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19살, 내 남편 전정국
W. 달감
16
"넌 한 달도 못버텼지?"
"..."
"난 5년을 버텼어."
정원 구석에 있는 작은 창고 아래 나란히 쭈구리고 앉은 우리는 계속해서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빗소리가 우리를 감쌌고, 나는 옆에서 들려오는 전정국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한껏 집중했다.
"너가 아니라 내가 먼저 좋아했다고 이 멍청아."
"그게 무슨 소리야?"
"15살 때 내 첫사랑."
"..."
"너야."
나는 놀란 눈으로 고개를 돌려 전정국을 바라보았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전정국은 이미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두 눈을 마주한 채 전정국은 말을 이어나갔다.
"너 너가 나 사랑한다는 거 깨달았을 때 왜 그렇게 힘들어했냐?"
"너는 날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으니깐."
"나도 그런 생각 때문에 15살때부터 정말 많이 힘들었어.
15살 때 나는 내 가장 친한 친구이자, 약혼자인 널 사랑하고 있는 걸 깨달았는데
너는 그때 정말 날 그저 친구, 정략결혼 대상자로만 보고 있었잖아.
그게 너무 힘들어서 짝사랑을 그만하려고 해봐도 오히려 약혼자, 부인으로 계속 붙어있으니 더 힘들었어."
나는 놀라서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전정국이 말하는 모든 게 빗소리에 섞인 아름다운 환청같았다.
혹여 내 소망이 너무나 간절해서 내 아픔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빗소리가 내가 듣고 싶은대로 들리는 것이 아닐까 한참을 다시 귀기울여보았다.
하지만 전정국의 목소리만큼 빗소리가 아름답지는 않았다.
나는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로 다시한 번 전정국을 향해 물음을 던졌다.
"그럼 지금까지 쭉 날 사랑해왔다고?"
"그래 멍청아."
"그럼 왜 내가 너한테 고백했을 때 바로 안받아준건데?"
"복수하고 싶었어.
너가 지금 괴로운거 난 5년동안 혼자 다 겪었는데.
이제야 날 사랑한다고 하는 너가 너무 감격스럽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고."
전정국의 말을 들으니 내 벅찬 마음과 달리 웃음이 피식 나왔다.
복수하고 싶었다니. 너무 전정국다웠다.
하지만 복수를 당해도 마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렇게 버티지 못할만큼 아파서 포기하려했는데 전정국은 이 아픔을 5년동안이나 간직하고 있었다니.
전정국이 안쓰럽게 느껴져 나도 모르게 울먹이는 말투로 "미안해"라는 말이 입밖으로 흘러나왔다.
그러자 전정국이 내 머리를 살짝 쥐어박으며 "내가 더 미안해" 라고 말했고
우리는 그제야 함께 미소지으며 함께 마주보고 웃었다.
"그리고 우리는 평생 함께할건데 딱 한달정도는 날 짝사랑하는 니 모습도 보고싶었어."
나는 "하여간 전정국 진짜 짖궂어." 하고 말하며 한껏 미소지었지만
'평생 함께할건데' 라는 말에 행복한 마음이 들어서 눈물 한방울이 툭 떨어졌다.
전정국은 큰 손으로 내 작은 얼굴을 감싸 조심스럽게 손가락으로 내 눈물을 닦아주며 말을 이어갔다.
"15살 때 난 너무 어렸고, 그래서 자꾸 너로 인한 아픔을 다른 여자들을 만나면서 잊으려고했어.
오늘 너가 김태형이랑 있는 걸 보고 화가 나서 최보나랑 키스한 것처럼.
그러니깐 최보나랑 키스한 것도 지금까지 많은 여자들 만났던것도 용서해줘."
"내가 용서할 권리가 있어? 모두 우리가 서로 사랑한단걸 알기 전에 이야기잖아.
오늘 전의 이야기들은 모두 잊자. 대신 오늘 이후로 부터는 내가 아주 철저히 관리할거야.
다른 여자들한테 눈길 주기만해봐, 특히 최보나!"
눈을 부릅뜨며 한 쪽 주먹을 들어올린 나를 전정국은 그저 웃으며 꼭 안아주었다.
나도 전정국 품에 안기며 어느때보다 가장 크게 전정국을 끌어안았다.
비에 젖은 전정국은 차가웠지만 전정국의 품은 따듯한 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연회장으로 들어가기 싫지?"
"응."
"그냥 우리 집으로 갈까?"
"응."
내가 대답하자 전정국은 정장을 벗어 우리의 머리위로 들어올렸다.
우리는 일어나서 빗 속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아침부터 샵에가서 가장 비싼 드레스와 슈트를 입고 온갖 치장을 했는데 몽땅 흠뻑 젖어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어버렸다.
그런 우리가 우스워 계속 웃음이 낫지만 그런 우리가 너무 행복했다.
우리는 비서아저씨의 차로 올라타 집으로 향했다.
내일이면 사라진 우리를 찾는 전화가 계속해서 우릴 귀찮게 하겠지만
우리는 단 한번도 미래를 생각하고 일을 저지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함께라면 그 무엇도 무섭지 않았으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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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나간 마누라가 드디어 돌아왔네"
집에 돌아와 비로 젖은 몸을 따듯한 물로 샤워하고 나오자 이미 씻고 나온 전정국이 침대에 누워 날 반겼다.
"그래도 나 없으니깐 많이 외로웠지?"
"아침밥 차려줄 사람이 없어서 많이 배고팠어."
짖궂게 웃으며 말하는 전정국의 대답에 나는 침대 위로 올라가 장난처럼 배게를 들어 때리는 시늉을 하였고,
전정국은 배게를 한 손으로 붙잡아 끌어당겼다.
그 덕에 나는 침대 위에서 꼬꾸라져 전정국 앞에 철푸덕 넘어졌다.
고개를 들자 전정국의 얼굴이 코앞에 있었고 전정국은 당황한 나를 도망치지 못하게 붙잡고 얼굴을 더 가까이하며 말했다.
"이제 침대에서 같이 자는 거지?"
"응?"
"내가 너한테 사랑한다고 하면 침대에서 같이 자기로 했잖아.
너 나랑 같이 안잔 거 꽤 오랜된거 알지?"
그러고보니 전정국이랑 싸우기 전에도, 전정국한테 고백한 이후로 같이 침대에서 잔 적이 없다.
전정국 말대로 전정국이 날 사랑한다고 인정하면 그때부터 다시 같이 잔다고는 했다만,
이상하게 사랑한다고 인정한 지금 막상 같이 자려니깐 이상한 기분이 든다.
정말 예전엔 아무렇지않게 한침대에서 잤었는 데 왜 이런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다.
그냥 몽실몽실하다.
"어라? 마누라 얼굴이 새빨게지네? 난 그냥 예전처럼 옆에서 같이 자자는 것 뿐인데 뭔생각하냐?"
"내내내가 언제 이상한 생각했다고 그러냐? 옆에서 자면 되잖아!"
나는 가까워진 전정국의 얼굴에서 도망치 듯 몸을 움직이며 전정국의 옆자리에 철푸덕 누웠다.
하얀 천장이 눈에 들어왔고 이상하게 내 귀에 내 심장소리가 너무 크게 들렸다.
그런데 전정국이 옆으로 돌아 눕더니 날 바라봤다. 더 커져가는 심장소리를 들킬까봐 걱정되었다.
"근데 이상한 생각 하면 좀 어때?"
"뭐?"
"우리 부부잖아. 거기다 우리 이제 진짜 서로 사랑하잖아."
"으응?"
"우리 엄마아빠도, 장인어른이랑 장모님도 언젠가 손녀나 손자를 바라실거야."
나는 전정국의 말에 놀라서 고개를 돌려 전정국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당황한 나와 다르게 뭐가 재밌는 지 실실 웃고 있었다.
그럼 저말은 정말 나랑 오...오늘밤...
하..하지만.. 정말 뭐 우리는 부부고... 사랑하고... 언젠가 아이를...
덮쳐오는 이상한 생각에 내 심장이 우주로 발사해 저 멀리로 날아가지는 않을까 걱정이 될 지경이었다.
나는 결국 이런저런 생각들을 견디지 못하고 눈을 꼭 감아버렸다.
눈을 감았음에도 전정국의 얼굴이 가까워지는 게 느껴졌다.
내 귀에 전정국의 입술이 가까워졌다.
"우리 미성년자니깐 조금만 참자 음란아"
날 놀리듯 웃으며 내 귀에 속삭이는 전정국에 나는 화를 내며 전정국을 때리려고 달겨들었다.
하지만 나는 한 번도 전정국을 힘으로 이겨본 적이 없었기에 금새 제압당했다.
전정국은 나를 품에 넣고 꼭 안았다.
같이 잔 적은 많았으나 나를 이렇게 꼭 껴안고 잔 건 처음이었다.
나는 문득 너무 행복함을 느꼈고 그 행복을 더 깊이 느끼기 위해 더 깊이 전정국의 품으로 더 파고들었다.
잠에서 깨면 이 모든 게 꿈일까 걱정이 되었지만
모든 게 꿈이더라도 지금 이 순간 만큼은 전정국의 품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최고로 행복한 현실에서 더 행복한 꿈들을 찾아 꿈 속으로 빠져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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