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대는 인기가 너무 많다. 많아도 너무 많다. 확실히 다른 여사원들이 하는 얘기를 들어보면 그렇다. 나는 그래도 백현씨랑 많이 다니는 바람에 여사원들이 하는 얘기는 많이 들을 수 없었지만 가끔 휴게실에서나 다른 여사원들이 하는 얘기를 들어보면 그들의 대화 주제 중 8할은 김종대 얘기였다.
"김종대 팀장님 너무 멋있지 않아요?"
"진짜 멋있다니까요, 아까 보고서 제출하니까 잘했다고 눈웃음 지어주시는데, 와-"
"아, 아까 점심 먹을 때 먼저 가셔서 계산하신거 봤어요? 진짜 멋있어요..."
나는 그 얘기를 들으며 속으로 그들을 비웃었다. 김종대의 실체를 알 때 그들의 반응이 너무나 궁금했다. 그들의 김종대에 대한 관심은 지대했다. 김종대가 어디를 나가기만 하면 팀장님 어디가세요? 하고, 김종대가 매번 나를 귀찮게 만드는 커피도 가끔 다른 여사원들이 대신 타주고는 했다. 하지만 그런 인기와 다르게 항상 김종대는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 나만 느낀 것일 수도 있지만, 그런 여자들과 김종대 사이에는 묘한 벽이 있었다.
그런데, 그랬던 김종대가 요즘 조금 달라졌다.
그날도 나는 김종대에게 서류를 제출하고는 내 자리로 돌아왔다. 김종대도 평소와 같이 무심한 표정으로 나를 슥 보고는 삐딱한 시선으로 내 서류를 대충 훑는것이 보였다. 김종대가 나한테만 보여주는 그 뭐라해야하지...하여튼 막 엄청 기분나쁜 눈빛이 있는데 그게 너무 짜증난단 말이다. 물론 앞에서 대놓고 말은 못하지만 말이다. 속으로는 순간 짜증이 확 나는게 느껴졌지만 그저 내 자리에서 김종대를 힐끔거리며 속으로 김종대 욕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김종대 앞으로 다른 여사원이 다가가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김종대의 표정은
방금 내가 앞에 다가갔을 때와는 비교도 안되게, 환하게 웃고 있었다.
***
뭔가 느낌이 쎄했다. 김종대가 다른 여사원들한테 친절한건 평소에도 알고 있던 사실이었는데도 그 여사원과 김종대만 보면 뭔가 느낌이 좋지 않았다. 이름이 민하, 라고 했던가...얼굴도 예쁘고, 몸매도-, 아, 내가 왜 이러고 있지...
나도 모르게 민하씨를 보며 위 아래로 훑는 나를 보며 내 자신이 정말 미쳤다는 생각을 했다. 여러가지고 완벽한 민하씨를 보면 더 짜증이 확 끓어올랐다.
한참 김종대와 민하씨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백현씨가 옆에서 나를 불렀다. 왜요? 하고 고개를 돌리자 백현씨가 메일 한 통만 보내달라는 부탁을 해왔다. 백현씨에게 파일을 받아 메일을 보내려는 순간 이번에는 내 앞자리의 대리님이 팩스를 보내라고 했다. 그 때 컴퓨터에서 반짝거리는 메신저를 보니 김종대가 보고서 수정하라고 메신저를 보내놨더라. 갑자기 확 밀려든 일에 허둥대고 있는데, 내 옆자리를 지나가는 민하씨가 보였다. 마침 팩스를 보내려는 듯 해서 같이 부탁하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민하씨!"
"네?"
"혹시 팩스 보내면서 제 것도 하나만 같이 보내주시면 안될까요...?"
"...아, 네"
내가 팩스를 부탁하자 민하씨는 한참 무표정으로 가만히 있다 하기 싫은 티를 팍팍 내며 내가 내미는 서류를 받아들었다. 아니, 팩스 하나 대신 보내주는게 어려워? 그녀의 불쾌한 표정에 나도 같이 표정이 굳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 때 김종대가 우리 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여주씨, 본인이 할 일은 직접 해요"
민하씨가 들고있던 내가 내민 서류를 김종대가 다시 내 쪽으로 주었다. 그에 내 표정은 벙 쪘고, 민하씨의 굳어있던 표정은 확 펴졌다. 그리고 김종대는 민하씨를 보고 웃으며 이야기했다.
"민하씨, 팩스는 제가 보낼 테니까 다른 일 먼저 하세요"
그리고 민하씨는 활짝 웃으며 감사합니다 팀장님! 하고는 본인의 자리로 휙 가버렸다. 그 사이에 나와 눈이 잠깐 마주쳤는데
...?
뭐지...?
저 표정이 뭔지는 모르겠는데, 확실히 기분이 나쁘다.
기분이 가라앉는게 느껴졌다. 왠지모르게 속상한 기분으로 멍하니 서있는데 김종대가 그런 나를 보더니 입모양으로 말했다. 일 안해? 그 말에 아무 말도 없이 다시 내 자리에 가서 앉았다. 내가 속상했던건, 나보다는 민하씨의 편을 들어줬던 김종대 때문인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민하씨에게 보여줬던 그 웃음이 그 시절 나에게 김종대가 보여줬던 웃음과 너무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
"여주씨, 여주씨는 미국 유학 갔던거에요?"
"네? ...아, 네..."
백현씨가 점심을 먹고는 커피를 쪽쪽 빨며 궁금하다는 듯 물어보았다. 순간 흠칫 했지만 이내 침착하게 그렇다고 했다. 그 때 백현씨가 놀란듯 어? 하는 소리를 냈다.
"왜요?"
"어, 저기 팀장님-, 아, 아니다. 여주씨 혹시 더 뭐 먹고 싶은거 없어요?"
백현씨가 내 눈치를 보더니 아니라면서 급하게 말을 돌렸다. 그런 백현씨가 의심스러워 눈을 가늘게 뜨며 왜 그래요! 하자 백현씨가 심하게 당황해하며 손을 내저었다. 아무것도 아니라니까요! 하는 말에 더 의심이 갔다.
"아, 진짜 뭔데요!! 저 진짜 이런거 궁금해서 못 참는단 말이에요..."
"아니, 저 그게, 아 진짜 나는 멍청이다 진짜..."
갑자기 자신을 자책하는 백현씨를 빤히 바라보자 백현씨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그냥...팀장님 저기 계신다구요"
"아...근데 그게 왜요?"
"...팀장님 민하씨랑 같이 계시는데..."
"..."
이런거 이상한거 알지만, 김종대와 민하씨가 같이 있는 모습을 보는데 내 표정이 굳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백현씨는 그런 내 표정을 보더니 안절부절 못하는 듯 했다.
"아니, 여주씨 그게-, 팀장님도 뭔가 일이 있어서 그런거 아닐까요?"
"...괜찮아요, 뭐, 저도 지금 이렇게 백현씨랑 있잖아요"
"...아, 그런가...? 이거랑은 조금 다른것 같은데...?"
백현씨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내가 급하게 말의 주제를 돌리자 백현씨가 금방 눈치를 챈듯 내 말에 리액션을 해주었다. 평소보다 더 과장된 듯한 리액션이, 그가 나의 기분을 풀어주려 얼마나 노력하는지가 보여 고마웠다.
***
"어머, 민하씨, 그 코트 팀장님 코트 아니야?"
"아-, 아까 점심먹을 때 춥다고 저 빌려주셨어요"
"어휴~ 그러다 둘이 뭐 생기는거 아니야?"
"에이, 아니에요-"
"내가 볼 땐 벌써 있는 것 같은데?"
민하씨는 말로는 계속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하지 말라고 했지만 표정은 내심 좋은 듯 밝았다. 그렇게 하하호호 웃는 여직원들 사이로 휴게실을 빠져나왔다. 기분이 점점 우울해졌다. 한편으로는 내가 왜 이런 감정을 느끼는 건지 의아하기도 한데, 확실한건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그렇게 우울하게 자리로 돌아가고 있는데 마침 휴게실에서 나오던 민하씨와 세게 부딪히고 말았다.
그런데 넘어지면서 발목을 삐끗했는지 발목이 저려오기 시작했다. 못 일어나고 끙끙대고만 있는데 옆에서 민하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옆을 보니 민하씨도 넘어졌는데 블라우스에 내가 들고 있던 커피가 쏟아졌는지 크게 얼룩이 져있었다. 당황해서 손을 뻗으려는데 김종대가 민하씨를 일으켜 주는 것이 보였다. 당황해서 그 쪽만 보고 있는데 김종대가 나는 신경도 쓰지 않고 민하씨에게 괜찮냐고 물어보고 있었다.
"민하씨, 옷에 커피 묻었잖아요"
"아...그렇네요..."
"...여주씨한테 세탁 맡기는게 어때요?"
김종대가 나를 힐끗 보는데, 내가 세탁소냐?;; 그치않아도 넘어져서 발목 아픈것도 서러워 죽겠는데 나는 신경도 쓰지 않는 김종대에 더 서러워졌다. 그 때 옆에서 백현씨가 짐짓 화난 표정으로 내 손을 잡고는 일으켰다. 내가 일어나서도 자연스럽게 김종대와 민하씨 쪽으로 가는 시선에 우물쭈물 하고 있자 백현씨가 한숨을 쉬더니 빨리 가요 하고는 나를 끌어당겼다. 처음으로 보는 백현씨의 진지한 모습에 그저 살짝 절뚝거리며 백현씨를 따라갔다. 백현씨가 그런 나를 보더니 인상을 찡그렸다.
"여주씨 발목 다쳤어요?"
"아니 그냥, 넘어지면서 살짝 삐끗한것 같은데..."
"병원 가요, 그럼"
"병원까지 갈 정도는 절대 아니고...!"
"그래도 가야지 빨리 나아요"
"정말 괜찮아요, 안가도 돼요"
"...알겠어요, 그럼"
백현씨가 고개를 돌려 본인의 모니터를 계속 보다가 짜증나는지 ...아 진짜 짜증나네 하는 소리가 들렸다.
"네?"
"팀장님 왜 그래요?"
"...뭐가요..."
"여주씨한테 왜 그러냐구요, 요즘에 민하씨하고 왜 저렇게-, 아, 진짜"
"팀장님하고 저하고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내 말에 백현씨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는 차마 그 눈을 마주볼 수가 없어 시선을 피했다. 아마, 백현씨는 알았을것이다. 내가 아무리 이래도 나와 김종대가 단순한 상사와 직원의 사이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백현씨는 이내 진지한 표정을 지우고는 웃어보였다.
"그냥 액땜했다 치죠 뭐! 오늘은 제가 바쁘고, 내일은 저희 같이 술이나 한잔해요!"
밝에 웃으며 내 등을 두드려 주는 백현씨에 나도 웃어보였다. 그나마 내 옆에 백현씨같은 분이라도 있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김종대와 민하씨 때문에 오늘 하루종일 집중을 하지 못하는 바람에 꼼짝없이 야근을 하게 됐다. 빨리 하고 퇴근해야 하는데 머리에 잡념이 너무 많아서 도저히 집중이 되지를 않았다. 그 때 엘레베이터 문이 열리더니 김종대와 민하씨가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둘이 같이 저녁을 먹은 듯 했다. 나는 그 쪽을 보다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다시 내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내 온 신경은 김종대와 민하씨 쪽으로 집중이 되어있었다.
"민하씨, 데려다드리고 싶은데 제가 아직 할 일이 있어서..."
"괜찮아요!"
"다음에는 꼭 데려다 드릴게요"
"에이~ 아니에요 팀장님!"
"그럼 내일 뵈요"
"안녕히계세요!"
민하씨는 이내 사무실에서 나갔고 사무실에는 나와 김종대 밖에 없었다. 김종대가 다가와서는 옆 의자에 풀썩 앉는것이 보였다.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지금 김종대가 별로 달갑지 않았다.
"나 오늘 민하씨랑 점심 저녁 다 같이 먹었어"
"...그게 뭐"
"민하씨 예쁘지"
"...응"
"야, 민하씨랑 있으니까 좋더라"
"..."
"너랑 다르게 여성스럽고, 착하고"
"..."
나도 모르게 점점 고개를 숙이게 되었다.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았는데, 사실 저번에 아플 때 김종대 앞에서 운 것도 나중에 상당히 후회했던 터라 이번에는 김종대 앞에서 울고 싶지 않았다. 김종대가 지금 일부러 나 찔리라고 나한테 이런 말 하는것 같은데, 너무 서운했다. 손이 작게 떨리는 것만 같았다. 눈물을 참기 위해 입술만 꾹 물었다.
김종대의 말을 아무 말도 없이 계속 듣다 도저히 더는 들을 자신이 없어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겼다. 김종대가 갑자기 어디가? 하고 물었지만 작게 피곤해서 집, 이렇게 대답하고는 급하게 사무실을 나왔다.
집에 가기 위해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에 타서 창밖을 보는데 많은 생각이 들었다. 김종대랑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면서 한번도 김종대에게 다른 여자친구가 생긴다는 상상을 해본적이 없었다. 그런데 만약, 만약 김종대한테 여자친구가 생긴다면? 그리고 우리 이제 나이도 어느 정도 있는데, 몇년이 지난 후에 내가 김종대가 다른 여자와 하는 결혼식에 가게 된다면,
나는, 자신이 없었다. 축하해 줄 자신이 없었다.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내 자신이 정말 한심하고 나쁜년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건 아마도 미련일 것이다. 지금 김종대와 나의 관계를 만든건 나 자신이었다. 내가 감히 김종대에게 이런 감정을 품을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김종대는 나 때문에 많은 상처를 받았고, 그에 대한 모든 책임은 나한테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김종대가 나를 완전히 잊고 다른 여자와 행복하길 바라주는것 뿐이었다. 그런데, 그게 안될 것 같았다. 김종대가 내가 아닌 다른 여자와 다정하게 얘기하는 것만 봐도 마음에 계속해서 걸렸다.
집에 들어갔는데, 가장 먼저 보인건 김종대가 얼마 전 내게 사다 준 약이었다. 나는 바보같이, 약을 치우지도 못하고 그냥 식탁 위 잘보이는 곳에 계속해서 놓고 있었다. 이렇게 계속 미련때문에 김종대한테 매달리는 내가, 너무나도 한심했다. 김종대가 사다준 약을 싱크대에다 던지듯이 하고 옷을 갈아입는데 괜히 막 눈물이 났다.
"김종대 나쁜새끼 진짜..."
그러다 바보같이 흐르는 눈물을 벅벅 닦았다. 과거에 연연하는 나도 싫지만, 내 앞에서 민하씨와 온갖 애정행각은 다하는 김종대가 너무 원망스러웠다. 그렇게 나 챙겨주는 척은 다 해놓고서는 이제와서 뭐 하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헤어진 연인 앞에서 그렇게 다른 여자랑 티내면서 연애하는것도, 솔직히 예의 있는 일은 아니지 않나.
그날 밤은 유독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
"헐, 아씨, 아파..."
어제 삐끗한 발목이 아침이 되니 더 심하게 부어있었다. 일단 출근은 해야하니 출근할 준비를 하고 있는데 어제 김종대가 한 말이 생각났다.
"너랑 다르게 여성스럽고, 착하고..."
"하..."
하지만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은, 어제 운 탓에 눈은 팅팅 붓고 예쁜 곳 하나 없이 못났기만 했다. 김종대의 어제 말 때문에 자존감이 뚝뚝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아픈 발목을 애써 무시하고는 집 밖으로 나왔다. 아픈것을 무시하고 계속 가려니 걷는 속도가 느려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핸드폰을 켜 시간을 확인했는데 회사에 아슬아슬하게 도착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아, 뛰고싶어도 뛸 수도 없고, 미치겠네...
이미 제 시간에 도착하기는 틀린듯한 시간을 보고 체념했다. 겨우겨우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회사 앞에 도착했는데 마침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백현씨가 보였다.
"어? 백현씨?"
"여주씨? 여주씨도 오늘 지각이에요?"
"하하...발목 아파가지고..."
"...거봐요, 제가 어제 병원 가자고 했잖아요."
"어...그럼 오늘 점심시간에 같이 가요!"
"그래요! 저도 발목 몇 번 삐어봐서 아는데, 그거 오래 냅둘수록 안 좋아요."
그렇게 사무실에 들어갔는데 김종대가 나와 백현씨를 힐끗 보더니 이번에는 두분이 같이 지각이네- 하고 말했다. 백현씨가 헤헤 웃으며 에이, 팀장님~ 하고 넉살 좋게 말하자 평소같았으면 그냥 웃으며 받아줬을 김종대가 무표정으로 백현씨를 지나쳤다. 그에 백현씨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원래 팀장님이 저러신 분이 아닌데, 요즘 왜 저러시나 모르겠네..."
"아..."
"여주씨, 팀장님이랑 싸웠어요?"
"...네?"
"그냥, 어제도 그렇고...물론 민하씨는 팀장님이 잘못하고 계시는거고...싸우셨나 해서..."
"백현씨, 진짜 아무 사이 아니라니까요..."
"알겠어요, 불편하면 굳이 말 안해도돼요."
백현씨가 웃으며 말했다. 백현씨의 배려에 나도 같이 웃어보이고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 나를 툭툭 쳤다. 고개를 드니 민하씨가 내 뒤에 서있었다. 순간 당황해서 눈동자가 갈 길을 잃고 말았다. 아, 나한테 무슨 말 하려하지? 막 싸움거는거 아니야?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민하씨가 내게 말을 꺼냈다.
"여주씨, 메일 하나만 보내 줄 수 있어요?"
"네?"
"별건 아니고 해외지사에 보내야 할 서류가 있는데 제가 지금 다른 일 급하게 해야할게 있어서요."
"아, 네! 당연히 할 수 있죠!"
그럼 부탁할게요, 민하씨는 내게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고 나는 민하씨가 부탁한 메일을 보냈다. 그리고 나는 그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일이 이렇게 커질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
"여주씨, 해외지사에 도대체 무슨 메일을 보낸거야?"
"네?"
"팀장님 화 많이나셨어, 빨리 가 봐."
백현씨와 점심먹고 정형외과를 갔다 왔는데 이대리님이 나를 급하게 불렀다. 아까 보낸 메일에 문제가 있다는데 응? 나 메일 보낸 적 없는데...
"저 메일 보낸적 없는데요...?"
"아까 오전에 보냈다는데?"
"어...아? 저, 그거 민하씨가 부탁해서 메일만 보내드린건데..."
"...그래? 하여튼 빨리 팀장님한테 가 봐, 사무실에 계실거야."
급하게 사무실로 들어가자 김종대가 머리가 아픈듯 머리를 감싸쥐고는 자리에 앉아있었다. 사무실에는 아직 몇몇 직원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김종대의 눈치를 보느라 사무실 분위기는 싸하기만 했다. 내가 조심스럽게 김종대 앞으로 가자 김종대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여주씨, 얘기 좀 해요 하고는 내 손목을 잡고 휴게실로 갔다.
휴게실에 가서도 김종대는 어이가 없는지 허- 하고 웃기만 했다. 나는 그저 고개를 숙이고는 내 손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자 김종대가 먼저 말을 꺼냈다.
"야, 김여주, 너 미쳤냐?"
"...뭐가"
"그 서류를 메일로 보내면 어떡해, 아직 고쳐야 할게 태산인데."
"..."
"지금 너 때문에 일이 얼마나 꼬였는줄 알아? 방금 나 이사님한테까지 갔다왔어."
"..."
"너는 그냥 아무 생각없이 한 일이겠지, 그런데 너 하나때문에 우리 부서에 얼마나 큰 파장이 왔는지 아냐고."
"..."
"야, 너는 정말, 오늘 아침만 해도 지각하고. 왜 이렇게 지각이 잦아? 일을 장난으로 하냐?"
"..."
"너 그딴식으로 할거면 그냥 출근하지마."
"...그거 메일 내가 보내려고 보낸게 아니라 민하씨가-"
"끝까지 남탓이냐?"
"아니, 정말 그게 아니라 민하씨가...!"
나도 억울함에 김종대에게 민하씨가 보내라고 한 것을 대신 보냈을 뿐이라고 변명하는 순간 휴게실 문이 열리며 민하씨가 들어왔다. 나는 당황한 눈으로 민하씨를 바라봤고 민하씨는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눈을 하고는 김종대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죄송해요 팀장님...제가 여주씨가 그 메일 보낸다고 했을 때 말을 해줬어야 했는데..."
아-, 저건 또 무슨 개소리야
"죄송해요...다 저 때문이에요 팀장님, 제가 여주씨한테 말만 해줬어도..."
"괜찮아요, 민하씨. 그거 민하씨 탓 아니에요."
눈물을 글썽거리는 민하씨를 김종대가 토닥거리며 위로해줬다. 나는 너무 당황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김종대는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민하씨를 계속해서 위로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곧 김종대는 훌쩍거리는 민하씨와 함께 휴게실을 나갔다. 그리고 김종대는 뒤를 돌아보고 나를 향해 말했다.
"최악이다, 진짜."
***
"아니이-, 백현씨!!! 나는 진짜 억울하다니깐!!! 그거어!! 민하씨가 보내라고 한건데! 막! 민하씨는 김종대한테 내가 보낸거라고 거짓말하구!!"
"그래!! 그건 민하씨가 나빴어!! 아니야, 민하씨가 아니라 박민하야 박민하!! 박민하 나쁜년!!!!"
"으아아 백현씨라도 내 편이라서 좋다아...왜냐면 우리 사무실에는 내 편이 아무도 없거든..."
"왜지이-, 우리 여주씨 성격이 이렇~게 좋은데?"
이미 정신줄을 놓은지는 오래였다. 아까 그 일이 있고 김종대와 민하씨는 아예 사무실에서 보지를 못했다. 도대체 둘이서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는건지 모르겠다. 물론 그 둘이 있는 장면을 상상하기도 싫지만 말이다. 백현씨는 우울한 나를 알고는 바로 퇴근하자마자 근처 술집으로 가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아까 있었던 일을 말하자 모든 장면을 옆에서 본 백현씨는 본인이 더 화를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팀장님 요즘 진짜 여주씨한테 너무한거 아니에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아니이, 그건 있잖아, 백현씨! 그건 내가 지은 죄가 많아서 그래...내가 지은 죄가 많아서...그래서..."
"..."
"내가 막-, 김종대한테 막-, 옛날에..."
"..."
"근데 있잖아 백현씨, 나 진짜 이러면 안되거든? 이러면 안되는데에...근데...민하씨하고 김종대가 같이 있는것만 보면 막 화나, 짜증나-"
"..."
"근데 나 진짜 이러면 안된단말야...나한테는 이럴 자격도 없는데..."
"...여주씨 많이 취한것 같은데..."
"진짜...김종대...짜증나...예의없는 놈..."
"...여주씨, 이제 집에 가요-"
백현씨는 아무 말도 없이 나를 집에 데려다 줬다. 침대에 누워서는 한참을 생각했다. 김종대에게 이런 감정을 느끼는건 분명히 이상한 일이다. 지금 내 감정이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겠는데, 확실한건 민하씨와 김종대가 붙어있는것만 보면 속에서 막 화가 끓는단 말이다. 그래, 김종대에게 이런 감정을 느껴서는 안된다. 그리고 지금 김종대가 하고 있는 행동도 상당히 나에게 예의 없는 행동이다. 아무리 내가 미워도 전 여자친구 앞에서 할 행동은 아니지 않는가. 이렇게 된 이상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그냥 내가 피해야 김종대도, 나도 원점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내일부터는 김종대와 마주치는 일도, 말을 섞는 일도 없도록 할 것이다. 그게 나와 김종대 모두를 위한 일이고, 우리에게 어울리는 자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