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 김준면 빙의글]
독(毒)
written by.빛, 허니찬
* * *
결혼반지가 손에 없다는 사실을 알아채자마자 정신이 아득해졌다. 아무리 겉으로만 보여지는 쇼윈도 부부라도, 결혼반지는 서약이나 다름 없는 소중한 증표인데. 나는 그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마주앉아 밥을 먹지 않아도, 같이 잠자리를 하지 않아도 크리스는 나의 남자였으며,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아무리 내게 관심이 없는 크리스라도 결혼반지가 손에 없다는 사실을 알면 크게 화를 낼 것이 분명했다. 차가운 시선을 보낼 크리스를 생각하니 덜컥 겁이 나기 시작한다.
"집에 두고오신 건 아니세요?"
"혹시 씻으실 때라던지…."
"아뇨, 아니에요. 뺀 적 없어요."
고개를 세차게 가로 저으며 완강하게 부인했다. 애초부터 크리스가 화낼 일은 만들지 않는 나였기에. 결혼반지를 내 손으로 뺄 리가 없었다. 눈물은 멈출 생각을 않고 두 볼을 타고 흐르고 있었고, 내 두 손은 바닥에 쏟아낸 물건들을 헤집기 바빴다. 유일하게 크리스와 나를 엮어주고 있던 증표라고 믿고 있었는데. 서러운 마음에 결국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소리내어 울었다.
* * *
구두를 신은 발이며 다리 전체가 퉁퉁 부어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서점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서점 안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모두 내 상황을 아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런 것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반지를 찾는 게 급선무였기에 발 뒤꿈치가 까져 피가 나던지 말던지 돌볼 겨를이 없었다. 카운터 앞이며 책 가판대 바닥까지 모조리 헤집고 다녀봤지만 반지는 커녕 조그마한 머리핀 하나도 보이질 않았다. 입술을 꾹 깨물고 서있다 책을 볼 수 있도록 만든 의자에 주저앉아 이마를 짚고 고개를 숙였다. 그 때.
"저기요."
많이 들어봤다 싶은 익숙한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고개를 들어 목소리가 들리는 쪽을 올려다봤다. 베이지 색 니트와 블랙 코트를 깔끔하게 차려입은 남자가 내 앞에 서있었다. 살짝 인상을 찌푸린 내 얼굴을 쳐다보며 말없이 미소만 짓는 이 남자.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남자를 뒤로한 채 걸음을 옮겼다. 뭐 저런 남자가 다 있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눈 앞에 아른거리는 결혼반지에 다시 울음 터지기 일보직전이였다.
"그쪽이 찾는 반지, 이거 같은데."
또각또각 구두 소리가 빨라질 무렵, 내 곁으로 달려온 남자가 눈 앞에 떡하니 반지 하나를 내민다. 여전히 미소가 가득한 얼굴을 한 번 바라보고, 그의 손에 놓여진 반지를 내려다봤다. 그토록 찾던 결혼반지였다. 2시간이 넘도록 온 서점을 다 뒤지고 뒤져도 나오질 않던 반지가 그의 손에 떡하니, 놓여져 있었다. 그제서야 긴장이 풀린 몸이 비틀거리자 급하게 나를 부축해주는 남자.
"괜찮아요?"
"괜찮아요. …고맙습니다."
"고집 여전하네. OOO."
무심한듯한 그의 말투에서 흘러나온 내 이름을 듣고 놀라 그의 얼굴을 쳐다봤다. 깜짝 놀란 내 얼굴을 쳐다보고 픽 웃는 이 남자는 준면이였다.
* * *
"백현이한테 결혼했단 얘기 들었어."
"…어, 응. 고마워. 그때도 지금도 여러모로 신세만 지는 것 같아."
테이블에 놓인 레몬티를 한 모금 마셨다. 말없이 웃으며 준면이를 보고있는 이 상황이 왜 이리도 어색하게만 느껴지는지 괜시리 손에 있던 애꿎은 반지만 꼭 쥐고 있었다. 김준면, 내 학창시절을 통틀어 대부분의 기억에 함께 자리하고 있는 친구. 나는 또래나 동급생들 사이에서도 유독 사교성이 부족했다. 물론 내 집안이나 뒷 배경을 보고 억지로 친해지려고 다가오는 친구들은 많았지만 딱히 관심을 두는 편이 아니었기에.
초등학교 때부터 늘 학급 회장이며 전교회장을 도맡아하던 너는 유달리 약한 나를 감싸주었고 항상 다정하게 대해준 친구였다. 같은 중학교도 모자라 같은 고등학교까지 배정 받고 유리, 백현이와 늘상 붙어다녔다. 고등학교 2학년 1학기, 해외지사로 발령을 받은 아버지를 따라 호주로 이민을 갔고 그 뒤로 지금까지 소식이 없던 너였다. 나는 너를 좋아했지만 혹시나 너를 보지 못하게 될까봐 망설이다 너를 보낼 수 밖에 없었다.
김준면과 OOO, OOO와 김준면. 친구라기엔 너무 가깝고, 연인이라기엔 너무도 멀었던 우리였다.
"가서도 계속 연락 했었어."
"…."
"최대한 빨리 연락 닿고 싶어서 계속 여기저기 수소문도 했었고."
"최대한 빨리 연락 닿고 싶어서 계속 여기저기 수소문도 했었고."
"…."
"중간에 몇 번 한국 들어와서 집 찾아갔었는데, 이사 갔다더라."
"…."
"보고 싶었어."
담담한 얼굴로 말을 이어가는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어 그저 테이블 위에 놓인 컵만 꼭 감싸쥐었다. 테이블 아래의 나머지 한 손엔 크리스와의 결혼반지를 쥐고있어 내보일 수 없었다. 애써 시선을 피하려는 나를 바라보던 그의 얼굴이 굳어 있었다.
"반지, 찾아주지 말걸 그랬다."
열여덟의 우리가 조금만 더 성숙했더라면 다시 마주하는 일이 쉬웠을까. 아니, 십 년이란 시간이 지난 지금에서야 다시 열여덟의 기억을 끄집어내야만 하는 우리가 다시 마주할 자격이나 있을까.
* * *
괜찮다는 말에도 한사코 집까지 데려다주겠다는 준면이를 거절하지 못했다. 저녁을 먹자는 제안에 쉽게 대답을 하지 못하는 나를 보고 씁쓸하게 웃는 네 얼굴이 안쓰러웠다. 결혼반지를 다시 네 번째 손가락에 낀 채로 하는 수 없이 그의 차에 올라타야만 했다. 운전석에 앉은 네가 음악을 틀었다.
I hear the crystal raindrops fall
수정같은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어요
on the window down the hall
아래층 복도에 있는 창문으로요
And it becomes the morning dew
그리고 그건 아침이슬로 바뀌죠
darling, when the morning comes and I see the morning sun
그대여, 아침이 올 때에 난 아침햇살을 본답니다
I want to be the one with you
그저 당신과 함께이고 싶어요
Just the two of us
오직 우리 둘이서
Building big castles way on high
저 높은 곳에 큰 성을 지어요
Just the two of us
오직 우리 둘이서
"이 노래, 좋아했잖아."
"…준면아."
"나 매일 이것만 들어. 호주에서도 그랬고, 십 년 내내 그랬어."
"김준면."
"네가 좋아하던 노래만 골라서 들었어."
귓가를 맴도는 노래를 애써 외면하고 시선을 창 밖으로 고정했을 때 네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었다. 단지 내가 좋아하는 노래라는 이유만으로 같은 노래를 들었다는 말에 무슨 얘기를 더 할 수 있을까. 다시 시선을 돌려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했다. 일곱 시, 크리스에게선 어떠한 연락도 오지 않았다.
"아이는."
"…."
"있어?"
신호에 걸려 차가 잠시 멈춘 틈을 타 말을 걸어오는 그. 없는 아이를 있다고 지어낼 수는 없어 그저 고개만 가로저었다. 착잡한 표정을 감출 길이 없는 우리 엉킨 실타래는, 어디서부터 풀어나가야 할까.
* * *
"번호 줄래?"
"…."
"OO아."
"준면아, 난…."
"반지 찾아준 대신이라고 생각해."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핸드폰 번호를 찍어 건내줬다. 다시 얼굴 가득히 미소를 띄운다. 내 손에 끼워진 반지에서 좀처럼 눈을 떼지 못하는 준면이의 얼굴을 말없이 쳐다보고 있었던 그 때.
"OOO."
차에서 내려 나와 준면이 쪽으로 다가서는 사람. 오른손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져있는 반지, 크리스였다. 갑작스런 크리스의 등장에 당혹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어느새 내 곁에 다가선 크리스는 자연스럽게 내 어깨를 꼭 감쌌다. 그와 동시에 핸드폰을 받아들고 미소 짓던 준면이의 눈빛은 갈 곳을 잃었다.
"크, 크리스."
"어디 갔었어. 전화 했었는데."
다정한 크리스의 목소리에도 좀처럼 말이 나오질 않았다. 온 몸이 굳어버린듯한 느낌, 말없이 크리스의 눈치를 살피며 준면이를 바라본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하게 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으로 어디론가 전화를 거는 준면이. 그리고 이내 내 가방 속에서 벨소리가 시끄럽게 울려대기 시작했다.
워아이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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