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 받았다.
좋아해.
너한테 잘해준 거. 내가 좋은 선배라 그랬던 게 아니라 널 좋아하는 선배라 그랬던 거야.
네가 싫다고 하면 그만 좋아할 건데.
어때.
그 정재현한테.
그 후배의 사연
그러니까 선배와의 첫만남은 지극히 평범한 날에
"이거 드롭하려고?"
"네?"
"엿들으려고 한 건 아닌데, 아까 친구랑 통화한 거 들어서."
"아..."
꽤나 평범하지 않은 일에서 시작됐다. 나는 그냥 수업이 재미 없어서 하산하려고 한 것 뿐인데 어떻게 귀신같이 그걸 듣고는 와서... 아 중요한 건 모르는 사이였다. 선배인 것도 몰랐어 나는.
"안 하면 안돼?"
"왜요?"
"나 이거 재수강이라 꼭 들어야 되는데 너 빠지면 폐강이라서."
드롭하지 않으면 공부하는 것까지 도와주겠다고 나서길래 아 내가 어쩌면 진상한테 잘못 걸렸구나 했는데, 결국 내가 졌다. 미인계를 쓸 줄은 몰랐지. 그게 의도한 거든 아니든 일단 좀 먹혀서.
왜 그랬는지는 아직도 모르지만 번호까지 주고 나서야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근데 왜 반말이지."
이유야 어찌됐든 하산 실패한 이상 출석은 열심히 해야겠다고 결심했으니 나는 나대로 열심히 다녔고 정재현은 정재현 대로 열과 성을 다해 출석 했으므로 우리가 마주치지 않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물론 서로 눈도 안 마주치고 수업만 듣느라 첫 날 이후로는 말도 안 해봤지만. 가끔 정말 수업이 너무 지루해서 빡치는 날에는 내 앞에 앉은 그 뒷통수를 바라보며 조용히 얼굴을 찌푸려줬다. 아니 그 날 나말고 다른 사람이 드롭하려고 했으면 거기에 가서 부탁할 거였나. 내가 싫다고 하면 어쩌려고 그랬지. 하는 마음을 담아서.
그리고 그런 내 생각을 듣기라도 했는지 수업이 끝나 밥 먹으려 가려고 자리를 정리하고 있을 때 불쑥 나타난 정재현에 내가 놀라는 건 당연했다.
"점심 약속 있어?"
"...아니요."
내가 살게, 나랑 먹자. 그 한 마디에 내가 정재현과 마주보고 앉아 쌀국수를 퍼먹게 되기까지는 30분도 걸리지 않았다. 도대체 사람한테 무슨 능력이 있길래 수업부터 점심까지 내가 입도 벙끗 못 하고 끌려 다니는지.
어색함에 목이 막혀 비명횡사라도 할 것 같았다. 나도 원래 말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이렇게까지 어색하면 아무 말이라도 털어보는 스타일인데, 지금 생각나는 말이라곤...
"저기 저번부터 궁금했는데.
"어?"
"그, 왜... 반말하세요?"
내 말에 냅킨을 만지작 거리던 정재현이 허, 하는 소리를 내곤 아하하 하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살면서 저렇게 텍스트로 웃는 사람은 또 처음인데.
"너 나 기억 안 나?"
"저희 초면 아니에요?"
"아닐걸요."
"...그렇다고 갑자기 존댓말을 쓸 필요까지야."
머릿 속을 이 잡듯 뒤져 아는 사람 리스트를 훑어봐도 도통 답이 나오질 않았다. 혹시 신종 작업 수단인가? -우리 어디서 본 적 있지 않아요?-의 2018년도 버전이라든지...
"도영이 형 생일날, 너 거기 있었잖아."
"거기 계셨어요?"
"10명도 안 되는 자리에서 나만 기억 못하는 건 너무한데."
"사실 도영 선배 빼면 아무도 기억 안 나요."
멍청한 나. 멍청하면 눈치라도 있어야 되는데 그것마저도 없는 나. 정재현의 입에서 나오는 자초지종을 대충 듣고 나니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면서 상황이 들어맞았다. 그리고 더 놀라운 사실은 그 날 개가 됐던 내가 정재현을 기억하지 못할 뿐이고, 그 흐린 기억 속의 그대인 정재현이 날 집까지 데려다 줬다는 거였다. 진상도 그런 진상이 없지.
"그래서 난 우리가 아는 사이인 줄 알았지."
"아... 죄송해요. 제가 그런 기억력이 안 좋아서."
"술 취해서 필름 끊겼던 게 아니라?"
"뭐, 그거나 그거나..."
그 다음부터 대화는 꽤 순탄했다. 내가 취했던 그 날 얼마나 진상이었는지에 대해 듣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어쩐지 정재현은 평소 보던 모습보다 즐거워 보였는데 그게 나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내가 쪽팔린 건 정재현 때문이 맞았다.
"그럼 지금까지 했던 반말은 사과하고. 앞으로는 반말 해도 될까? 요?"
"욕하셔도 할 말은 없습니다만..."
그래서 나랑 정재현 사이가 수요일 점심시간을 함께하는 사이로 발전하게 된 거다.
그 후배의 사연
"선배 오늘은 뭔가... 김치찌개 먹고 싶지 않아요?"
"너 저번 주에 먹었다고 하지 않았어?"
"벌써 저번주인데요...?"
나는 그냥 김치찌개를 유난히 좋아할 뿐이고, 오늘도 그냥 김치찌개가 먹고 싶었을 뿐인데.
"아, 비 온다."
"선배 우산...은 없겠죠."
"과방 가볼까."
"거기도 없을 것 같은데, 제가 뛰어갔다 올까요?"
"지금?"
"네, 여기서 지하철역까지 뛰면 3분도 안 걸려요. 안에 다이소 있으니까 거기서 우산 사면 좋을 것 같아서."
김치찌개를 위해 혼자 청춘드라마를 찍어야 한다니. 이미 뛰기로 결정을 했으면서도 비에 젖을 머리를 생각하니 앞이 깜깜하긴 했다. 음... 내 머리 곱슬이 두각을 나타내면 안 되는데 추해서.
"그냥 내가 앞에 편의점 갔다올게, 넌 여기서 기다려."
"네? 아니, 잠깐, 잠깐만요 선배. 이거라도 쓰고 가세요."
급히 건넨 내 가디건이 비를 얼마나 가려줄지는 모르겠지만 맨 몸으로 빗 속에 뛰어드는 걸 지켜보고 있을 수는 없어서. 그렇게 뛰어가는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냥 멍하니 서서 지켜보기만 했다. 날씨는 눈치도 없지.
"그냥 학식 먹을 걸 그랬나봐요. 김치찌개 너무 욕심이었다."
"아까는 안 먹으면 큰일 날 것처럼 굴었잖아."
"에이 그거야 약간 오바 한 거죠."
"약간이 아니던데. 안쪽으로 더 들어와, 비 맞는다."
편의점 투명 우산을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 밖에 내놓는 이유가 있다. 아주 잘 팔리기 때문에. 오늘 나랑 선배처럼 전혀 비에 대비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낚아채기엔 아주 좋은 수단이었다. 정리하자면 수요가 좋으니 우산이 하나 남았고, 그러니 내가 선배랑 이렇게까지 붙어가는 건 다 이유가 있다는 거였다. 내가 아까 다이소로 가려고 했던 이유가 이건데.
들리는 거라곤 우산에 떨어지는 빗소리랑 선배 말소리 뿐인데. 선배는 내 어깨를 안으로 당겨 잡더니 아무 말이 없고 오늘따라 김치찌개 집은 멀고. 이러다간 내가 김치찌개를 끓일 판이었다.
"선배 제가 다음에는 더 맛있는 거 살게요."
"그럼, 그래야지."
"예의상이라도 거절해주시면 저야 좋고요."
내가 현대인의 감성보다 더 말라버린 내 지갑을 흔들어 보이자 선배는 또 아하하, 하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러고보니 처음 쌀국수 집에서도 저렇게 웃었지 아마. 어쩌면 내가 기억 못하는 도영선배의 생일 날에도 저렇게 웃고 있었을지도 모르고.
"아, 선배. 어제 왜 저 보고 모르는 척 했어요?"
"내가?"
"네, 어제 마주쳤잖아요 우리."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어제 이동혁이랑 수업 들으러 가는 중에 딱 마주친 그 얼굴을. 분명히 나랑 눈이 마주치고, 눈빛은 이미 나랑 인사를 하고도 남았는데 내 옆에 있는 이동혁을 한 번 보더니...
'뭐야, 네 수요일메이트 아니야?'
'어, 맞는데. 바쁜가.'
'그냥 널 모르는 척 하고 싶은 거 아니고?'
동기 사이에 불화를 심어줘놓고는 저렇게 모르는 척을 할 수 있다니. 먹던 숟가락도 내려두고 빤히 쳐다보자 그제야 민망했는지 음, 하는 소리를 내며 앞머리를 쓸어 넘긴다. 좋게 말하면 할 말을 찾는 거고 있는 그대로 말하면 변명거리를 찾는 중이려나.
"동기랑 같이 있길래."
"선배 그런 눈치도 봐요?"
"꼭 그런 건 아니고."
"다음부터는 그냥 인사 해요. 선배랑 친한 티 좀 내게."
왜 그런 소리를 했는지는 정확하게 설명할 수가 없다. 정말 그냥 친한 티 한 번 내보고 싶어서 그런 소리가 나왔는지도 모른다. 이동혁이 한참을 혼자 하는 우정이라며 놀렸던 게 생각이 나 억울해 그랬을 수도 있고, 정말 그냥 우리가 그 정도의 친분은 되는 사이라는 걸 알려주고 싶어 그랬을 수도.
"아 이거 다 졸았네, 불 꺼둘 걸. 물 좀 부을까요?"
"어, 그래. 여기,"
"정재현!"
졸졸졸 물이나 붓고 있는데 갑자기 나타난 도영선배 때문에 하마터면 몽땅 때려부을 뻔했다. 오늘 이래저래 김치찌개 상태가 영 위험한게, 아침에 별자리 운세라도 보고 올 걸.
"형이 왜 여기있어?"
"밥 먹으러 왔지. 너도 그런 거 아니야? 이 사랑해 마지않는 후배랑."
"와, 선배도 여기 자주 오세요?"
"내가 제일 먼저 찾았어 여기. 정재현이 데리고 온 거지? 그걸 누가 알려줬겠니."
어쩐지. 주변에 김밥 천국 위치도 모르는 사람이 이런 맛집은 어떻게 찾았나 했다. 역시 인생에 도움이 되는쪽은 도영선배인가... 저번에 밥 먹으러 가자고 했을 때 한 번 따라가볼 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너네는 무드 없게 김치찌개 집에서 데이트야."
"아, 뭐래. 그런 거 아니야. 얼른 가."
"그런 거 아니라기엔 너무 증거가 많은데."
"증거는 무슨 증거."
"사람은 둘인데 바닥에 둔 우산은 하나고, 김치찌개에는 물을 부어서 새로 끓이고 있질 않나. 내가 말 걸기 전까지는 눈치도 못 챘잖아 너희. 그래서 당연히 데이트인줄 알았지 나는."
아, 그래. 술자리도 아닌데 그게 다 졸아서 자박해질 때까지 눈치도 못 챘다 둘 다. 나와 재현선배만 아는 사실이지만, 둘이 밥을 먹을 때면 심심치 않게 있는 일이었다.
"아 됐어, 얼른 가. 우리 밥 먹어야 돼."
"간다 가. 야 근데 다음에는 좀 덜 시끄러운 데로 가. 데이트 하는데 서로 말은 들려야지."
더 뭐라고 하기 전에 쏙 빠진 도영 선배는 아예 2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정말이지 사람 머릿 속을 막 뛰어다니면서 헤집네 저 사람... 저런 게 재능이지 싶었다. 연애학과 같은 건 없나, 교수해도 될 것 같은데.
"정신 없지."
"괜찮아요, 재미있는데요 뭐."
"근데."
"네?"
"진짜 내 말 잘 안 들려?"
도영선배 말처럼 데이트도 아니면서 밥 먹으러 온 마당에 밥보다 뭐가 더 중요했길래 그렇게 될 때까지 신경조차 안 썼는지 몰랐지만, 이따금씩 보여주는 저 붉은 귀를 보고 있자면
머지 않아 그 이유를 알게 될 것 같기도 했다.
선생님들: (둥절)
나: (머쓱)
-재현선배랑 비 오는 날 우산 하나로 걷는 거 보고 싶네... 에서 시작했다가 하핫 (코쓱) 원래 한 편에 다 쓰려고 했는데 쓰고 싶은 장면이 많아서 쓰다보니 길어져 일단 잘랐어요? 빠지는 장면들이 아까워서 8편 정도로 나눌까 생각도... 예, 망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흑흑 떠나지 말아주세요.
-아 그리고 선생님들 진짜 귀여운 사람덜... 제가 원래 귀엽다는 말을 잘 안 하는 사람인데 씁... 이전 글 댓글마다 날씨 좋다고 말하기 있습니까? 분명히 하늘이 울고 있었는데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