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씨 5
w. 채셔
그 날, 열일곱의 정국은 이상했다. 평소에는 내가 웃든 울든 신경도 쓰지 않던 애가 그 날만은 좀 달랐다. 기자와의 진빠지는 인터뷰를 마치고 온 아버지는 분풀이 대상으로 태형을 택했고, 태형은 그 날 온종일 아버지에게 시달렸다. 틈을 타 피떡이 된 태형을 정국의 집으로 피신시켰지만 아버지가 우리의 행방을 모를 리 없었다. 아버지가 정국의 집에 도착했다는 말에 부랴부랴 태형을 정국의 옷장 안에 숨겼는데, 아버지는 나를 훤히 꿰뚫고 있다는 듯 정국의 방으로 들어왔다. 아버지가 천천히 태형이 숨은 옷장 앞으로 다가오자 막막해진 나는 무턱대고 그 앞을 막아섰다.
“하지 마세요.”
“비켜.”
떨리는 목소리로 아버지에게 말했지만, 아버지는 들은 체도 않고 옷장 문고리를 잡았다. 나는 옷장 문을 닫으려, 아버지는 열려 옥신각신하며 몸싸움을 벌이다 한순간 균형을 잃은 내가 나가 떨어졌다. 그 틈에 문이 확 앞으로 젖혀졌고, 옷 속에 숨어있던 태형과 아버지의 눈이 마주쳐버렸다. 장식품에 손등이 찢긴 줄도 모르고 나는 그 앞까지 기어 태형의 앞을 막고 섰다. 아버지는 이성을 잃은 것 같았다. 무엇이 그의 심기를 건드렸는지 모를 일이었다. 숨이 넘어갈 것처럼 우는 나와 겁에 질린 태형 앞으로 아버지가 천천히, 천천히 다가왔다. 짐승이라도 된 듯 아주 천천히 발을 끌면서.
“아빠, 하지 마세요.”
“나오라고 했어.”
제발요……. 울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아버지에게 부탁했지만, 아버지는 도리어 손을 올렸다. 아버지의 손이 빠르게 나를 덮치자 눈을 꽉 감았다. 눈을 감자 방 안에는 태형과 내 울음소리만이 가득 울려 퍼졌다. 헐떡거리며 손으로 원피스를 꼭 쥐었을 때, 누가 나를 거칠게 잡아끌었다. 순간 맥이 탁 풀려 휘청거리면서 단단한 품에 안겨졌다. 내가 떨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떨고 있는 사람은 내가 아니었다. 살며시 눈을 떠서 천천히 나를 안고 있는 남자를 확인했다. …정국이었다. 정국이 아버지의 팔을 꽉 잡고 서 있었다.
“제 방에 들어오라고 한 적은 없는데.”
“뭐?”
“계약, 안 하고 싶으신 거죠? 계약권은 아버지가 아니라 저한테 있어요, 장인어른.”
정국은 장인어른이라는 단어를 특히 공들여 말했다. 한동안 아버지와 정국 사이에 정적이 감돌았다. 숨이 막혀버릴 것 같은 분위기가 몇 분 동안이나 지속되고야 나서 아버지가 김비서에 의해 끌려 나갔다. 그대로 주저앉아 오열하는 나를 지켜보던 정국은 이내 제 방바닥에 말라붙어 있는 피를 제 소매로 닦았다. 그리고는 제가 입고 있던 하얀 티를 북북 찢어 내 손목에 칭칭 감았다. 정국은… 제가 이 모든 일련의 사건들을 겪기라도 한 듯 떨고 있었다.
“울지 마….”
“……….”
“내가 있잖아.“
정국은 불안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정국이 더듬거리며 내놓은 그 말이 그 순간 나에게 얼마나 큰 위안이었는지 모른다. 아버지가 나를 때리려 했다는 게 믿기지 않을 뿐더러 태형의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아서 무서웠다. 하지만 내 뒤에 정국과 그의 집안이 있다는 듯한 그 말을 듣는 순간, 아까의 울음이 무색할 만큼 마음이 놓였다. 아버지가 나간 지 몇 분이 채 되지 않아 구급대원들이 도착했다. 금방 탈진할 만큼 눈물을 쏟아내고 들것에 옮겨질 때, 또 병원 침대로 옮겨질 때, 몇 개의 링거 줄을 달고 기력을 차리기 전까지…. 나를 다독이는 서툰 손길이 있었다. 나는 금세 누구의 손길인지를 알아차릴 수 있었지만, 눈을 뜨지 않았다.
어제의 정국은 그때만큼이나 이상했다. 무엇이 그를 움직이는지 아직까지 알 수 없었다. 열일곱의 정국도, 지금의 정국도 사건이 있던 후로는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때에도 그랬다. 병원에서 내가 기운을 차리자마자 제 할 일을 다 했다는 듯이 굴었었다. 덜덜 떨며 제발 제 앞에서 울지 말라고 하던 지금의 정국도 내가 괜찮아지자 미련 없이 연희의 방으로 향했다.
…지금의 나는 어떻게 하는 게 좋은 걸까.
처음에는 모든 게 윈윈인 줄로만 알았다. 아버지와 나는 권력을, 아버님과 정국은 돈을. 지민과 태형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을 만큼의 뒷배경이 되어줄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나는 이 결혼이 합리적이라고 여겼다. 이 결혼으로 실제로 지민이 집에서 나올 수 있었고 조금이나마 제 삶을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태형이는…. 여기서 벗어나거나, 정국의 마음 한 조각이라도 얻거나 둘 중에 하나였다. 아니, 그보다… 태형이 왜 죽었는지는 알아야 한다. 비밀을 벗겨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찌 되었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돈이 필요했다. 다시 집으로 들어가면 나는 꼼짝없이 유세나 돕는 이혼한 딸이 되어 있을 것이다. 무엇이든 내멋대로 할 수 있는 권력이 있어야 했다. 그건 정국의 집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어떻게 보면 여기에 있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긴 셈이었다.
아가씨
처음으로 돌아가야 했다. 나는 정국의 서재로 들어가, 컴퓨터를 켰다. 비밀번호가 떡하니 걸려 있었지만, 비밀번호를 추리하는 것쯤은 쉬웠다. 몇 년동안 정국의 옆에서 잤으니 그 정도 훔쳐보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왜인지는 몰라도 정국은 0521 이라는 숫자를 좋아했다. 골프 회원 번호도, 개인용 핸드폰의 비밀 번호도, 심지어 금고 비밀 번호까지 0521을 쓰곤 했다.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지만, 꾹꾹 누르자 순식간에 그의 공간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인터넷을 켜서 아버지의 이름과 함께 태형과 지민이 우리 집에 들어온 년도를 치자 기사가 몇 개씩이나 펼쳐졌다. 미래우리당 – 의원, 장애우 입양 이후 국민 지지율 높아져…. 위선 가득한 기사들을 클릭하자, 그곳에서 공통적으로 희망 보육원이라는 글자를 찾을 수 있었다. 아버지의 인터뷰 영상을 보고 있자니 울화가 치밀었다.
‘제가 희망 보육원에 봉사하러 자주 가요. 근데 거기서 제일 친하게 지냈던 친구가 너무 똘망한 눈빛으로 저를 보는 거예요. 그 순간 아, 얘를 내가 데리고 가야겠다…….’
마치 나를 비웃는 듯한 인자한 인상에 얼굴이 찌푸려졌다. 희망보육원으로 전화를 연결하자, 신호음이 몇 번 울리더니 마침내 통화가 연결됐다. 나이가 지긋한 여자의 목소리가 수화기로 울려 퍼졌다.
“네, 희망 보육원입니다.”
“…뭐 좀 여쭙고 싶어서요.”
“어떤 게 궁금하시죠?”
“김태형이라고… 아세요?”
태형의 이름을 언급하자마자 상대와 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태형이 입양된 지 꽤 많은 시간이 흘렀는데, 그 이름을 아는 거라면 어쩌면…. 태형이, 어디 있어요? 급하게 묻자 그쪽에서 꽤나 당황한 말투로 ‘죄송해요.’하고 툭 끊어버렸다. 거길 찾아가야 해. 다급하게 지민에게 전화를 걸려다 순간 멈칫했다. 지민은 몇 십년 동안 태형의 형 노릇을 했는데…. 태형의 죽음을 파헤치다 보면, 지민이 상처 받는 게 아닐까. 하지만 지민도 태형의 죽음을 아는 듯이 굴었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건, 내게 아무 것도 하지 말라던 정국이 자신의 사람들을 내게 내줄 리 없었다. 그러니까 내가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지민뿐이었다. 심호흡을 한 번 크게 하고, 지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가씨.”
“지민아, 나 네가 필요해.”
“…네?”
“나 좀 도와줘.”
“무슨 일 있어요?”
일단 집에 오라며 빠르게 전화를 끊었다. 무엇부터 해야 할지 머릿속이 혼잡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부터 찬찬히 해야 했다. 컴퓨터를 끄려다 문득 파일 하나가 눈에 띄었다. 별다른 것이 아니었다면 눈길을 잡아채지 않았으련만, 파일 이름이 연희의 이름이었다. 전정국은 참 취향도 특이하지. 제가 좋아하는 사람을 왜 컴퓨터에도 집어넣는 걸까, 하고 파일을 클릭했을 때 나는 입을 떡 벌렸다. 연희의 이력서였다. 사실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내가 알고 있던 연희의 배경과는 완전히 달랐다. 연희는 훨씬 유능했다. 아버지가 가장 신경써서 준비하던 언론사의 기자였던 연희는, 무슨 일인지 자신의 분야와 전혀 다른 정국의 회사로 이직했다. 왜 연희의 이력서를 굳이 저장해놓은 걸까. 아무리 봐도 이상했다, 이력서 사진 속의 연희는 내가 아는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아가씨
이 집에서 진짜인 건 무엇이고, 가짜인 건 무엇일까. 진짜로 화병이 난 게 틀림없었다. 연희까지도 나를 속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았다. 어떻게 해도 정상인처럼 분노를 다스릴 수가 없어서, 나는 곱게 정리된 머리카락을 내 손으로 쥐어뜯었다. 머리가 뽑힐 것처럼 아프다가 곧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기분이 들었다. 그게 또 싫어서 비명을 지르며 숨을 몰아쉬었다.
“그만 좀 해.”
소리가 들린다 했더니 내 앞에 약 봉투를 든 정국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한심해 보인다는 얼굴로 정국은 내게 약 봉투를 툭 던졌다. 약을 받아들고 정국을 천천히 바라보자, 정국은 의아하다는 듯이 보는 나를 의식했는지 고개를 돌렸다. 착각하지 마, 아버지가 지어온 거니까. 정국은 자켓을 걸며 차갑게 내게 말했다.
“나 내일부터 외출할 거야.”
뜬금없이 느껴지겠지만 괜히 더 단호한 말투로 정국에게 말했다. 정국은 어느새 내게 안중에도 없어진 약 봉투를 응시하다가 단호한 목소리로 내게 일렀다. 나가기만 해. 나가는 그 순간부터 파혼이니까. 정국은 친절하게 웃고 있는 것 같았지만 누구보다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지자, 정국은 곧 쿵-하고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지금 밀리면 아무 것도 못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벌떡 일어섰다.
“파혼해, 그럼.”
드레스룸으로 향하는 정국을 붙잡아 그 말을 내뱉었다. 그 말을 내뱉는 게 죽어도 싫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했다. 오히려 후련한 기분이 들었다. 다시 한 번 파혼하자, 라고 천천히 내뱉어보았다. 감정이 미묘하게 뒤섞였다. 이내 부엌에서 뭔가를 하고 있던 연희와 눈이 마주쳤다. 인상을 찌푸리는 정국의 얼굴을 보면 미친 듯이 이 남자를 갖고 싶다가도 처음으로 해본 말에 해방감 같은 게 들었다.
“지랄하지 마.”
정국은 욕설이라도 들은 것처럼 기분 나쁘다는 듯이 내게 말했다. 미세하게 손이 떨리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금세 잊었다. 정국이 그럴 리가 없으니까. 정국은 와이셔츠 단추를 하나 풀면서 나른한 목소리로 진득하게 물어왔다. 파혼해서 어떻게 살려고? 정국은 웃고 있었지만, 동시에 웃고 있지 않았다. 지민이 사진전 열잖아. 지민이랑 같이 살아야지. 퍽 진지한 말투로 정국에게 말했지만, 정국은 ‘지민’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짜증난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리며 제 넥타이를 끌어내렸다. 이내 다시 얼굴을 편 정국은 천천히 나에게 다가왔다.
“…뭐하는 거야.”
차갑게 대꾸했지만, 정국은 직선처럼 내게 다가왔다. 정국의 눈이 나를, 내 입술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내게 다가오는 정국을 살짝 밀어냈지만 정국은 그럴수록 더 다가왔다. 떨리는 눈으로 정국을 쳐다보다가, 사이가 가까워지자 나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그러나 입술에는 아무런 감촉도 느껴지지 않았다. 눈을 천천히 떴을 때, 정국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조소를 띄고 있었다. 정국에게 속았다는 것이 분하면서도, 정국이 내게 다가왔을 때 떨렸던 마음이 한심했다. 또 연희가 이 장면을 보았을 것이라고 생각하자 죽고 싶을 만큼 비참했다.
“이러는데 네가 집을 나가?”
“…….”
“까불지 마.”
“…….”
“껌도 씹다가 단물 빠지면 그때 버리는 거야.”
“…………뭐?”
“넌 아직 단물 남았다고.”
정국은 그 말을 뒤로 드레스룸으로 유유히 걸어 들어갔다. 멀어지는 정국의 등을 보면서 콱 죽고 싶어진 나는 연희의 눈길을 그대로 느끼면서 방으로 들어갔다. 울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꾹 참았다. 내가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협탁 위에 놓인 램프를 분에 못 이겨 밀쳐냈다. 램프가 휘청거리며 협탁 밑으로 떨어졌고, 바닥에 닿는 순간 산산조각이 나면서 바닥에 흩뿌려졌다. 조각들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내 조각 안에 무언가가 반짝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힘없이 빨간 불이 반짝거리다가 꺼지자 나는 그것을 주워 들었다. 빨간 불이 반짝거리는 그것은, ……카메라 렌즈였다. 램프가 비추고 있던 방향은 침대 속의 나. 내 손보다 작은 카메라 렌즈가 램프에 뒤섞여서 조용히 나를 지켜보고 있었던 거다. 순간 소름이 돋으면서 분노가 치밀었다.
“씨발 새끼….”
나를 감시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왜, 도대체 왜 나를 감시하고 있었던 걸까. 문득 내가 있는 이 방이 감옥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덧붙임
쓰던 글 날라가면 자괴감 들고 괴로워,,,
오랜만에 와서 미안해요 ㅠ_ㅠ
다음 편은 빨리 올게요, 암호닉도...
그나저나 다들 후회공을 좋아하시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