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19살, 내 남편 전정국
W. 달감
12
기분이 좋지 않아 야자도 하지 않고 홀로 집에 왔다.
집에 오자마자 침대에 털썩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자꾸만 아까 옥상에서 함께 있던 전정국과 최보나의 모습만 떠올랐다.
내가 더 화가나는 건 생각할수록 너무 예쁘고 잘생긴 두 사람이 어울리게 느껴졌다는 것이다.
'어떤 애였는데?'
'너랑 다르게 엄청 예쁘고, 착하고, 정말 순수했지.'
전정국의 말을 다시 떠올릴수록 그 첫사랑이 최보나였음에 확신이 들었다.
확실히 최보나는 나랑 다르게 엄청 예쁘고, 착하고, 순수 그 자체의 이미지였다.
'나 정국이랑 사겨도 될까?'
'나 정국이 정말 많이 좋아해. 꼭 사귈거야.'
'글쎄? 정국이가 날 정말 사랑한다면 결혼할 수 없을까?'
최보나의 말은 단지 지나가는 말들이 아니었다.
그 애가 한 말에서는 진심과 자신감이 느껴졌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내 남편을 완전히 뺐길 것 같은 나쁜 예감이 들었다.
전정국을 뺐길 것만 같다.
전정국이 다른 여자애를 만났다고 이렇게 불안한 적은 없었는데, 최보나가 나타난 지금은 너무나 불안하다.
다른 평범한 여자애들과는 다르게 최보나는 전정국의 첫사랑일테고
다른 평범한 여자애들과는 다르게 전정국이 진심으로 최보나를 사랑할 것만 같으니깐.
---
"야 너 김태형이랑 뭔 사이냐?"
야자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 전정국이 내게 물었다.
아까 나랑 김태형을 보고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전정국이 직접적으로 물을 줄은 몰랐다.
나는 아직 기분이 풀리지 않았기에 아까의 심술을 담아 살짝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 오빠가 나 좋아한데."
"김태형 좋은 인간 아니야. 괜히 속지말고 김태형이랑 어울리지마."
"니가 무슨 상관인데?"
내 날카로운 말투에 전정국은 살짝 놀란 듯 나를 쳐다보았다.
자기는 새벽에 최보나가 불러서 뛰쳐나갔으면서 내가 김태형이랑 있는 걸 가지고 뭐라고 하는 게 우스웠다.
"너도 아까 최보나랑 같이 있었잖아. 너도 내가 최보나랑 어울리지 말라고 하면 최보나랑 안어울릴거야?"
"최보나랑 나는 그냥 친구야 바보야."
"근데 왜 나한테 거짓말 해?"
"..."
"너 어제 새벽에 최보나한테 간거였잖아."
내 말에 전정국은 놀란 듯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그 놀란 표정이 최보나와 함께있었다는 사실을 입증시켜줘서 더욱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마지막까지 아니었다고, 오해라고 말해주길 바랬던 내가 정말 바보같았다.
"정말 그냥 친구 사이면 어제 새벽에 최보나랑 뭐했는지 말해봐"
"말 못해. 너가 상관할 일 아니라고 했잖아."
"하, 그래. 나도 너한테 이렇게 따질 이유도 권리도 없지.
너 좋아하는 건 나 혼자하는 거고, 너랑 나는 사랑해서 결혼한 사이도 아니니깐."
"..."
"한 달간 기다려주겠다고 했으면서 그새 못참고 최보나한테 넘어간거냐? 대체 여자를 얼마나 밝히는 거야?"
"말 그따구로 할래? 나랑 최보나 그런거 아니라고 말 했잖아."
"적어도 김태형은 너처럼 사람 마음 가지고 안놀아!
너랑은 다르게 나보고 예쁘고, 사랑받을 만하다고, 좋아한다고 말해준다고!"
"내 말 안믿고 자꾸 그따구로 니 말만 할거면 나가서 김태형한테 사랑한다고 하던가."
나도 화가 나서 눈물이 터져나오기 일보직전이었지만, 그러면서도 전정국이 나를 달래주기를 바랬지만,
전정국도 화가 많이 나서 꾹꾹 참고 있는 게 눈에 보였다.
내 불안한 마음에 나도 전정국에게 날카로운 말들을 뱉어버렸지만,
결국 전정국은 어젯밤 최보나와 무얼했는 지 말해주지 않았다.
전정국의 마지막 말에 난 결국 그대로 전정국을 냅두고 집을 뛰쳐나왔다.
어젯 밤은 전정국이 집을 나갔는 데 오늘은 내가 나간 꼴이 되어버렸다.
결혼한 이후로 처음으로 이틀이나 함께 하지 못하고 있다.
나는 결국 마구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으며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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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불러서 널 냅두고 뛰쳐나갔다고? 야, 그건 빼박이다."
내가 한밤 중 향한 곳은 친구 하정이의 집이었다.
사립중학교에서 만난 친구라 하정이 역시 꾀나 부잣집 딸이었고,
나와 전정국이 결혼했단 걸 알고있는 사람 중 한명이었다.
"남자는 좋아하는 여자 아니면 새벽에 불러도 절대 안나가.
거기다 아침에 돌아왔어? 야 그럼 그 긴 새벽동안 뭘 했겠냐?"
"꺄악 조용히 해 제발!!"
"어린 나이에 팔려간 불쌍한 내 친구... 걍 너도 다른 남자랑 사겨."
"조용히하라고 했지?"
"다 사실인데 뭐."
내가 듣기 싫어 귀를 틀어막든말든 자기 말을 뱉어내는 이하정이 너무 얄미웠다.
하지만 이하정이 하는 말은 대부분이 사실이었고, 그래서 내 불안한 마음은 더 커졌다.
"최보나 갑자기 왜 전학갔나 했더니, 전정국때문에 일반고 갔던거야? 대박이다."
"사립고등학교에서는 최보나 어땠냐?"
"거기서도 인기 쩔었지. 여자가 봐도 진짜 예쁘잖아."
"하... 진짜 내가 걔보다 난 거 하나도 없냐?"
"어. 없어. 남자들이 훅! 갈 스타일이지."
"아!! 진짜 여기 괜히 왔어! 너때문에 더 불안해졌잖아!"
"울면서 재워달라고 전화한 게 누군데. 근데 너 진짜 외박해도 괜찮아?"
이하정의 말에 나는 휴대폰을 빤히 바라보았다.
연락없이 하는 첫 외박이었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집에 들어와서 자라고 연락이 오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바램과 다르게 전화기는 너무 잠잠했다.
내가 어디서 자든 걱정도 안되는 모양이었다.
어젯밤 한숨도 못자고 전정국을 기다린 내 모습과는 너무 달랐다.
역시 전정국을 좋아하는 건 나 혼자뿐이구나. 라는 게 다시 확 체감이 들었고 그 만큼 슬퍼졌다.
나는 이불을 끌어안고 이 모든 걸 잊기 위해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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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이하정이 내 기분을 풀어주겠다고 데려온 곳은 백화점이었다.
일반고에 다니느라 잊고 있었던 부잣집 자녀의 감성을 일깨워주겠다고 했는데,
난 그딴거엔 관심이 하나도 없기때문에 심드렁해서 따라왔다.
하지만 지금 내 복잡한 마음을 잊게 해줄 무언가가 필요했기 때문에 난 적극적으로 쇼핑에 동참했다.
"일시불이요."
"그래 막쓰는거야! 원래 여자는 쇼핑할 때 스트레스가 팍팍 풀리는 거거든!"
이하정의 말을 믿고 오랜만에 고가의 상품들을 카드로 엄청 긁어댔고, 내 양 손엔 쇼핑백들이 가득 들려있게 되었다.
이렇게 하면 기분이 조금은 풀릴 줄 알았는데, 내 마음은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야, 이제 돌아가자."
"에? 나 아직 구두 안샀어."
"그럼 나 먼저 차에 가있을게."
"그래! 이따봐!"
이하정은 신이 나서 뛰어갔고, 나는 뒤돌아 터벅터벅 백화점 복도를 걸었다.
그저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이 나이가 되서 내가 우리 집에도 못들어간다는 내 처지가 참 우스웠다.
그러면서도 전정국 생각은 꾸준히 들었다.
지금쯤 전정국은 뭐하고 있으려나, 지금쯤 내 생각 한 번은 했으려나.
전정국의 얼굴을 생각하자 다시 마음이 무거워졌고,
양 손에 들린 쇼핑백들 또한 너무 무거워서 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나는 결국 버티지 못하고 쇼핑백들과 함께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곧 내 마음을 더 무겁게 만들 익숙하고도 불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더 불길한 건 그 불길한 목소리가 하나가 아니었다는 것이었다.
"어머님! 너무 잘어울리세요!"
"호호, 우리 보나가 골라줘서 그렇지"
"아니에요~ 어머님이 너무 고우셔서 뭘 입어도 잘어울리시는 거에요!"
최보나와 전정국의 어머님이었다.
나는 믿기지 않는 조합에 입을 떡 하고 벌렸다.
나도 모르게 도망가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랐고 그 자리를 당장 벗어나려고 벌떡 일어났다.
"김탄소?"
하지만 난 떡하니 최보나와 눈이 마주쳐버렸고, 곧 어머님과도 눈이 마주쳐버렸다.
방금까지 최보나를 향해 환하게 웃으시던 것과는 다르게 나를 보자마자 얼굴이 확 구겨지셨고,
난 언제나 그랬듯 어머님 앞에서는 한껏 움츠러들었다.
"너 여기서 뭐하는거니?"
"..."
"쇼핑백들은 뭐니? 그걸 다 산거니?"
저번에 전정국과 함께 시댁을 뛰쳐나온 뒤로 처음 뵙는거였다.
어떻게든 되겠지 하고 연락을 안했는데 이렇게 만나는 건 최악중에 최악이었다.
난 항상 어머님 앞에서는 겁쟁이가 되었지만
최보나 앞에서 무너지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난 최대한 마음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어머님이 어떻게 최보나랑..."
"내가 내 어머니 사교모임 따라다니다가 만나뵈었고, 나랑 정국이 어머님이랑 취향이 비슷해서 가끔 이렇게 쇼핑해왔어."
"보나는 너랑 다르게 자기 집안을 위해서 벌써부터 사교모임부터 모든 기업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인맥도 기르고 공부도 한단다.
너는 그런데는 하나도 안다니고, 바쁜 척은 혼자 다하더니 이런데서 그렇게 쇼핑하고 다니니?"
그런데 나가도 우리 엄마가 정신병자라고 무시하고, 창피해하실거잖아요.
라는 말을 꾹 삼키고 눈을 내리깔았다.
어머님과 최보나가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내가 며느리인지 최보나가 며느리인지 나조차도 햇갈릴 지경이었다.
"너 같은 애가 내 며느란게 정말 쪽팔린다.
보나가 내 며느리였어야하는데...
보나랑 너를 보면 가정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는다."
"어머니! 말씀이 심하시..."
"조용히해! 그 땐 내 아들이 대든거라 그 정도로 끝났지, 감히 너 같은 년이 내 앞에서 말대꾸 하려고 하지마!
너가 내 아들 성격을 그따구로 만든거야! 꼴배기도 싫으니 썩 꺼져버려!"
내가 대꾸를 할 틈도 없이 어머님은 그대로 화를 내며 뒤돌아 떠나버리셨고
내 눈에는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졌다.
그리고 그 눈물 뒤로 최보나의 미소가 눈에 들어왔다.
"너... 웃니? 이 상황이 웃겨?"
"어머, 미안 그런 의도로 웃은 거 아니야."
"허? 그럼 무슨 의도로 웃은건데?"
"생각보다 쉽게 바꿀 수 있을 것 같아서."
"뭘?"
"너랑 내 자리"
최보나는 얕게 지었던 미소를 더 활짝 지어보이며 뒤를 돌아 어머님을 따라갔다.
하지만 나는 화를 낼 수도, 어떠한 대꾸도 할 수 없었다.
나 조차도 내 자리를 지킬 자신이 없었기때문이다.
지금 어머님의 마음도, 전정국의 마음도 모두 최보나를 향해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여기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덩그러니 혼자 남아서 울고만 있다.
이제 내 옆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다고 느끼면서도,
바보같이 지금 이 순간까지도 전정국이 나에게 달려와주기를 마음 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
"탄소야!"
하지만 혼자 남아 울고 있는 나에게 달려와 나를 안아준 건 김태형이었다.
김태형은 울고 있는 나에게 달려와 나를 꼭 껴안았다.
머리로는 전정국이 아니니 떨어져야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그 품에 기대 한참을 그렇게 울어버렸다.
김태형은 내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나를 한참이고 토닥여주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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