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씨, 팀장님이랑 일은 잘 했어요?"
"아...네...하하"
점심을 먹고 온 백현씨가 나를 툭 치며 물어봤다. 일은 무슨. 김종대 일도 없으면서 그냥 나한테 시비틀려고...아니 경고, 협박...하여튼 그런거 하려고 남으라고 한거란 말이다. 진심으로 살면서 가장 살떨렸던 Best3 안에 드는 순간이었다. 김종대가 내 귀에 대고 "여주야, 우리 한번 잘 해보자"라고 속삭인 순간 나는 확신했다. 저 새끼는 존나 싸이코다. 우리 착했던 종대가 어쩌다 이렇게...그 시절의 김종대와는 정말 딴판이었다.
유치한 김팀장 02
그 날은 늦여름이었다. 나는 그 전날 인터넷으로 놀다가...새벽 5시에 자는 바람에 피곤해서 교실에 뻗어있었고, 최악인건 그 날 아침에 생리까지 터졌다는 것이었다. 여자들이라면 아침에 준비 다 돼서 나가는데 갑자기 느낌 이상해서 화장실 가봤는데 터졌을 때의 그 더러운 기분을 알 것이다. 친구들은 점심 먹겠다고 급식실로 갔고, 나는 그것조차 귀찮아 그냥 책상에 엎드려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침 창가였던 내 자리 덕에 햇빛은 나른하게 내 자리를 내리쬤고, 부드러운 바람이 내 머리카락을 간지럽혔다. 그렇게 나는 점점 졸음의 세계로 빠지고 있었고 눈이 점점 감겨왔다. 그 때 내 옆자리에서 의자를 끄는 소리가 들렸다.
"여주야, 자?"
"...아니-"
"밥도 안먹고, 그러고 있으면 어떡해"
종대가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힘겹게 고개를 들어 작게 칭얼거리는 소리를 내며 종대의 품에 안겼다. 종대는 살짝 당황한듯 순간 손이 갈 곳을 잃더니 곧 나를 안아오며 토닥거렸다.
"여주야, 너 내가 이러고 있을 줄 알고 먹을거 사왔어"
"안 먹어-"
"씁, 먹어야지, 내가 너 약 사오려고 밖에 편의점까지 몰래 갔다왔단 말이야"
그 말에 종대가 책상 위에 올려놓은 봉지를 보았다. 뒤적거려 비닐봉지 안에 있는 것을 하나씩 꺼냈더니 뭘 이렇게 많이 사왔는지 한가득이다.
"이거는 너가 좋아하는 피자빵"
"너가 좋아하는 딸기우유"
"짠-, 배 아플까봐 핫팩도 사왔다?"
"그리고 편의점갔다가 너 요즘 입술 너무 많이 트는것 같아서 립밤 사왔어"
"마지막으로 약! 이거 먹고 아프지 마-"
괜히 감동받아서 종대야...하고 다시 안기니 종대도 실실 웃으며 나를 꽉 껴안았다. 그러다 복도가 점점 소란스러워지고 다른 애들이 점점 교실로 가까워지는 듯한 발소리에 급하게 떨어진 우리 둘이었다. 우리 둘이 나란히 앉아있는걸 보더니 반에 들어온 친구들이 못 볼 꼴을 봤다며 입에 칫솔을 물고는 다시 나갔다. 그리고 나는 종대가 사준 립밤의 포장을 뜯고는 내 입술에 발랐다. 종대는 옆에서 오구오구하는 눈빛으로 웃으며 바라보고, 그러다 종대에게도 립밤을 발라주니 종대가 그 상태로 굳어버렸다. 그러고는 귀까지 빨개져서는 말을 더듬거렸다.
"ㅈ,지금 뭐하는거야..."
"뭐하는거긴, 립밤 발라줬잖아"
"...근데 그거 방금 너가 썼...아 몰라!"
나는 그런 종대가 귀여워 킥킥거리며 웃었고, 종대는 아 웃지마! 하고 소리치며 온 얼굴이 빨개진 채로 고개를 푹 숙였다. 내가 계속 웃으니까 종대가 삐졌는지 ...나 갈거야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짜 가게?"
"...어차피 이제 종 칠 때 다됐어"
"아 그렇네"
그리고 종대는 나에게 손을 살살 흔들어주며 뒷문 쪽으로 뒷걸음질쳤다. 그러다 혼자서 갑자기 흠칫 하더니 나에게 빠르게 다가왔다. 순간 훅 가까워진 종대의 얼굴에 뭐야 왜 그래-하고 얼굴을 살짝 뒤로 빼자 종대가 갑자기 입술에 쪽 하고 가볍게 입을 맞췄다. 먼저 뽀뽀한건 자기면서, 더 부끄러워하는 종대다. 잠시동안 내 앞에서 부끄러워하며 발을 동동 구르던 종대는 종이 치는 소리에 갈게! 하고는 복도로 뛰어나갔다. 역시 김종대는 귀엽다.
***
이렇게 나는 한참동안 그 시절의 김종대를 회상했고, 문득 정신을 차려 팀장 자리에서 모니터를 바라보며 타자를 두드리고 있는 김종대를 바라보았다. 불쌍한 우리 종대...어쩌다 저렇게 싸이코가 됐을-아 나 때문이구나, 나는 싸이코가 된 종대가 불쌍해 아련한 눈빛으로 종대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갑자기 고개를 든 김종대와 눈이 마주쳤다. 저 눈빛, 겁나 무섭다고, 김종대가 나를 노려보듯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순간 너무 쫄아서 눈조차 깔지 못했는데 김종대가 뭐라고 중얼거렸다.
뭐? 뭘 ㄲ...ㄹ...ㅏ...뭘 꼬라봐?
나는 얼른 이 장면을 나만 본게 아니길 바라면서 주위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김종대의 이런 모습을 본건 나 혼자인것 같았다. 주도면밀한 새끼, 하여튼 싸이코가 분명하다. 나는 이를 부득부득 갈며 다시 내 할일을 시작했고, 힐끗 본 김종대는 나를 너는 존나 나한테 안돼 하는듯한 비웃음을 지으며 보고 있었다. 아오 김종대 개새끼!!! 내가 어쩌다 이 회사를 들어와서 이러는건지 모르겠다.
그렇게 한참을 여러가지 복잡한 생각때문에 머리가 아파 끙끙대고 있는데 갑자기 백현씨가 옆자리에서 나를 쿡쿡 찔렀다. ? 하는 표정으로 쳐다보니 백현씨가 재밌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여주씨, 제가 정말 재밌는거 알아왔어요"
"뭐요...?"
"참새는 어떻게 울죠?"
"짹짹?"
"병아리"
"삐약삐약"
"개미"
"...?"
"앤트...앤트...앤트...(ant...ant...ant...)"
"..."
하하 존.나.재.밌.다.
백현씨는 나에게 이런 괴상한 드립을 시전하고 자기는 재밌는지 우허허헠 하면서 웃어댔다. 내 지금 표정 무지하게 썩어있겠지, 아니 첫 날부터 이런 표정하고 있다 찍히면 안돼!! 나는 애써 입꼬리를 올려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하하 재밌네요 백현씨 하하하하 그러자 백현씨는 신이나서 말했다. 그쵸, 재밌죠?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다 제가 하는 농담 재미없다고 한다니까요, 하여튼 개그에 감각이 없어서 그런거에요, 그쵸?
아...네...백현씨는 진심으로 사람들이 왜 자기 개그를 안 받아쳐주는지 모르는걸까? 그리고 내 옆자리는 왜 하필 많은 사람들 중에 백현씨지? 존나 스트레스받는다. 회사에 입사했는데 내 옆자리는 이런 이상한 사람이고, 팀장은 김종대야. 나 맹세코 나쁜짓 한적 없는데...아, 김종대 존나 나쁘게 차서 벌 받는가 보다. 아니 그건 제 의지가 아니었다니까요? 하여튼 계속 어색하게 웃으며 백현씨 농담에 맞장구 쳐주다가 김종대를 살짝 보니 김종대가 내 쪽은 안보고 모니터만 보고 있긴 한데...뭔가 마음에 안드는지 미간에 주름이 가득하다. 미간에 주름이나 생겨라 김종대 개새끼야
온갖 김종대 잔심부름에다가 일 좀 하고 백현씨 재미없는 농담 받아쳐주다 보니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다. 김종대는 시계를 힐끗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고 직원들에게 말했다. 나도 신나서 짐을 챙기는데 김종대가 갑자기 또 내 이름을 불렀다. 아 또 왜?? 이번에는 또 왜?? 뭘로 시비걸려고?
"여주씨는 잠깐 남아요"
"...왜요?"
내가 소심하게 왜요...?하자 김종대가 나를 존나 야렸다. 아 네~네, 분부대로 합죠~ 당연히 나는 바로 쫄아서 그냥 조용히 자리에 앉았고, 백현씨는 내 귀에대고 팀장님이 여주씨 마음에 드나봐요! 라는 망발을 내뱉었다. 나는 설마 이 말 김종대가 들었을까봐 겁나 눈치봤고, 그나마 다행인건 김종대가 못 들은것 같았다. 백현씨가 내일 봐요, 하고는 엘레베이터를 타고 내려갔고 다시 사무실에는 우리 둘만 남아있었다.
김종대가 내 자리로 뚜벅뚜벅 걸어와서는 책상 위에 내 핸드폰을 던지다시피 내려놨다. 아니 시발? 이거 바꾼지 한달됐다고
"야, 이거 폰 바꾼지 한달 됐다, 개새ㄲ-"
"..."
"...미안"
...나는 존나 또라이가 분명하다. 미쳤어 미쳤어!!! 뭔 생각으로 쟤한테 개새끼라 했지? 나는 지금 내 뺨싸다구를 후려갈기고 싶었다. 그리고 김종대 눈치를 보면서 뒤늦게 ...미안, 하고 사과했다. 김종대는 한참 감정없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쳐다보지 말라고 ㅠㅠㅠㅠㅠ 존나 무서우니깐 ㅠㅠㅠㅠㅠ
"여자가 입 거칠면 매력 없는데,"
"..."
"내가 뭐가 좋다고 얘랑...어휴"
김종대의 말에 나도 짜증났다. 나는 그래도 나름 우리 둘의 추억을 학창시절의 예쁜기억이라 생각하고 있는데 그걸 모욕해 니가? 아, 성깔 죽여야되는데 내가 성질이 존나게 더러워서 말이야. 나도 모르게 김종대를 확 쏘아봤다.
"...어쭈, 째려봐?"
"..."
"...기억해, 김여주, 우리 둘의 관계는 전남친, 전여친이기 전에 상사와 부하의 관계야"
"..."
"...그리고 근무 중에 남자놈들이랑 노닥거리지 마"
"너가 뭔 상관인데"
"그 남자들도 나처럼 너한테 속았다가 사기당하면 안되잖아-"
김종대가 여유롭게 웃으며 나와 눈을 마주쳐왔다. 그러다 난 이만- 하고는 발걸음을 뗐다. 그리고 엘레베이터를 잡아 타는 그였다. 어, 나도 타야되는데? 내가 급하게 가방을 들고 엘레베이터에 타려고 뛰어갔지만 김종대는 존나 비열한 표정을 하고는 그대로 문을 닫아버렸다. 나는 김종대가 듣길 바라며 크게 소리쳤다. 김종대 개새끼!!! 텅 빈 사무실에 내 목소리만이 울렸고 나는 혹시 다른사람이 있을까봐 주위를 둘러보며 눈치를 봤다. 아, 나 진짜 찌질하다. 이게 다 김종대 때문이다.
***
"...아!! 엄마 나 진짜 이 회사 못다니ㄱ-!!"
-어이구, 우리 이쁜 큰 딸 여주! 오늘 첫 출근은 잘 했어?
"...응"
-열심히 하고, 미국에 있어서 밥 못챙겨줘서 많이 미안하네...혼자 있어도 밥 꼬박꼬박 챙겨먹고, 알겠어?"
"알겠어..."
엄마한테 하소연하려고 전화한건데, 나는 힘없이 전화를 끊었다. 하긴 내가 이 회사 합격했을때 진심으로 기뻐하며 방방 뛰던 우리 가족들을 생각해서라도 회사를 그만두거나 뭐, 그럴수는 없었다. 한숨만 푹 쉬고 카톡 들어가는데 낯선 방에 초대돼있었다.
[짠!]
[여주씨! 마케팅부서 단톡방이에요!]
백현씨가 나를 초대했다. 아, 마케팅 부서 단톡...그럼 김종대도 있나? 옆의 친구 목록을 눌러 확인해보니 김종대도 있다. 프사를 보니 지 사진이다. 풉-, 꼴에 지 사진이야 ㅋㅋㅋㅋㅋ 존나 웃기네 ㅋㅋㅋㅋ
근데 뭐...조금 괜찮게 나온거 같기도 하고...입꼬리 예쁘게 잘나왔네...캡쳐해야지...나는 나도 모르게 홈버튼과 홀드버튼을 꾹 눌러 김종대 사진을 캡쳐했고, 뒤늦게 퍼득 정신을 차렸다.
"?? 김여주 너 미쳤니? 무슨 김종대 사진을 캡쳐해?"
나는 급하게 갤러리에 들어가 그 사진을 삭제하려고 사진을 클릭했다. 그러다 혼자 한숨을 내쉬었다. 뭔가 삭제하기가 싫었다. 솔직히 정말 이유는 모르겠는데, 그냥 삭제하기 싫었다. 조금 미친것 같지만, 그래, 미쳤다 치고 모른척 홈버튼을 눌러 갤러리에서 나왔다. 괜찮아 뭐 어때, 설마 나 말고 누가 또 보겠어
***
"팀장님, 저희 신입사원도 왔는데 회식 안해요?"
책상에 얼굴 쳐박고 일하고 있었는데 백현씨의 갑작스러운 말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백현씨가 웃는 낯으로 김종대에게 회식 안하냐고 물어봤다. 그 말에 김종대가 한참 아무 말이 없다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오늘 회식 할까요?"
"팀장님이 쏘시는거죠?"
"네- 뭐, 저희 회식 안한지도 오래됐고, 제가 쏘겠습니다."
오 김종대 통 큰데? 의외라는 눈길로 김종대를 바라보았다. 김종대 존나 짠돌이는 아니네? 그런데 보통 사원들은 회식 싫어하지 않나? 그런데 여기는 왜 이렇게 회식을 좋아해. 그래서 나는 백현씨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백현씨, 보통은 회식 다들 싫어하지 않아요?"
"아, 그렇죠"
"그런데 백현씨는 왜 이렇게 회식을 좋아하세요?"
"아-, 저희 부서는 회식 분위기 좋아요, 일단 팀장님이 젊으시니까 분위기도 너무 딱딱하지도 않고 좋아요! 그리고 팀장님이 자주 쏘세요!"
"아...그렇구나..."
그렇게 김종대 커피 심부름 몇 번 하고, 기획안 몇 번 까이고, 복사 몇 번 까이고, 팩스 몇 번 까이다보니 어느새 가까워진 퇴근시간이었다. 정신차려보니 부서직원들과 함께 엘레베이터를 타고 있는 나였다. 나는 오늘도 김종대한테 탈탈 털려서 제 정신이 아니었다. 김종대는 진짜 어마어마한 개새끼다.
"여주씨, 신입인데, 원샷하셔야지!!"
"오오~ 원샷해! 원샷해!"
아...나 술 잘 못 마시는데...나는 어색하게 웃다 어쩔 수 없이 잔을 들었고, 주위를 둘러보니 다들 나만 주목하고 있는 가운데 김종대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계속해서 술만 마시고 있었다. 그걸 보니 왠지모르게 심사가 튀틀리는 기분이라 에라 모르겠다 하고 잔을 입에 가져다대고는 술을 들이켰다. 다 마시고 술잔을 딱 내려놓는데, 머리가 띵 하더니 온 세상이 핑핑 돌았다. 애써 숨을 가다듬고있는데 누군가 내 앞에 술병을 하나 더 내려놓았다.
"...?"
"여주씨, 그거가지고 안되지"
"..."
"한번 더 원샷, 대신 오늘 회식했다고 내일 지각하면 안돼요"
김종대가 눈웃음을 살살 치면서 내 병에 다시 술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나는 그 눈에서 악마를 보았다. 또라이새끼, 내가 자존심 상해서 마신다. 김종대가 내 술잔을 흘러내릴정도로 꽉 채우자 주위에서 헐 팀장님 너무...하는 소리와 와 대박! 역시 화끈하셔!! 하고 호들갑떠는 소리가 겹쳐 들려왔다. 그리고 나는 술잔을 들고 김종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굳은 나의 표정과 여유로운 웃음을 짓고 나를 바라보는 김종대. 우리 사이에는 남들이 봤을때는 알 수 없는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결국 내가 먼저 술잔을 들고 술을 들이키는걸로 우리의 기싸움은 끝이 났다. 그런데 술을 내가 한번도 이정도로 퍼먹어본적이 없어서 그런지, 나는 그 술을 끝으로 까무룩, 정신을 잃고 말았다.
***
[김종대 시점]
"어, 여주씨 아예 못 일어나시는데?"
"제가 여주씨 데려다줄게요!"
우리 부서의 분위기메이커인 백현씨가 쓰러진 김여주를 보고 자기가 데려다주겠다며 나섰다. 오늘도 김여주랑 하루종일 노닥거리던데, 뭐가 그렇게 즐겁나 싶다. 둘이 만약 뭔가 있다면...당연히 백현씨가 아깝지. 고개를 푹 숙이고 벽에 기대 쓰러져있다싶이 한 김여주를 바라보았다. 백현씨가 김여주를 들어올리자 김여주가 백현씨에게 기대왔다. 그걸 본 순간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정신차려보니 이미 다른 직원들에게 내가 김여주를 데려다주겠다고 한 후였다.
"제가 여주씨 데려다주겠습니다."
"에? 팀장님, 괜찮아요! 팀장님 2차에서 노래방 가셔야죠!! 노래방 좋아하시면서!"
"오늘은 조금 피곤해서요, 여주씨 데려다주고 바로 집으로 가겠습니다, 계산은 제가 하고 갈게요"
내가 정신을 차린건 정신 못차리는 김여주를 데리고 식당 밖으로 나온 후였다. 식당밖으로 나온 나는 바로 내가 한 말을 후회했다. 아니 내가 김여주가 뭐가 예쁘다고 집에까지...! 순간 확 열받는 느낌에 김여주를 땅바닥에 내려놨다. 그러자 히잉...추워...하며 내 다리에 엉겨붙는 김여주였다. 아, 짜증나
일단 그 골목은 나오긴 했는데, 생각해보니 나는 김여주네 집이 어디인지조차 몰랐다. 나는 한숨만 푹 쉬다 김여주를 근처 벤치에 앉히고는 나도 옆에 앉았다. 어떡하지...한참동안 한숨만 푹푹 내쉬다가 김여주를 흔들었다.
"...야, 야...일어나"
"..."
"너가 집이 어딘지를 알아야 내가 데려다줄거 아니야"
"..."
"...진짜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에 안든다"
결국엔 포기하고 그냥 나도 벤치에 기대앉았다. 그러다 김여주가 슬슬 내 어깨에 기대서 자는데, 처음에는 그냥 슬쩍 밀기만 했는데 계속 그러는게 열받아서 손으로 확 세게 밀쳤더니 옆으로 갑자기 넘어지길래 깜짝 놀라 다시 붙잡았다.
"...그래, 니 맘대로 해라, 니 맘대로 해"
"..."
"...넌 항상 네 맘대로였잖아"
김여주는 항상 지멋대로였다. 헤어지는 순간까지 그랬다. 나는 그 순간을 똑똑히 기억한다. 그 날의 사소한것 하나하나까지, 나는 잊을 수가 없었다. 김여주에게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우습게도 김여주는 나의 첫사랑이었다. 아니, 과거형이 아니라 첫사랑이다. 보통 남자의 첫사랑은 무덤까지 간다 한다. 나는 그 말을 믿지 않는다. 내 첫사랑인 김여주는, 아예 나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버렸다. 어쩌면, 긍정적인 방향으로. 하지만 그 시절 어렸던 나는 김여주때문에 하루하루 숨을 쉬는것조차 어려웠다.
사실, 너가 이별을 말하는 순간까지도 너는 참 예뻤다. 아니, 실제로는 예뻤는지는 기억이 퇴색되어 잘 모르겠지만 그 시절의 나에게는 너무 예뻤다. 그래서 더 슬펐다. 그런 예쁜얼굴로 잔인한 말을 내뱉는 너는, 정말 미웠다.
너는 내가 질린다고 했다, 수준이 맞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 어쩌면 그럴수도. 생각해보면 그 시절의 나는 김여주보다 딱히 잘난게 없었다. 그런 완벽한 여자였던 김여주의 주위에는 항상 남자가 끊이지를 않았다. 나는 김여주때문에 친하던 여자인 친구들까지도 거리를 두려 노력했다. 그런데 김여주는 남녀사이에도 당연히 친구가 될 수 있다는 입장의 절대적인 지지자였다. 내가 가끔 질투라도 하려하면 ...친구인데 왜 그래? 하는 눈빛을 내게 보여줬다. 처음 헤어지자는 통보를 받았을 때는 내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나의 저런 사소한 집착이 어쩌면 여주를 지치게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돌이켜생각해보면 그 때는 이성적인 판단이 흐려져서 그런것이었다.
속절없이 시간은 흘렀다. 김여주 없이는 아무것도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시간은 빨리갔다. 그리고 나는 다시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김여주가 너무나도 원망스러워졌다. 나는 내 모든것 갖다받칠정도로 좋아했다, 아니 사랑했다. 그런데 김여주는 나를 진심으로 좋아한적이 단 한순간도 없었다고, 단호하게 말하고는 나에게 멀어졌다. 그리고 너는 그 말을 끝으로, 먼 타국으로 가버렸다.
그 이후로는 공부만 했다. 내 머리에는 항상 김여주가 '수준떨어져서 더 이상은 네 장단에 못 맞춰주겠어'하는 소리가 웅웅 맴돌았다. 이 말만 생각하면 부글부글 끓었다. 뭐? 수준이 안맞아? 다른 사람이 들으면 오글거릴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우정보단 사랑인 사람이다. 그 정도로 만인에게서 인정받던 사랑꾼이던 나인데, 나에게 그런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일방적으로 이별을 고하다니, 나의 기준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사랑에 사람의 수준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건 마음의 이끌림이 끝이다. 그 순간부터 김여주가 미칠듯이 미웠다. 내 고등학교 시절은 돌이켜보면 김여주 밖에 없었다. 1,2학년때는 김여주랑 연애하느라 정신없었고, 3학년때는 나를 무참히 차버린 김여주가 괘씸해서 공부만 했다.
남자의 첫사랑은 무덤까지 간다는 말은 절대 믿지 않았지만, 첫사랑이라는게 여운이 심하긴 했나보다.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대학에 가서 대학 생활을 하는 동안, 여자는 항상 끊이지 않았다. 내가 노력을 하지 않아도 주위에 넘치는게 여자였다. 수많은 여자를 만났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는 김여주가 계속해서 생각났다. 좋아하는건 아니었다. 아니 그냥 이상했다. 나의 김여주를 향한 감정은, 그래, 딱 이 단어로 밖에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이상하다. 수많은 스팩좋고 완벽한 여자를 만나면서도 김여주때문에 매번 관계가 끊기는게 너무 화가났다. 우선 김여주한테 화가 났고, 과거에 집착하는 찌질한 나에게 화가났다. 그렇게 처절하게 나를 버리고 해외로 간 애가 뭐가 신경쓰여서, 내가 할 일은 김여주를 미워하며 더 이를 갈아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것 밖에 없는데,
그렇게 나는 스물여덟이란 매우 어린 나이에 팀장이라는 자리까지 올라왔다. 내 자신이 대견했다. 고등학교 시절 무참했던 첫사랑때문에 나는 결국 이 자리까지 올라왔다. 사실 10년이란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가끔 김여주가 생각났다. 김여주가 생각날수록, 나는 일에 더 매진했다.
"팀장님, 이번 신입사원 명단입니다."
"우리 부서에도 이번에 신입사원 오나요?"
"아, 김대리님 빈자리 대신 신입사원 한명이 들어오게 됐습니다."
"아..."
"인사팀이 팀장님이랑 같이 일하게 될 사람이니 팀장님이 직접 보고 최종결제 받으라 하셨습니다."
"..."
"직접 한번 보세요"
직접 표지를 넘겨 이력서를 보았다. 그런데, 나는 순간 내 눈을 의심했다. 이력서에 써있는 그 이름은 김여주가 맞았다. 혹시나 해서 생년월일을 확인해봤지만, 내가 아직 미련스럽게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내가 아는 김여주의 생일이 맞았다.
"하...?"
"네?"
"아니에요, 결제하겠습니다."
그리고 나는 충동적으로 결제한 서류를 넘겼다. 유치한 복수심이 마음에서 스멀스멀 올라왔다.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모르겠지만, 김여주도 내가 얼마나 아팠는지 느껴봤으면 좋겠다. 그 시절의 내가 얼마나 힘들었고, 너 하나 때문에 내 인생이 얼마나 뒤바뀌었는지, 너의 한마디가 나에게 얼마나 큰 영향력이 있었는지,
오랜만에 부모님이 사는 집에 내려간 나는 부모님과 요즘 어떤 일이 있었는지 등의 얘기를 하고 내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리고 내 책장을 조심스레 살폈다. 빛 바랜 앨범이 있었다. 고등학교시절 나중에 추억했을때 잊혀질것 같아서 하나 둘씩 모으던 사진들이었다. 물론 김여주가 나보고 헤어지자고 한 순간 이 앨범에 사진을 모으는 일도 관뒀지만,
그 이후로 한번도 펴 본적 없던 앨범이었다. 무언가 조심스러웠다. 보면 안될것을 보는 기분이었다. 앨범의 마지막 사진은, 체육대회 날 김여주와 내가 각자 반 반티를 입고 환하게 웃으며 포즈를 취하고 있는 사진이었다. 김여주의 얼굴을 보는 순간, 마음에 뭔가 묵직한 것이 쌓이는 기분이었다. 힘없이 앨범을 다시 책장에 꽂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의 인연은, 왜 이리도 질길까. 마지막으로 고민하던 나는 그 앨범을 들고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한참동안 과거를 회상하다 내 어깨에 무언가 닿는 기분에 다시 정신을 차렸더니 여전히 내 어깨에 기대서는 자고있는 김여주였다. 조용히 얼굴을 관찰했다. 그 시절 참 예쁘다고 생각했던 너의 속눈썹도, 눈도, 코도, 입술도 전부 다 그대로다. 그래서 더 짜증난다. 너는 계속해서 나를 과거에 연연하게 만든다. 그런 너가 정말 미웠다. 아니 지금도 밉다. 언제까지 이러고 앉아있을 수는 없었다. 김여주의 볼을 툭툭 치며 깨우려고 해봤다.
"야, 야 김여주"
"..."
"확 버리고 가기 전에 대답해라"
"..."
"아, 존나 짜증나네"
어쩔 수 없이 김여주를 업고는 나의 집으로 향했다. 김여주는 자는지 한참 말이 없었다. 그러다 갑자기 김여주가 쌕쌕거리는 숨소리를 내더니 살짝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김종대"
"왜"
"나 싫지"
"응, 존나게 싫어"
"근데 너 왜 이렇게 잘생겼어?"
"..."
"나 막 그래서 너 카톡 프사 캡쳐했다-, 헤헤, 웃기지, 보여줄까?"
그러고는 나에게 자신의 갤러리를 열어서 보여주는 김여주였다. 뭐 어쩌라는거지, 김여주의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나도 같이 마음이 어지러워졌다.
"종대야, 있잖아...나 너만 보면 막..."
심장이 쿵쿵 뛰었다.
"막...이상해...좋은건지 싫은건지 모르겠는데, 그냥, 그냥 이상해"
"...나도"
너도 그랬구나, 어쩌면 지금 우리 둘이 서로에게 느끼는 감정은 비슷할지 모르겠다. 아니 솔직히 이것조차 웃기다. 왜 김여주랑 나랑 느끼는 감정이 똑같아? 일방적으로 버림받은건 나란 말이다. 끝까지 피해자인척이지 김여주.
"하여튼 정신 차렸으면 니네 집 주소 말해"
"..."
"야, 설마 또 자냐? 어? 니 필요한 말만 해놓고?"
"..."
"...김여주 진짜 짜증나"
이렇게 항상 제멋대로인 네가, 그 시절에는 뭘 해도 예뻐보였다.
김여주를 업고는 힘겹게 집에 들어와 쇼파에 눕혔다. 양심적으로 침대는 집주인인 내 자리이다. 그리고 씻고 나왔는데, 쇼파 위에서 추운듯 웅크리고 누워있는 김여주의 작은 등이 보였다. ...하여튼 난 너무 마음이 약해서 탈이다. 나는 한숨의 푹 쉬며 김여주를 들어 내 침대로 옮겼다. 침대로 옮기고 나니 김여주의 불편해보이는 옷이 눈에 들어왔다. 미치겠네,
"아, 씨 진짜"
옷 벗기고 내 티라도 입히려고 블라우스 단추에 손을 가져다댔는데, 나도 남자인지라 본능이 앞서더라. 단추를 몇개 풀렀는데 보이는 속살에 미칠 지경이었다. 진짜 나중에는 손을 덜덜 떨면서 단추를 하나하나 풀었는데, 손에는 온통 식은땀이 가득했다. 그 때 김여주가 날 확 끌어당겼다. 어쩌다보니 나는 김여주의 어깨에 고개를 묻고 있는 꼴이 됐다. 내 코로 너의 향기가 온전히 들어왔다. 더 이상은 참기 힘들것 같아 힘겹게 김여주를 밀어냈다. 정신차려, 김종대. 지금 상대는 김여주라고, 너가 막 욕구를 느끼고, 그럴 상대가 아니라니까? 손으로 마른 세수를 하고는 숨을 들이켰다. 그래, 블라우스 벗기고, 청바지 벗기고, 내 티만 입혀주면 되잖아, 그게 뭐가 어렵다고
나는 떨리는 손으로 눈을 꼭 감고 다시 김여주에게 손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나는 그 날, 밤잠을 설칠 수 밖에 없었다.
+)사담
연재가 늦어질것 같습니다 ㅠㅠ 요즘 많이 바빠서 ㅠㅠㅠ 그래도 오늘은 조금...길죠...?? (아니면 짜진다)
부가설명을 드리자면 지금 종대는 여주를 막 좋아하는건 아니에요...여주도 마찬가지고, 둘다 서로에 대한 감정이 이상하다고 했잖아요, 말 그대로 서로에 대한 지금 복잡미묘한 감정에 막 얽혀있는거죠 ㅠㅠ
그리고 종대는 어두운 캐릭터가 아니에요! 지금은 김종대의 깐족거림이 드러나지 않았을 뿐...조금만 있으면 여주한테 엄청 깐족거려서 여주 빡치게 만들걸요 ㅋㅋㅋㅋ 단지 여주에게만 한정되어있는 저런 캐릭터랄까...다른 사람에게는 다정한 종대입니다 ㅋㅋㅋ 다음 화부터는 그런 종대를 열심히 표현해보도록 할게요...♥
항상 글 읽어주시는 독자님들께 감사합니다!
실음과 썰은 김팀장이 어느정도 스토리라인이 잡혀갈때까지는 연재 잠깐 쉽니다.
암호닉
-암호닉은 항상 받습니다!!
-암호닉은 신청 순입니다
-존칭생략
첸팀장/별다방커피/달로와요/건망고/네이처죤대/유성매직/호이호잇/말랑/깐초/공주/유아/오센
0112/3관왕센/양융/미니롱/네이큥/비비빅/0408/잇힝/몽이/바나나/boice 1004/매직핸드/찬찬찬
9484/벗꽃/가을/망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