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뭐, 좋아하는거 없니.”
아이가 입을 떼기 전에 잽싸게 덧붙인다.
“꽃 말구.”
입을 다시 다물고 곰곰 머리를 굴려보다 내놓는 답이라는게 겨우,
“요리하는거요.”
“요리하는거 재밌잖아요. 냄새도 맛있구.”
그래서 그냥 어벙하게 아이를 쳐다보고 만다.
아이는 내가 빨래 개는 법을 모르는 줄 아는건지 내 무릎에 얹힌 흰 바지를 들고 가 자기가 갠다. 면티를 집어들면서 대화를 좀 더 잇는다.
“뭐, 어떤 요리.”
“맛있는 요리요.”
맙소사. 이 아이는 어떨때 보면 사람인가 싶게 섬세하더니 이럴땐 왜 꼭 이리도 둔할까.
“아니 뭐, 양식이라던가, 일식이라던가, 그런거 있을거 아냐.”
“안 가려요. 다 좋아해요.”
다른 이라면 나가고 싶어 안달일 집에 제발 남겨달라고 부탁하는 괴짜 아이. 취미가 음악 듣기, 책 보기 정도는 아닐거라고 짐작은 했지만, 이렇게 되어버리니 뭘 사다줘야 좋을지 감도 안 잡힌다. 별다른건 아니고 잘 부탁한다는 의미로 가볍게 자기 좋아하는거 하나 구해줄까 싶었더니. 친구는 없나. 같이 노는 ‘기종’ 같은건 가리지 않는건가.
“그, 친구는? 없어?”
“블루투스나 원격 네트워크로 소통해요. 지금도 아저씨랑 이야기하고 있지만 다른 주파수대에선 친구랑 인간의 멸종을 논하고 있는걸요.”
흠칫 떨며 쳐다보자 여전히 무표정으로 눈을 한번 마주친다.
“장난이지?”
“그럼요. 설마 진짜겠어요.”
아이의 농담은 이런 식이다. 웃지는 않지만 농담 던지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 하지만 농담은 사다줄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니까.
“책 읽는건 어때?”
“장르를 물어보시는건가요, ISBN 분류법을 물어보시는건가요?”
맙소사. 나는 우스갯소리로 툭 던져본다.
“추리소설 같은건?”
“아가사 크리스티, 엘러리 퀸 등도 좋지만 일본 쪽을 좀 더 선호해요. 설정이 과격해서 그렇지 그만큼 다른 부분을 정교하게 조절하는게 보입니다. 쓰쓰이 야스타카의 〈인구조절구역>이나 혼다 테쓰야의 〈스트로베리 나이트> 같은 경우는 저한테 너무 고어하고, 그보다는 살짝 마일드한 미나토 가나에는 〈고백>이 가장 치밀하긴 한데 그 이후로 나오는 대부분의 작품들이 텐션이 떨어지고 설정이 비현실적이라 흥미가 없어졌습니다. 가장 좋아하는 작가는 신본격 운동의 거장 아야츠지 유키토이구요, 그가 저술한 관 시리즈 중에서는 〈시계관의 살인>이 플롯이 정교하고 트릭이 재밌어서,”
“아아아, 알겠어, 알겠어.”
질문하기가 무섭게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이름들이 우르르 쏟아져나온다. 정말 이 책들을 다 읽어본거라면 아이는 무서운 독서광일테다. 간간히 뒷마당으로 통하는 마루에 앉아 내 책을 들고 있는 모습을 보긴 했지만 아이가 말한 책들은 전부 내게 없는 것들이다. 이것들도 네트워크로 읽은 걸까. 그럼 읽지 못한 책도 있을까.
“혹시 그럼, 읽어보고 싶은 책은 있어?”
“아,”
잠깐 숨을 들이키더니 오랫동안 생각한 것 같은 이름 하나가 툭 튀어나온다.
“J. D. 샐린저의 〈바나나피시를 위한 완벽한 날> 이오.”
“샐린저..? 그, 뭐더라, 그.. 무슨 파수꾼, 그 사람?”
“〈호밀밭의 파수꾼>. 네.”
〈바나나피시를 위한 완벽한 날> 이라니. 물어봤자 또 내가 모르는 이야기만 잔뜩 할 것 같아 일단 입을 닫는다. 아이는 그게 신기했나보다.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다 갠 빨래들을 쌓아놓고 묻는다.
“더, 안 물어보시네요.”
“.. 내가 뭘 알아야 더 묻든 말든 하지.”
“그래도 〈호밀밭의 파수꾼> 작가 이름이 제롬 데이빗 샐린저인건 아시잖아요. 그럼 됐죠.”
그러고선 경쾌하게 일어나 수건들을 들고 화장실로 간다. J. D. 샐린저가 제롬 데이빗 샐린저의 약자였구나. 나는 남몰래 부끄러워하며 이를 앙 다문다. 점심땐 서점에 다녀와야지. 아이에게 줄 선물을 찾았다.
.
“오랜만이시네요.”
바코드를 찍어주던 서점 아이가 시선을 올려 내 동공에 점을 찍는다. 낯이 익은데 어디서 봤더라 머리를 굴리는 사이 아이가 턱짓으로 길 건너편 약국을 가리킨다.
“아, 그.”
“수리는 잘 하셨구요?”
진통제를 처방받은 날, 집에서 머리라도 감기라며 날 도와준 약국 알바의 친구였다. 약국 한 귀퉁이에서 조용히 옛날 게임기를 들고 있다가 알바가 행여 진통제를 놓칠까봐 알게모르게 옆에서 친구를 참 많이 돕던 아이였다. 이국적이던 이목구비가 비로소 기억난다.
“잔고장이라, 그냥 쓰기로 했어요. 학생도 그때 고마웠어요.”
“애가 좀 정신이 없어서, 뭘 잘 빠트리고 그러니까요.”
“원래 여기 알바였어요?”
“아뇨, 최근에 시작했어요.”
“아아, 어쩐지.”
눈동자가 한번, 어색하게 다른 곳을 찍고 아래로 내려온다. 귀엽다. 못 본 줄 알았겠지.
“아저씨도 이 근방 사시죠?”
지갑을 뒤적거리다 고개를 든다.
“이 근처 사람들이 홈봇을 많이들 쓰시더라구요. 심부름도 자주 와요.”
“아.”
“책방 망한거 같아도 아직은 멀었어요. ‘혈기왕성한’ 애들이 해킹 걱정 없이 어떻게든 해보려면 제일 안전한게 책이니까.”
생각외로 눈치가 재발랐다. 인터넷이 생긴게 언젠데 아직도 책방 장사를 하나 싶은 표정을 어느새 읽었는지 척척 대답을 내놓았다. 당돌한 젊음이 청순해 나는 그저 웃었다.
“그럼 그 책, 아저씨가 읽으시려구요?”
“응? 아뇨, 우리 아이꺼.”
“쿡, '우리 아이’ 요. 근데 요즘은 어지간한 홈봇들은 네트워크로 다 읽을텐데.”
계산을 마치자 아이가 물었다. 턱을 괴고 묘한 눈빛으로 빙긋 웃는다. 나도 묘한 웃음으로 답한다. 재미있는 아이를 만났다.
“약국 친구, 오늘 일찍 마친다는 거 같던데.”
아이가 박장대소를 터트린다. 어린왕자 문고본을 턱 얹어준다.
“제가 사는걸로 할게요, 이건. 알려주신 답례에요.”
.
서점을 나서는 길은 걸음이 가볍다. 웬일로 조금씩 개이는 날씨에 나는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고 싶어진다. 꽃, 이라.
딸그랑-
누가 말리기라도 할세라 바람처럼 제비꽃 한 다발을 사 묶는다. 화사해질 얼굴을 생각하니 가슴 속 어느 새장에서 파랑새가 휘파람을 분다. 주책이다, 날씨 맑은게 뭐 대수라고. 조금 침착하자며 집을 들어오는 길, 마당 근처를 어정거리는 아는 얼굴을 하나 만난다.
“어, 소령님!”
“아, 이 대위!”
얼마만이던가. 생사를 함께 넘던 전우애는 까마득한 시간에 빛이 바랬고, 5년만인가에 다시 본 내 상사는 여전히 맑은 사람이었다.
“5년만인가?”
“그러게요. 어쩌다보니 연락도 못 드린게 차일피일 쌓였습니다.”
“이 대위는 여전하군. 카리스마 있는 인상도 그렇고.”
“소령님이야말로 여전히 맑아보이시는걸요, 하하.”
반가운 인사를 나누며 대문을 열면 의아한듯 놀란 아이가 우리를 맞는다. 입모양으로 아는 분, 하고 소령님과 함께 거실 소파에 앉는다. 아이는 차를 내리러 주방으로 들어간다. 아까 전부터 아이를 빤히 쳐다보던 소령님이 몸을 굽혀 묻는다.
“홈봇인가?”
“예. 어머니께서 말릴 새도 없이 주문하셨어요."
머쓱하게 웃다가 테이블 건너편을 보면 팔짱을 낀 소령님은 턱만 매만질 뿐이다.
“소령님도 홈봇 쓰시려구요?”
“아니, 그냥,”
아이가 재게 차를 끓여온다. 소령님이 웃으며 쟁반을 받든다.
“고마워요, 잘 마실게요.”
“이야기 잘 나누세요.”
경계심이 채 다 풀어지지 않은 아이가 주춤거리며 방으로 사라진다. 소령님의 눈빛이 변한다. 본 적 있다, 저 분위기. 아주 여러번.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면 이번엔 내가 묻는다.
“본론, 아직 안 나왔죠.”
“.. 역시 이 대위.”
소령님이 아이가 사라진 방문을 바라보다 차를 들이킨다. 입술을 깨물고, 말을 시작한다.
“자네, 요새 나라 상황 어떤지 알지.”
“응과원 회의가 20차에 이르렀어. 나야 뭐 중령 대신으로 회의 나간지만 어언 7회차인데 아무렴, 파악을 못하려구. 기업체들 아이디어야 바닥난지 오래야. 죄다 거기서 거기. 신무기? 화학전? 뭔들 생각을 안 해봤겠어. 그런데 웃기게도, 이게 상대편도 똑같은 생물이어야 어느 정도 먹힐 거 아냐. 우린 지금 무생물과 싸우고 있는거라고. 희망도 뭐도, 바닥났다고 생각했는데,”
소령이 차를 마신다. 눈빛만큼이나 찻잔을 거칠게 내려놓는다. 내 눈빛도 그다지 온순하지는 않을 것이다. 애써 품위를 지키려 마시는 척은 하지만 식도가 틀어막힌지 이미 오래다. 안 들어도 이미 알 것 같은데, 당신 하려는 말.
“보급형 홈봇.”
내가 잘못 들었나.
“보급형 홈봇이 관건이었던거야. 그 애들은 사람도 아니니까 인적 손실도 없고, 사회적 문제가 되지도 않을테고,”
“소령님.”
찻잔 손잡이에 금이 간다.
“설마 지금,”
“...”
“장난치시는거죠?”
금은 비단 내가 들고 있는 이 작달만한 그릇에만 난 것 같지는 않다. 팽팽한 것이 얼굴을, 팔을, 가슴을, 배를, 등을, 온 몸을 조인다. 초속 몇십킬로미터는 족히 찍을 침묵이 정수리에서 발바닥까지를 관통해 내리꽂힌다.
“이 대위.”
“예.”
“정말, 많이 막았어.”
“예.”
“나도 막상 보고 올려놓고 보니까,”
“예.”
“이건 아니라고, 정말,”
“예. 가십시오.”
“나도 정말 막았다구! 근데,”
“가십시오.”
“군대라는 곳이, 자네도 알잖은가!"
“가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대위!!”
“제발 그냥 가십시오!!”
테이블에서 떨어져 깨진 찻잔 파편이 나뒹군다. 겁에 질린 아이가 방문을 열고 빼꼼, 거실을 내다본다. 현관을 가리키는 나와 눈이 마주치더니 황급히 다시 문을 닫는다.
“소령님 하실 말씀 예상해볼까요.”
“... 이 대ㅇ,”
“무기화 하기엔 당장 샘플용으로 만들 수량이 부족하다. 중고 자발 지원을 받고 있다. 너도 참가해라. 겨우 기계 한대일 뿐 아니냐. 어차피 집안일 할 손 부족해서 들여온 고철덩어리, 다시 들이면 그뿐 아니냐!!”
“이 대위, 진정하고 좀 앉지.”
“더 이상 할 말 없습니다. 나가십시오.”
“이 대위, 제발..”
“저 아이가!! 방금도 제가 화를 내는 것 같으니까 눈치를 살핀다고 방문을 열었다 닫은 저 아이가!!”
“...”
“저 아이가 무생물이라구요. 사람이 아니라구요.”
“... 이 대위.”
“가십시오. 할 말 없습니다.”
뭉툭해진 감각 속으로, 상사가 모자를 집어들고, 외투를 집어들고, 현관으로 머뭇거리며 다가간다. 아이가 배웅을 한답시고 나서고, 인사를 하고, 문이 열렸다 닫힌다. 현관문 앞에 홀로 남은 아이가 갸웃거리며 다가온다.
“들어가.”
놀란 아이가 숨을 들이킨다.
“들어가있어. 정리되면 부를게.”
아이가 찻잔 조각을 줍는다.
“들어가있으라고!!”
황급히 아이가 들어가 방문을 닫는다. 비로소 감각의 날이 돌아온다.
'그 애들은 사람도 아니니까 인적 손실도 없고, 사회적 문제가 되지도 않을테고,’
그때에야, 천진하던 소령의 말이 찻잔 파편보다 더 아파오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