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동거
w.로스트
(Triathalon - Bad Mood)
“우리 데이트할까.”
정적을 뚫고 나온 갑작스런 지민의 목소리였다. 거실 테이블에 앉아 노트북을 두드리던 여주의 손이 주춤거리며 허공에 멎었다. 그런 여주의 뒤에 바짝 붙어 앉아 두 팔은 여주의 허리에, 턱은 여주의 어깨에 괸 채 말하는 지민의 표정이 어딘가 불퉁했다. 아무리 그래도 오랜만에 휴일인데,
“이렇게 내내 노트북만 두드리고 있는 건 너무하잖아.”
지민이 가늘어진 눈으로 여주를 바라보며 노트북 위에 놓여있던 여주의 손등 위로 슬며시 깍지를 껴왔다. 지민의 말대로 얼마 전 정국의 마음을 본의 아니게 알아 버린 후, 마치 일중독에 걸린 사람처럼 며칠을 노트북만 붙잡고 있던 여주였다. 물론 영화 제작과 관련해 일이 많아진 것도 사실이었지만, 무엇보다도 글을 쓰는 동안엔 딴 생각이 들지 않았으니 잠깐이라도 머리를 식힐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된 탓이었다.
“...데이트요?”
때문에 여주는 평소처럼 잠잠히 글을 쓰고 방 안에서 영화 시나리오를 다듬는 등, 나름의 휴식을 취했다. 여태껏 여주가 생각해온 휴식이라곤 고작 이런 것들이 전부였으니 ‘연애, 휴일, 애인과 데이트.’ 이런 평범한 연인들의 루트는 아직 여주에게 익숙지 못한 것이 사실이었다. 27년 동안 제대로 된 연애가 없었으니 제대로 된 데이트 또한 여주의 경험에 있을 리 만무했다. 게다가 아무리 연인 사이라고 한들 매번 이렇게 집에서 지민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별다른 데이트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도 있었다.
“응, 데이트.”
“하지만 시간이..”
“뭐 어때요.”
“원래 밤늦게 하는 데이트가 더 재밌는 법이잖아.”
노트북 하단의 시간을 확인하는 여주를 보며 지민이 뭐가 문제냐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 지민의 반응을 보며 여주는 괜스레 제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많이 봐왔고, 심지어는 두 남녀의 데이트 장면을 직접 써본 적도 있었던 여주였으나 막상 제가 하려니 몸이 꼬이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였다. 그런 여주를 보며 지민은 짧게 웃음을 터트렸다. 마냥 연애에 서툴기만 한, 이러한 여주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매번 이렇게 웃음부터 나오고 보는 지민이었다.
“가끔 보면 주변에 이렇게 동거하는 연인들 있잖아요.”
“......”
“나 예전엔 그거 되게 이해 안됐거든?”
매번 보는 얼굴, 뭐 하러 집에서까지 보나 싶고.
그리고 그런 지민의 웃음 뒤에 이어진 건 뜬금없는 연인들의 동거에 관한 이야기였다. 비스듬히 상체를 기울인 채, 여주를 바라보며 말을 잇는 지민을 보며 여주는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근데 이젠 이해가 돼.”
“이렇게 여주 씨 보고 있으면.”
그 말을 끝으로 여주의 손등에 깍지를 끼고 있던 자신의 손을 다시 한번 제대로 고쳐잡는 지민이었다. 지민의 입가에 걸려 있는 잔잔한 웃음과 차분한 목소리. 거기서 오는 미세한 설렘이 여주의 마음을 또 한번 울렁이게 만들고 있었다.
-
이미 영화가 시작된 직후라 상영관 내부엔 컴컴한 어둠이 드리워 있었다. 심야 시간이라 그런지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두 사람이 보기로 한 영화 또한 이미 수많은 관객들을 동원하고 이젠 썰물에 다다른 영화였으니 더더욱 그랬다. 최대한 방해가 되지 않게 발소리를 죽이고 뒤 쪽의 커플석에 나란히 엉덩이를 붙인 여주와 지민이 손에 쥐고 있던 맥주를 한 모금 홀짝이며 스크린에 집중했다. 두 사람 모두 오랜만에 느껴보는 영화관 내의 묵직한 공기였다.
“......”
영화는 무난히 초반부를 지나가고 중반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스크린에서 흘러나오는 주인공의 대사들을 하나하나 곱씹으며 영화에 집중하는 여주와는 달리 지민은 그저 무심한 얼굴로 여주의 손가락 마디만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애초에 지민은 데이트로 영화관을 즐겨 찾는 편이 아니었다. 전 여자친구들과도 대부분 술을 먹거나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유흥을 즐기는 편이었지, 이렇게 소소한 데이트를 한 기억은 한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지민은 영화에 집중한 여주의 옆얼굴을 보며 ‘이런 데이트도 나름 괜찮네.’ 하는 생각을 문득 떠올리곤 했다. 긴 텀을 두고 느리게 깜빡이는 여주의 두 눈. 집중하느라 살짝 벌어진 여주의 입술. 지금 제 손에 닿아있는 여주의 손끝. 소리를 낼 수 없으니 이러한 촉각과 시각에만 집중해야 하는 이 공간의 특성이, 지민에게 꽤나 나쁘지 않게 다가온 것이었다.
“..여주 씨.”
“......”
“여주야.”
아예 스크린에서 고개를 돌려 옆에 앉은 여주의 얼굴만을 제 눈으로 하나하나 짚어보던 지민이 이내 조용히 여주를 불렀다. 자신의 이러한 끈덕진 시선에도 불구하고 저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여주가 조금은 괘씸해진 이유에서였다. 그 사실을 알리 없던 여주는 그제야 지민의 목소리에 반응하며 지민을 돌아보았다. 나 집중이 안 돼. 지민이 투정을 부리듯, 나른하게 풀린 눈으로 작게 속삭였다.
“..왜요? 영화가 재미없어?”
“...아니, 뭐.”
“여기가 너무 어둡고 조용해서 그런가.”
지민을 따라 목소리를 낮춰 말하는 여주를 보며 지민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너무 어둡고 조용해서 집중이 안 된다는, 여주가 이해하기엔 그저 애매하기만 한 지민의 대답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하필 이런 공간에 네가 내 옆에 있어서.’ 이러한 뒷말은 여주를 약 올리기라도 하듯 제 목구멍 너머로 삼켜내버린 지민이었으니 말이다.
지민이 여주의 허리 뒤로 불쑥 손을 집어넣었다. 여주가 흠칫 놀라며 순간 제 허리에 바짝 힘을 준 채 숨을 참았다. 점차 자신 쪽으로 기우는 지민의 상체를 따라 여주가 슬그머니 옆으로 몸을 물러섰다. 하지만 그렇게 금방이라도 여주의 허리를 감싸 안을 것만 같던 지민의 손이 달리 향한 곳은, 다름 아닌 여주의 팔걸이에 꽂혀있던 맥주 캔 쪽이었다. 괜스레 긴장한 표정이 역력한 여주의 얼굴을 오롯이 바라보며 지민은 보란 듯이 손에 쥔 맥주를 한 모금 짧게 들이켰다. 여주를 바라보며 짓궂게 제 입꼬리를 올리는 지민의 목울대가 작게 요동쳤다.
“방금 이상한 생각했죠.”
“...제가 언제,”
“그러면서 몸은 왜 빼?”
그리곤 다시 한 번 불쑥 여주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 안는 지민이었다. 여전히 속삭이듯 말하는 지민의 목소리가 여주의 귓바퀴를 간지럽혔다. ...빨리 영화나 봐요. 여주가 그런 지민의 어깨를 밀어내며 애써 지민을 외면했다. 스크린의 빛에 의해 어둠 속에서 훤히 드러난 여주의 귀가 조금은 붉게 물들어있었다. 그 모습을 발견한 지민이 이내 고개를 젖히며 소리 없이 웃었다. 여주의 집중력을 완전히 흩트려 놓은, 지민의 승리였다.
-
“이제 기분 좀 괜찮아졌어요?”
영화를 보고 난 후, 선선한 바람이 부는 밤거리를 두 사람은 꽤 오랫동안 걸었다. 팔짱을 꼈다가, 손을 잡았다가, 어깨에 손을 둘렀다가. 누가 봐도 평범한 연인들의 데이트였다. 그러던 중, 집 근처의 골목 앞에서 문득 발을 멈춘 건 지민이었다. 여주가 그런 지민을 넌지시 바라보았다.
“그날부터 계속 저기압이었잖아.”
지민의 말을 듣고 있던 여주가 조금은 놀란 표정으로 눈을 키웠다. 나름 속으로 잘 숨겨왔다고 생각한 여주였으나 여주의 복잡한 마음이 지민의 눈엔 조금도 숨겨지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여주는 애꿎은 제 입술만 벙긋거렸다. 지민이 그런 여주를 마주 보며 차분히 말을 이었다.
“말해주기 곤란하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돼요.”
“......”
“대신 이거 하나만 말해줘.”
“...지금 내가 불안해해야 할 상황인 건지.”
단순히 확신을 갈구하는 말인 듯 보였으나 그런 지민의 말의 내면엔 이미 지민이 느끼고 있는 불안한 감정이 여실히 담겨있었다. 여주는 그제야 지민이 요 며칠간 자신을 보며 홀로 확신 없는 불안감에 시달려왔으리라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여주가 정국의 마음을 알아차린 바로 그 날 이 자리에서,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한 여주의 표정이, 떨리는 목소리가. 이미 지민에겐 여주와 정국 사이로 뭔가의 변화가 찾아왔음을 깨닫게 해주는 충분한 증거로 보였으니까.
“...티 났구나.”
여주는 일순 제 마음 한편이 미어짐을 느꼈다. 여주에 대한 믿음과 혹시나 하는 그 불안감 사이에서, 지민은 계속 여주에게 사랑한다 말을 거는 방식으로 자신의 불안을 지워내려 애써왔던 것이다. 여주가 지민에게로 서서히 다가가 지민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지민의 품에 고개를 묻은 여주가 지민의 옷자락을 조심히 감싸 쥐었다.
“...이렇게까지 신경 쓰고 있는 줄 몰랐어요.”
“......”
“그만큼 내가 티를 낸 줄도 몰랐고.”
두 사람의 머리 위에서 깜빡이는 가로등 불빛이 흐려졌다 선명해지길 반복했다. 고요한 거리의 공기가 여주의 목소리를 잔잔히 띄워 올렸고, 여주는 자꾸만 올라오는 감정을 억누르며 최대한 차분히, 제 감정을 지민에게 전달하려 노력했다.
“이렇게 지민 씨를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어.”
“......”
“그래서 숨긴 거지, 다른 의도는 없었어요.”
그냥, 그냥 내 생각이 짧았던거야.
지민이 저 때문에 불안해하지 않기를 바랐다. 때문에 여주는 제 서투른 표현 방법을 탓했고 일찍이 이렇게 털어놓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을 느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발견함과 동시에 여주는 자신이 지민을 생각보다 더 깊이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또 한 번 실감했다. 지민은 자신의 품에 기대 그렇게 천천히 제 속 사정을 털어놓는 여주를 보며 그저 말없이 여주가 쏟아낸 감정들을 받아낼 뿐이었다.
여주의 말이 끝마침과 동시에, 지민은 그런 여주의 볼을 감싸 안아 오래도록 여주와 눈을 맞췄다. 그리곤 여주의 얼굴 가까이로 고개를 숙이며 여주의 콧대를 지나 천천히, 시선으로 여주의 입술을 쫓는 지민이었다. 여주의 눈꺼풀이 지민의 고개를 따라 조금씩 감겨오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서로의 입술이 부딪힐 것만 같은 이 짧은 거리에서, 여전히 서로의 시선은 서로의 입술에 향한 채였다.
“...신경 쓰여요, 전부.”
“......”
“내가 사랑하는 당신한테,”
“내 온 신경을 쏟는 건 당연한 일이잖아.”
마침내 깜빡이던 가로등 빛이 완전히 소멸했다. 한순간에 주변으로 어둠이 몰려듦과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 부드럽게 맞물리는 두 사람의 입술이었다.
*
낰낰... 독자님들 계신가여..?
제가 이번에도 너무 늦었습니다.. 진짜 망할 혐생이 절 놓아주질 않네여...
아니 과제도 과젠데 무엇보다도 제가 지금 아는 지인 분께 알바 겸으로 아동 연극 시나리오를 부탁받아서 쓰고 있거든요..
근데 하필 담당자분 너무 까다로우시고...^^ 하하 죽겠네요
암튼 그래도 최대한 시간 날때마다 다음편 틈틈히 들고 오려고 노력중입니다
아무래도 기말 때까진 매번 이 속도일 것 같지만.. 그래도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꼬박꼬박 주말에 올 수 있도록 노력해볼게요
독자님들 댓글보면서 힐링하는 게 제게도 현생 이겨내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에... 네.. 그냥 보고싶었다는 말입니다
이거 올리고 또 과제하러 가야 한다는 현실이 마냥 슬플 뿐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