 흔들었는데 정재현은 슬쩍 주위를 둘러보더니 허공에 있던 내 손을 잡아 제 쪽으로 가져간 후 빠르게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야!”
미쳤어? 놀란 마음에 눈을 크게 뜨고 급히 양 옆을 살펴보니 다행이도 본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이 자식이, 약속 했으면서ヽ(`Д´)ノ 손을 빼며 녀석을 노려봤지만 정재현은 그래도 좋은 건지 씨익 웃더니 간다~! 라며 후다닥 도망갔다. 저게 진짜…. 나는 그 뒷모습을 보며 허! 하고 몸을 들썩이다 정재현이 입 맞춘 손등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따 보면 죽었어 정재현.”
말은 그렇게 했는데, 나 왜 또 웃냐고. 실없이 입꼬리가 올라가 괜히 손등을 만지작 거렸다.
“사귀냐?”
“아 깜짝, 아. 아아.”
그때 누군가가 뒤에서 불쑥 말을 던지는 바람에 나는 또 한 번 놀랠 수밖에 없었다. 가슴을 부여잡은 채 고개를 돌리자 캡모자를 푹 눌러 쓴 태용 선배가 보였다. 선배는 그런 나를 보며 입꼬리를 씩 올렸다. 아놔 아무도 못 본 줄 알았는데..! 선배를 향해 어색하게 웃어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에 선배 앞에서 세상 제일 우울한 사람처럼 굴었던게 생각나 살짝 쪽팔리기도 했다. 하이고. 선배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키득 웃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말도 덧붙였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물며 발끝을 들었다 내렸다.
“축하해. 오래 가라.”
“감사합니다 선배.. 그래도 당분간은 비밀로 해주세요..”
“야 내가 말할 사람이 어딨냐.”
걱정하지마. 내 어깨를 툭툭 두들기는 손길에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아 진짜 며칠동안은 아무도 모르게 연애 하려고 했는데. 물씬 드는 괘씸한 마음에 정재현이 도망간 쪽을 힐끔 쳐다보다 강의실로 발을 옮겼다. 그런데 같이 걸어가던 선배가 얼마 안 가 다시 나를 불렀다. 아 맞다, 그리고 여주야. 그 소리에 걸음을 멈춘 내가 네? 대답하며 몸을 돌렸다.
“저번에 너 민형이 과외비 처음 받고 나랑 해장 한 날 기억하지?”
“네. 기억하죠.”
“그 전 날에 너 술 취해서 친구가 업고 갔다고 한 것도 기억해?”
나는 눈을 깜빡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잊어. 정수정한테 말로 뺨 맞은 날인데...(울컥) 선배는 그런 나를 보며 무심하게 손을 주머니에 꽂더니 곧 무덤덤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때 너 업고 간 애 정재현이야.”
“..”
“..”
“..네?”
….(oωo)? 뭔 소리야?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러고보니 그때 선배가 정씨는 정씨인데.. 라고 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니 그러니까 그때 술에 쩔어서 정신 못차리던 나를 업어간 사람이 정수정이 아니라 정재현이라고? 나는 입을 떡 벌린 채 멀뚱히 선배를 바라봤다.
“아니 선배는.. 왜 그걸 이제야 말 해요?”
“아니 뭐 그거야 너네가 이제야 사귀니까?”
아 뭐야. 나도 모르게 허, 하고 어깨를 들썩이자 선배는 어쭈 중얼거리며 내 머리를 한 번 튕기고 먼저 강의실로 들어갔다. 나는 그런 선배를 따라 고개를 움직이다 가방끈을 꾹 쥐며 정재현이 사라진 복도를 다시 눈에 담았다. ..나 그날 문태일 때문에 술 마셨는데. 오래 전부터 날 좋아했다는 정재현의 고백이 스쳐 지나갔다. 순간 말문이 막혔다.
정재현 너는 그날 날 업으면서..
문태일 때문에 술에 취한 나를 업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정재현과 사귄지 3일 째였다. 그래도 정수정과 김동영한테는 말해줘야겠다는 결론에 약속을 잡아 오랜만에 넷이서 모이기로 했다. 때마침 불금이라 장소는 당연히 치타폰이였다. 제발 사귀라고 말로 고사를 지냈던 애들이니 나와 정재현이 사귄다는 말을 들으면 분명 난리가 날 거다. 안 봐도 비디오였다.
정재현과 함께 집에서 티비를 보다가 약속시간에 맞춰 나왔다. 가을 바람이 서늘하게 불었다. 단풍이 늘어진 거리를 걸으며 정재현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오늘 강의가 너무 지루했고, 동기가 이런 말을 했고, 선배가 그랬는데 너무 짜증났어. 그런 일상을 나누며 걸음을 내딛는데 정재현이 자꾸만 스치던 손을 잡았다. 전해지는 온기에 맞잡은 손을 한 번 본 후 정재현을 올려다보자 녀석은 씩 입꼬리를 올릴 뿐이었다.
“손을 막 잡네 정재현.”
“싫으면 놓을까?”
“아 누가 싫대?”
하여튼 능글 거리는 거 최고라니까. 첫 연애 맞아? 어째 나보다 능숙한 것 같았다. 뭐 그렇다고 내가 능숙하다는 건 아니고. 입술을 씰룩거리며 잡은 손을 더 꽉 잡았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치타폰 앞이였고, 우린 잠시 멈춰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정수정과 김동영을 한 번 살폈다. 둘이 또 무슨 얘기를 하면서 싸우는 건지 정수정의 표정이 살벌하다. 갈까? 옆에서 정재현의 음성이 들렸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정재현은 손을 잡은 채 나를 이끌었다. 딸랑 종소리와 함께 치타폰 문이 열렸다. 제일 먼저 반겨주는 건 역시 텐 오빠였고, 그 다음 고개를 돌린 건 메뉴판을 들고 있던 정수정과 김동영. 순간 긴장이 됐다.
“어, 왔…”
“…”
“야.. 내 눈에만 쟤네 손 잡고 있어?”
“내 눈에도 미친 손 잡고 있는데.”
정재현이 앞장 서 걸어가며 손을 흔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정수정과 김동영은 눈을 가늘게 뜨며 정재현과 내가 잡고 있는 손에 초점을 맞춘다. 그 모습이 웃겨서 일부러 맞잡은 손을 더욱 흔들어보였다. 내 장난에 정재현이 나를 내려다보며 픽 웃는게 시야 끝에 걸렸다.
“너네 뭐냐..?”
“뭘 것 같냐?”
테이블까지 걸어간 나와 정재현은 아무렇지 않은 척 의자를 끌어 앉았다. 물론 손은 놓지 않았다. 일부러 테이블 위에 턱 올려놓자 김동영이 입을 떡 벌린다. 아 미친, 얘네 사귀나봐! 정수정이 그런 김동영의 등짝을 소리나게 내려치며 소리쳤다.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놀란 것 같았다. 이제 놓아도 되겠다는 생각에 작게 웃으며 잡고 있던 손을 떼어냈다. 하지만 그건 잠시였고, 놓기 무섭게 다시 손을 잡아오는 정재현 때문에 나 역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어, 우리 사귀어.”
전보다 더 꾹 손을 잡은 정재현이 말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정재현을 바라봤다. 사귀는 거 맞는데, 막상 저 입에서 그 말이 나오니 또 민망함이 올라왔다. 얼굴은 또 엄청 잘생겼어요. 녀석의 옆태를 홀린듯 바라보다 괜히 볼이 붉어지는 기분에 고개를 휙 돌렸다. 앞에선 박수를 치고 난리가 났는데 쑥스러운 마음에 다른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입술을 혀로 축였다.
“뭔데. 언제부턴데? 어? 누가 고백 했는데? 너야? 아님 김여주?”
“아까 문자로 보낸 거 다 주문했지?”
“어, 주문 다 했는데 지금 그게 중요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빨리 불라고.”
나는 고개를 더 푹 숙였다. 일이라고 할만한 건 싸우다 키스한 거.. 밖에 생각이 나지 않았다. 얼굴이 터질 것 같아 정재현과 잡은 손에 힘을 꾹 줬다. 너가 대신 말하라는 뜻이였다. 정재현은 그런 내 뜻을 기특하게도 알아들은 건지 픽 웃는 소리가 들리더니 제 엄지손가락으로 잡고 있던 내 손등을 살살 쓸었다.
“오늘이 삼일짼데,”
“삼일씩이나 됐어?!”
“내가 친구 그만하자고 했어.”
정재현의 말에 얼굴을 가리던 손을 슬쩍 내려 힐끔 녀석을 쳐다봤다. 눈이 마주치자 입꼬리가 곡선을 그린다. 그때 마침 텐 오빠가 주문한 술과 안주를 서빙하러 왔다. 여주랑 재현이 무야~ 나 다 봤어~ 오빠가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하는데 나와 정재현은 어색하게 웃음을 흘렸다. 우리 대신 정수정과 김동영이 얘네 사귄대요~! 라고 말을 해줬기 때문이다. 저럴 줄 알았지. 세상 신나할 줄 알았어. 축하한다는 말과 함께 카운터로 돌아간 오빠에게 고맙다고 답을 하는데, 정재현이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안돼. 아직 확실히 마무리 안 지었잖아. 정수정이랑 김동영 눈빛을 보라고. 슬쩍 확인한 얼굴들이 사악하게 웃고 있었다. 야씨.. 나만 두고 가지마…(இдஇ; )
“손만 씻고 올게.”
하지만 정재현은 잡고있던 손을 빼낸 후 매정하게 걸어갔다. 나도 확 화장실로 도망갈까 싶었지만 정수정이 빨랐다. 엉덩이를 떼기도 전에 김여주~ 하며 간드러진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계속 말해봐.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뭘 어떻게 돼. ..사귀잖아.”
“키스는? 내가 확 해버리라고 했잖아.”
“미쳤어? 아 진짜!”
“난 너네 평생 삽질만 할 줄 알았어.”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칵테일잔으로 뻗던 손을 멈칫하곤 소리를 빽 질러버렸다. 다행이 눈치는 못 챈 건지 정수정과 김동영은 쉬지않고 공격을 날렸다. 그러면서 끝은 꼭 아무튼 축하한다, 다. 병 주고 약 주는 것도 아니고(바득). 나는 다시 떠오른 입맞춤 모먼트를 애써 묻으며 마저 손을 뻗었다.
“김여주. 정재현은 진짜 오래됐다.”
쩝 입맛을 다시며 술을 한 모금 마시는데 맞은 편에서 땅콩을 와그작 씹던 김동영이 무심하게 말했다. 이걸 이제야 말하고 있네. 쯧쯔 혀를 차기도 했다. 미간을 좁혔다. 도대체 얼마나 오래 됐길래 저래. 정재현도 어이없을 정도로 예전부터 좋아했다더니. 정수정이 턱을 괴며 그런 나를 바라봤다. 그러더니 곧 제 긴 머리를 뒤로 넘기며 툭 내뱉는다. 너 진짜 결정 잘 한 거야. 후회 할 일 없을 거고.
“그랬으면 좋겠다.”
테이블 밑으로 다리를 쭉 피며 작게 기지개를 켰다. 절대 헤어지지 않을 거라고 단호하게 말하던 정재현이 문득 떠올랐다. 헤어짐에 대한 걱정이 제일 컸는데, 정재현을 믿기로 했다. 물론 내가 녀석을 좋아하는 마음도. 이렇게 되면 정재현이랑 결혼까지 해야하는 건가. 그건 좀 억울하다. 엄마가 결혼은 이런 저런 연애 다 해보고 하랬는데…(먼산) 괜히 잔을 흔들거리며 정재현의 빈자리를 힐끔 보는데 그 순간 큼직한 손이 정수리를 덮었다. 굳이 고개를 들지 않아도 정재현이라는 걸 알았다. 물기를 덜 닦은 건지 촉촉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무슨 얘기 하고 있었어?”
“당연히 너네 얘기 중이였지. 빨랑 앉아. 건배나 한 번 하게.”
정재현은 내 머리에서 손을 뗀 후 내가 힐끔 거리던 빈자리에 다시 착석했다. 나는 물기 묻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한 번 털어내며 그런 정재현을 쳐다봤다. 왜? 정재현이 입모양으로 물었다. 그에 아니라는 뜻으로 고개를 저었다. 내가 그럴동안 앞에서 김동영이 먼저 잔을 들었다. 자자, 다 잔 들어라. 건배사는 그냥 위하여로 간다. 오케이?
“앞에 연애를 좀 붙여주라.”
“야 살 붙일 거면 그냥 이름도 붙여. 김여주와 정재현의 연애를 위하여.”
“아 뭐든 빨리 해.”
허둥지둥 잔을 들었다. 색깔이 다른 칵테일들이 안주 위로 모였다. 자아~! 정수정이 잔을 뒤로 슬쩍 빼며 시동을 걸었다. 결국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그리고 곧 쨍, 하고 잔과 잔이 부딫히는 소리와 함께 건배사가 울렸다. 김여주와, 정재현의, 연애를, 위하여!
옅게 취기가 올라 기분이 좋았다. 옆에서 걷고 있는 정재현 역시 그런 건지 자꾸 실없이 웃는다. 잔잔하던 공기 틈을 녀석의 웃음 소리가 흐트렸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마시긴 했다. 분위기라는게 무서웠다. 애들과 헤어진 후 왔던 길을 되돌아가며 우리는 또 손을 잡았다. 걸음은 느리게 내딛으며 맞잡은 손을 앞뒤로 흔들거렸다. 어쩌다 내가 떨어져 걷게되면 정재현은 팔을 당겨 그대로 나를 제 쪽으로 끌었다. 그럼 녀석과 내 사이는 또 좁혀지고, 픽픽 웃음이 터졌다.
“나 솔직히 아직도 잘 안 믿겨.”
그렇게 걸어가던 중 정재현이 나직하게 말했다. 뭐가. 그에 고개도 돌리지 않고 짧게 대답했다. 한동안 돌아오는 답변이 없었다. 정재현은 잡은 손을 흔들던 걸 느릿하게 멈췄다. 그제서야 녀석을 바라봤다. 정재현은 고개를 살짝 숙였고, 귀끝을 붉게 물 들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
“너랑 손 잡는 거.”
“..”
“이 순간이.”
꿈 같아. 그 순간 눈이 마주쳤다. 정재현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 탓이였다. 거리가 어두워 잠시 흐르는 정적이 더 고요한 느낌이었다. 주위에 몇 없는 상점과 가로등, 달빛에 의존해 정재현을 바라봤다. 쟤가 하는 말이 너무 와닿아서 목구멍이 꾹 막혔다. 정말 정말, 내가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더 나를 좋아하는 것 같아 발끝이 저렸다.
“야 정재현.”
작게 부른 이름인데도 크게 근방을 울렸다.
“왜 김여주.”
“너..”
“응.”
“진짜 나 언제부터 좋아했어?”
정재현이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발을 내딛는 속도도 전보다 더 느려졌다. 내 물음에 잠시 생각하는 건지 나를 보고있던 시선을 돌려 다시 앞을 바라본다. 그런 녀석의 머리카락이 잔잔한 바람에 작게 흔들렸다.
“처음 너 좋아하는 거 깨달은 건 초등학교 육학년 때.”
그 바람은 내 볼도 스쳐 지나갔다. 그래서 그런 건지 취기가 싹 가시는 것도 같았다. 나는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입술만 벙긋거렸다.
“내가 널 언제부터, 왜 좋아하게 됐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
“..”
“그냥 어느날 문득 보니까 너를 좋아하고 있더라.”
중학교도 아니고 초등학교. 실내화 주머니 들고 등하교 할 때부터 나를 좋아했다고? 걸음을 멈췄다. 그러자 손을 잡고 있던 정재현의 팔이 팽팽해지는가 싶더니 녀석 역시 몇 발자국 앞에서 발을 멈추고 나를 바라봤다. 어제 태용 선배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몇 달 전 그날 나를 업고 나간게 정재현이라는 말. 그럼 너는 내가 문태일 때문에 술에 취했을 때 뿐만 아니라 문태일을 짝사랑 했을 때, 그러다 마음이 맞아서 연애를 했을 때, 헤어져서 한창 힘들어 했을 때 모두 마음을 숨기고 내 옆에 있었던 거네. 내가 너를 마냥 친구로만 봐도 아무 내색 안 하고, 그렇게 묵묵히.
“..미안해.”
“너가 왜.”
“그냥.”
“..”
“내가 너무.. 늦은 것 같아서.”
현재의 나는 너를 좋아해서 그 모든 시간이 미안하기만 하다. 지금 생각나는 것만 해도 한숨밖에 안 나오는데. 내 한 마디 한 마디에 네 속은 얼마나 뒤집어졌을까 생각하니 고개가 저절로 떨궈졌다. 나는 왜 그렇게 긴 시간동안 의심조차 해본 적 없을까. 진짜 눈치도 없이. 후회가 됐다. 그런 내 시야로 정재현의 운동화 코가 들어왔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정재현은 잡고 있던 손을 놓더니 제 허벅지에 얹고는 무릎을 살짝 굽혀 나와 눈높이를 맞춰왔다.
“김여주.”
정재현의 얼굴이 가까웠다. 그런 말 하지 마. 녀석은 나지막이 말했다.
“나 사실 너한테 기적을 바랐어.”
“..”
“내가 좋아하는 김여주가 나를 좋아하게 해달라고 했어.”
그러더니 씩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볼에 보조개가 피었다.
“기적이 돼줘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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