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완성 오르비스 6 |
6.
전화로 집주소를 알려줬더니, 종인은 용케도 제 집을 찾아왔나보다. 몇 분되지 않아 걸려온 종인의 전화를 받고 밑으로 내려와보았더니, 종인은 이미 집앞으로 경수를 데리러 와있었다. 장난인줄 알았는데 정말로 이렇게 집앞에 대놓고 서있을 줄은 몰랐다. 경수가 입고있는 후드티의 모자를 푹 뒤집어 쓰고 쭈뼛쭈뼛 앞으로 다가섰다. 한눈에 띄는 오토바이의 라이트가 눈이 부실 지경이였다.
오토바이에 기대서있던 종인은 입구로 나온 경수를 발견하고 씨익 웃었다. 종인의 미소를 보며 경수가 침을 꿀꺽 삼켰다. 밖에서 사적으로 종인을 단둘이 만나는게 처음이기도 했고, 또 밖에서 보는 김종인은 학교에서와는 다른 분위기가 풍겨졌다. 별일 없겠지, 뭐. 경수는 애써 긴장한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경수가 종인의 앞에 가까이 다가갔을때 종인은 한걸음 앞으로 다가섰다. 경수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움찔하며 눈을 크게 뜨고 종인을 올려다 보았다. 까만 밤에도 빛나는 눈동자가 종인을 향했다. 종인은 그런 경수의 반응을 보며 물었다.
" 혹시 내가 무서워? " " 어? " " 아님 습관인가. "
두번째는 혼잣말이였다. 종인은 땅바닥을 쳐다보면서 아스팔트 바닥에 운동화 코를 찍찍 문댔다. 들릴까말까한 조그만 목소리였는데도 경수는 종인의 목소리를 들었다. 긴가민가한 종인의 말투에 잠시 당황스러웠다. 설마 나한테 물어보는건가? 역시 대답해야겠지?
" 스.. 습관이야. " " 원래 다른 사람들한테도 이래? " " 그냥 익숙하지 않아서 그래…. 아무튼 그러니까 신경쓰지 마. "
경수가 종인을 쳐다보며 물었지만, 종인은 신경도 쓰지않고 아스팔트 바닥에 발장난을 치는데 집중했다. 경수는 어느샌가 종인의 숙여진 얼굴에 생긴 그림자를 지켜보았다. 깜깜한 밤이었지만 희미하게 켜진 가로등이 빛을 내고 있어 얼굴이 아예 안보일 정도는 아니였다. 틈사이로 보이는 종인의 얼굴은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내 말이 들리긴 하는건가. 내심 대답을 기대하고 있던 경수는 김이 확 새버렸다.
갑자기 종인이 고개를 들어 슬며시 아파트 단지 주변을 둘러보았다. 오토바이를 세워 좁은 주차장 바로 옆은 주황빛 가로등 불빛과 옆쪽에 놓여진 분리수거함들이 너저분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깨진 술병과, 산산조각난 유리조각들도 위험해보이긴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주변은 사람 하나 다니질 않아 조금은 삭막해보이기도 했다. 주변을 둘러보던 종인이 미간에 주름을 만들며 얼굴을 찌푸렸다. 어딘가 마음에 들지 않아보이는 표정이였다.
뭐지? 경수는 왜 종인이 저러는지 알 수없었다. 혹시 자신이 무슨 실수라도 한걸까? 아님, 집주변이 너무 더러워서? 하긴 쓰레기가 많기는 했다. 근데 그게 내 잘못은 아닌데…. 진짜 별의 별 생각이 다들었다.
주변을 슥 둘러보던 종인이 경수를 보며 말했다. 경수를 향한 눈빛이 조금 날카로웠다.
" 너네 아파트엔 씨씨티비도 없냐? 요즘 세상이 얼마나 위험한데. " " 없으면 어때. "
아파트 단지 내에는 정말로 씨씨티비가 없었다. 경수도 지금 처음 안 사실이였다. 하지만 크게 개의치는 않았다. 그래서 경수가 툴툴거리면서 대답했지만 종인은 작은 한숨을 쉬었다.
" 지가 신경쓰지 말라고 해놓고는. "
이번에도 혼잣말이였다. 종인은 헬멧을 쓰고 오토바이 시동을 걸었다. 부릉. 조금은 시끄러운 소리가 아파트 단지 안에 울렸다. 경수는 조그맣게 말할때 종인의 표정을 보았다. 웃는 모습은 아니였지만 입술을 삐죽 내미는 모습이 생동감 있었다. 겉만 보면 되게 차가울 것만 같은데 이런 표정도 지을줄 아는구나. 종인의 말이 무슨 뜻이지는 모르겠지만, 경수는 그냥 히, 웃었다. 조금은 친해질 수 있을까.
종인은 바보같이 웃고있는 경수를 보며 말했다. 뭐가 좋다고 웃어, 빨리 타. 부드러운 말투는 아니였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얼른 타라는 종인의 말에 경수도 헬멧을 쓰고 종인의 뒷자리에 가볍게 올라탔다.
밤바람을 맞으며 달리는 오토바이는 종인에게는 쾌감이였지만, 경수에게는 견뎌야만 하는 것이였다. 도저히 앞을 보지 못하겠어서 경수는 종인의 허리만 꾹 안고 달렸다. 게다가 손에 한 깁스 때문에 종인을 잡는게 더 불편했다. 정신놓고 있다가는 놓쳐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경수는 팔에 힘을 꽉 주었다. 어쩔 수 없이 살기위해서 나오는 본능이였다. 아니 대체 이딴게 뭐가 좋다고 타고다닌다는 것인가! 종인이 서서히 속도를 올릴 수록 경수는 눈만 꽉 감고 종인의 등에 얼굴을 파묻었다. 옷을 펄럭펄럭 휘날리게 만드는 바람마저도 무서웠다.
종인이 밑을 바라보니 제 허리를 점점 세게 감아오는 경수의 팔이 보였다. 그리고 등에 닿아오는 따듯한 체온도 느껴졌다. 아마 얼굴을 대고 있겠지. 종인은 경수 모르게 슬몃 웃어보였다. 소매 사이로 보이는 손목은 가늘고 하얬다. 또 손목을 타고 시선을 옮기니, 배 언저리에서 조금씩 움직이는 길게 뻗은 손가락이 신기했다. 그 와중에 오른손에 단단히 감겨진 깁스가 눈에 띄었다. 오른손가락은 어떻게 생겼을까? 아마 왼손과 마찬가지로 가늘고 길것 같다. 종인은 감겨오는 이상야릇한 느낌에 배에 힘을 주었다. 항상 뒷자리에 타는 찬열과 같은 자세인데도 느낌은 전혀 달랐다. 찬열보다 조금은 가볍고 허리를 감싸는 힘이 약했다. 그리고, 더 따듯했다.
" 왜 이렇게 떨고있어. " " ...무서워. " " 그럼 진작 말을 하지. "
말하는 것도 무서운데 어떡하라고. 경수는 속으로 툴툴대었다. 몸으로 느낄 수 있을정도로 오토바이 속도가 확 줄었다. 차들이 거의 다니지 않는 도로위에서 오토바이는 그다지 큰소리를 내지 않으며 달렸다. 그저 바람이 머리카락을 기분좋게 흩뜨릴 정도의 속도였다. 자연스럽게 경수의 팔에서 힘이 조금 빠졌다. 강하게 조여오던 허리춤이 허전해지자 종인은 입맛을 쩝 다셨다. 어딘가 아쉽다.
경수는 종인의 등에 머리를 기대고 옆을 바라보았다. 속도를 줄이니 조금씩 오토바이에 적응이 된 것 같았다. 이렇게 가끔씩 달려보는 것도 괜찮은 것 같다. 지나치는 풍경들이 눈에 맺힐때마다 경수는 마음이 조금 센치해졌다. 몸에 조금씩 힘이 빠져나갔다.
아마 찬열도 종인의 뒤에 앉아 오토바이를 탔겠지. 지금 눈에 보이는 풍경들처럼 스쳐지나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종인과 찬열이 5년동안 친구라고 했으니 이런 사소한 것쯤은 같이 했겠다. 이런 것들 뿐만 아니라 찬열에 관해서 경수는 좀더 알고싶었다. 종인에게 물어본다면 귀찮아 할까? 누군가를 귀찮게 하는 건 싫었다. 하지만 알고 싶었다. 박찬열을. 욕심은 좀처럼 줄지를 않았다. 경수는 종인의 눈치를 보면서 슬며시 물어보았다. 종인이 대답하지 않는다면 그냥 바로 질문을 접을 생각이였다.
" 있잖아. " " 왜? " " 너 찬열이랑 친해? " " 어. " " 얼만큼? "
경수가 고개를 옆으로 빼서 종인을 보았다. 하지만 헬멧을 쓰고 있는 터라 표정이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종인의 표정이 어떨지 상상은 갔다. 무엇이든지 귀찮아 하는 무심하며 나른한 얼굴. 종인의 특유의 분위기가 풍겨나오는 표정. 종인은 역시나 짧은 대답이였다. " 중1때부터. " " 어디 중 나왔는데? " " 은솔중. " " 찬열이 중학교 때도 키가 그렇게 컸어? " " 걔 중1때까지만 해도 쪼끄맸는데 중삼때 애가 존나 콩나물처럼 자라더라." " 우와… 공부는 잘했어? " " 잘하는 편. 반에서 3등안에는 들었어. " " 진짜? 운동은 잘해? 좋아하는 스포츠라던가…게임이라던가. " " 키만 멀대같이 커서 운동은 젬병. 근데 게임은 엄청 좋아해. 특히 아이온. " " 그렇구나……. "
찬열의 얘기는 들으면 들을 수록 재밌는 영화를 보는 것만큼이나 흥미진진했다. 모든게 완벽할 것만 같은 찬열이 의외로 운동을 못한다는 사실도 은근히 귀여웠고, 게임을 좋아하는걸 보면 그도 그저 똑같은 평범한 남학생이라고 느꼈다. 경수는 그 외에도 찬열에 대해 궁금한 점들을 물었다. 예를 들면 성격이나, 좋아하는 음식이나 음악 같은 아주 사소한 것들을. 종인의 입에서 찬열의 이름이 나올때마다 경수의 눈은 무언가를 기대하는 강아지처럼 반짝였다. 입꼬리가 보기좋게 호선을 그렸다. 기분이 붕 뜨는 느낌이였다.
갑자기 종인이 몰고가던 오토바이를 갓길에 멈춰세우더니 뒤를 돌아보았다. 경수는 갑자기 멈춰버린 오토바이에 영문을 모른채 종인의 허리를 놓았다. 종인은 경수를 돌아보며 말했다. 헬멧을 벗지 않아 표정은 보이질 않았다.
" 넌 무슨 기집애들처럼 뭘 그렇게 꼬치꼬치 캐물어? " " 내..가? " " 어, 너. 아까부터 뒤에서 자꾸 물어보니까 정신 없잖아. "
화를 낸다고 하기엔 너무 담담했고, 그냥 말하는 것이라기엔 은근히 짜증이 녹아든 말투였다. 갑자기 분위기가 바뀌어버린 종인을 보며 당황스러웠지만 한편으로 경수는 아차, 싶었다. 절대 종인을 귀찮게 만드려는 생각은 아니였다. 그저 쓸데없는 호기심에 이것저것 물어보다가 적정선을 오버해버리고 말았다. 자제를 못하는 방정맞은 자신의 입이 문제였다.
" 미안해. 귀찮게 하려던건 진짜 아니였어! "
진짜로. 경수는 종인의 옷자락을 꾹 잡고 말했다. 마지막 말은 너무 작은 목소리여서 못들었을 수도 있겠다. 종인은 방금 전보다 더욱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주 조용하고 고요한 길 한복판에서 종인의 목소리는 선명했다.
" 너 박찬열 좋아해? " " 아니! 내..내가 왜. 그냥 친구로써 그런거지…."
갑작스러운 돌직구가 경수의 머리를 제대로 후려쳤다.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느낌이라면 알까. 전혀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이였다. 왜, 왜 갑자기 그런 질문을! 경수는 기겁을 하며 손사래를 쳤다. 손을 좌우로 휘젓는 동안 깁스를 한 오른손이 무겁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질문을 듣자마자 '아니!' 라는 대답이 먼저 빛의 속도로 튀어나왔다. 사실 경수가 찬열을 좋아하는 건 맞았지만, 겉으로는 절대 좋아하지 않아야만 했다. 오르비스는 가까이 다가가서도, 멀어져서도 안되는 존재였으니. 경수는 혹시라도 로봇처럼 어색하게 웃고있는 자신의 표정을 종인이 의심스러워하지는 않을까 걱정되었다. 평소엔 잘만 올라가던 입주변 근육이 딱딱하게 굳어 좀처럼 올라가질 않았다. 하.. 하...하.
어색한 웃음의 경수를 보던 종인은 잠시동안 말이 없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 아님 말고. 가자. "
종인의 말이 끝난 후 오토바이는 다시 출발했다. 전에 달리던 속도보다 조금 빨라진 속도였지만 무섭지 않았다. 그것보다는 혹시 제 마음이 들켰을까 싶어 심장이 벌렁거렸다. 생각할수록 복잡했다. 앞을 보고있는 종인의 표정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무심하게도 그는 돌아봐주지 않았다. 경수는 종인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이마를 등에 묻었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 그의 등에 닿은 이마가 따듯했다. 가까울 것만 같았던 찬열의 집은 생각보다 먼 것 같았다. 좀처럼 도착하질 않으니. *
경수는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납득이 가질 않았다. 그저 허무하기 짝이없었다. 찬열의 집까지 왔음에도 찬열의 얼굴은 커녕 머리카락 한올도 보질 못했다. 밤 늦게 피곤한 몸을 이끌고 온 보람이 없었다. 지금 시간에 찬열을 볼 수있다는 희망따위는 갈기갈기 찢겨 사라져버렸다. 경수는 멍하니 엘리베이터 안에 붙어있는 거울을 보았다. 퀭한 눈 밑에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올 정도로 피곤한 상태였다. 이런 상태로 여기까지 왔는데…. 화도 나고 어이도 없고. 자신이 한심했다. 차라리 이럴줄 알았으면 다음날 학교에서 줄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엘리베이터 안은 종인과 경수 단 둘 뿐이였다. 종인은 엘리베이터 구석에서 팔짱을 끼고 평소처럼 무심한 얼굴이였다. 그런 종인을 보며 경수는 한숨을 쉬었다. 푹. 처음 801호 현관문 앞에 서있을 때였다. 여기가 찬열이네 집이구나……. 경수는 두근대는 마음으로 종인과 함께 문 앞에 서있었다. 종인은 경수에게 찬열의 핸드폰을 달라고 했다. 폰 좀 줘봐. 경수는 조금 망설이다 핸드폰을 건네주었다. 이제 진짜로 찬열을 만날 수 있는 것이였다. 핸드폰을 받은 종인은 망설임없이 초인종을 눌렀다. 딩동-. 집안에서는 마치 아무도 없는 것처럼 아무 소리도 나질 않았다. 종인이 다시 초인종을 눌렀다. 그러자 이내 안에서는 부스럭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낮은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 누구세요? ' 경수는 조금씩 손에 땀이 찼다. 집에서의 찬열은 어떤 모습일까? 물론 많이 달라지는건 없겠지만 그의 새로운 모습을 본다는 건 언제나 설레는 일이였다. 그때였다. 종인이 잠시 깜짝 놀래더니 평소답지 않게 예의를 차린 목소리로 말했다. ' 저예요, 종인이. 찬열이한테 급하게 볼일이 있어서 왔는데. ' 현관문이 끼익 열리고 중년의 아저씨가 모습을 드러냈다. 경수는 순간 입밖으로 엥?이라는 말이 튀어나올 뻔한걸 가까스로 참아냈다. 찬열의 집인데 그 안에서 나온 것은 40대 후반정도로 보이는 아저씨였다. 경수는 이목구비가 뚜렷한 아저씨가 찬열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나서 바로 어떤 생각이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갔다. 설마…찬열의 아버지?
' 어, 종인이구나. 찬열이 지금 자는데 어쩌지? ' ' 그러면 이 핸드폰 좀 전해주세요. 자세한 건 내일 말해준다고 하구요. ' ' 알았다. 그런데 밤 늦게 왔는데 못 만나서 어쩌냐. ' ' 아녜요, 아저씨. 저희가 더 밤 늦게와서 죄송합니다. ' ' 그래, 잘가라. ' 예상대로 그는 찬열의 아버지였다. 어쩐지 뚜렷하고 큼직한 이목구비가 찬열과 비슷하게 닮았다. 짧은 대화가 끝나고 인상이 조금 날카로워 보이는 찬열의 아버지에게 종인은 꾸벅 인사했다. 경수도 잠시 눈치를 보다가 따라서 고개를 숙였다. 찬열의 아버지는 옆에서 가만히 서서만 있는 경수를 한번 보았다. 고개를 들때 그와 눈이 마주친 경수는 순간 얼음처럼 몸을 움직이질 못했다. 그러나 찬열의 아버지는 이내 경수에게서 눈을 떼고 현관문을 조용히 닫았다.
그게 지금까지 일의 끝이였다. 경수는 엘리베이터 거울에 머리라도 처박고싶은 심정이였다. 설마 진짜 이게 끝? 정말로?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실소가 저도 모르게 나왔다. 참나. 물론 찬열의 집에 간다고 해서 '어, 차라도 한잔 마시고 갈래? 우리집 구경 좀 하다가. ' 이런 에피소드를 바란 건 아니였다.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래도 안녕,이라고 인사정도는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정말 하다못해 얼굴 한번정도는 마주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대체 이게 뭔가! 경수는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갈 정도로 허무했다. 괜히 종인이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경수는 풀린 눈으로 종인을 몰래 바라보았다. 그 속엔 원망도 섞여있었다. 난 왜 끌고 온거니, 너 혼자 가지 그냥. 경수의 찌릿거리는 시선을 받던 종인이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둘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 뭘 자꾸 쳐다봐. " " …그냥. " " 박찬열 못봐서 아쉽냐? " " 아니, 별로. "
난 핸드폰만 갖다주러 온거잖아…. 경수가 먼저 시선을 피했다. 내리깔아진 시선은 조금 우울해보였다. 사실은 엄청, 엄청 아쉽지만 종인에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계속 자신을 바라보는 종인의 시선이 뒷통수에 느껴졌지만 경수는 다시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때 엘리베이터가 땡- 소리를 내며 1층에 멈춰섰다. 문이 열림과 동시에 종인이 먼저 빠른걸음으로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경수도 그 뒤를 따라 내렸다. 앞서가는 종인의 뒷모습이 오늘따라 더 무심하게 보였다. 나쁜 새끼. 경수는 맘속으로 중얼거리며 힘없이 걸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발소리가 자꾸만 요란스러워졌다. 밖으로 나오니 새벽공기가 시렸다. 조금 오버해서 말하자면 시베리아 한랭기류만큼 차가웠다. 거의 12시가 넘어서 1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내일 학교는 피곤해서 어떻게 가지. 경수는 작게 하품을 하며 생각했다. 종인은 벌써 오토바이에 앉아서 시동을 켤 준비를 하고 있었다. 환한 라이트가 앞을 밝혀주었다. 종인이 눈부심에 눈을 찡그리는 경수를 향해 소리쳤다.
" 데려다 줄테니까 타! "
경수가 눈이 아플정도로 밝은 빛을 피해 종인의 옆으로 섰다. 종인이 경수를 바라보며 왼쪽으로 휙, 턱짓했다. 얼른 타라는 뜻이였다. 올때처럼 똑같이 경수가 뒷자리에 가볍게 앉았다. 왠지 모르게 에스코트를 받는 여자가 된 느낌이였다. 이런 풍경은 데이트를 하고 집에 오는 연인들이나 하는 일이였다. 오빠가 데려다줄게, 하며 여자를 조수석에 앉히는 뭐 그런 것? 그러나 생각은 그렇게 했지만 경수의 팔은 종인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고 있었다.
집에 가는 길에 둘은 좀처럼 말이 없었다. 종인은 어떨지 몰랐지만 경수는 이런 어색한 상황이 불편했다. 무어라도 대화를 해야할 것만 같았다. 원래 소심한 터라 먼저 입을 잘 여는 편이 아니였지만 지금은 스스로 말을 하고 싶었다. 정말 드문 경우였다. 잔잔한 새벽속에서 물결치듯 경수가 정적을 깨고 말했다.
" 고마워. " " 뭐가? " " 데려다 줘서! "
점점 빨라지는 속도에 비례해서 귓가를 때리는 바람소리도 점점 커졌다.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을까봐 경수는 목에 힘을 주고 크게 말했다. 들릴까? 들렸으면 좋겠다. 경수는 종인의 대답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 모든 것을 흩트러뜨리는 요란한 바람소리에 대답을 못들을까봐서 작은 소리에도 귀를 기울이게되었다.
" 원래 너같은 애들은 밤늦게 돌아다니면 안돼는거야. 알아? " " 나같은 애들이 뭔데 그래. "
종인은 순간 아까전 찬열이 했었던 말이 떠올랐다. 경수, 귀엽잖아. 바로 옆에서 찬열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다시 생각해보면 가끔 귀여운 구석이 있기는 했다. 종인은 절로 입꼬리가 올라간채로 말했다. " 넌 몰라도 돼. " " 그게 뭐야... " 경수가 끝말을 흐리며 말했다. 늘어진 목소리들은 지나가는 풍경들에 섞여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종인의 단단한 등에 자신도 모르게 적응되어가고 있었다. 긴장이 풀어지고, 몸이 점차 늘어졌다. 점점 정신이 몽롱해지고 피곤은 쌓여만 갔다. 경수가 말을 하려고 할때마다 목소리에 자꾸 힘이 빠졌다. 차갑게 얼굴을 때리는 바람에도 졸음이 조금씩 밀려왔다. " 나 무슨 여자라도 된 것 같아. " " 그럼 경수 양 하지 뭐. " " 그건 싫어. " 경수가 고개를 좌우로 도리질 쳤다. 경수 양이라고 불리는 건 싫다. 내가 무슨 여자두 아니구…. 싫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웃겼다. 경수는 맨정신이 아닌 정신으로 피식 웃었다. 갈수록 제가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 이대로 가다가는 헛소리라도 지껄일지도 모른다. 아니, 오토바이에서 떨어질 수도 있겠다. 정신을 놓지는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며 팔에 힘을 꾹 주었다. 종인은 갑자기 힘을 조여오는 경수의 팔이 보였다. 특히 오른손의 깁스가 눈에 띄었다. 경수의 작은 손가락을 감싸고 있는 단단하고 무거운 석고틀. 보기만 해도 자신이 더 답답했다. " 도경수. " " 응. " " 너 그거 언제 풀어. " 경수가 다시 되물었다. 그거가 뭐야? 종인은 밑에서 자신의 허리를 감싸앉는 경수의 무거운 오른손을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 " 오른손에, 깁스. " " 아……. 이거? 다다음주에. "
" 같이 가자. " " 어딜 같이가? " " 병원 말이야. 깁스 풀어야지. " '갑자기 왜?' 라고 묻고 싶었지만, 지금 상태로서는 다시 물을만한 정신이 경수에겐 없었다. 종인이 왜 이런걸 묻는지도, 어떤 생각을 하고있는지도, 모두 궁금했지만 지금은 그저 그런가 보다, 하고 끝내고 싶었다. 말했다시피 경수는 제정신이 아니였다. 반쯤 떠진 눈사이로 길게 늘어진 가로등 빛의 행렬이 하나의 선을 만들어 지나갔다. 그것은 마치 대기의 공간에서 타들어가는 유성의 꼬리와 비슷했다. 빛을 내는 존재들. 그 원동력이 공기의 마찰이든, 전기든 아름다운건 마찬가지였다. 나의 궤도는 어떨까. 나의 궤도는 과연 완성되어질 수 있을까? 만약 나의 궤도가 완성되어진다면 그건 정말로 아름다웠으면 좋겠다고 경수는 생각했다. 아름다운 불빛과 그에 대조되는 어둠을 보다가 경수는 잠시 눈을 감았다. 잠들지 않게 조심하면서 잠시만 머릿속을 정리하고 싶었다. 아, 종인의 말에 대답하는 걸 잠시 잊었다. 경수는 종인의 등에 볼을 갖다대며 조그맣게 속삭였다. " ……그래. "
경수가 생각하기에 지금 이순간, 모든 것이 상반되는 것만 같았다. 불빛을 번쩍이며 빛내는 간판들은 밝았지만 금방이라도 나를 집어삼킬듯한 밤은 어두웠고, 정말 생각하고 싶었던 것은 너무나도 복잡해서 생각하기가 싫었고, 옷의 작은 틈사이로도 스며오는 밤바람은 차가웠지만, 자신이 끌어안고 기댄 종인의 등은 따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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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구두굳ㄱ굳 학교 면접 준비 하느라 바쁘기도 하지만 그래도 남은 편은 꾸역꾸역 올립니다ㅠㅠ 힘을 ㅈ..쥬세여 그럼 저는 또 공부를 하러 갑니다ㅠㅠ 아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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