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Carly Rae Jepsen - Call Me Maybe
핸드볼 선수 김종대 下
그렇게 종대와 한바탕 크게 싸우고 난 후 우리의 사이는 더 단단해졌다. 종대는 그 전보다 자주 내게 자신의 마음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고는 했다. 그가 나의 말을 단 한마디라도 흘려듣지 않는다는게 너무나 분명히 보여 웃음이 나왔다. 그가 내게 마음을 표현하는 방식은 꽤나 직설적이고, 귀여웠다. 꼭 지금처럼 말이다.
"야, 니 남자친구가 너한테 하트 날린다."
"헐, 귀여워."
"미친, 닭살..."
종대는 경기 중 골을 넣으면 내 쪽을 가리키며 하트를 날리곤 했다. 그게 그 만의 골 세레모니였는데, 어쩌다보니 핸드볼 부 부원 중 여자친구가 있는 학생들의 단골 세레모니가 되어버렸다. 친구들은 눈살을 찌푸렸다.
"아 짜증나, 진짜 오글거려."
"왜? 귀엽기만한데."
친구들은 내 말에 오만상을 썼다.
"김여주나 김종대나 다를게 없어. 대단한 사랑꾼들 납셨네, 그냥."
사실 그들의 빈정거림은 그닥 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종대가 좋다는데, 무슨 상관이야.
내 앞에서 나와 김종대를 욕하던 친구들의 목소리가 사그라들었다. 그들의 시선은 동시에 내 뒤 쪽을 향해있었다. 그에 나도 몸을 돌리려 할 때였다.
"여주야."
나를 뒤에서 껴안은 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나 오늘도 이겼어."
"잘했어, 종대야."
"잘했으면,"
"잘했으면?"
나를 돌려세운 그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의 입술을 톡톡 쳤다. 그런 그를 보고 웃다 까치발을 들어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친구들은 어느새인가 자리를 뜨고 없었다. 보나마나 지금 쯤 내 욕을 잔뜩 하고 있을게 뻔했다.
"이거 가지고 되겠어?"
나를 보며 눈이 휘어져라 웃던 그가 말했다. 뭐가? 하며 고개를 갸웃하자 내 어깨를 잡고 끌어당긴 그가 작게 속삭였다.
"키스 정도는 해줘야지."
"..."
"해줄거지?"
그를 밉지않게 흘기다 그의 얼굴을 감싸고 천천히 입술을 가까이 했다. 그가 나의 허리에 손을 올렸다. 막 입술이 맞닿을 때였다.
"떨어져."
어디선가 나타난 김종인이 우리를 떼어놓았다. 종대는 잠시동안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야, 김종인. 니가 뭔데-"
"엄마 아빠한테 말한다."
"..."
김종인의 말에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종대의 표정을 힐끗 봤다. 그는 당황함이 역력한 표정이었다. 그가 내게 말했듯, 그는 나의 부모님에게 그와의 연애가 발각되는 것을 무척이나 꺼려했다. 종대는 부모님이 있을 때에는 나의 눈조차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 죄책감이 든다나 뭐라나.
***
그렇게 그와 꼭 손을 맞잡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 그에게 먼저 질문을 던진건 나였다.
"종대야."
"응?"
"너는 우리 부모님이 너랑 사귀는거 아는게 왜 싫어?"
내 말에 그의 시선이 내게 내려앉았다.
그는 한참 대답이 없었다. 왜, 왜 그러는데- 하고 그의 팔을 흔들며 답을 독촉했다. 담담하던 그의 얼굴이 점점 붉게 물들었다. 왜지?
"왜 말 안해줘, 응?"
"...부끄러워서."
"뭐가?"
나를 바라보던 그가 내 시선을 피했다. 민망한 듯 코를 긁적인 그가 말을 이었다.
"내가 몇 번이나 말했잖아."
"뭘?"
"너 소중하다고."
"..."
"내 눈에도 이렇게 예쁜데, 부모님 눈에는 어떻겠어."
이번에는 나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반면 그의 표정은 담담하게 가라앉았다.
"여주야."
"...응?"
"저번에 그랬잖아, 내가 좋아한다는 말 안해줘서 불안했다고."
"...응."
"아껴주고 싶어서 그랬어."
"..."
그가 작게 헛기침을 했다.
"어, 그러니까. 조금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는데..."
"..."
"나야 너 정말 좋아하지. 너무 좋아서 막, 너만 보면 엄청 두근대는데."
"..."
"그래서 더 좋아한다는 말을 아껴주고 싶었어."
"..."
"정말로, 넘쳐흐를것 같을 때만 진심을 담아서 얘기하고 싶어서..."
"..."
"그런데 그 점이 오히려 너를 불안하게 만들었다면...다 내 잘못이야."
"..."
"다시 한번 미안해."
그는 진심으로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에 대한 넘쳐오르는 애정을 참을 수 없었다. 결국 그를 먼저 꽉 끌어안았다.
"종대야. 너가 뭐가 미안해."
"..."
"내가 더 미안해, 네 마음도 몰라주고..."
"아니야, 내가 더-"
"종대야."
"응."
"솔직히 말하면, 좋아한다는 말로도 부족해."
"..."
"사랑해, 종대야."
내 말에 그의 표정이 멍하게 변했다. 한참을 굳어있던 그가 나를 더 세게 안았다.
"여주야."
"응."
"나도 마찬가지야."
"..."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길게 본 사이도 아니면서 사랑한다고 하냐고 하겠지만."
"..."
"지금까지 얼마나 만났냐보다는, 앞으로 얼마나 만날지가 중요하잖아."
그가 천천히 내 손에 깍지를 꼈다.
그가 나와 시선을 똑바로 맞추었다. 그가 찬찬히 손으로 내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의 손길에서 조심스러움이 묻어나왔다.
"여주야."
"...응."
"너는 내 첫사랑이야."
그의 말에 잔잔한 감동이 밀려왔다. 누군가의 처음이라는 것은 참 황홀한 일이다.
"나도, 나도 종대야. 너가 내 첫사랑이야."
내 말에 그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여주야. 내가 아까 그랬잖아. 좋아한다는 말은 마음이 넘쳐흐를때 진심을 담아서 하고싶다고."
"응."
"지금이 그래."
"..."
"사랑해. 여주야."
다가오려던 그를 살짝 막았다. 왜냐고 묻는듯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종대야."
"응."
"그냥, 항상 궁금했던게. 이런 마음을 왜 키스같은 스킨쉽으로밖에 표현을 못할까?"
"그래서, 나랑 하는 키스가 싫어?"
내게 장난스럽게 잔키스를 남기던 그가 내 입술을 간질이며 물었다.
"그럴리가. 그냥 문득 궁금해졌어."
"어떻게하면 내 마음이 전해질까."
그가 장난끼가 섞인 말투로 계속해서 입술을 대고는 말했다. 간지러운 느낌에 그를 밀어내려 했으나, 힘으로 그를 이기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조금 더 부드럽게 하면, 전해질것 같아?"
그가 내게 씩 웃어보였다. 그의 말이 부끄러워 얼굴을 붉혔다.
"빨리 말해봐, 원하는대로 해줄게."
"..."
"내가 어떻게 키스해줬으면 좋겠어?"
그는 내가 얼굴을 피하는 대로 쫓아왔다.
"우리 여주는, 좀 거친걸 좋아하나."
그가 짓궂게 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아, 하며 살짝 인상을 쓰자 그는 내 입술을 부드럽게 혀로 쓸며 나를 달래주었다. 평소와는 조금 다른 그와의 키스에 괜히 부끄러워 그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그는 계속해서 내 입술만 자극하며 나를 애태웠다. 나에게서 잠시 입술을 뗀 그가 말했다.
"여주야."
"..."
"나도 너랑 만나면서 궁금했던거 많아."
"...뭐?"
"그냥."
"...?"
"왜 내가 너를 만날수록 어린애가 되는지, 그런거?"
"너가 무슨 어린애야, 어린애가 이렇게 키스하고, 야-"
내 말에 그는 큭큭대며 입을 맞췄다.
"그게 아니라, 나는 나 혼자 다 컸다고 생각했는데."
"...응."
"내 감정이 흘러가는걸 볼 때마다, 아직 멀었다는걸 느껴."
"글쎄, 그건 나도 마찬가지인데."
"됐어, 너랑 만난다면 어린 애도 좋지 뭐."
그는 양 손으로 내 볼을 잡더니, 쪽 소리를 내며 입을 맞추곤 장난스레 웃어보였다.
"이러고있다가 종인이한테 걸리겠다."
"..."
"그만 가자."
그가 내 손을 살살 흔들었다.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대신 내가 집에 가면 키스 많이 해줄게."
"딱히 안해줘도 되는데..."
"너가 원하는 대로 해준다니까. 부드럽게? 아니면-"
"아, 진짜 김종대!"
능글맞은 종대의 말투에 소리는 질렀지만 내 입가에서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그의 이런 모습마저도 귀여우니, 그에게 빠져도 단단히 빠진게 분명했다. 그래, 우린 서로에게 미쳐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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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야, 오늘 엄마 아빠 둘 다 출장이야."
"응? 갑자기?"
"어제 말해준다는게 깜박했네."
엄마는 토스트기에서 구워진 식빵을 꺼내며 말했다.
"언제와, 그럼?"
"내일 점심 쯤?"
"김종인은 알아?"
"종인이는 당연히 모르지. 오늘도 일찍 나갔잖아."
"아, 그렇겠네."
아무 생각 없이 토스트를 먹다 나는 그대로 멈췄다.
"엄마. 김종인 오늘 친구네 집에서 자고 온댔잖아."
"아, 맞다. 까먹었네."
"...그럼 내가 김종인한테 전화해서-"
"됐어, 뭘 그러니. 출장 한두번 가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걔 내일 저녁 늦게 와서 엄마 아빠 출장갔다 온것도 모를걸?"
하기야 그것도 그렇다. 전화기로 향하던 발걸음을 멈췄다.
종대는 씻고 나왔는지 젖은 머리를 털며 식탁 의자에 앉았다. 엄마가 뒤를 돈 사이 그는 나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종대야."
"네!"
"오늘 아저씨하고 아줌마 출장가니까, 여주랑 집 잘 지키고 있어."
"아...그럼 내일 오세요?"
"응.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고."
"네, 안녕히다녀오세요."
엄마는 그렇게 현관문을 나섰다.
엄마가 나가자마자 그는 나를 보며 씩 눈웃음을 지었다.
"여주야."
"응?"
"이건 진짜 대박이야."
"왜?"
"오늘 종인이도 없잖아."
"그렇지."
그는 나를 세게 끌어안으며 좋아 죽겠다는 듯 흔들어댔다. 그런 그의 모습이 귀여워 웃음이 나왔다.
***
"여주야. 내가 하루 종일 생각해봤어."
"뭘?"
"너랑 오늘 뭘 해야할지."
종대는 가방을 뒤적거리며 노트를 꺼냈다. 슬쩍 보니 심지어 번호까지 붙여 목록을 만들어 놓은 것이 보였다.
"...수업 안 듣고 그런 짓이나 한거야?"
"그런 짓이라니!"
종대는 오히려 펄쩍 뛰며 그런 짓이라니! 이게 고작 그런 짓이야? 하고 투덜댔다.
"어디 한번 보기나 하자."
노트를 뺏어들어 1번부터 차근차근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1. 여주가 해준 밥 먹기.
"...나 요리 잘 못하는데."
"너가 해주는거라면 컵라면이라도 좋아."
"진짜?"
"...어...그렇다고 컵라면은 조금..."
2. 여주랑 같이 공부하기.
"이건 평소에도 하는거 아니야?"
"그러니까, 네 옆에 앉아서 커플처럼 공부하고 싶다니까?"
"커플처럼 공부하는게 뭔데?"
"공부하다가 장난도 치고, 눈 맞으면 뽀뽀도 하고..."
"..."
3. 여주 밥 먹여주기.
"...밥 먹여주기는 대체 뭔데?"
"내가 너 떠먹여주고싶어."
"...대체 왜?"
"그냥. 내가 가져다 줄 때마다 너가 먹으면 귀여울 것 같아."
"..."
4. 여주 방 구경하기.
"너 내 방 구경한 적 있잖아."
"아직 없거든. 맨날 테라스에서 보기만 했지."
"...아, 그렇네? 근데 너 내 방 왜 한번도 안 들어왔어?"
"그야 당연히 종인이 때문에 그렇지."
"아..."
5. 여주 머리 말려주기.
"이건 뭔데?"
"그냥, 왜 영화같은거 보면 남자가 여자 머리 말려주잖아. 그거 해보고싶었어."
"...김종대 생각보다 순정파다?"
"내가 좀 그래."
6. 여주 재워주기.
"...이게 내가 지금까지 본 것 중에 제일 이상해. 내가 애기야? 재워주게."
"너 애기 맞아."
"..."
"귀엽잖아."
여기까지 읽고는 노트를 탁 덮었다. 그에 종대는 왜애!! 하며 소리를 빽 질렀다.
"딱히 더 읽어봤자, 뭐..."
"...야! 내가 그래도 많이 뺐거든?"
"뭐 뺐는데? 한번 들어나 보자."
팔짱을 끼고는 그를 응시했다. 내 말에 그가 답지않게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이더니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뭔데 그래?"
"아니, 그게..."
"뭔데, 빨리 말해라?"
"그냥, 남녀가 단 둘이 있다보면, 뭐, 조금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갈 수도 있구..."
우물우물 소심하게 말하는 그에 허-하고 웃음이 나왔다.
"그래서, 나를 상대로 그런 생각을 했어?"
"..."
"나 가지고 야한생각했다, 그거지."
"ㅇ,야! 그걸 그렇게 직접적으로 얘기하면 어떡해!"
종대는 얼굴이 시뻘개져서는 소리쳤다.
쇼파에서 일어나 방을 향하자 그는 덩달아 몸을 일으키더니 나를 졸졸 따라왔다. 그런 그를 째려보며 말했다.
"너 오늘 나한테 손 대지 마."
"...너무해."
종대는 입이 삐죽 튀어나왔다. ...정말 때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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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야아-, 나도 한 입-"
아까 손 대지 말라는 나의 말이 무색하게, 그는 나의 뒤에 꼭 매달려있었다.
나는 팬케이크를 굽느라 바빴고, 그는 이런 나를 보고 마냥 좋은 듯 헤헤거리며 웃었다.
"나도 한 입 달라니까아-"
"여기."
군말 없이 그의 입에 작게 자른 조각을 넣어줬다. 그는 엄지를 척, 치켜들며 완전 맛있어! 하고 외쳤다.
"여주야."
"응."
"우리 이러고 있으니까 꼭-"
"결혼한것 같다고?"
"...뭐야, 김 새게."
그는 짐짓 삐진 표정을 지었다.
"결혼은 무슨. 꿈 깨."
"...너 요즘 나한테 왜 이렇게 딱딱해졌어?"
"아니거든?"
"...진짠데, 너 좀만 더 그러면 나 좀 서운할 것 같아."
그의 말에 뒤를 돌았다. 그는 정말로 서운한 듯 눈썹 끝을 추욱 내렸다. 요즘 내가 너무 틱틱댔나? 미안한 마음에 그에게 조심스럽게 안겼다.
"종대야. 내가 요즘 너무 틱틱거렸지. 미안해-"
"..."
"아아-, 종대야, 화 풀어. 응?"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비비적대며 칭얼댔다. 내 머리 위에서 그가 큭, 하며 웃음을 터뜨리는 소리가 들렸다.
작게 웃던 그가 점점 박장대소를 하기 시작했다.
"ㅇ,야. 왜 웃어?"
오히려 당황한건 나였다.
"아, 우리 여주 이렇게 귀여워서 어떡하지..."
웃음을 가라앉힌 그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 그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나를 보며 귀여워! 하고 볼을 쭉 잡아늘렸다.
"여주야. 내가 어떻게 너한테 서운해."
"..."
"이렇게 귀여운데, 응?"
"..."
"우리 여주 먹어야지, 아-"
그는 팬케이크를 작게 조각내어 내 입 앞에 내밀었다. 그를 흘겨보며 입을 벌려 받아먹었다.
"아기 새 같아, 아기 새."
"..."
"아, 여주야. 나 네가 너무 좋아."
그가 나를 품 속에 밀어놓고는 꽉 끌어안은 채로 흔들어댔다. 그의 가슴팍에서 빠르게 뛰는 그의 심장 박동 소리가 들렸다. 설레임에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
"너 방에서 좋은 냄새 나."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말리며 방으로 향하는 나를 그가 졸졸 따라왔다.내 방에 들어선 그는 작게 와-하는 탄성 소리를 냈다.
"왜?"
"여자 애 방이잖아."
"그게 어때서?"
"그냥. 너한테서 나는 좋은 냄새 나."
그가 내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이내 내 침대에 풀썩 앉은 그는 자신의 옆자리를 톡톡 치며 말했다.
"여주야. 머리 말려줄게, 와서 앉아."
"진짜? 진짜 말려줄거야?"
그의 말에 얼른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의 로망이 여자친구의 머리를 말려주는것이라는 말에 면박을 주긴 했지만, 나 역시도 영화에서나 보던 장면을 내가 직접 재현하게 되니 두근거리고 떨리기는 마찬가지였다.
그가 드라이기를 키고는 내 머리를 조심스럽게 말려주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내가 아플까, 조심스럽기 그지 없는 그의 손길에 나른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와 나 사이에는 드라이기 소리를 배경삼아 정적이 흘렀다. 가만 보니 그의 귀 끝이 빨개진게, 우리 둘 사이의 분위기가 묘하게 흘러가고 있음은 명백했다. 나 역시도 그 묘한 분위기에 점점 젖어들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가 천천히 드라이기를 껐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머리 다 말렸는데."
"..."
"너한테 좋은 냄새 나."
그의 얼굴이 내게 다가왔다. 그가 얼굴을 내 목선에 묻고는 작게 숨을 들이켰다. 온 몸이 빳빳하게 굳어가는 느낌이었다.
그와 나의 시선이 다시 한번 부딪혔다. 그와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의 풀린 눈이 내 시선에 들어왔다. 아마 나도 그와 비슷한 눈빛을 하고 있을게 분명했다. 점점 가까워지는 거리에, 그와 나의 콧등이 스쳤다. 그 순간 그의 손이 내 어깨를 밀어냈다.
"...여주야."
"...응?"
"나 피곤해서, 그만 잘게."
"ㅇ,응?"
그가 서둘러 내 방을 나섰다. 그는 내 방 문을 열고 나갔고, 나는 잠시동안 당황스러움에 멍하니 침대 위에 앉아있었다.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린 나는 뛰다시피 그를 쫓아갔다. 그는 막 그의 방 문을 열던 참이었다. 그의 팔을 붙잡았다. 그는 짐짓 놀란 표정이었다.
"...종대야."
"..."
"너가 재워준다며."
"..."
"나, 혼자 자기 무서워."
나의 마지막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의 입술이 다가왔다. 지금까지 나눴던 키스와는 비교가 되지 않게 급하고, 거칠었다. 그의 힘으로 나는 뒤로 몰아붙여질 수 밖에 없었다. 점점 뒷걸음질을 쳤다.
무언가 걸리는 느낌에 풀썩 주저앉으면, 그의 침대였다. 잠시 떨어졌다가도 다시 맞붙어 오는 그의 입술에 나는 거친 숨을 토해낼 수밖에 없었다. 아무런 이성적인 판단도 서지 않았다.
그가 나를 점점 뒤로 눕히는 것이 느껴졌다. 온 몸에 힘이 풀리는 바람에 어떤 대항도 할 수 없었다. 나를 똑바로 눕힌 그가 한참 깊게 입을 맞추다 입술을 뗐다.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여주야."
"응..."
"괜찮아?"
그의 말에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렵긴 하지만, 너라면 괜찮을것 같아. 그의 입술이 다시 진득히 맞붙어왔다.
"하, 종대야-"
내 입술에만 머물던 그의 입술이 점점 귀로 옮겨갔다. 생소한 자극에 나는 숨을 빠르게 몰아쉬며 몸을 비틀 뿐이었다. 내 귀를 자극하던 그의 입술이 내 목선을 타고 점점 내려갔다.
나의 허리에 얌전히 올려저 있던 그의 손이 내 티셔츠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손이 내 맨 살 위를 배회했다. 점점 티셔츠가 말려올라가기 시작했다. 맨 살에 찬 바람이 스쳐 몸을 살짝 떨었다.
그의 손이 점점 올라가 속옷에 닿았다. 몽롱하던 정신이 확 깨는 기분이었다. 분명히 그라면 괜찮다 생각했는데, 순간적으로 두려움이 끼쳤다. 그의 이름을 다급하게 불렀다.
"종대야."
"..."
"종대야,"
"..."
"...이래도 되는걸까, 우리?"
내 말에 그의 손이 멈췄다. 한참을 굳어있던 그는, 천천히 손을 뺐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말려올라갔던 내 티셔츠를 다시 내려주었다.
"미안해."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내 옆에 털썩 누웠다.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바람에 그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한참 아무 말도 없는것이 확실히 기분이 좋지는 않아보였다. 하기야 기분이 좋을리가. 꼭 다 허락한것 처럼 굴다가 이제와 변덕 부리는 꼴이-
"종대야."
"..."
"...미안해, 내가 많이 서툴러서-"
"그런 말 하지 마."
그가 찬찬히 그의 얼굴에서 손을 뗐다. 그의 진지한 시선이 나를 향했다.
"내가 더 미안해."
"..."
"이렇게 준비도 없이, 성급하게 하는건 나도 싫어."
그의 말을 마지막으로, 한참 정적이 흘렀다. 조심스럽게 그의 품에 안기자 그가 나를 토닥거리기 시작했다.
그의 품에 한참을 안겨있다,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 아직도 너가 참 많이 궁금하다.
"종대야."
"응."
"어쩌다 유학오게 된거야?"
"그냥, 부모님께서 권유하셔서."
"그럼, 아무 말 안하고 따랐어?"
"그건 아니지. 나도 한국에서의 내 생활이 있는데."
그가 내게 웃어보였다. 사실은 두렵다. 그가 자신의 생활을 찾기 위해 돌아갈까봐 말이다.
"종대야, 혹시 보고싶은 사람 있어?"
"보고싶은 사람?"
"응."
"너는?"
"음...나는 친구들."
"나는 우리 할머니."
"할머니?"
"응. 엄마 아빠가 맞벌이셔서 어릴 때부터 할머니께서 봐주셨거든. 나 출국하는 날도 할머니가 공항까지 오셨는데, 진짜 눈물날 것 같더라."
"그래서 울었어?"
그가 민망한 듯 웃었다.
"아니, 할머니 앞에서는 괜찮은 척 하다가 들어가서 솔직히 조금 울었어."
"...지금은, 한국 가고 싶어?"
"글쎄, 처음에는 빨리 돌아가고 싶었는데..."
그가 고민되는 듯 말 끝을 흐렸다. 심장이 쿵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당연하다. 당연히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겠지, 내가 처음에 그랬듯 말이다. 그를 막는 것 또한 이기적인 일 임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근데 지금은 아니야."
"...응?"
"한국에는 너가 없는데, 여기는 너가 있잖아."
"..."
그의 말에 내 생각이, 행동이 일순간 멈췄다.
"너가 미국에 있으면, 나도 미국에 있을거야."
"..."
"너랑 같이 졸업도 할거고, 대학도 너랑 같이 다닐거야."
"..."
"어떤 일을 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사회 생활 할 때도 네 옆에는 내가 있을거고."
"..."
"너랑 결혼해서, 아들 딸 낳고 알콩달콩..."
"...벌써 거기까지 생각한거야?"
장난스레 말했지만, 살짝 잠긴 목소리였다. 그의 말은 항상 나를 울게 만든다. 그게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이든 말이다. 지금은 그의 진심이, 그의 사랑이 나를 울게 만들었다.
"울어?"
"...안 울어."
"왜 울어, 울지 마."
그가 손을 들어 내 눈가를 닦아주었다.
"너 울라고 한 말 아니야."
"..."
"내 미래는 전부 너 밖에 없어."
"...종대야."
"응."
"나는 너가 그렇게 말해줄 정도로, 그렇게 가치있는 사람이 아니야."
"...뭐?"
내 말에 그는 굳은 표정을 했다. 그의 딱딱한 표정에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가 내 얼굴을 들어올려 숙인 고개를 들게 했다.
"왜."
"..."
"왜 그런 말을 해."
"..."
"나 화나, 너가 그런 말 하면."
"..."
"고개 숙이지 말라 했잖아."
"..."
"너가 왜 가치가 없어, 너 때문에 내가 모든걸 다 버리고 여기에 남겠다는데."
그의 말에 다시 한번 울음이 터졌다. 한숨을 쉬던 그는 나를 품에 안아 토닥거렸다.
"울지 마."
"..."
"울면 내가 더 속상해, 응?"
나를 토닥거리며 그는, 나를 달래주기 위해 그의 얘기들을 하나하나 풀어놓았다.
"나 미국 오기 직전에, 친구들이랑 같이 바다 갔었는데-..."
그의 이야기를 한참 들었을까, 귓가에서 그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져갔다. 영원히 오지 않을 것만 같던 잠이 쏟아져왔다.
"여주야, 자?"
"..."
"잘 자, 여주야."
"..."
"좋아해, 많이."
그의 달콤한 고백을 끝으로, 나는 잠이 들었다.
BGM. Taylor Swift - Blanc Space
핸드볼 선수 김종대 下
그렇게 또다시 시간을 흘렀다. 우선 종대와 나만 집에 있던 날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해보자면, 다음날 아침 종대는 1층에 내려갔다 급하게 집에 들어오는 김종인과 마주쳤다. 그의 말에 따르면 김종인이 그를 상당히 무서운 표정으로 노려봤다고 한다.
종대는 그제서야 내가 자신의 침대에서 함께 잤다는게 기억이 났고, 서둘러 2층으로 올라와 자던 나를 깨워 내 방으로 보냈다. 몇 분 후 김종인이 내 방 문을 슬쩍 열어 나를 확인하는 소리가 들렸다. 솔직히 말하면 조금 무서웠다. 자기가 무슨 아빠도 아니고,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나와 종대의 관계는 변함없었다. 그는 나를 아낌없이 사랑해줬으며,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우리는 변함이 없을 줄 알았는데.
변화는, 한 통의 전화로부터 시작됐다.
***
그 날, 나는 종대와 테라스에 앉아 따사로운 봄 볕을 배경으로 공부를 하고 있었다. 말이 좋아 공부지, 사실은 연애질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우리만의 세계에 빠져 있었달까.
그리고 우리의 분위기는, 갑자기 테라스 문을 벌컥 연 엄마로 인해 깨져버렸다.
"...종대야."
엄마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무슨일 있어요? 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엄마는 말할 수 없다는 듯 시선을 피하며 종대에게 전화기를 내밀었다.
그리고 전화를 받은 그는, 한참동안 그대로 굳어 전화기를 손에서 놓지 못했다.
***
그리고 그는 바로 다음날 떠났다.
그의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했다. 그는 울지도 않았고, 어떠한 말을 꺼내지도 않았다. 그저 말이 없었다. 그의 모습에 더 불안한건 나였다. 하지만 나를 등지는 그의 뒷모습을 나는 붙잡을 수도, 위로랍시고 어떤 말을 꺼낼 수도 없었다. 짐을 싸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그에 대한 안쓰러움과 동시에 불안함을 느꼈다. 그는 과연, 돌아오기나 할까.
내 걱정과는 다르게 그는 일주일 후 돌아왔다. 그 사이에 살이 빠진 듯 해보였다. 그가 현관문을 여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그를 향해 뛰었다. 그는 내게 힘없이 안겼다. 항상 나를 안아주던 그인데, 지금은 내가 그를 안아주어야 했다.
그는 말수가 줄었다. 공부를 하다가도, 나와 말을 하다가도, 팀 연습을 하다가도 멍을 때리기 일쑤였다. 그는 무언가 정신을 놓고 있는것 같았다. 그는 지독한 슬럼프에 빠졌다.
"여주야."
"...응."
"미치겠어, 아무것도 집중이 안돼."
"..."
그는 깊게 숨을 내쉬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의 모습은 많이 지쳐보였다.
"내가 한국에 없어서 그런게 아닐까?"
"...뭐가?"
"우리 할머니."
"..."
"나도 못 보고 돌아가셨잖아."
항상 이런 대화의 반복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이고 반복되는 그의 말을, 나는 처음 듣는 척 받아주었다. 지쳤다. 하지만 더 두려운건 지쳐가는 나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는, 항상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했다.
"그냥, 한국으로 돌아갈까?"
몇 달 전, 나 때문에 미국에 남겠다던 그와 같은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그는 변했다. 그는 나에게 수십번을 물었다. 한국으로 돌아갈까, 하고 말이다. 아마 지금의 그는, 그의 한 마디로 인한 나의 감정은 생각할 여유조차 없을 터였다. 머리로는 이해한다 했으나, 가슴으로는 속상했다.
그럴 때마다 그를 위로했다. 괜찮아,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거야, 시간이 약이야. 틀에 박힌 뻔한 말이었다.
사실, 변해가는 그의 모습에 속상에 울기도 여러 번, 서운해 울기도 여러 번이었다. 그의 앞에서는 절대 울지 않았다. 그는 내 우는 모습을 싫어했으니 말이다. 밥도 먹고싶지 않았다. 통 입맛이 없었다. 전이었으면 무슨일이냐며 나를 다그칠 그는, 나는 신경조차 쓸 여유가 없었다.
그렇게 원망스럽게도 시간을 흘렀다. 그는 여전히 그 상태 그대로였다. 이제는 그의 성격이 완전히 변해버릴까봐 두렵기까지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의 앞에서 온갖 밝은 척을 하며 그를 위로해주는 일 밖에 없었다.
분명히 나는 지쳐가고있었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사실, 나는 알고있었다.
"나 그냥, 한국으로 돌아갈까?"
그를 잡고싶은 나의 욕심이라는걸 말이다.
이제는 인정해야했다. 내가 그를 억지로 이곳에 붙들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그를 놔주는 것이 진정 그를 위하는 일이라는 것도.
"...종대야."
"..."
"나는 너가 행복한게, 내가 행복한거야."
"..."
"정말 인연이라면, 언젠가는 다시 만나겠지."
"..."
"...가고 싶으면, 한국으로 가."
그의 눈이 멍하니 나를 향했다. 그의 시선을 피했다.
"...헤어지자, 종대야."
차마 그를 바라보지 못했다. 그를 보면 내 결심이 다시 한번 흔들릴 것 같았다.
"우리 그만하자."
널 사랑하는 만큼, 너의 행복이 곧 나의 행복이었기 때문이다. 나 따위의 희생은 감수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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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그는 떠났다. 정말로 말이다. 그가 떠나던 날, 나는 그를 현관까지 배웅하지도 않았다. 그저 내 방에 틀어박혀있었다. 그를 보면 울게 분명했고, 그가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차피 그는 지금 내가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테지만 말이다.
그가 없는 이곳의 시간은 참 느리게 흘렀다. 원래 이렇게 시간이 느리게 갔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김종인은 김종대를 싫어했다. 부모님이 그의 이름을 언급만 해도 김종인은 눈살을 찌푸렸다. 처음에는 그런 그를 나무랐으나, 이제는 아무 감정도 들지 않았다. 그의 이름조차 듣고싶지 않았다.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나니까 말이다.
친구들은 내 눈치를 봤다. 그럴만도 한게, 급격히 말수가 줄었다. 항상 멍하니 있던 그의 모습이 이제 나의 모습이 되었다. 이제서야 그가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소중한 사람을 잃은 상실감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점점 나의 패턴을 되찾고 있었다. 그를 잊은게 아니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를 잊을 수는 없었다. 마치 문신마냥 그는 내게 단단히 새겨졌고, 지울 수 없었다. 그로인해 나는 사랑을 알았고, 배려를 알았고, 희생을 알았다. 확실히 나는 어른스러워져 있었다. 그 하나로 인해 말이다.
생각을 하지 않으니 괜찮았다. 상처의 회복보다는 도피에 가까웠지만 말이다. 외줄타기를 하듯 아슬아슬했던 나는, 다시 안정을 되찾았다.
하루에 수백번도 생각나는 그를, 억지로 무시하며 말이다.
***
그렇게 나는 졸업반이 되었다. 완연한 가을이었다. 내게 큰 파도를 일으켰던 이별의 슬픔은 이제 잔잔하게 내 마음 속에 흘렀다. 사람은 늘, 아픔을 통해 성장한다.
그와 함께 걷던 길을 혼자 걸어 집에 도착했다.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집에 들어와 거실로 향했을 땐. 너무 그리웠던, 아니, 너무 그리워 오히려 보고싶지 않았던.
"여주야, 종대 왔다. 인사하고."
"..."
그가 있었다.
***
그는 한창 봄이던 4월에 떠났고, 지금은 한창 가을인 10월이니 근 5개월이 흘렀다. 문득 계산을 해본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이토록 시간에 무뎌져 있었던가.
그렇게 오랜만에 보는 그의 얼굴은, 내가 사랑하던 그의 모습 그대로였다. 올라간 입꼬리, 상냥한 눈빛, 매끄러운 콧날...
그를 마주할 수 없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반갑다는 감정조차 들지 않았다. 오히려 원망스러웠다. 나는 이제서야 그를 어느 정도는 잊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 내 마음은 마치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뒤 마냥 무서울 정도로 잠잠했다. 그 어떤 마음의 동요도 없었다. 그의 등장은 그랬던 나의 마음에 큰 폭풍을 일으켰다. 거실에서 그와 눈이 마주친 이후, 나는 절대로 다시는 1층에 내려가지 않았다. 그를 마주할 자신도 없었고, 보고싶지도 않았다.
그는 왜 다시 돌아왔을까. 왜 다시 돌아와서 나를 또 힘들게 하는걸까. 왜 괜히 다시 와서 잊었던 감정을 다시 생각나게 만들고, 왜 그의 눈빛은 여전히 다정해서 내가 지난 시간을 떠올리게-
눈물이 났다. 지난 수 개월간 그를 잊었니, 역시 시간이 약이었니, 하는 말들은 다 말도 안되는 개소리였다. 나는 그를 잊은게 아니라 그저 마음 한 켠으로 몰아넣었을 뿐이었다. 지금처럼 언젠가는 터질, 시한폭탄 마냥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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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를 피했다. 밥을 먹다가도 입맛이 없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는 일이 허다했다. 내가 선택한 도피처는 잠이었다. 요즘은 하루종일 잠만 자는 것 같았다. 차라리 잠을 자는게 나았다. 그럼 그와 마주칠 일도, 괜히 그를 떠올리는 일도 없을테니 말이다.
친구들은 돌아온 그를 고운 시선으로 보지 않았다. 그가 다시 학교에 오던 날, 친구들은 그를 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했다. 그리고 여전히 우리 집에서 홈스테이를 한다는 말을 듣고는 더 경악스럽다는 표정을 했다. 무심한 척 했다. 이 일에 관해 무심해지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는 다시 핸드볼 부에 들어갔다. 지난 5개월간의 부재가 믿겨지지 않을 만큼 그는 잘해내고 있었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그에 대한 소식을 애써 무시했다. 두려웠다. 나는 그로 인해 이렇게 망가졌는데, 그는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그에게 나의 존재가 어쩌면 가벼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나를 종일 괴롭혔다.
핸드볼을 그렇게 좋아하던 내 친구는, 이제 핸드볼을 보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 붙어있는 포스터를 보며 친구에게 말했다.
"조금만 있으면 결승이네."
"경기 안 봐? 그렇게 좋아하면서."
친구는 아무 말이 없었다.
"...안 봐."
"괜찮은 척 좀 하지마. 더 불쌍하니까."
친구의 말에 힘없이 팔을 내렸다. 티내지 않으려 했는데, 감출 수 없는 모양이었다. 나는 왜 이렇게 감정을 감추는 일에 서투를까. 내 자신이 끝도 없이 한심해지는 날이었다.
***
"둘은 그렇게 친하더니 왜 몇 달 안 봤다고 어색해."
엄마는 식탁에 나란히 앉은 우리를 보며 말했다. 엄마의 말에 나도 멈췄고, 그도 멈췄고, 김종인도 멈췄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미국으로 돌아오고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의 눈에서는 전혀 생각을 읽을 수 없었다. 다시 먼저 시선을 피한건 내 쪽이었다. 천천히 손을 다시 움직였다.
"...처음부터 그렇게 친했던 적 없어."
"..."
"서로에 대해서 별로 아는 것도 없는데, 뭐."
"..."
"입맛 없어서, 그만 먹을게."
의자에서 일어나 방을 향했다. 계단으로 올라가는 나의 모습을, 그의 눈이 계속 쫓았다.
***
학교가 끝나고 오늘도 역시 혼자 집을 가기 위해 교문으로 향할 때였다. 문득, 핸드볼 경기장으로 시선이 향했다. 한번 가볼까... 한참을 망설였다. 머리는 안된다고 외쳤지만, 내 발 걸음은 이미 경기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내가 정신을 차린건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경기장 문이 열렸을 때였다. 나도 모르게 문을 열어버린 손을 보고는 한참을 멍하니 서있다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오늘만 보자. 딱 오늘까지만... 조심스럽게 관중석 뒤 쪽으로 향했다. 텅 빈 경기장에는 그와 팀 코치님만이 있었다. 그는 코치님과 함께 개인 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멍하니 봤다. 아주 잠시동안, 예전으로 돌아간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 헉-"
계속해서 멍하니 그의 모습을 보다 발을 헛딛어버렸다. 급하게 의자를 잡아 넘어지는건 간신히 면할 수 있었다.
경기장의 낯선 소리를 들렸는지 그의 연습이 잠시 멈췄다. 서둘러 경기장의 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그를 피하기 위해 정신없이 뛰었다. 숨을 헉헉대며 건물 입구로 나와 고개를 들었을 땐, 잔뜩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는 사정없이 쏟아내리고 있었다. 강한 물줄기를 만들며 말이다. 하늘은 내 마음을 대변하는 듯 새까맸다. 망설이다 걸음을 내딛었다.
갑자기 내 위로 그림자가 졌다. 뒤를 돌았다. 뒤에는 얼굴에 아무 표정도 담겨있지 않은 그가 우산을 들고 서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서있다, 그는 내게 억지로 우산을 쥐어줬다. 그리고 그는 먼저 건물을 나섰다.
거센 장대비를 온 몸으로 맞으며 먼저 앞서나가는 그의 뒷 모습이 보였다. 속이 울렁거렸다. 그는 항상 내게 뒷모습만 보여줬다. 다섯 달 전에도, 그는 사랑한다는 말을 속삭이며 내게 영원할 것 처럼 말해놓고 먼저 내게 등을 졌다. 내가 그에게 먼저 헤어짐을 고했지만 그건 그의 압박에 따른 나의 불가피한 행동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도 그는 내게 여지를 남겨놓고는 먼저 등을 보인다. 그는 항상 이런식이었다. 내 마음 한켠에서 째깍대며 위험을 경고하던 시한폭탄이 폭발했다.
그의 앞에서는 울지 않겠다는 나의 다짐이 무색하게 눈물이 흘렀다. 감정이 넘치다 못해 폭발할 것 같았다. 그가 밉다. 이런 그도 질리고, 나도 질린다. 그냥 도망쳐버리고 싶다. 손에 쥐고 있던 그의 우산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강한 빗줄기에 순식간에 내 온 몸이 젖어들기 시작했다. 그를 울음섞인 목소리로 불렀다.
"야, 김종대!"
울음이 섞인 못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내 부름, 아니, 고함에 그는 뒤를 돌았다. 내동댕이 쳐진 우산을 보는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 나쁜 놈아!"
눈물이 비와 섞여 구분할 수 없었다. 눈 주위를 벅벅 닦아 뜨기 힘들었던 눈을 다시 똑바로 떴다. 지금 그가 보는 내 모습은 얼마나 못났을까. 상상하기도 싫었다. 비에 젖은 생쥐꼴에, 얼굴에는 눈물인지 비인지 구분 못할 물기가 가득하다. 목소리가 듣기 싫게 울음에 먹혀들어갔다.
"지금 이 우산은 어떤 의미인데?"
"..."
"너는 늘 그런식이야."
"..."
"넌 맨날 사람을 착각하게 만들어. 너 때문에 내가 병신짓을 몇 번이나 했는 줄 알아? 처음에는 내 마음 무시하려드는 너 때문에 힘들었고, 만나면서는 표현 안하는 너 때문에 힘들었어. 마지막까지 사람 비참하게 만들어놓고 이제와서 뭐 하는거야?"
그에게 울부짖었다. 지금까지 참아왔던 모든 울분을 터뜨렸다.
"너는 내가 그렇게 쉬워? 너는 내가 필요하면 찾고, 부담되면 버리는 사람이야?"
"..."
"대답해보라고! 너한테 난 대체 뭔데?"
학생들이 다 떠나 빈 학교에 나의 고함소리만 퍼졌다. 내 말에 굳어있던 그가 내게 화난 표정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내 어깨를 잡은 그가 나를 흔들어댔다.
"너가 뭘 알아? 너가 나한테 쉬워? 그건 무슨 개소리야. 나는 너가 쉬웠던 적 단 한번도 없-"
"그만 좀 해. 내가 말했잖아, 너는 늘 이런 식이라고. 지금도 그래. 너가 좀 아쉬우니까 이딴 사람 홀리는 말로 나 미치게 만들었다가, 또 결국에는 버릴거잖아."
"야! 너 말 그렇게밖에 못해?"
"어, 못해. 내가 존나 못되서 이렇게 밖에 말 못해. 그러니까 제발 나한테 그만해. 나라고 안 지치는 줄 알아? 나도 지쳐. 나는 무슨 감정없는 로봇이나 되는 줄 아냐고!"
둘 다 언성을 높혀 소리를 질러댔다. 그의 표정이 잔뜩 화가 나 일그러져있었다. 나 또한 마찬가지일게 분명했다.
"내가 너한테 미안하니까 온거 아니야. 내가 너한테 미안해서,-"
"미안? 고작 그런 미안하다는 생각 때문에? 아니, 미안해하지마. 미안하면 내 눈 앞에 보이지 말라고! 너 한국 좋다며. 그냥 한국 가서 살아! 가서 다른 여자 만나고, 그냥 내 얘기는 걔랑 심심풀이 술 안주 정도로나 해."
"말 그딴식으로 하지 말라고 했잖아!"
"너는 너가 미안하면 바로 나를 찾아와? 너 때문에 내가 얼마나 힘들었을지는 생각 안해? 너는 왜 이렇게 이기적인데. 나는 너 때문에 몇 달 동안 밥도 제대로 못 먹었고, 잠도 제대로 못 잤어. 그런데 그렇게 무작정 돌아오면 내가 좋아할거라고 생각했던거야?"
"..."
"거봐, 아무 말도 못하잖아. 너가 맨날 말로만 사랑한다, 좋아한다 하면서 진심이었던 적이 있냐고."
"..."
"진심이었으면, 그렇게 쉽게 행동할리가 없잖아..."
점점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격해진 감정에 말을 이을 수조차 없었다. 그의 앞에서 어린애 마냥 울었다. 서러움에 소리를 내어 한참을 울었다. 아무 말이 없는 그에 더 눈물이 났다. 엉엉 울며 걸음을 옮겼다. 앞이 보이질 않아 옷 소매로 거칠게 눈가를 닦았다.
그에게 한번 더 속았다. 그의 달콤한 사탕발림에 다시 한번 넘어갈 뻔했다. 이제는 그를 믿을 수가 없었다.
옷이 젖든 말든, 그런것은 하나도 상관이 없었다. 내 마음이 지금 이 날씨보다 수십배, 아니 수백배는 더 우울하고, 우중충했으니 말이다. 볼품없이 울며 한참을 걸었을 때였다. 나를 쫓아온 그가 내 손목을 잡고 끌어당겼다.
그가 무작정 입술을 들이댔다. 피하려했지만 운동을 하는 그를 힘으로 이기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그의 어깨를 때렸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내게서 떨어졌다.
"미안해, 여주야. 내가 미안해."
"지금 뭐하는건데, 너는 정말로 내가 우스워?"
"나는 한번도 너가 우스웠던적 없어, 나한테 너의 의미가 가벼웠던 적도 없어."
그의 눈이 빨갰다. 비와 섞여 잘 구분은 가지 않았지만, 지금 그 또한 울고 있음이 분명했다.
"미안해, 내가 정말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
"내가 어렸어, 내가 이기적이었어. 나는 정말로, 내 감정밖에 생각 안 하는-"
그가 잠시 말을 멈췄다. 그 또한 울음에 말이 막히는 듯 했다.
"하지만 널 사랑한다는 말로 거짓말 한 적은 없어."
"..."
"한국에 몇 달동안 있으면서, 계속 널 생각했어. 그리고 그제서야 알았어. 내가 얼마나 병신이었는지."
"..."
"너가 쉬웠을리가 없잖아, 너 때문에 처음 느껴본 감정이 몇개인데 내가 너를 쉽게 생각해."
그의 말이 중간중간 끊어졌다. 그 답지 않게 말이 횡설수설 꼬여갔다.
"미안해. 몇 번을 말해도 용서되지 않을거 알아. 미안해. 항상 멋대로 굴어서, 너 힘들게 해서 미안해."
"..."
"너가 내 얼굴 보기 싫으면 그냥 다시 돌아갈게, 우선은 집 부터 옮길게."
"..."
"미안해, 내 욕심이었어. 정말로 미안...미안해."
그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입술을 깨물고 한참을 서있던 그는 쳐진 발걸음으로 한발짝을 뗐다. 이번에는 그런 그를 내가 붙잡았다.
"이제와서 뭐? 돌아가겠다고?"
"..."
"너 진짜 어이없다."
"..."
"그렇다고 뭐, 이제와서 다시 한국 가면 내가 또 좋을 것 같아?"
그는 붉어진 눈으로 다시 나를 내려봤다.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니, 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이번에는 내가 그에게 먼저 입맞췄다. 처음에는 뻣뻣하게 굳어있던 그도, 내 어깨를 감싸안으며 입을 맞췄다. 그의 뜨거운 혀가 내 입 안을 배회했다. 우리의 입술 사이로 계속해서 빗물이 들어왔다. 그리고 우리의 눈물도 말이다. 지금 당장 사라지기라도 할듯 서로를 강하게 감싸안고 우리는 한참 입을 맞췄다. 뜨거운 숨결이 서로의 입 안에서 섞였다.
"사랑해."
그가 속삭였다. 그리고 입술이 다시 맞붙었다. 그친 줄 알았던 눈물이 다시 흘렀다. 서로를 깊게 탐했다. 그토록 그리웠던 그가 온전히 느껴졌다. 그렇게 우리는 한참을 빗 속에 서서 키스했다. 둘 다 어린애같이 울면서 말이다.
***
비를 맞으며 그와 언쟁을 벌이고, 한참을 키스까지 했으니 감기에 걸리는건 당연한 일이었다. 온 정신이 몽롱했다. 눈조차 뜨기 힘들었다. 학교를 빠질 수밖에 없었다.
뜨거운 숨을 내뱉으며 눈을 떴을 때는, 몽롱한 시선 사이로 그의 모습이 보였다.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눈 앞이 뿌얬다. 꿈결같이 보이는 그에게, 뜨거운 숨을 내쉬며 내뱉듯 말했다. 이미 이성은 저 멀리로 날아간 상태였다. 내 본심이 어떠한 방어막도 없이 마음대로 튀어나갔다.
"사랑해."
"..."
"사랑해, 종대야."
그 말을 끝으로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머리가 지끈거리며 쑤셨다.
"나도, 나도 사랑ㅎ...여ㅈ..."
끊어질듯 말듯한 정신에서, 그의 목소리가 언뜻 들렸다. 그리고 나는 다시 깊이 잠이 들었다
그 날 앓았던건 비단 단순한 열병이 아니었다. 나는 사랑의 열병을 앓았고, 그를 앓았다. 이 열병은 성숙을 위한 과정이리라.
BGM. High School Musical OST - We're All In This Toge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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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우리는 원래의 위치로 돌아왔다. 물론 5개월 전 그 위치로 말이다. 그는 내게 훨씬 더 부드럽고, 헌신적이고, 다정했다. 그의 넘쳐나는 사랑에 내가 어찌해야할지 모를 정도로 말이다.
"여주야."
"응?"
"많이 좀 먹어. 너 볼때마다 내가 마음 아파."
그가 직접 밥을 떠서는 내 입 앞에 가져다댔다. 김종인은 그 모습을 보며 벌떡 일어나서는 밥통에 다시 본인의 밥을 쏟아넣고 2층을 향했다. 종대는 상관이 없어보였다. 그의 눈에는 오직 나의 모습만이 비췄다.
"여주야."
"왜?"
"내가 진짜 미쳤었지, 널 놔두고 어딜 가."
아무 말 없이 입을 우물거리다 그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종대야, 대학 어디갈거야?"
이제 졸업반이니만큼 대학은 우리에게 중요한 주제였다. 같은 대학교는 아니더라도, 가까이 다니고 싶은데...
"너가 가고싶어하는데."
"...응?"
"너가 가고싶어하는데 갈거야."
"너는 다른 대학교 가고싶어했잖아."
"너랑 같이 있고 싶어서."
그는 밥 먹자, 같은 일상적인 말을 한것마냥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적잖이 충격을 받은 것은 내쪽이었다.
"...왜-"
"너랑 같은 대학교 다닐거야."
"..."
"같은 고등학교 졸업하고, 같은 대학교도 졸업하고. 평생 같이 할거야."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잖아."
사람 일은 모른다. 혹시나, 그와 내가 다시 한번 이별을 겪게 된다면, 그는 지금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까.
"후회하면 어떡해."
"후회 안해."
"..."
"혹시 너와의 관계가 지금같지 않더라도 후회 안해."
"..."
"나한테는 가치 있는 일이야."
나 또한 알았다. 먼 미래에 그와의 관계가 혹시 지금과 같지 않더라도, 이제는 회상하며 웃을 수 있노라 자신하며 말할 수 있었다.
문득 이게 진정한 사랑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존재는 언제나 나를 웃음짓게 만든다. 생각만 하면 저절로 웃음이 새어나오는게, 이게 사랑이 아니라면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핸드볼 선수 김종대 下
주 내 고등학교 핸드볼 팀의 마지막 결승이었다. 종대의 팀은 지금까지의 모든 경기를 승승장구하며 이겨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전혀 긴장한 내색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긴장하고 있는 것은 내 쪽이었다.
"쟤도 긴장 안하는걸 왜 너가 해?"
친구들은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글쎄, 그러게 말이다.
이제 막 경기가 시작하려던 참이었다. 다른 선수들과 얘기를 나누던 그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맨 앞 줄에 앉아있던 나는 다가오는 그에 급하게 일어섰다.
그가 내 머리를 쓰다듬고는 내 팔을 들어올려 자신의 아대를 풀고 내 손목에 둘러줬다. 한참을 멍하니 보기만 했다.
"종대야, 너는?"
"나는 필요없어."
그가 씩 웃었다.
"여주야."
"응."
"너는 내 은인이야."
"응?"
"사랑해."
"..."
"꼭 이기고 올게."
그가 내게 가볍게 입을 맞추고 다시 경기장으로 향했다.
경기장 중앙에 선 그는 내게 자신만만한 미소를 던졌다. 그의 미소는 승리를 예견하는것 마냥 밝았다.
***
경기 내내 우리 팀의 응원석은 흥분의 도가니였다. 그는 일년간 보여줬던 경기들 중 최상의 컨디션을 보여줬다. 명백한 우리 팀의 승리였다. 환호성이 경기장을 폭발시킬 듯 했다. 팀의 응원가가 울려퍼졌다. 모든 관중과 선수들이 뒤섞여 소리를 지르며 서로를 껴안았다. 팀의 주장은 우승컵을 번쩍 들어올렸다. 관중들에게서 다시 한번 환호가 터져나왔다.
모든 사람들이 승리의 주역인 그를 둘러쌌다. 하지만 그는 모든 사람을 뿌리치고 나를 향했다. 마침내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우리 둘이 마주보고 서있게되었다. 서로를 바라보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그가 나를 껴안아들어올렸다. 그리고 그와 입술이 맞닿았다. 맞닿은 입술 사이로 서로의 기분 좋은 웃음이 새어나왔다. 경기장에는 다시 한번 환호가 터져나왔다. 그렇게 사람들의 환호성 속에서, 우리는 한참 기분좋은 입맞춤을 나눴다.
사람들은 말한다. 청춘이란 아프다고,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나는 나의 청춘에게 고한다. 나의 청춘은 그 누구보다 아름다웠리라, 나는 그 누구보다 눈부신 성공을 했으리라.
한 사람을 지극히 사랑했으니.
'난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날 기리는 기념탑도 없고, 내 이름은 곧 잊혀지겠죠.'
"하지만 한가지 눈부신 성공을 했다고 자부합니다.'
'한 사람을 지극히 사랑했으니.'
영화 The Notebook. 2004.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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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분량 짱 많은데...^^ 쓰다가 중간에 날라가서 다시썼어요 ㅋ....진지하게 그만둘까 고민했어요....ㅋㅋ
내일 번외 및 후기로 찾아뵙겠습니다 :)
여러분 불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