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를 처음 만나던 날.
나는 아직도 그날을 잊지 못하였다.
처음 본 순간... 그대를 雪花 라 일컬으니 너는 내게 스며들어와 하얀 '눈꽃' 이 되었다.
어두운 길을 앞서 걷는 나으리의 뒤를 따르며 태환은 쿵쿵..뛰어대는 가슴을 어찌 할 줄 몰랐다.
길이 어두워 험하니 함께 마을까지 돌아가자는 그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어 말없이 그 뒤만 따르던 태환은
스산한 바람과 함께 묻어온 나지막한 그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올렸다.
"선월의 오라버니께서는 마음에 품은 정인이 있으십니까."
여전히 앞만 보고 걸으며 자신을 향해 던져온 나으리의 질문에 태환은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가 곧, 다시 그 뒤를 따랐다.
"...글쎄요..."
욱신거리는 가슴을 한 손으로 쥐며 겨우 대답하였다.
그러고는 자신의 눈앞에 서있는 그의 뒷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어느새 젖어드는 눈시울에 얼른 시선을 거두고
아랫 입술만 지그시 깨물었다.
"저는... 마음에 들어온 여인이 있습니다."
"......................"
자신의 뒤에 서서 겨우 겨우 눈물을 삼키고 있는 태환의 모습을 알리 없는 쑨양은 목소리 가득 설레임을 담아
입을 떼었다.
"그 여인은 꽃을 닮았습니다."
대답이 느리면 혹여나 나으리가 자신을 돌아볼까...태환은 마른 입술에 번지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내고 천천히 되물었다.
"어떤...꽃...말씀이십니까."
굳이 그 답을 듣지 않아도 태환은 알 수 있다.
그가 나에게 명한 단 하나의 이름.
그만이 부를수 있는 나의 이름.
눈물에 잠기려는 목소리를 겨우 가다듬어 묻는 태환의 질문에 앞서 걷던 쑨양이 천천히 걸음을 멈춰섰다.
그러고는 태환을 향해 천천히 돌아선다.
숨길 수 없는 온화하고 행복한 그의 미소에 태환은 가슴이 덜컥..내려앉는것 같아, 눈물 가득한 얼굴을 들키지 않으려
얼른 고개를 바닥으로 향했다.
"시린 겨울. 마른 나뭇가지에 피어나는....하얀 눈꽃."
"......................."
"그 여인은... 그 꽃을 닮았습니다."
귓가에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에 태환은 젖어든 입술을 달싹여 그가 듣지 못하게 조용히 그 이름을 되뇌었다.
"..........설.....화."
입밖으로 터져 나오려는 눈물에 태환은 입술에 피가 베이도록 꼭 깨물었다.
그에게 수없이 설화라 불리우며 오늘처럼 슬펐던 날은 없었을것이다.
온전하게 설화의 모습으로 그의 마음을 듣지 못하는게 이토록 가슴을 쥐어뜯는 고통인지 생각지도 못하였다.
당장이라도 그를 붙들고 그 여인이 자신이라고 말하지 못하는 현실에 태환의 동그란 눈에서 굵은 눈물 방울이
뚝뚝- 떨어져내린다.
어두운 숲 길, 스산하게 불어오는 바람 소리와...거짓으로 감춰진 그의 모습에...
쑨양은 태환의 눈물을...알아채지 못하였다.
"저는 곧 청나라로 돌아갑니다."
천천히 몸을 돌려 다시 발걸음을 옮기던 그가 던진 한마디에 태환은 눈물로 얼룩진 고개를 들어 그의 뒷 모습을 응시했다.
"돌아가기전에 그 여인에게 해야 할 말이 있습니다. 그 말을 하기 위해선... 선월 오라버니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
"도와주시겠습니까...?"
편지를 맡겨 둘테니 누이에게 꼭 전해달라 신신당부하는 그에게 알았다..답을 해주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기운 없이 신을 벗고 한기 가득한 방안에 들어선 태환은 축-처지는 몸을 벽에 기대고 앉아 무릎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것일까...
먹고 사는게 바빠 마음속에 정인 하나 둔 적 없던 자신의 인생에 처음으로 가슴을 설레이게 만드는 이가 생기었다.
하나, 그 마음을 드러낼 수 없는 현실에 태환은 절망감을 느끼고 있었다.
처음부터 거짓으로 자신을 감추지 않았더라도...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 자신임을 알고 있다.
차라리... 여인의 모습으로 그를 만나 잠시라도 행복했음에 감사하여야 하는것이 아닌가... 하는
어리석은 생각으로 태환은 위로 받고 싶어졌다.
"청나라..."
가본적도...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멀고 먼 자신의 나라로 돌아간다는 나으리의 말이 떠올라 무릎에 묻고 있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올렸다.
"가기전까지... 그래... 그때까지만... 그때까지만 행복하자."
그가 곧 자신의 나라로 돌아간다면,
그의 기억속에 태환은... 설화는... 좋은 사람, 좋은 기억으로 남을것이다.
다시 만날 수 없는 인연이니... 그가 돌아가기전까지만 행복하면 되지 않을까.
한없이 어둡게 가라앉아 있던 그의 얼굴에 작은 희망의 빛이 떠올랐다.
툭-
"......어........"
그러다 뺨 위로 떨어져내린 눈물 방울에 태환은 흠칫 놀라 손끝으로 쓸어내렸다.
[왜 눈물이 흐르는 것이냐. 나는 이렇게 웃고 있는데.
나으리가 돌아가면 난 좋은 사람으로 그의 기억속에 영원히 남을 수 있다.
헌데, 왜 눈물이 나는 것이냐............]
"어찌 되었느냐."
시름이 가득한 눈빛으로 물어오는 날카로운 목소리에 마주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던 사내가 천천히 입을 떼었다.
"여인의 정확한 행방은 알 길이 없으나, 비슷한 모습의 여인이 잠시 목격되었던 집은 알아내었습니다."
"그곳이 어디냐."
"저잣거리 근처입니다."
사내의 대답에 김재호는 안도의 숨을 작게 내어쉬고 피곤한 눈가를 쓸어내렸다.
"비슷하다라... 그 집은 누가 사는 곳이더냐."
"사내 혼자 사는 집이라 들었습니다."
"사..내..?"
김재호의 미간이 구겨지며 그의 입가에 비틀린 웃음이 매달린다.
"이번에도... 같은 연유인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그를 향해 사내가 시선을 맞춰왔다.
그 눈빛에 김재호는 입가에 웃음을 지워버리고 다시 입을 열어 차가운 어조로 그를 향해 명했다.
"오늘 밤, 그 여인을 찾아오라."
자신을 향해 고개를 숙여보이는 사내를 향한 눈빛을 거두고 김재호는 피곤한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번에는... 그렇게 쉽게 놓아주진 않을것이다.
같은 연유로 두 번은...내게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입가에 쓸쓸한 미소를 지어보이는 그의 눈빛이 어둡게 내려앉는다.
"오라버니! 오라버니!"
벽에 기대어 멍하니 방바닥만 바라보던 태환은 밖에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어올렸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방문을 열어보니 금옥의 딸아이가 자신을 향해 손짓을 하며 빨리 나오라 재촉을 한다.
"이 시간에 어쩐 일로 온게냐?"
"어머니께서 오라버니 모시고 오라 하셨어요. 얼른요~"
쪽마루에 멀뚱히 서있는 태환에게 달려와 그의 팔을 붙들고 끌어당기는 아이의 모습에 태환은 어쩔수 없이
신을 꿰어 신었다.
신을 신자마자 태환의 손을 붙들고 싸리문밖으로 힘껏 잡아끈다.
작은 몸에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기운 없는 그를 붙들고 장터 거리로 나서는 아이를 따라 주막에 다다른 태환은
앞치마를 곱게 두르고 그를 반기는 금옥의 모습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태환! 초경쯤에 주막으로 나오라 하지 않았소!"
멍한 표정으로 서있는 그를 붙들고 방안으로 들이미는 손길에 태환은 딸아이와 함께 신을 벗고 안으로 들어섰다.
한상 가득 차려진 맛깔나는 음식들에 태환의 두 눈이 휘둥그레진다.
"이게 다 뭐요?"
"일단 앉으시오~ 자자, 한잔 받으시고!"
"나 술 못하는거 알지 않소. 그나저나 이게 다..."
"좋은 날 한잔 해야 하지 않겠소? 내가 이제.. 여기 주막 여주인이오."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지으며 술이 가득 부어진 잔을 들이미는 금옥의 얼굴을 바라보며 태환은 입만 벙긋거렸다.
"잘 되었지 뭐... 포도청에 알려질까 겁먹지 않아도 되고... 이제 자네도 고생안해도 되니 말이오~"
"아니, 그래도.. 이렇게 갑자기..."
"좋은 기회를 얻어 이리 되었소. 그동안 고맙고..미안해서... 오늘 내가 사는거니 맛나게 드시오."
금옥이 환한게 웃으며 잘 삶아진 닭다리 하나를 뜯어 태환의 손에 들려주었다.
닭다리와 금옥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던 태환은 입술을 꿈질거리다 뭔가 할말이 있는듯 천천히 입을 떼었다.
"나 때문에 이리 된거니... 이걸 먹을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소."
".........?"
"포도청에 고한 자...김재호 아니겠소? 나 때문에 이리 된거니..."
어두워진 표정으로 손에 들린 닭을 그릇 위에 다시 올려놓는 태환의 모습에 금옥은 뭔가를 말하려 입술을 열었다가...
곧, 다물어버렸다.
김재호가 아니라 얘기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아무 말도 하지 말라 당부했던 그의 말이 떠올라 금옥은 태환 몰래 미안한 표정을 지어보이고 그의 손에 수저를 쥐어주었다.
"그런 말 마시오! 내가 원했던 일이기도 하오. 곧 그만두려고 했는데 잘 되었지. 마음쓰지 마시고 얼른 드시오."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를 건넨 금옥은 자네가 먹질 않아 딸아이도 먹지 못하고 눈치만 본다며 얼른 들으라 부추겼다.
그 말에 기다렸다는 듯 아이가 전 하나를 집어 태환의 입에 넣어주었다.
"어머니, 나 이제 먹어도 되오?"
"그래~ 얼른 먹거라. 자네도 얼른 드시오."
허겁지겁 음식을 먹는 아이를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던 태환은 얼른 먹으라 떠미는 금옥의 성화에 천천히 수저를 들어올렸다.
한참만에 식사가 끝나고 아이는 잠을 자러 옆방으로 돌아갔다.
빈 상을 두고 마주앉은 태환과 금옥은 흔들리는 호롱불 아래, 말없이 앉아만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여는 금옥의 목소리에
그제서야 눈을 마주쳤다.
"어젯밤에 도망가느라 진을 뺏다니... 무슨 말이오? 나으리와 함께 있지 않았소?"
"아... 별거 아니오. 잡히지는 않았으니..."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금옥은 표정없는 얼굴로 멀뚱히 앉아 있는 태환을 바라보며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나으리 말이오."
"...................."
"자네가 남자라는 것은 아직 모르오?"
조심스러운 질문에 태환은 고개만 끄덕이고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내 보기엔 그 나으리.. 자네에게 진심인것 같소. 자네는 어떻소...?"
"무엇... 말이오..? 내 마음 말이오...?"
"....................."
"내 마음이 어떻든...안되는거 아니겠소...? 청나라 사신에... 나와 같은 사내이니..."
"....................."
"처음부터 거짓으로 감추었으니... 나으리가 떠날때까지... 그래야겠지..."
".....떠나다니...?"
그의 말에 화들짝 놀란 금옥은 동그래진 눈으로 태환을 바라보며 재촉했다.
"곧 청나라로 돌아간다 하오. 그때까지만 들키지 않는다면... 좋은 기억으로 남게 되겠지. 그뿐이오."
감추려 했으나 감춰지지 않는 태환의 슬픈 얼굴에 금옥은 손을 뻗어 그의 마른 손을 꼭 쥐었다.
"이제야 행복해지나 했소. 자네를 만나고 그리도 환하게 웃는 건 처음이라... 나으리께 솔직히 말해보는건 어떻겠소...?"
금옥의 제안에 태환은 눈물이 스며나오려는 두 눈을 꼭 감고 고개를 가로저어 보였다.
"나 좋자고... 다른 이의 마음을 어찌 불편하게 만들겠소. 나으리께는... 그저 좋은 여인으로...좋은 기억으로 남고 싶소."
애써 웃어보이는 태환의 얼굴에 금옥은 가슴이 아파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괜찮다며 오히려 자신을 위로하는 태환의 물기 가득한 목소리에 금옥은 쓰린 가슴을 달래었다.
가여운 사내에게 이런 시련이라니...
붉어진 그의 눈가가... 나으리를 향한 그의 마음이 안타까워 금옥은 한숨만 내쉬었다.
***
안녕하세요~흰둥이입니다~
남자의 모습으로... 설화의 오라버니로...
사랑하는 이의 진심을 듣게 되다니...ㅠㅠㅠㅠㅠㅠㅠㅠ
저 너무 잔인한가요...? 미안해..태환아..ㅠㅠㅠ엉엉
오늘 메인 사진은 태환의 첫! 사내 복색이군요!
오오...저러고 다녀도 이쁘네욬ㅋㅋ
장터 길 다닐때 여자들이 쳐다보는 이유가 있었어요...올?
결론은, 태환은 여인의 옷도 남자의 옷도...
다 잘 어울리네요ㅎㅎㅎ
재밌게 읽어주시는 많은 분들...
항상 댓들로 응원해주시는 감사한 분들...
늘 고맙고...사릉합니다♡
활기찬 월요일을 위하여... 편안하고 행복한 일요일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