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오세요 ,
심야<心惹> 약국
written by, 참이슬
-마음을 이끄는 약국, 그 첫 번째 이야기-
우리 동네에는 조금 특이한 약국이 하나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특이하냐구요? 이 약국은 다른 약국과는 달리, 밤 9시부터 가게를 열어 새벽 6시에 문을 닫는, 심야 약국입니다. 이 심야 약국은 그 역할에 걸맞게 아담한 크기의 약국입니다. 손님을 위한 의자 4개, 정수기 1대, 사람 한 명이 들락날락일 수 있는 조제실과 데스크가 전부인 이 약국은 무언가 신비한 느낌을 주기도 하지요. 약국의 원래 주인은 백발의 약사님이셨는데요, 그만 건강이 악화되어 그의 아들이 물려받아 가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야심한 밤, 이곳엔 저마다의 이야기를 껴안은 사람들이 찾아오겠지요. 그렇다면, 그 중 저의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
하늘여행-TIDO kang
[ 응급실 코드에이, 응급실 코드에이- ]
※코드에이: 심정지 환자 발생
응급실로 들어오는 분주한 뜀박질들. 커텐이 젖혀지고 CPR 중인 나를 밀치는 손길이 있었다. 그렇게 해서 어떻게 환자를 구하겠다는거야! 다리에 힘이 풀린 나머지 바닥에 나동그랐지만 스스로 일어나야했다. 그나마 하나뿐인 동기가 내 바지를 털어주었다. 그제서야 비오듯 흐르는 땀을 닦을 수가 있었다. 하지만 내가 넘어짐과 동시에 나의 자존감이라는 것도, 나락으로 빠졌다. 턱없이 부족한 힘으로 심폐소생을 하고 있는 내 모습이 답답해 보였을리가 만무하다. 이해한다. 이해하지만. 그래도.. 울컥하는 마음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낌새를 알아챈 동기는 나를 데리고 휴게실로 들어섰다.
※CPR: 심폐소생술
" 너 잘못 아니잖아. 왜 그래. "
" ...혜령아, 나 그만 둘까? "
" 뭐? 너 그런 약해빠진 소리 마. 그리고 너가 그만둔다면 나도 때려치울거야. "
나를 위해주는 혜령이의 말에 애써 웃음을 지어보였다. 굳이 웃으려 안 해도 돼. 그 말 한 마디에 왈칵- 하고 쏟아지려던 눈물을 겨우 참으며 다시 일어났다. 눈가를 꾹꾹 누르며 나오니 대량 TA 환자들이 속속들이 밀려들어왔다. 슬퍼할 틈도, 마음을 추스릴 틈도 없는 이곳. 이런 생각 마저도 모든 일이 끝나고서야 드는 이곳에서 과연 나는 언제까지 일을 할 수 있을까.
※TA: 교통사고
터덜터덜. 오늘도 일 수습과 인수인계 등으로 정시퇴근에서 훨씬 벗어난 밤 10시경에 동네로 들어섰다. 오늘따라 몸도 마음도 지치네. 땡땡 부은 다리를 잠시동안 바라보다, 우두커니 빛을 내고 있는 약국으로 들어갔다. 제목도 그저 '약 국' 두 글자인 이 투박한 곳에 오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안해진달까. 그런데, 오늘은 모르는 사람이 서 있다. 어서오세요. 나는 그만 바보처럼 우두커니 서서 처음 보는 약사선생님을 바라보았다. 약사 이민형.. 속으로만 읊는다는게 밖으로 튀어나오자. 굵은 검은 테 안경의 선생님은 당황했는지 고개를 갸웃거린다.
" 저.. 여기 원래.... "
" 아, 네. 저희 아버지가 운영 하시는데 건강이 좀 안좋아지셔서요. "
" 정말요? 어디가 아프세요? "
" 약제 옮기시다 허리를 다치셨어요. "
" 아아.. 얼른 나으셔야할텐데.. "
" 걱정해주셔서 감사해요. 그런데 어디가 아프셔서 오셨나요? "
아 맞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비타민을 얘기했다. 특별히 찾으시는 제품 있으세요? 묻는 그의 말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뒤에 벽장으로 가서 주섬주섬 몇 개의 비타민을 들고 데스크에 올려놓았다. 근데, 이 선생님 몇 살일까. 나이가 굉장히 어려보이는데. 잠시 다른 생각을 하다가 그의 설명을 미처 듣지 못했다. 아, 죄송해요. 뭐라고 하셨죠? 어수선한 나의 말과 행동에 그는 무언가 깨달았는지 살짝 미소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 혹시.. 제가 진짜 약사인지 걱정하고 계시나요? "
" 에..? 아, 아니..... 그게 아니라. 그, 너무 젊어 보이셔서.. "
" 안경 때문에 그런가보다. 저 나이 많아요. 면허증 보여드릴까요? "
손을 내젓기도 전에 그는 빠르게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 사이에 재빠르게 얼굴에 열을 식히려 볼을 이리저리 만져보고 손으로 부채질도 해보았지만 이놈의 얼굴이 제멋대로 빨개져 있을 생각을 하니 더 열이 나는 것 같다. 그는 면허증 액자와 학교 졸업증까지 들고 나타났다. 이런.. 괜스레 더 미안해진다. 직업을 의심하는 손님이라니. 이게 무슨 민폐람. 나는 너무 죄송한 마음에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두 손만 모은체 안절부절했다. 다행인건지, 그는 매사에 웃으며 말을 했다.
" 이제는 괜찮으세요? "
" 네! 너무.. 너무 괜찮아요. 정말 죄송해요. 제가 피곤해서... 정신이 없어가지고.... "
" 어, 오늘 무슨 일 있었어요? "
나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네, 무슨 일 있었죠. 의사한테 무시당한 간호사의 이야기. 엄청 길텐데.. 마음 속으로만 주절대느라 정적이 흐르는지도 몰랐다. 가만히 있던 그는 밑에서 비타민음료 두 병을 꺼내 데스크 밖으로 나왔다. 그리곤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앉으세요. 나는 얼떨결에 그의 말에 따라 의자에 앉게 되었다. 괜히 장사만 방해하는 건 아닌지 걱정되는 나에 비해 그는 여유로웠다. 아니, 평화로워 보였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런 그의 모습이 무척 부러웠다. 항상 걱정하고, 슬퍼하고, 우울해하는 이런 나와는.. 굉장히 달라보인다.
" 이제 들려주세요. 오늘 있었던 일. "
" 저.. 근데 제가 장사하는데 민폐가 되진 않나요? "
" 전혀요. 오히려 반가운걸요. "
겨우 안심을 하고 천천히 말을 하기 시작했다. 허나 의자의 간격도 그렇고 너무 가까운 거리가 신경쓰인 나머지 바보처럼 말을 더듬게 된다. 거기다 얘기를 하는 내내 나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는 그가 너무나도 잘 느껴져 민망스러웠고, 그런 그의 얼굴을 한 번도 보지 않고 바닥만 내려다보고 얘기하는 내가 상상되어 열심히 경청해주는 그에게 감사하기도 전에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그러다 결국 이건 대화의 예의가 아니라 생각되어 용기내어 그의 얼굴을 찔끔 쳐다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잘 듣고있어요. 라고 말하는 것 같다. 말이 아닌 작은 행동만으로도 이렇게 큰 위로를 받을 수 있구나.. 그 뒤로 부끄러움 보다는 용기가 생겨 아직까진 부자연스럽지만 천천히 그와 눈을 마주치며 남은 얘기를 마칠 수가 있었다. 너무.. 길었죠.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묻는 나에게 그는 아니라 말한다.
" 아뇨. 속상해했을 생각을 하니 제 마음이 다 아프고 화가 났어요. 넘어지면서 다친 곳은 없었나요?
" 네.. 뭐 밀치고 이러는거야 응급실에 있으면서 많이 겪어봐가지고 괜찮아요. "
" 괜찮지 않다고 말해도.. 누가 안 잡아가요. "
나는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다시 말없이 미소지었다. 아, 안돼. 코끝이 시큰해지는 기분이 조금만 더 그가 포근한 위로를 건넸다간 수도꼭지가 터지듯 눈물이 터져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다. 서둘러 코를 누르며 감사하다 말했다. 그리곤 그가 준 비타민 음료 뚜껑을 열어 한 모금 마셨다. 몸에 생기가 조금씩 돋는다. 그렇게 짧은 시간, 서로 말이 없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할 것 같아 입을 열기 전 그의 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이 동네 사시죠? "
" 아, 네. 여기 약국에서 조금만 올라가면 저희 집이에요. "
" 아아.. 혹시 내일은 몇 시 쯤 퇴근하세요? "
" 글쎄요. 공식적인 시간표가 있지만 그건 말 그대로 장식용이라.. 매번 달라요. 요즘들어선 지금 시간대에 끝나구요. "
" 만약 된다면, 내일 약국 들렀다 가세요. "
" ...아, 네! "
딸랑- 하는 종소리와 함께 손님이 들어왔다. 나는 이제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도 데스크로 돌아갔다. 그와 목례를 나누고 약국을 나왔다. 뭘까 이 포근한 감정은. 구름이 내 몸을 휘어감고 있는 듯한 기분이다. 내 손에 쥐어진 비타민 음료를 보니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오늘따라 달도 더 예쁘게 빛나보인다.
오늘 밤은 왠지, 맥주를 마시지 않아도 깊게 잠에 들 수 있을 것 같아.
-첫 번째 이야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