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의 치욕, 삼전도
서울특별시 송파구에는 360여 년 된 삼전도비(三田渡碑)라는 것이 세워져 있다.
높이 5.7m, 너비 1.4m의 이 비석의 원래 명칭은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다.
어떻게 청나라 황제의 덕을 기리는 비가 대한민국의 수도 안에 자리 잡고 있을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땅에 찧다
1637년 1월30일 조선의 16대 임금 인조는 피난처였던 남한산성을 나섰다.
청나라 황제에게 항복의 예를 올리기 위해서였다.
병자호란 발발 후 45일 만이었다.
조선에 조공을 바치던 이민족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굴욕의 순간,
그날의 광경을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답니다.
“주상 전하께서 남색 전복 차림으로 세자와 함께 서문을 통해 성을 나섰다.
(중략) 주상 전하께서 삼공육경(三公六卿)을 거느리시고
백보 가량 걸어가 평지에서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예를 행하셨다.”
삼배구고두란
한 번 절할 때마다 세 번 머리를 땅바닥에 찧는 예를 세 번 하는 것이다.
인조는 얼어붙은 땅에 머리를 부딪쳤고 이마는 피투성이가 됐다.
인조는 땅바닥에 엎드려 오랑캐들을 받들겠다는 항복문서를 바쳤다.
조선의 왕이 이민족 왕 앞에 머리를 조아린 최초의 사건이었답니다.
치옥의 비가 세워지다
청나라는 항복 조건으로
왕자인 소현세자·봉림대군, 대신들과
그들의 아들을 인질로 잡아갔다.
조선 처녀 수만 명이 청나라에 강제로 끌려간 것도 이때 일이다.
잡혀간 처녀들은 청나라에서 노예·성적 노리개로 인간 이하의 수모를 당했다.
훗날 나이가 들어 고국으로 돌아온 2만5000여 명은
환향녀(還鄕女)라고 하여 멸시와 조롱을 받았답니다.
삼전도 항복 이후 2년이 지나
청나라는 조선 조정에 “대청국의 승전을 기념하는 비를 세우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조정은 대제학 이경석이 비문을 짓고,
참판 오준이 쓰고 여이징이 전서하도록 했다.
비문은 만주어·몽골어·한자로 쓰였다.
이렇게 하여 치욕의 삼전도비가 세워진 것이랍니다.
왜 당했는가?
병자호란 발발 40여 년 전,
1592년의 임진왜란은 백성들을 극심한 빈곤으로 넣었다.
「징비록(懲毖錄)」에는 왜란 중 백성들의 처참한 실상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답니다.
“조선 전역이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었으며,
(중략) 심지어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잡아먹고
남편과 아내가 서로 죽이는 지경에 이르러
길가에는 죽은 사람들의 뼈가 잡초처럼 흩어져 있었다.”
일찍이 율곡 이이는
왜구의 침략에 대비해 십만 양병을 조정에 건의했다.
조정은 이를 무시했고 이로 인해

무방비 상태로 왜구에 강토를 유린당했다.
불과 반세기도 지나지 않아 국방을 소홀히 해 당한 임진왜란의 교훈을 잊었고,
결국 조선은 군사대국으로 성장한 청나라에 삼전도의 수모를 당하게 됩니다.
명분과 절의는 옳더라도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힘이 없으면
굴욕의 역사를 쓸 수밖에 없답니다.
조선은 이러한 역사의 교훈을 무시했고 국방을 등한시했다.
그 결과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국난을 겪었으며
300년도 채 지나지 않아 일본에 국권을 빼앗기게 됩니다.
삼전도의 치욕 요약
조선 15대 임금 광해군 재위 때,
여진족 추장 누루하치가 부족을 통일하여 후금이라는 나라를 세웠고
후금의 태조(누루하치)는 중원을 통일하기 위해 명나라를 공격했답니다.
이에 명나라는 임진왜란 때 자기네가 파병해 줬다는 이유로
조선에게 도와달라고 했고현명한 왕인 광해군은
명나라가 질 것임을 예감,
명나라에 파병을 하는 동시에 후금에게는
싸울 뜻이 없었음을 전했답니다.
결국 조선은 피 한 방울 안 흘렸고,
얼마 후에 광해군은 대국을 배신했다는 이유로 신하들에게 쫓겨났고
새로 임금이 된 인조는 친명배금(명나라와 친하고,
(후)금나라를 배척한다.)정책을 썼답니다.
결국 후금(후에 청나라로 국호 변경)과의 전쟁을 두 번이나 맞았고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죠.
병자호란 때, 청나라 태종(황타이지)은 삼전도에서
인조에게 항복을 받아냈고청나라 황제는 앉아있었고,
인조는 절을 하며 이마를 바닥에 찧었다고 합니다.
이게 삼전도의 굴욕입니다.
삼전도의 치욕과 관련한 인조실록 글을 인용합니다.
삼전도는 아래의 사건을 말합니다.
[인조실록]
삼전도에 나아갔다.
멀리 바라보니 청태종이 황옥을 펼치고 앉아 있고
갑옷과 투구 차림에 활과 칼을 가진 자가
방진을 치고 좌우에 서있었다.
악기를 진열하여 악기를 연주하였는데,
대략 중국 제도를 본 딴 것이었다.
왕이 걸어서 진 앞에 이르렀다.
용골대가 들어가 보고하고 나와서 청태종의 말을 전하였다.
"지난 날의 일을 말하려 하면 길다.
이제 용단을 내려 왔으니 매우 다행스럽고 기쁘다."
인조가 대답하였다.
"천은이 망극합니다."
용골대 등이 데리고 들어가 단 아래에 북쪽을 향해 자리를 마련하고
왕에게 나가기를 청하였다.
사람을 시켜 큰 소리로 소리치게 하였다.
왕이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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