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게는 시선 끝을 잡아끄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게 뭐냐고 묻는다면 콕 집어 대답해줄 말을 찾을 수는 없었지만, 이름도 몰랐던 그와 복도에서 스쳐지나갈 때마다 차학연은 모든 신경을 빼앗기기 일쑤였다.
하얗다. 학연이 느낀 그의 첫인상이었다. 햇살을 타지 않은 듯 눈처럼 하얀 피부는 봄의 정경과 너무도 잘 섞여들어 학연은 그와 마주칠 때마다 숨을 죽이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언제나 걸음을 걸을 때 살짝 구부정하게 등을 굽히고 다니지만 백 팔십은 족히 넘는 키 덕분인지 그것이 흉해보이지도 않았다. 하얀 피부와 대비되는 결 좋은 새카만 머리카락도, 약간 차갑게까지 보이는 고양이 같은 분위기도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여학생들 사이에서 택운은 알게 모르게 인기를 끌고 있었다. 아마 택운의 사교성이 좋았더라면 벌써 수차례 고백을 받고도 남았을 터였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말들로는 꼭 필요할 때를 빼놓고 먼저 말을 거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했다. 정택운의 목소리를 들은 날은 행운이 찾아온다는 미신은 이미 1학년 10반 아이들 사이에서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이야기였다.
나도 10반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다른 사람이라면 그런 애도 있냐고 웃고 넘겼을 이야기였지만 학연의 머릿속에 어렴풋하게 떠오른 건 같은 교실에 앉아있는 자신과 택운의 모습이었다. 얼굴도 알고 이름도 알고 심지어 반번호까지 아는데 정작 목소리를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목소리… 나도 듣고 싶다. 같은 반이면 들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아니, 같은 반이 아니라 옆반이기만 했더라도 혹시 또 모르는데. 하필이면 10반과 제일 멀리 떨어진 1반일게 뭐람. 학연은 괜시리 반배정을 결정했을 누군가가 미워졌다.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택운이 어떤 목소리로 어떤 말을 할지, 너무도 궁금했다. 자신의 이름을 불러줬으면 좋겠다는 막연한 소망이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봄바람마냥 산들산들 학연의 가슴을 간질였다.
점심을 먹고 교실로 올라가는 길에 학연이 택운의 뒷모습을 발견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학연의 시선은 자연스레 그의 등 뒤를 따라갔다. 처음에는 반으로 돌아가는 거겠지, 했지만 그의 발길이 향한 곳은 2학년 교실이 있는 북관이 아닌 서관쪽이었다. 어딜 가는 걸까 하는 의아한 마음에 학연도 택운의 뒤를 천천히 따랐다.
계단을 몇 층 내려가 도착한 곳은 서관 1층에 있는 도서실이었다. 입학한지 몇 개월이 지났는데도 학연은 물론이고 주변 아이들도 한 번 발길을 준 적이 없는 장소였다. 도서관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접근성이 너무 떨어졌고 책을 읽는 걸 즐기는 아이들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학교에서도 도서관에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은 건지 간신히 구색만 맞춘 정도였다.
평소 연이 없던 장소였기에 잠시 망설였지만, 그래도 학연은 손잡이를 잡았다. 나무문은 끼이익 하는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냈을 뿐 별 저항 없이 쉽게 학연을 안으로 들여보내주었다. 몇 걸음 들어서자마자 작은 방안에 쌓여있는 책들 덕분에 특유의 종이 내음이 흘러왔다. 그리고나서 바로 학연의 눈에 들어온 것은 대출과 반납을 할 수 있는 카운터쯤으로 보이는 책상에 앉아 한 번 눈길을 보내고는 전혀 학연을 신경 쓰지 않고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린 택운이었다.
오는 사람이 거의 없긴 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없는 것은 아니라서 사람이 온다는 게 신기한 일은 아니었다. 단지 조금 특이한 점이 있다면, 보통 매일 오던 사람만 오던데 지금 들어온 사람은, 도서관에서는 처음 보는 사람이라는 점 정도일까.
“무슨 책 읽어?”
예고도 없이 날아온 질문에 택운은 책에서 눈을 들어 제 앞에 서있는 학연을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왔으면 책을 읽던지, 아니면 대출을 하고 얼른 나가던지 하면 되는데 왜 굳이 처음 보는 사람에게 나서서 말을 거는 건지 택운으로서는 잘 이해가 가질 않았다. 택운의 침묵에도 불구하고 학연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이야기를 이었다.
“너 이름이… 정택운. 정택운이구나.”
“…….”
“나 너 알아. 복도에서 몇 번 봤었거든.”
학연은 몰랐던 척, 택운의 명찰을 보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상대방은 자신의 얼굴도 모를 텐데 이름까지 알고 있으면 조금 이상하게 생각되지 않을까 싶은 걱정이 들어 일부러 그랬다. 학연의 생각에서 약간 틀림점이 있다면, 택운이 학연을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학연은 스스로가 생각하는 것보다 학교 내에서 꽤 유명인사였다. 무슨 행사가 있다, 하면 멋들어지게 춤을 추기도 했고 성격도 워낙에 좋아 인맥도 넓은 그였기에 주변에 별 관심 없는 택운의 귀까지 여차저차 들어갔다. 듣던 대로 사람을 대하는 것에 모난 곳이나 벽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자신에게는 조금 부담스러울지도 모르겠다고 택운은 생각했다.
“난 차학연이야. 너랑 같은 학년이고.”
“…….”
아무렇지도 않은 척 웃으며 말을 걸었지만, 학연은 사실 당장이라도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이 두근거렸다. 목소리가 너무너무 듣고 싶어 참지 못하고 대뜸 말을 걸었는데 정작 상대방은 대답은커녕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무 말 없이 올려다보고만 있으니 정말 죽을 맛이었다. 이러다가 괜히 이상한 애로 오해당하는 건 아닐까 싶어 몇 마디 더 말을 하려는 순간, 원망스럽게도 곧 수업이 시작됨을 알리는 예비종이 쳤다.
그 소리에 택운은 읽고 있던 책을 덮었다. 덕분에 학연은 뒤늦게나마 아까 했던 질문의 답을 얻을 수 있었다. <박사가 사랑한 수식>이라는 약간 번진 듯한 디자인의 글씨를 학연은 자신의 기억에 새겼다. 책을 읽는 걸 즐기지는 않지만, 택운이 읽은 책이라는 이유로 흥미가 갔기에 나중에 자신도 읽어볼 셈이었다. 그런 학연을 두고 택운은 자리에서 일어나 먼저 문 쪽으로 걸어나갔다. 같이 가자고 해볼까. 학연이 고민하는 사이 택운이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 학연을 바라보았다.
“나와.”
“어?”
“문… 잠가야 돼.”
“어…? 아, 어! 응!”
빨간 입술 사이에서 조용히 흘러나온 미성에 학연은 순간 홀린 듯 귀를 기울였다. 자신이 몇 번씩이나 상상해왔던 것 보다 몇 배나, 아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예쁜 목소리였다. 정신이 멍해져서 자신이 어떻게 도서관 밖으로 나왔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택운이 도서관 문에 자물쇠를 채우고 다시 자신을 돌아볼 때까지 귓가에서 자꾸만 그 예쁜 미성이 웅웅 울리는 듯 했다. 아, 세상에. 내가 어떻게 됐나보다. 목소리를 듣게 된 게 이렇게 기쁘다니. 만면에서 웃음이 뚝뚝 흘러넘치는 표정을 짓고 있는 학연을 신기한 걸 보는 듯 바라보는 택운의 시선에 학연은 겨우 자신의 표정을 관리할 수 있었다.
“택운아. 나 너랑 친해지고 싶어.”
“……?”
“그러니까, 내일도 올게.”
지금은 일단… 교실까지 같이 가지 않을래? 내밀어진 학연의 호의에, 택운은 앞으로 조금 귀찮아질 것 같은 느낌을 받았지만 마냥 싫지만은 않아 승낙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택운은 솔직히 말하자면, 처음엔 학연이 도서관에 오는 걸 반기지 않았다. 오히려 꺼려했다는 편이 옳았다. 도서관은 택운만의 작은 세계였다. 택운은 그 안에서의 시간들이 소중했고, 혼자만의 세계를 즐겼다. 그 사이를 허락도 없이 불쑥 파고든 학연이 마냥 곱게만 보일리만은 없었다.
택운은 제 영역에 사람을 들어놓지 않으려 했고, 끈질기게 학연과의 사이에 선을 그었다. 하지만 학연은 택운보다 더욱 끈질겼고 택운이 자신을 무시해도 기분 나쁜 기색 하나 없이 지치지도 않고 찾아와 말을 걸었다. 학연은 착실하게 택운에게 파고 들었다. 택운은 완고하긴 했지만 모질지는 못했기에 결국은 자신이 좋다며 붙어오는 학연을 떨쳐내지 못하고 결국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곁을 내주었다.
학연은 자연스럽게 택운의 시간에 녹아들었다. 늘 대출반납을 관리하는 조그마한 책상 앞에서 책을 읽었던 택운을 학연은 그 밖으로 이끌어냈다. 나 혼자서 읽으면 심심하다는 게 그 이유였다. 책을 읽는데 혼자 읽든 둘이 읽든 무슨 상관인가 싶었지만 택운은 순순히 학연의 말에 따라주었다. 도서관 중간에 놓인, 6명 정도가 앉을 수 있는 책상. 그곳에 마주보고 앉아 책을 읽는 것이 이제는 일상이 되었다.
택운은 그렇게 학연을 자기 사람으로 받아들였다. 일단 택운은 자신의 선 안에 들어온 사람에게는 한없이 약해졌다. 학연은 다가갔고, 택운은 그런 학연을 더 이상 피하지 않았다. 가끔은 택운이 학연에게 자신이 읽었던 책울 권해주기도 했고 학연은 간식거리를 들고 와 책을 읽고 있는 택운의 입에 손수 과자를 물려주기도 했다.
“운아, 맛있어?”
“…맛있어.”
“어휴, 우리 운이. 많이많이 먹고 살 좀 찌워야겠다.”
처음에는 인상을 찌푸리며 자신이 먹겠다고 하던 택운도 학연이 고집스럽게 안 된다며 먹여주자, 지금은 책장을 넘기면서 학연이 주는 과자를 받아먹는 게 오히려 제 손으로 집어먹는 거 보다 더 익숙해졌다. 택운이 자연스럽게 자신이 주는 걸 받아먹으면서 책을 읽는 걸 보며 학연은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하얗고 신경쓰이는 아이. 학연에게 있어 택운은 그런 존재였다. 그래서 자꾸 눈길이 가고, 관심이 갔고. 친해지고 싶다고 생각해서 쉼없이 노력했다. 결과, 지금은 택운의 옆자리를 이렇게 꿰차고 앉아있게 됐다.
그런데 참 이상했다. 처음에는 그냥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목소리를 듣고 나니 그 목소리로 자기 이름을 불러줬으면 했고, 학연아, 하고 자그마하게 제 이름을 부르는 걸 듣고 나니 조금더 택운과 가까워지고 싶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이상하게도 계속 욕심이 났다. 산들이며 가슴께를 간질이는 바람이 그칠 지를 몰랐다. 내가 왜이러지. 택운을 보고 있으면 꽉 조여오는 것 마냥 가슴 한 구석이 답답해져오는 느낌에 학연은 아무도 몰래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날도 평소와 다름없었다. 점심을 먹고 난 후 수업종이 칠 때 까지 도서관에서 책을 읽었고, 수업이 끝나기가 무섭게 가방을 들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조금 뒤늦게 택운이 도서관에 도착해 잠겨있던 도서관 문을 열었고 둘은 평소와 다를 것 없이 마주 앉아 책을 읽었다. 누구 한 사람 끼어들 틈 없는 완벽한 둘만의 세상이었다. 편안하게 흐르는 적막 위에 간간히 책장을 넘기는 소리만 들려왔다.
한참을 책에 눈을 두고 있던 학연은 뻐근한 고개를 들었다. 아. 그리고 그 순간, 학연은 숨이 멎는 듯 했다.
창문으로 따스한 빛이 새어들어오고 있었다. 잔잔한 금빛이 택운의 주변을 넘실거렸다. 새까만 머리카락이 상냥한 빛깔에 젖어들어 반짝였다. 내리깔려있는 기다란 속눈썹에 져가는 햇살이 아롱다롱 매달려 있는 모습을 학연은 한참 넋을 놓고 바라봤다.
“왜?”
시선을 느낀건지 택운은 고개를 들어 멍하니 저를 쳐다보는 학연에게 조용히 물었다. 노을이 한층 더 짙게 깔렸다. 학연아? 의아한 듯 이름을 부르면서 오물거리는 입술이 무척이나 예뻤다. 학연은 택운의 쪽으로 몸을 뺐다. 택운이 느리게 눈을 꿈뻑이는 모양이 보였다. 사뿐히 감기는 속눈썹을 보면서 학연은 택운의 입술 위에 제 입술을 겹쳤다.
소리도 없이 살짝 닿았다 떨어지는 짧은 입맞춤. 둘은 아무 말도 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숨소리가 들릴 듯 가까운 거리. 한박자 늦게 미칠 듯 뛰기 시작한 심장소리가 혹여 들리지는 않을까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제야 학연은 그동안 자신을 괴롭혔던 그 간지러운 답답함의 정체를 알았다.
“택운아.”
좋아해.
학연이 그렇게 도망쳐버리고 난 후, 택운은 너무 당황스러워서 따라갈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한참을 그냥 앉아있었다. 내일 오겠지. 그러면 그 때 물어봐야겠다. 택운은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택운의 생각과는 달리 학연은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첫째날에는 무슨 일이 있겠거니 둘째 날에는 아직 할 말이 정리가 안된거겠지. 하며 택운은 애써 신경쓰지 않으려 노력했다. 삼일 째, 택운은 자신의 앞 자리가 텅 빈 것이 너무 쓸쓸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겨우 삼 일 모습을 보지 못했다고 이러는 자신이 이상했다. 일주일이 지났다. 택운이 읽고 있는 책의 페이지는 한시간이 지나도 제자리 걸음이었다. 책 내용이 들어오질 않았다.
학연은 학연이 생각하는 것 보다, 그리고 택운이 느끼고 있던 것 보다 훨씬 더 깊숙하게 택운의 일상에 스며들어있었다. 넘어가는 책장의 소리가 자신의 것 밖에 없는 게 너무 거슬렸고, 잠시 책에서 눈을 떼고 앞을 보면 마주보며 웃어주는 사람이 없는 게 어색했다. 택운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꾸만 문을 흘끔거렸다. 가끔씩 발걸음 소리가 다가올때면 혹여 학연이 온 건 아닐까 기대하고 실망하는 일을 반복했다.
내가 왜 이렇게 걔를 기다리고 있는거지.
학연이 도서관에 오지 않은지 이주일이 지났을 때에, 택운에 손에는 책이 들려있지 않았다. 택운은 가만히 앉아서 문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고민했다. 이렇게까지 기다릴 이유는 하나도 없는데. 그냥 입맞추고 도망쳐버려서, 그게 답답해서 그런가? 곁에 있다가 없으니까…… 외로워서? …외로워? 스스로가 생각한 말에 택운은 깜짝 놀랐다.
원래부터 혼자가 편했다. 이제와서 혼자 있는 걸 외롭다고 생각할 이유는 어디 한군데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 확실히 자신은 외롭다고 생각했다. 그래. 외로웠다. 지금 택운은, 너무나도 학연이 보고 싶었다. 말 한마디 없이 그냥 마주보고 앉아서 책을 넘기고, 가끔 눈이 마주치면 사사로운 장난을 치기도 하고. 가끔은 함께 숙제를 풀고….
드디어 택운은 전하고 싶은 말을 찾았다. 답답했던 것은 학연이 도망쳐버려서가 아니었다. 자신이 말하고 싶은 걸 하나도 전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친해지고 싶다는 말에 실은 자기도 그랬다고 답하지 못했다. 책을 골라줘서 고맙다는 말에 늘 책을 같이 읽어줘서 고맙다고도 전하지 못했다. 좋아한다는 말에, 나도 널 좋아한다고 답하지 못했다.
전하지 못한 것들이 너무 많았다.
언제나 받기만 했다. 언제나 학연이 다가왔고 자신은 받아들였다. 그래서 이번에, 택운은 자신이 먼저 학연을 찾기로 했다. 먼저 손을 내밀어 보자고, 그렇게 결심했다.
“차학연.”
곧 4교시가 시작되는 쉬는 시간이었고 학연은 친구들과 점심이 뭐가 나올까에 대해서 시덥잖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귓가에 박혀든 조용한 목소리에 학연은 너무 놀란 나머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평소와 하나 다르지 않은 표정으로 택운이 제 앞에 서있었다. 학연이 도서관으로 가는 발길을 끊은 이후부터 이렇게 제대로 얼굴을 보는 것은 거의 보름만의 일이었다. 반도 제일 끝과 끝반이었고, 접점이 거의 없는 학교 생활에서 학연이 먼저 택운을 찾지 않았다면 애초에 두 사람은 만날 일 조차 없었다.
갑작스럽게 반까지 찾아온 택운의 등장에 당황해 어버버거리면서도 학연은 실로 오랜만에 마주한 택운을 찬찬히 살폈다. 안 그래도 제 눈에는 어찌 할 수 없을 정도로 예뻐 보이는 사람이었는데, 못본 사이에 한층 더 예뻐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너 뭐야.”
“어… 어?”
날카롭게 흘러나온 말에 얼빠진 대답을 흘리고 있자니 금세 구경꾼들의 시선이 몰려들었다. 뭐야, 정택운이랑 차학연이랑 아는 사이였어? 둘이 싸워? 나 정택운 목소리 처음 들어봐…. 작게 수군거리는 소리들이 신경쓰이지도 않는건지 택운은 학연의 앞으로 한걸음 더 성큼 다가섰다.
“왜 안 와.”
멍청하게 눈만 깜빡거리고 있으니 다시 한 번 더 들려오는 물음. 도서관, 왜 안오냐고.
“그거야…….”
“그거야?”
“너 불편할까봐….”
답지 않게 뒷말을 재촉하는 택운과 마찬가지로 답지 않게 황급하고 비겁한 변명을 내세우는 학연. 택운이 답답한지 뭐라 입을 열려 했을 때, 타이밍 좋게도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택운은 말을 하는 대신 학연을 잠시, 하지만 아주 빤히 쳐다본 후에 등을 돌려 교실에서 나갔다.
수업이 시작됐지만 학연의 머릿속은 매운 건 칠판 한가득 채워져있는 필기가 아닌, 오로지 정택운 뿐이었다. 지금까지는 늘 제 쪽에서 다가섰고 먼저 손을 내밀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그러다 제 욕심을 참지 못해 충동적으로 택운에게 입맞췄다. 꿈결마냥 짧은 순가이었지만 그것은 학연에게, 그리고 분명 택운에게도 선명하게 아로새겨진 금빛 속의 시간이었다.
택운의 동의 없이 겹쳐진 입술과 무책임하게 흘러나온 좋아한다는 고백을 학연은 죄라고 생각했다. 도망치듯 그 곳에서 빠져 나온 후, 다시는 발을 들이지 못했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마음은 한사람만을 향해 있어서. 택운을 찾으려 무의식중에 두리번거리는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화들짝 놀라기를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다가도 아이들 속에서 유독 하얗게 반짝이던 택운을 찾아내면 눈을 떼지 못하고 몰래 그 모습을 좇았다. 조금이라도 눈이 마주칠까 싶으면 파드득 놀라 고개를 푹 숙여버리기도 했다.
그런 나날이었는데. 학연은 제 앞에서 왜 찾아오지 않았냐며 묻던 택운의 얼굴을 떠올렸다. 조금은 화가 난 듯 한 표정이었다. 그에 반해서 발그레하게 물들어있던 귓가는, 수줍음을 잔뜩 머금고 있었다. 사람 눈에 띄는 걸 싫어하는 택운이, 먼저 나서는 걸 꺼려하는 택운이. 모두의 주목을 살 걸 알면서까지 신경쓰지 않는 척 해가며 굳이 먼저 학연을 찾아왔다.
아.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며 가라앉았다. 그리고는 이내 백 미터 달리기를 한 것처럼 쉴 새 없이 두근, 두근. 기분 좋은 고동을 울린다. 아, 어쩌지. 택운아. 정택운. 그 모든 행동들이 뜻하는 바는 어렵지 않았다. 너무도 쉽게 알 수 있었다. 사랑스러움이 물밀 듯 밀려왔다.
학연은 들썩거리는 몸을 간신히 억누르고 있었다. 수업종이 친지 5분은 족히 지났는데도 수업이 질질 이어졌다. 아, 빨리 끝나라. 좀 빨리. 그렇게 안절부절 못하고 있다가, 나가도 좋다는 선생님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학연은 자리를 박차고 달려갔다. 친구들과 그토록 열심히 이야기를 나눴던 점심에 관한 생각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학연이 정신없이 뛰어간 곳은 식당이 아닌 서관 1층, 그 구석에 있는 학연과 택운의 공간이었다.
택운의 반으로 곧장 갈 수도 있었지만 몸이 먼저 이곳으로 향했다. 순식간에 도착한 도서관 앞에서 학연은 밭아진 숨을 골랐다. 잠시 심호흡을 하고, 문을 열었다. 끼이익. 이제는 익숙해진 낡은 나무문의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 곳에는.
“운아!”
학연은 망설임 없이 택운을 끌어안았다. 택운이 주춤하다가도 이내 학연의 등에 팔을 둘렀다. 좋아해. 두 사람의 목소리가 동시에 겹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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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격조했습니다*ㅇㅅ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