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데, 감기는 안 걸렸어?"
"응 괜찮아."
그는 내게 왜 어제 늦게 잤냐며 물어보지 않았다. 다행인건가. 허나 어제 눈꽃축제에 갔다는 것은 곧 밝혀질 것이다. 왜냐, 지금 내가 그의 앞에 내밀고 있는 이 것 때문에.
"뭐야?"
"장갑."
"갑자기?"
나는 그에게 장갑을 내밀었다. 그에게 잘 어울리는 회색 장갑. 그는 내게 뭐냐며 물었고, 나는 대답했다. 장갑. 사실 전부터 신경쓰였다. 이동혁의 장갑은 내게 있는데, 그러면 이동혁은 손시렵게 이 겨울을 나야 하나 하고. 다른사람 같았으면 새로 장갑을 사서 쓰겠지 하겠지만 그의 장갑이 내게 있다고 해서 새 장갑을 사서 쓸 이동혁이 아니기 때문에, 신경이 이만저만 쓰이는 게 아니었다.
"눈꽃축제 갔다 왔는데, 네 생각이 나서."
"고마워."
그는 내가 보는 눈 앞에서 장갑을 끼고는 내 손을 잡았다. 내 손을 잡은 장갑이, 이동혁의 손이 다행히도 따듯했다. 물론, 그는 늘 내 손을 따듯함으로 품어 주었지만.
내 앞에서 날 보며 웃고 있는 그가 예뻤다. 그리고 고마웠다. 내게 누구와 갔냐고 물어보지 않아줘서. 이걸 어떻게 줘야 하나, 내심 신경쓰이는 게 한두가지가 아니었는데 그는 그런 내 걱정거리를 모두 품고 모른 체 했다. 그런 이동혁에게, 미안하면서도 사랑의 감정을 버리지 못했다.
*
일이 있었던 이동혁은 점심을 먹기도 전에 궁을 나갔고, 나는 미처 하지 못한 준비를 했다. 옛날에 사가에 있었을 때는 그냥 얼굴만 대충 씻고 나오면 준비가 끝나는 거였는데. 이제는 익숙해져 버린 이곳의 생활에 신기하기도 하고, 느낌이 이상했다.
"전하께서 앞에서 기라디고 계십니다."
"응? 벌써?"
하루가 멀다하고 나를 찾아오는 국왕은, 오늘도 나를 찾아왔다. 어젯밤, 어영이의 말로는 강녕전은 교태전보다 훨씬 늦게서야 불이 꺼졌다고 했다. 조심스럽게 예상을 해 본다. 그도 분명 늦잠을 잤을 거라고.
밖으로 나가니 아침에 안 오던 눈이 다시 오고 있었다. 내가 너무 늦게 나왔나. 쌓여져 있는 눈 위로 다시 쌓이는 눈을 밟고 놀며 그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꼭 어린 아이 같았다. 중학생. 아니, 초등학생이 운동장에서 하는 흙장난처럼, 그렇게 그는 눈이 반갑기라도 한 듯 눈을 밟으며 발장난을 치고 있었다.
"잘 주무셨어요?"
"어, 좋은 꿈 꾸셨습니ㄲ…."
흰 장갑을 낀 손을 만지작거리다, 늘 그가 하던 말을 오늘은 내가 먼저 꺼냈다. 그러자 습관처럼 내게 첫인사를 건넸던 그가 잠시 당황하다 웃어보였다.
"사실 늦잠을 잤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대신들을 뵐 때 얼마나 쪽팔리던지."
그렇게 내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눈꽃축제 구경에 재미를 붙인 나 때문에, 그는 오늘 아침 대신들과의 회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늦게 들어갔다. 괜히 미안해서 그의 눈치를 보니, 알아챈 그가 웃어보이며 내 탓이 아니라고 한다.
"제가 데리고 나갔지 않습니까. 부인이 즐거우셨다면 그걸로 됐습니다."
가끔 이렇게 훅 들어오는 그의 말이, 아직까지도 적응이 안 된다. 그는 알다가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전에 그가 대신들과 회의하는 모습을 몰래 엿본 적이 한 번 있는데, 한없이 자상하다가도 그는 엄격한 사람이었다. 한 나라의 국왕이니, 당연하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이렇게 늘 훅 들어올 때면 예기치 않은 바람을 맞은 기분이랄까. 늘 새롭게 놀랐다.
국왕과 새롭게 쌓인 눈을 뽀득 소리내어 밟으며 정자에 도착해 앉았다. 내리는 눈 색이 마치 내 장갑색 같았다. 이 장갑을 처음 받았을 떄는, 죽어도 끼지 않을 것처럼 그랬는데. 지금 내 머릿속을 채운 생각, 많은 것들이 변했구나
"부인께서는, 사가에 계실 때 눈이 오면 주로 뭘 하셨습니까?"
잠시 사고회로 정지. 정지였다. 내가 이곳에 왔을 때는, 봄이었다. 그것도 늦은 봄. 겨울은 이곳에서 한 번도 맞아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하나 싶었는데, 이곳에서나 내가 살던 그 대한민국에서나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을 한 번 해 본다.
"어… 그냥 눈사람도 만들고 눈싸움도 했어요."
"눈싸움이요?"
그의 질문에, 괜히 또 옛날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현주와 눈이 오면 알바를 째고 눈싸움을 했던 기억이, 아직까지도 생생하다. 그래, 현주는 눈싸움 장인이었다. 거의 맞는 건 나였고, 던지는 건 현주였다. 그는 내 말에 잠시 생각하더니, 내게 물었다.
"저희도 할까요."
"네?"
"눈싸움."
그는 그 말을 시작으로 눈을 뭉치기 시작했다. 아니, 잠시만요, 타임- 타임. 수없이 타임을 외쳤지만, 그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결국 그에 의해 만들어진 내 주먹만한 눈덩이는, 내 팔을 강타했다. 아니 잠시만요, 이렇게 세게 던지기 있기?
승부욕 하면 또 지지 않는 나라, 열심히 눈을 만들었다. 그는 맨손이었고, 나는 장갑을 꼈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손이 시렵지도 않은지 기계처럼 잘만 만들어냈다. 그렇게 깨끗하던 궁의 넓은 벌판같은 곳에 크기가 다른 두 쌍의 발자국들이 여럿 찍힌다. 그러다 결국,
"아악!!"
거의 공격만 하던 그를 피해 달아나던 내가 넘어졌다. 흰 눈에 오른쪽 볼이 파묻혔다. 차갑고 아팠지만, 그것보다는 쪽팔렸고, 잠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내 넘어짐에 놀란 그가 달려와 나를 일으켜 세웠고, 나는 그의 부축 아래에 일어섰다. 습관처럼 추워서 코를 훌쩍이니 콧물도 나온 것 같다. 킁 하는 소리가 이곳을 메웠다. 그는 나를 정자로 데리고 갔고, 내 옆에 앉은 그는 내 몸에 있는 눈들을 자신의 맨손으로 털어주고 있었다. 손 시려울 텐데.
"괜찮으세요 부인?"
그의 말에 눈을 왼 쪽으로 돌려 그를 흘겨보았다. 사실 내가 넘어졌을 때, 넘어진 나보다 더 놀란 것은 국왕이었다. 눈을 크게 뜨고 달려와 내게 괜찮냐고 물어보던 그. 지금 털고 있는 그 눈 누가 다 묻힌 건데요 헝헝. 그는 내 째림에 웃음을 참는 듯 보였다. 오른 쪽 볼에 살짝 들어간 보조개마저 날 비웃고 있었다. 쪽팔림이 조금 가고 나니 아픔이 내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 급격하게 시려오는 오른쪽 볼에, 나는 그 볼을 손으로 쥐고 있었다.
"..미안해요."
"됐거든요."
"부인께서 넘어질 줄 몰ㄹ…"
"……씨이…"
불난 집에 아주 기름을 들이붓고 계시네. 씩씩대며 자꾸만 흘러 내려오려는 콧물을 훌쩍이며 오른 쪽 볼을 쓸었다. 그는 내게 미안하다고 하는 와중에도 내 머리를 정리해주며 말했다. 이젠 그의 "부인" 소리가 점점 익숙해지고 있었다. 아 그나저나 산발일 텐데, 아침에 단장하고 온 의미가 없잖아.
"예쁘게 나오고 싶었는데, 다 물거품이 됐어요."
뾰루퉁한 내 말에, 그는 잠시 내 머리를 정리하는 것을 멈칫 하더니 계속 이어나가며 내게 말했다. 그리고 나는 느낀다. 사람이 이렇게 짧은 시간에 많은 감정을 느낄 수 있구나 하고. 쪽팔림, 아픔, 그리고 아마 마지막은
"예뻐요."
"…"
"많이 예뻐요."
설렘이 아닐까.
*
"…받으세요."
"이게 뭡니까?"
정자에서부터 교태전까지 날 거의 보살피다시피 해서 데려온 그에게 내민 것은 다름아닌 하트였다. 정말 드라마에서나 보고, 봐도 유치하고 오글거린다며 토하던 나였지만, 뭔가를 그에게 주고 싶은데 웬만해서는 다 가지고 있으니 내 머릿속에서 나온 창의력이라고는 이것 뿐이었다.
"…하트요."
"하트?"
"아, 이게 어… 다른 나라에서는 …… 사랑한다는 뜻인데ㅇ … 저 들어갈래요."
말을 끝마치지 못하고 교태전 안으로 들어왔다. 이유는 그가 날 정말 빤히 쳐다보고 있어서. 분명 누군가 나를 저런 눈으로 쳐다본다면, 하고 전에 생각했을 때는 정말 오글거리고 토 나온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국왕이 저런 눈빛으로 나르 보니,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그래서 들어왔다.
방 안에 들어와서 괜히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고, 급하게 뛰는 심장을 주체하기 힘들어 심호흡을 해야 했기 때문에,
설렘인지 두근거림인지 사랑인지 모르는, 아니 알면서 모른 척 하고 싶은 이 감정 때문에.
*
"됐다."
이민형에게 물건을 부쳤다. 하는 방법을 몰라 그저 알게 되면 보내야지 했는데, 어영이에게 물어보니 자신이 전해주는 사람을 안다고 하길래, 가득 찬 상자는 그녀의 손에 의해 이민형에게로 전달될 예정이다.
내가 상자 안에 넣은 것들을 보면 이민형은 분명 보내 만한 거 보냈네. 하고 웃을 게 뻔하기 때문에, 여러가지를 구상해 봤는데, 역시 내 창의력은 거기서 끝이었다. 어영이에게 부탁한 목도리가 주 물건이었다. 흰 색 목도리는 그의 목에 딱일 것 같았다. 생각해보니 이민형이랑 이태용 만난 지도 꽤 오래 됐구나 싶다. 그래도 친구라고 궁금했다. 청나라에서 아프진 않는지, 잘 지내고 있는지.
어영이 손에 들려 나간 박스를 본 후, 나는 단장을 다시 해야만 했다. 왜냐, 아까 망가졌기 때문에, 그리고 갑작스레 날 강녕전으로 부른 대비마마의 부름 때문에.
그녀를 혼인식 이후 본 적이 있었던가, 생각해 본다. 갑자기 왜 나를. 사실 무서워서 잘 안 찾아뵀다. 핑계를 대자면, 엄두가 안 나서. 혼인식 전에 그렇게 무례하게 했는데, 아무리 내가 현재 국왕의 비로 신분이 더 높다고 해도 나보다 나이가 많은 건 맞는 말이고, 무서운 건 당연하니까.
갑작스런 그녀의 부름에 나는 최대한 단정하게 단장해야 했고, 아직 무슨 일인지도 모른 체 지레 겁먹고 굳어버린 몸을 일으켜 강녕전으로 향했다.
가면서 생각했다. 굳이 대비마마께서 본인이 머무는 대비전이 아닌 국왕의 처소인 강녕전으로 부른 이유는 무엇일까. 강녕전 앞에 다다르니, 눈에 띄는 것이 하나 있었다.
강녕전 바로 앞, 그늘막 밑 3cm정도 되는 나무 위에 올려져 있는 하트. 눈 하트. 내가 국왕에게 준 것이었다. 혹여나 녹을까 저런 것일까, 천막까지 쳐 햇빛을 완벽히 차단시켰다. 그렇게 내가 준 하트모양의 눈뭉치는, 꽤 귀한 대접을 받고 있었다.
강녕전 앞에 서,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나니 어영이가 문을 열겠다며 말했고, 곧 그녀에 의해 강녕전의 문이 열렸다. 열렸는데,
"들어 오시지요, 중전."
국왕은 없고, 대비마마와 그 옆에 한 여인만이 앉아 있었다. 어쩔 수 있나, 그녀의 말대로 나는 그녀에게 가볍게 목례를 한 후 그녀의 앞으로 다가섰다.
"앉으세요."
어디에 앉아야 하나 싶다가 대비마마와 그녀의 앞에 앉으니 , 그제서야 대비마마가 약간의 비릿한 조소와 함께 내게 말을 건넨다.
"내 중전께 소개시켜드리고 싶은 아이가 있어 왔소."
"…말씀하세요."
불길했다. 뭔가 불길한 예감이 머릿속, 마음 속을 휘집고 다녔다. 그녀는 나를 보던 시선을 그 여인에게 옮기더니, 소개하라는 듯 그녀를 쳐다봤다.
그리고,
"안녕하십니까. 중전마마, 소인은"
"…"
"곧 후궁의 첩지를 받게 될 한家 사람입니다."
아직 익숙치 못한 아픔이, 심장을 망치로 내리치듯 쾅. 하는 묵음의 소리가 내 안에서 울렸다.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 작가의 말 ! |
안녕하세요, 니퍼입니다! T^T 일단 아까 있었던 제 실수에 대해서는 너그럽게 용서 바랍니다 헝헝.. 정말 죄송해요. 모른 척 넘어가 주세욧..ㅠㅠㅠ. 쥐구멍 찾고 싶으니까.. 좀 많이 횡설수설이네요 ㅠㅠ..
오랜만이죠! 애몽 까먹으신 건 아닐까 많은 걱정 했어요 T^T. 그래도 이렇게 찾아와 주셔서 제 글 읽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ㅠㅠㅠ. 암호닉은 다음 주까지 정리해서 글 밑에 다시 달도록 하겠습니다! 모든 신청해 주신 분들 감사드려요 ♥
♥ 많이 부족한 제 글 읽어주셔서 감사드려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