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졌어"
니가 이러면.... 나 이제 더 이상해져. 자꾸만 자꾸만 다른 마음 먹어 성용아. 나한테 기대지 마. 나한테 니가 기대면 난 너 놔주지 못할지도 몰라.
음악도 꺼지고 깜깜해서 불빛 하나 없는 차 안에서 공기 마저 무거워져 짓눌리는 느낌이 든다. 내가 작아지는 느낌. 한없이 찌그러지는 느낌.
두 손을 맞잡아 무릎 위에 내려놓고 마른 입술을 혀를 살짝 내어 축이면 조금이라도 이 무거운 공기가 가벼워 질까..
이 무거운 공기가 가득찬 좁은 공간에서도 오히려 넌 아무렇지 않은것 같은데 나는 자꾸만 작아져.
어느덧 한강 둔치에 도착한 우리. 강변가에 차를 세워두고 내 마음을 찌르는, 아프게 하는 성용이의 말을 듣는 중이다.
내 가슴에 빵꾸 나면 다 니 책임이야 기성용. 니가 내 가슴을 너무.. 너무 아프게 찌른다. 그것도 아주 많이.
"너도 봤지? 예뻐. 많이. 엄청. 몸매는 또 얼마나 착하다고. 그리고 마음씨도 고와. 배려도 많고 이해심도 깊고... 중요한건 내가 정말 좋아했다는거야"
"............."
"자철이 자식 소개로 나갔는데 첫눈에 반한거 있지. 왜- 그런거 있잖아 운명 같은거. 유치한데... 그랬어. 아, 그리고 은지는 컵으로 뭐 마실 때 항상 새끼손가락 든다?
되게 웃기지? 저번엔 아이스링크장에 갔는데 어떻게 그렇게 못탈수가 있는지.. 커피는 항상 카라멜마키아토만 마셔. 달달한게 좋다나봐. 웃을 때는 항상 이렇게 눈이 막
휘어지게 웃고 말할 때 어눌한 발음이 얼마나 귀여운지.. 머리카락이 자꾸 거슬리며 이렇게 오른쪽으로 쓸어내릴 때 진짜 예쁘다? 근데... 이제 못 봐"
"............."
"말 좀 해봐.. 위로하라고 불렀더니.."
"뭐라디"
"뭐가?"
"은진가 뭔가 걔가 뭐라고 했드냐고"
"난 남자 없이도 잘 살 수 있다, 연애를 한다는건 시간을 뺏기는것 같다, 내가 나빠서 그런거니까 이해 해달라. 뭐 이런 말이지"
전형적으로 남자 찰 때 쓰는 대사네 요거 요거- 저 주제에 성용이 정도면 감지덕지지 튕기기는..
자꾸만 안쓰러워지려는 내 마음을 추스리려 했다. 여자친구랑 헤어졌다니까 자꾸만 이상한 감정이 싹을 틔운다.
"나쁜 여자네... 우리 아직 어리잖아. 세상에 널린게 여자인데 너무 마음 쓰지마"
세상에 널린게 여자지만 날 좀 봐줘. 언제까지 기다릴까. 언제면 니가 눈치채고 날 알아봐줄래..
좋아하는 남자 연애 상담 해주기 정말 힘들다.. 이 남자야 니가 이렇게 눈치가 없으니까 그 좋은 여자 만나고도 못 잡는거야.
"다시 잡아볼까? 잡는게 좋을까?"
마음 같아서는 미쳤냐고 니가 뭐가 모잘라서 그런 여자한테 꿀려야하냐고 해주고 싶다만.. 그러면 안되겠지?
"한번 쯤 잡아주는것도 예의야"
난 이 말을 두고 두고 후회할 날이 올거라고는 꿈에도 상상 못했다.
이 날 성용이의 한탄을 듣고서도 나는 애써 내 안에 꿈틀거리며 싹을 틔우려는 나쁜 마음을 누르려 친구로서 힘내라는 흔한 위로의 한 마디도 해주지 못했다.
성용이는 친구일 뿐이라고, 니가 자꾸 좋아지면 안되는거라고, 난 너에게 위로를 해줘야하는거라고.. 성용이 보다 더 아픈 표정을 지으며.
그 날 이후로 우리는 전 처럼 자주 만나서 저녁도 먹을 수 있었고 잠 안오는 금요일 밤이면 DVD를 빌려다가 밤새도록 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아침에 일어나보면 과자 봉지가 여기저기 널부러져서 지저분한 거실 한가운데에 우리 둘이 기대어 잠들어 있곤 했다.
친구로서든 연인으로서든 함께 아침을 맞이하는 그 느낌이 얼마나 좋았는지.. 가슴이 간지러운 느낌이랄까 아니, 이런걸 설레임이라고 하는건가?
느릿 느릿하게 해가 중천에 뜨면 그 때서야 일어나 늦은 아점을 먹고 성용이는 훈련을 가고 나는 학교에 나갔다.
강의 중간 중간 교수님 눈을 피해서 오늘 저녁을 뭘 먹을지, 어떤 DVD를 볼지에 대해 성용이와 카톡도 하고 그러다 걸려서 교수님의 따가운 눈초리를 받기도 하고.
아팠던 한 달 만큼 설레임으로 가득한 한 달을 보내고 있었다. 적어도 성용이와 함께한 시간 중에 가장 행복한 시간이였다.
그리고는.. 내가 한 말에 책임을 져야할 때가 돌아왔다. '한번 쯤 잡아주는것도 예의야'
당연히 No라는 대답을 할거라 생각하면서도 정말 예의상 물었단다, 다시 생각해보면 안되냐고, 성용이가. 뜻 밖에도 돌아오는 대답은 Yes.
저가 좋아하는 말할 수 없는 비밀 보기로 해놓고는 기껏 빌려왔더니 전화도 안받고 오지도 않고 하염없이 기다리다가 화가 나 우걱우걱 과자만 혼자 씹어먹었다.
자정이 훨씬 넘은 시간에 성용이로 부터 온 문자 한 통. '니 덕분에 잘 된것 같아' 뭐가 잘된건지 문자에 나와있지는 않지만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은지라는 아이와 다시 잘 되었다는... 그런 얘기겠지. 심장이 덜컥 내려앉고 머리가 새하얘져와서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는다.
멍하니 창문 밖을 바라보고 있으면 익숙한 실루엣이 우리 집 앞 거리를 지나가는게 보인다. 어떤 여자와 다정하게.
운명은 날 가지고 노는건지 자꾸만 날 들었다 놨다.. 이제 조금 행복해지려 했는데, 이제 조금 마음이 편해지려 했는데, 이제 조금.. 고백해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는데.
잔인하다. 고백을 해볼까, 어떻게 하지?, 정말 해볼까?. 이제서야 내게도 기회가 왔다 싶었는데, 잔인하다.
다정한 연인이 골목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면 내 눈에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눈물이 흐른다. 왜 울지.. 나 왜 울어.
니 남자친구도 아니잖아. 그냥 친구일 뿐이잖아. 왜 울어 왜. 바보 같이. 사랑이 아니라 우정인데 왜.. 왜..
또 다시 한 달 전으로 돌아갔다. 성용이는 간간히 잘 지내냐며 문자도 하고 집에도 찾아오곤 했지만 그 때 마다 몸이 좋지 않다, 피곤하다며 다음을 기약했다.
학교에 가면 친구들도 다들 성용이가 다시 은지라는 아이와 사귀는것에 대해서만 왈가왈부할 뿐이였다.
괜히 그게 듣기 싫어 밥도 따로 먹고, 놀러가자는 말에 또 다시 피곤하다는 핑계만 늘어놓으며 일찍 집에 들어갔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 근 한 달 간 그랬듯 멍하니 버스 창 밖을 바라보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 버스로 30분 쯤 걸리는 집은 요즘 들어 부쩍 멀어진 느낌이다.
저 멀리에서 성용이와 은지라는 아이가 다정하게 걸어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얘네는 뭐 나 따라다니면서 데이트하나 왜 자꾸 내 눈에 띄는거야.
신호등이 빨간불에서 초록불로 바뀌면서 버스가 출발했고 가까워진 성용이와 나는 눈이 마주쳤다.
요 며칠 사이 성용이의 문자, 전화, 카톡 다 씹었던 나는 불연듯 놀라며 눈을 꼭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뜨면 성용이가 있던 자리는 다른 풍경으로 가득찬다.
받을까 말까 망설이는 내 손 안에서 진동하는 휴대폰을 내려다보지 않아도 수신자가 성용이라는걸 금방 알 수 있다.
눈까지 마주쳤는데 안받기도 그렇고.. 결국 숨을 들이쉬고 큼큼- 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최대한 밝은 목소리를 내보려고.
"여보세요-"
[너 왜 나 보고 눈 감아?]
"해..햇빛 때문에 그럤지-"
[왜 문자랑 전화는 씹고 그래? 저녁이나 같이 먹을까 하면 꼭 전화 안받더라]
"예쁜 여친님이랑 드셔- 비루한 솔로는 혼자 먹을테니까"
밝은 목소리를 내는데에 성공한 건지 성용이는 별 다른 의심 없이 평소 내가 문자나 전화를 씹을 때 처럼 아주 아주 정색하는 목소리로 장난스레 말했다.
봐. 난 니가 아무리 목소리를 바꿔도 기분이 어떤지 다 아는데 너는 모르잖아. 오랜 친군데.. 친구.. 친구.
[무슨 일 있는건 아니지?]
"무슨 일?"
[아니 뭐.. 애들이 요즘 너 기분 안 좋아 보인다고 하던데... 괜찮지?]
"얼씨구 니가 어쩐 일로 내 걱정을 다 해? 걱정말고 니 일이나 잘해. 또 차이지 말고"
[차..차..차이다니!!! 야 됐고! 오늘 밥이나 먹자. 또 피곤하다 어쩌다 핑계 늘어놓을 생각 딱 접어서 주머니에 넣는다 실시!]
"야- 나 진짜 피곤하단 말이야. 그럼 니가 레포트 대신 써주던지"
[좋은 말로 할 때 나오시지?]
어이구. 레포트 대신 써준다는 말은 절대 안하지. 결국 끈질기게 졸라대던 성용이는 내게서 알겠다는 확답을 얻어내고서야 전화를 끊었다.
성용이와 입씨름을 하다보니 도착한 집. 우리 집 진짜 예쁘구나. 작년 여름에 성용이와 화단을 꾸몄던게 생각난다.
마당도 있는 2층 집이 너무 횡하지 않냐는 성용이 말에 이주일에 걸쳐 잔디도 심고 꽃도 심었다. 물 주면서 물 장난 친게 생각나 희미하게 웃어봤다.
얼마만에 지어보는 웃음인지 기억도 가물가물 하네- 앞으로는 하지 못할거라 생각하니 조금 슬프기도 하다.
성용이 집에도 만만치 않게 내 짐이 있겠지만 우리 집엔 특히나 성용이 짐이 많다. 제 운동 기구를 마당에 가져다 놓는가 하면 같이 다이어트 하자며
어느 날 마당에 떡- 하니 자전거를 두 대나 들어놨더랬지. 여기저기 아무데나 벗어 놓고간 양말들도 잘 빨아서 개어 두면 맨날 까먹고 안가져가고..
오늘도 빨랫줄엔 성용이 양말들이 띄엄띄엄 걸려있다. 양말 장사 해도 되겠다- 조금 많다 싶은 빨래들 사이에서 성용이 양말만 거두었다.
탁탁- 소리 나게 털어 먼지를 날리고 종이백을 꺼내와 그간 빨아뒀던 양말들 까지 차곡차곡 종이백에 담았다.
운동 기구도, 자전거도 이제 다 가져가라고 해야지. 우리 집에 니 물건이 하나도 없도록.. 이제 니가 잊혀지기 쉬워지도록.
친구로만 지낼 수 있게 내가 노력할게. 그냥 너는 언제나 처럼 그 자리에 가만히 있어. 내가 멀어질게.
다음 망상 선수는 누구로 할까요....ㅠㅠㅠ 똥손인 저에게 제발.. 아이디어를 주세요..
Thanks to.
기성용하투뿅님, 마뷰님, 깡통님, 쫑님, 버물리님, 짤랑이님
투게더님, 빼뺴로님, 피클로님, 에이삐씨님, 갸루상님, 파절이님
아직 시리즈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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