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초여름의 시작이었다. 별 것 없는 나날들이 흘렀다. 찬우는 얇은 겉옷을 걸치고 막 성균관의 동재를 나서고 있었다. 옆구리엔 철이 지난 전집 몇 권을 낀 채였다. 그는 뜨거운 태양을 느끼며 무의식적으로 인상을 찌푸리곤 손바닥을 곧게 펴 머리 위에 그림자를 지게 했다. 그럼에도 더위는 사그러들지 않았다. 찬우는 고작 그림자 따위로는 태양을 피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고, 이내 한참을 우두커니 펼치고 있던 손을 도로 내렸다. 작년 여름이 걷혔을 때 서랍에 놓아둔 부채를 다시 꺼낼 때가 온 것 같다고 그는 생각했다.
할 일이 많았다. 집으로 돌아가 전집을 마저 읽어야 했고 한양에 물건을 찾으러 온 중국 상인들에게 보낼 편지를 써야 했다. 걸음을 재촉해야 하는데, 뜬금 없이 성균관 입구에 모습을 드러낸 이 여인은 찬우의 앞을 가로막고 비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보통 평평하던 그의 미간이 저절로 찌그러졌다. 그는 전집을 고쳐 잡았다. 급한 용건이 없다면 화를 낼 생각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도련님?"
"…알아보지 못해 죄송하오나 낭자는 누구신지?"
"윤이라고 하옵니다."
낯선 여인에게서 음성을 전해들은 찬우는 눈을 가느다랗게 했다. 윤이라면 몇 번 들어본 적이 있다. 의정부 이조판서의 딸로 세자빈과 혼인한 그와 아주 두터운 친분이 있다고 했다. 찬우는 조금 표정을 풀었다. 아무리 뜨거운 더위에 신경이 흐느적해도 윗사람에게 예의는 갖추어야 했다. 찬우는 짧게 고개를 숙이며 그녀에게 인사했다. 초면임에도 이렇게 스스럼이 없는 그녀가 어쩐지 이상하면서도 당돌하게 느껴졌다.
윤의 곁엔 아무도 없었다. 찬우는 주위를 조금 두리번거리다가 그녀에게 목소릴 낮춰 말했다. 그 둘이 서 있는 곳은 성균관의 입구 근처의 은행목 몇 그루 사이 어딘가였다.
"…성균관은 금녀의 공간입니다. 만남을 하고 싶은 유생이 있으셔도 함부로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그럼."
찬우는 그녀에게 경고하며 가던 길을 마저 가려고 했다. 그에 윤은 마른 손으로 대뜸 그를 붙잡았다. 잘 알지도 못하는 여인에게 팔을 잡힌 것이 불편해 목소릴 높이려던 것을 판서의 딸이라 참았다. 찬우는 최대한 부드러운 동작으로 그녀의 손을 떼어냈다. 윤은 아무렇지 않게 웃고 있었다.
"…제게 무슨 볼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예."
"…어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이 안으로 그대를 들어오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 도련님께서 그 곳을 나오시면 되는 일 아닙니까?"
윤은 꼿꼿하게 말했다. 찬우는 그런 그녀의 태도가 기가 막혀서 얼굴을 딱딱하게 했다. 그녀는 계속 불필요한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입술이 단 한 번도 떨리지 않았다. 단련된 웃음이었다. 자연스럽지 못한 표정에 속이 뒤집혔다. 찬우는 그대로 윤을 지나쳐 성균관을 벗어났다.
"양반의 자식도 아니시면서, 어떻게 성균관 입학을 가능케 하셨습니까?"
그러나 뒤에서 들려오는 가시를 박은 윤의 말에 찬우는 걷던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판서의 딸이더라도 방금 발언은 무례했다. 그는 등을 돌리고 다시 그녀의 앞으로 다가갔다. 윤은 마치 내기에서 이긴 것처럼 의기양양했다. 흠 잡을 곳 없이 빼어나게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이 꼭 한 떨기 복사꽃 같았다.
윤은 천천히 다가오고 있는 그를 향해 한 번 웃었다. 그녀는 자신의 그런 웃음이 아주 좋은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단 걸 잘 알고 있었다. 특히나 남자한테는 더 더욱. 윤은 나쁜 말을 해놓고 수줍게 웃었다. 찬우는 그녀가 보통 사람이 아니란 것을 알아챘고 무의식적으로 세자빈을 걱정했다. 윤이 그녀에게도 이런 말과 얼굴을 했더라면, 분명 그녀는 상처 받았을 것이다.
"재력이 대단하다고 들었습니다."
"그게 뭐가 어쨌다는 말씀이십니까."
"돈으로 이 세상에 못할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도련님."
"……대체 무슨 뜻으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배운 자들의 권리인 성균관에 어째서 도련님 같은 분이 계신 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 곳에 입학을 넣으시면서, 그 몫으로 동전 몇 개를 내놓으셨는지가 궁금합니다."
그 길을 지나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길목은 조용했다. 찬우는 대답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고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녀를 바라보고 싶지 않았다. 지금 윤은 이상한 말을 하고 있다. 지성도 없이 오로지 돈으로만 성균관에 부정적인 입학 허가를 받았다고 알고 있는 것이다. 찬우는 차마 여인에게 화를 낼 수 없어서 계속 얼굴을 구기고만 있었다.
"도련님의 아버지께서는, 대체적으로 무슨 일을 하십니까?"
"그걸 왜 궁금해하시는지."
"소녀가 도련님께 관심이 가 그럽니다."
"……."
방금 마주쳐놓고 저런 말을 하는 그녀가 우스워서 찬우는 잠깐 침묵했다. 윤과의 대화를 빨리 끝내고 싶었다. 그는 그러기 위해선 얼른 대답을 하는 것으로 그녀의 궁금증을 풀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양 곳곳에 제자를 두시고, 그림 혹은 비단을 짜게 하시어 중국이나 다른 지역에 값을 받고 팔고 계십니다. 가끔 시장에 작은 화분이나 조각도를 파는 날도 있습니다. 외에도 여러 무역 일을 하십니다."
"흠, 왜 가장 중요한 걸 빼놓으십니까?"
"……."
"도련님의 정 씨 일파를 크게 부흥하게 하는 일, 그것을 왜 빼놓고 말씀하십니까."
윤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찬우는 엉뚱한 말을 입에 담고 있는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다.
"도련님의 아버지께서 살인 청부를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누가 그런 소릴 합니까? 아닙니다! 아버지는 그저……."
"청부를 끝낸 뒤 손에 쥐게 되는 값이 대단하시다고, 그렇게 들었습니다."
"……."
"왜 그렇게 놀란 얼굴을 하십니까? 설마 줄곧 모르셨다거나, 그런 건 아니시지요?"
"……."
"도련님께서 늘 향나무 냄새를 달고 다니시는 이유를 이제 알겠습니다. 시체 처리를 위해 가장 많이 쓰이는 것이 바로 향나무가 아닙니까. 댁에 심어진 향나무가 많이 있지요? 그게 다 시체의 썩은 향을 감추기 위한 존재들입니다. 그것들을 바로 곁에 두고 생활하실 테니, 그 향이 몸에 베일 수밖에요."
"…오해를 하신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그런 일을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대대로 이어지는 양반 가문이 아니시면서 고작 비단 몇 필을 만들어 타지에 판다고 그런 부귀를 누릴 수는 없습니다. 다 도련님의 아버지께서, 비밀스럽게 이뤄지던 청부를 도맡아 하셨기 때문입니다."
"……."
"그리고 가장 마지막 청부로, 누군가를 대신하시어 돌아가신 세자저하의 심장을 찌르셨기 때문입니다."
아마 그 마지막 청부로 어떤 것과 비할 바 없는 금전을 손에 넣으셨을 겁니다. 막힘 없이 모든 것을 털어놓는 그녀의 입이 태연하게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찬우는 어지러운 속을 참지 못하고 잠시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충격적인 사실에 머릿속 모든 것이 깨끗하게 지워졌다. 윤이 말한 것이 모두 사실인지, 사실이라면 그녀가 어떻게 그러한 것들을 알게 됐는지 찬우는 의심스러워졌다.
사실일 리 없다. 모두 거짓일 것이다. 윤이 어떤 오해를 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찬우는 부정하고 싶었다.
"설령, 도련님께서 모든 것을 모르셨어도 그런 아버지를 둔 죄는 피하실 수 없을 것입니다."
신경이 아득해졌다. 윤이 뱉는 말 하나 하나가 긴 꼬챙이가 되어서 성대를 찌르는 것 같았다. 그녀는 갑자기 나타나 자신도 모르고 있던 엄청난 것들을 알려주었고 천진하게 미소 지었다. 찬우는 이 모든 걸 납득할 수 없어서 조금 떨리는 손길로 전집 몇 권의 끝을 만지작거렸다. 마음에 소용돌이가 쳤다.
"도련님께서 앞으로 저와 몇 번만 만나주시면 입을 다물겠습니다. 원하신다면, 훗날 제가 가지게 될 힘을 도련님께도 나누어드릴 수 있습니다."
"…무슨 뜻으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기껏해야 형사취수혼입니다. 그 만남이 오래 지속될 일은 없을 겁니다. 이제 저하의 힘을 함께하는 건 누구도 아닌 제가 될 것입니다."
"……어째서 함부로 입을 놀리십니까! 이 이상으로 세자빈에게 모욕될 말을 하시면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
"음, 당장 의금부로 끌려가 목을 잘리셔도 좋으십니까? 상관 없으시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저는 모든 것을 말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입 닥치라는 소리였다. 찬우는 깊게 혓바닥을 씹었다.
"지금, 저하의 동생 분께서 모든 죄를 덮어쓰게 되셨습니다. 다 도련님의 부친 때문입니다."
"……."
"깊게 고민하실 필요가 없는 일입니다. 그저 앞으로 제 얼굴을 몇 번만 보아주시면 됩니다."
윤이 설득했다. 윤의 편에 서게 되면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 만일 그녀의 제안을 거절한다면, 집은 그대로 풍비박산이 될 것이다. 찬우는 천천히 손톱을 씹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을 그녀에게 말해야 할지, 망설여졌다. 그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말해도 윤은 믿지 않을 것이다. 변명으로 알아들을 게 뻔했다.
윤은 나름의 생각이 있었다. 그녀는 세자빈이 싫었다. 갑자기 나타나 예쁘지 않은 얼굴로 세자의 곁을 차지한 그녀가 정말 죽도록 밉고 싫었다. 그래서 윤은 똑같이 되갚아주고자 했다. 차근차근 그녀의 사람을 모두 제 것으로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윤은 하루 빨리 그녀를 밀어내고 다시 세자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었다. 세자는 며칠 전부터 편지하지 않았고, 마치 자신을 말끔히 잊은 것처럼 궁의 일을 알려주지 않았다. 윤은 찬우의 약점을 잡고 그를 영영 잡아둘 작정이었다. 그녀의 앞에서 찬우와 사랑할 생각이었다. 그녀로부터 느꼈던 감정 모두를 똑같이, 조금의 오차도 없이 알려줄 것이었다.
윤은 찬우를 쳐다보며 선명하게 웃었다. 사랑을 위해서라면, 그녀는 또 다른 사랑을 시작할 수 있었다. 결정적으로 찬우는 의외로 순진했다.
15
잠이 쏟아졌다. 벌써 며칠째 똑같은 하루가 반복되고 있다. 지루하다. 지금 펼치고 있는 서책을 찢고 싶을 정도로 졸리고 지루하다. 나는 이 평화로움을 가능하면 좋은 쪽으로 생각하고 싶었지만, 지속되는 일상이 슬슬 지겨워졌으므로 이제는 마냥 달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무언가 특별한 일이 나타나야 했다. 하지만 나는 아직 한빈과 스스럼 없이 지낼 수 없어서 그에게 모든 것을 토로할 수 없었고 응석을 부릴 수도 없었다. 그를 편안히 볼 수만 있다면 진작부터 궁 말고 다른 곳을 가자고 보챘을 것이다. 물론 그가 그 부탁을 들어줄 일은 없겠지만.
아무튼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나는 지금 정말 미치도록 심심하고 따분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결국 서책을 덮었고 화각함 안에 몰래 보관하기 시작한 일기장을 꺼냈다. 일기를 써야겠다고 다짐한 날부터 밀리지 않게 꼬박꼬박 기록했기 때문에 잡히는 종이가 꽤 두툼했다. 사실 일기라고 할 것도 없었다. 그냥 매일이 반복되기 때문에 어제가 오늘이었고 오늘이 내일이었다. 그래서 약 열 장의 일기는 서로 내용이 비슷했다.
일기의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건 준회였다. 왜 그런지는 나도 모른다. 그냥 준회, 그 단어가 나오면 쓸 것이 많아졌다. 나는 그에 대해 글씨를 적노라면 왠지 모르게 짝사랑 중인 사춘기 소녀가 된 것만 같아서 누가 보지도 않는데 열심히 팔로 종이를 가려야만 했다. 나는 그가 나에게 뭔지 한 번 생각했다. 그는 호위무사다. 나에게 그가 어떤 존재인지는 그 문장 하나로 완벽한 설명이 가능했다. 그런데도 내가 그에 대해 적어가는 건 비정상적으로 많았다. 그는 단지 호위무사일 뿐인데 어느 순간부터 그렇게 보이지 않을 때가 많아졌다.
준회는 그 날 이후로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이상한 말을 하지도 않았고 내 마음을 복잡하게 하지도 않았다. 그는 내게 선을 그었고, 그 선은 영원히 지속되는 철조망처럼 나를 분단시켰다. 내가 그로부터 분단되었음을 알게 된 건 그가 내게 먼저 말을 걸어오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을 때였다. 아마 일주일 전 쯤이었다. 나는 그 때 그걸 깨달았고 그는 정말로 그 후로는 먼저 아는 척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그에게 그런 짓을 하는 나름의 이유가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이틀 전에 문안을 올리고 돌아오는 길에 문득 그에게 덥다고 말했더니, 그는 별 다른 대꾸 없이 나를 어딘가로 데리고 갔다. 거기는 자선당과 한참 떨어진, 궁의 끄트머리 쯤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거대한 돌 무덤처럼 보였다. 느닷 없이 찬 바람이 부는 것 같아서 어깨가 으스스했다. 준회는 나한테, 기다리고 있겠으니 그 안에 잠깐 들어갔다가 나오라고 했다. 나는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곳에 발을 들이기 싫었지만 그대로 말하면 준회한테 오해를 살 것 같아서 그냥 참고 걸음을 옮겼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그 곳은 석빙고였다. 아직 냉장고가 개발되지 않은 궁에서는 지하에 창고를 뚫고 그 곳에 여름에 쓸 얼음들을 저장한다고 했다. 그 안에 들어가면 시원한 것보다는 쌀쌀하고 춥다는 느낌이 더 강하게 들었다. 그래도 어느 정도 열을 식히는 데에는 탁월해서 나는 어제에도 그와 함께 그 곳에 갔다 왔다.
한빈의 얼굴을 보는 건 아침과 저녁에 문안을 드릴 때, 그리고 아주 가끔씩 같이 밥을 먹을 때가 전부였다. 그는 내 남편이면서 어떻게 된 게 얼굴을 보기가 하늘의 별 따기와도 같았다. 게다가 그는 말할 때 오로지 정면만 쳐다보는 버릇 아닌 버릇이 있어서 같이 있는 순간에도 내가 그의 얼굴을 볼 일은 극히 드물었다. 그는 가끔 공부를 하다 말고 비현각으로 가 여러 사람들과 진지하게 회의를 하는 것 같기도 했는데, 이건 그저 마침 그 때 마당을 거닐고 있어서 알게 된 평범한 사실일 뿐이다. 절대로 그의 모습을 훔쳐본 건 아니었다. 절대로.
윤형과는 거의 하루에 두 번 꼴로 마주치고는 했다. 항상 산책을 하고 있을 때 어쩌다가 그를 만나게 되는 식이었다. 이 엄청난 우연의 일치가 하루도 빠짐 없이 계속되다 보니 나중에는 어쩌면 그가 산책 중인 나를 늘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이상한 착각마저 들었다. 그에게 궁 생활이 힘들지 않느냐고 물으면 그는 한결 같은 미소를 지으며 괜찮다고 대답했다. 그와 좀 더 얘기를 나누고 싶어도 옆에서 준회가 이만 대화를 끝내라는 눈치를 줘서 그럴 수가 없었다. 그와의 대화는 항상 내 쪽에서 일방적으로 끝나고는 했다.
"마마, 저하께서 만나시길 희망하십니다."
나는 서책을 덮고 지겹게 두드리고 있던 손가락을 멈췄다. 반가운 소식이었다. 드디어 무료하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서 나는 얼른 몸을 일으키고 단장을 했다. 통풍이 잘 되는 얇은 모시 옷에 습관적으로 주머니를 달았다. 나는 그가 나를 부르는 이유를 짐작해보면서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궁녀 몇 명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지금 저하께선 어디에 계십니까?"
"예, 자선당 뒤쪽에서 아우 분과 함께 검술을 겨루고 계십니다."
"…그렇습니까, 잘 알겠습니다."
나는 신을 신겨주겠다는 그녀들을 사양하고 자선당을 나왔다. 마당엔 준회가 홀로 외롭게 서 있었다. 그는 나를 보고도 먼저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나는 말 없이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런 그가 버릇 없이 느껴진 건 아니다. 그냥 조금 슬퍼졌다. 준회는 나에 대한 선을 지우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를 알려주지도 않을 것이다.
"……날이, 많이 덥지?"
"괜찮습니다."
오고 가는 말 없이 같이 걸음을 옮기려니 어색해서 간신히 용기를 냈는데, 그건 곧 무가치해졌다. 준회는 나와 말을 섞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조금 무안하게 고갤 끄덕이며 걸었다. 기껏 걱정해 물었더니 돌아오는 대답은 여전히 변함 없었다.
자선당을 막 돌았을 때 가장 먼저 보인 모습이 동혁이 한빈에게 칼을 겨누고 있는 것라서 나는 조금 놀랐다. 그러나 곧 크게 웃음을 터뜨리는 한빈의 얼굴에서 나는 안심하고 불안감을 지웠다. 저 둘은 지금 검술을 겨루고 있는 것이다. 걱정할 게 없었다. 한빈이 쥐고 있던 검을 내려놓았다. 항복의 의미였다. 이내 동혁도 한빈의 목 부근을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던 검을 내렸다. 오랜만에 보는 그의 표정이 쑥스러움에 한껏 젖어있었다.
"제법이다, 그동안 검 실력이 많이 늘었구나."
"아닙니다…. 아까 저하께서 저를 위해 일부러 검을 놓치지 않으셨습니까."
한빈은 동생을 많이 사랑하는지 좀처럼 보기 힘든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윤과 있을 때만 나오던 얼굴이었다. 이윽고 그가 조금 거친 동작으로 동혁의 뺨을 마구 비볐다. 그게 그의 나름의 애정 표현인 건지 동혁은 볼이 쓸려 아픈 내색은 않고 즐겁게 웃고 있었다. 그 둘과 조금 떨어진 곳에 곤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는 나를 알아보고 잠깐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이내 한빈도 내 존재를 알아차리곤 짧게 탄성했다. 동혁은 약간 놀란 얼굴을 하다가 내게 고개를 숙였다. 나는 천천히 그 둘에게로 다가갔다. 준회는 말도 없이 곤의 곁으로 갔다. 곤이 심각한 표정으로 준회에게 무언가를 속삭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한빈이 조금 큰 소리로 나를 불렀을 때, 그 때에서야 준회가 아닌 곳으로 눈을 돌릴 수 있었다.
"빈궁, 어떻습니까?"
"…예? 무엇이요?"
정말 몰라서 물은 것이었다.
"누구의 검 실력이 더 나은지 묻고 있는 것입니다."
"…아……."
나는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내가 본 건 동혁이 그에게로 검을 겨누고 있는 게 다였다. 그래서 누구의 실력이 더 나은지 판단이 불가능했다. 멀뚱멀뚱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한빈 때문에 곤란해졌다. 나는 눈치껏 그에게 말했다.
"그야……. 두 분 모두 훌륭하십니다."
"하, 그대도 참 눈치가 없으십니다. 이럴 땐 그냥 제 편을 들어주시는 겁니다."
대놓고 자기 편을 들어달라는 그가 웃겼다. 그는 내게 그렇게 말하고 정말로 토라진 것처럼 세모 같은 눈을 했다. 동혁은 그의 옆에서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런 그를 생각 없이 바라보고 있다가, 이내 그의 목선에서 수상한 흔적을 발견하고 나는 크게 놀랐다. 미세하지만 충분히 알아볼 수 있는 상처였다. 색이 약간 붉게 도드라진 게 화상 같기도 했고, 가벼운 철과상 같기도 했다. 그는 곧 내 시선을 의식하고 다급히 목을 가렸다. 나는 순전히 걱정스러워 그에게 물었다. 아까 검을 맞을 뻔한 건 한빈인데 왜 상처는 동혁이 가지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다치셨습니까? 어디, 상처를 좀……."
나는 무심코 그의 손을 잡아 내렸다. 그에 그는 화들짝 놀라면서 내 손을 뿌리쳤다. 갑자기 닿은 내 손에 체온이 없었던 모양이다. 많이 차가웠나. 그에게 괜히 미안해졌다. 한빈은 뭐가 뭔지 모르는 것 같았다. 그는 그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일전에 모서리에 목을 찧인 적이 있어서 생긴 상처입니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그대의 손을 거절한 건 죄송합니다. 그저……. 그저, 놀랐습니다."
동혁이 설명했다. 그러면서 옆에 있는 한빈의 눈치를 봤다. 한빈은 동생의 말에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나는 차분하지 못한 동혁의 음성에 그가 거짓말로 나를 속였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었다. 그가 내게 굳이 상처의 이유를 속이고자 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문득 주머니에 담긴 윤형의 연고를 떠올려냈다. 그걸 바른다면 금방 상처가 아물지 않을까. 하지만 동혁은 내가 그렇게 하도록 두지 않을 것 같았다. 가볍게 손이 스쳐도 얼굴을 붉히며 소스라치게 놀라던 사람이다. 아마 미안한 얼굴로 거절할 것이다. 나는 금방 그 생각을 접었다.
문득 곤이 다가와 둘의 검을 챙겨 치웠다. 그걸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한빈이 약간 장난스럽게 웃으며 동혁의 어깨를 잡았다.
"너, 제대로 글 공부를 가르친 게 틀림 없느냐?"
"…예?"
"살면서 그런 악필은 본 적이 없다. 조선 모든 여인들은 다 참한 글씨를 가지고 있을 줄 알았는데, 빈궁을 보니 아니더구나. 농간 따위가 아니다, 정말로 내가 가진 것보다도 한참 뒤떨어지는 글씨였다."
나는 동혁에게 내 서툰 글씨를 우스개로 팔아넘기고 있는 그가 싫어서 미간을 좁혔다. 그렇게 놀렸으면 됐지. 그에게까지 내 글씨를 낮게 평가하고 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빈은 애처럼 웃고 있었다.
"세자빈께선 용모가 아름다우시니 글씨 정도는 빼어나지 않으셔도 됩니다."
"뭐? 이제 보니 내 아우, 눈이 참 낮구나."
정말 저렇게 대놓고 사람한테 모욕을 주기도 힘들 것이다. 나는 그냥 체념했다. 그에게 살가운 태도를 바라는 것 자체가 모순이었다. 동혁은 그 말을 하면서 나를 보고 부드럽게 웃었다. 아무리 모친이 다르더라도 형제가 어쩜 저렇게 닮지 않을 수 있는지, 몇 번을 봐도 신기했다.
한빈은 이만 석강을 준비해야 한다면서 걸음을 옮길 준비했다. 멀리 떨어져 있던 곤과 준회가 빠르게 바짝 다가왔다. 나는 준회의 곁에 서며 약간 어두운 얼굴의 동혁을 쳐다봤다. 그는 왕비의 박대를 받는다. 궁과 조금 떨어진 곳에 홀로 살고 있다고 했다. 그런 그가 무슨 일로 오늘 궁을 찾아왔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묻지 않았다. 동혁의 얼굴이 점차 침울해지는 게 보여 그럴 수 없었다.
그는 굳이 길을 돌아서 걷자고 했다. 바로 궁 모퉁이를 돌면 보이는 게 자선당인데, 한빈은 방향을 바꿔 걷기 시작했다. 어째서 다리 아픈 일을 자초하는지, 그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동혁이 토를 달지 않기에 나도 잠자코 그를 따라 걸었다. 그는 궁의 담 전체를 산책하려는지 그 끝을 보며 움직이고 있었다. 대전과 점차 가까워지면서 나타나는 궁의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들은 갑작스런 세자의 등장에 적지 않게 놀라면서 고개를 숙였다. 쏟아지는 시선들에 마음이 불편했지만 내색하지 않기 위해 애썼다.
그러다가 갑자기 한빈이 걸음을 멈추었다. 느닷 없이 그친 그의 움직임 때문에 동혁이 약간 얼떨떨한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슬쩍 고개를 빼서 그를 바라보자, 한빈은 어느 곳을 향해 시선을 집중하고 미간을 좁히고 있었다. 이내 그는 표정을 풀었다. 그는 무서운 무표정으로 지시했다.
"다시 한 번 말해 보겠습니까."
"……예, 예? 저하, 무슨 말씀이신지…."
"방금 뇌까린 걸 내 앞에서 다시 한 번 입에 올리란 말입니다."
그가 상대하고 있는 것은 그다지 늙지 않은 신하 두 명이었다. 한빈의 말에 그 둘은 크게 당황하여 되물었다. 한빈은 이제 무표정을 지우고 인상을 썼다.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궁녀들은 놀란 얼굴로 입을 가리고 있었다. 신하들은 한빈의 물음에 대꾸할 마음이 없는지 그저 눈알을 좌우로 굴리고만 있었다.
한빈이 차게 웃었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옆에 있는 곤에게 명령했다.
"당장 저 둘의 목을 쳐라."
그 명령에 곤이 놀란 것처럼 눈을 깜빡거렸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사람 목숨을 먼지로 여기고 있는지 그는 방금 내린 지령에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의 말에 신하 둘이 빠르게 무릎을 꿇고 애원하기 시작했다. 주변의 웅성거림이 더욱 커졌다. 나는 준회의 표정이 궁금해서 문득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딱딱한 눈으로 한빈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어떤 말을 입에 담지는 않았다. 나는 그에게서 시선을 떼고 동혁을 쳐다봤다. 항상 얌전하던 그의 얼굴이 당황에 젖어 무너지고 있었다.
"…내 동생은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내 동생이 내 형을 죽인 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어째서 감히 그런 거짓된 소문을 입에 올리십니까! 죽어 마땅한 일입니다. 무얼 하냐, 이 자들을 당장 끌고 가지 않고!"
"아이고, 저하! 송구하옵니다! 부디 명을 거두시옵소서!"
주고 받는 대화로 대강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저 신하 두 명이 동혁에 대해 나쁜 말을 수군거린 모양이다. 그리고 하필이면 세자가 그걸 알아들었고. 한빈의 지시로 처형 당할 신하들이 불쌍하지 않았다. 동혁이 안쓰러웠다. 그는 이제 왕비가 아닌 모든 사람들로부터 눈총을 받고 있는 것이다. 한빈이 강압적으로 곤을 쳐다봤다. 어서 신하들을 데리고 가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곤은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양심과 명령 사이에서 크게 고민하는 것이리라.
소동 속에서 그 둘과 같이 무릎을 꿇은 건 동혁이었다. 그는 입술을 앙 다물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한빈을 올려다봤다. 한빈은 그런 동생을 무심하게 쳐다봤다. 날카로운 기류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동혁의 꽉 다물어진 잇새가 아파 보였다.
"…저하! 부디 명을 거둬주소서. 저는 그런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내가 들었다."
"……."
"내 동생을, 너를 욕되게 하는 걸 내가 들었다."
"저하……. 저를 욕되게 하는 것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제 존재가, 제 목숨이, 저를 묶어두고 저를 욕되게 할 뿐입니다."
동혁이 간청했다. 한빈은 그 발언에 짧게 숨을 토하면서 신하 둘을 쏘아봤다. 그들은 몸을 움찔하며 급히 고개를 숙였다. 주변에 일순간 정적이 돌았다.
"한 번만 더 같잖은 말을 입에 올리면 진정으로 혓바닥을 뽑을 것이니, 눈에 띄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그렇게 말하는 한빈의 눈 속에서 뜨거운 살기가 어른했다. 그는 곧 그 둘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곤에게 동혁을 궁의 입구까지 호위할 것을 부탁했다. 곤은 아까와는 다르게 싹싹하게 그 명을 받았다. 나는 새삼 그가 이 나라의 세자라는 것을 실감했다. 그는 말 한 마디로 사람의 목숨을 쥐고 비틀 수 있다. 누구보다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한빈은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이내 홀로 어디론가 걷기 시작했다. 나는 움직일 수 없었다. 동혁을 두고는 움직일 수 없었다. 한빈이 사라질 때까지, 신하들은 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나는 그것이 동혁에 대한 사죄의 눈물이 아니란 걸 알았다. 살았다는, 목숨을 보존했다는 안심에서 드러나는 그런 눈물이었다. 굳이 그들을 감싼 동혁이 답답했다. 저 둘은 동혁 덕분에 살아났지만 동혁에게 고개 숙이지 않았다. 분명 왕비의 곁에서 명을 받고 움직이는 신하들일 것이다. 왜 그토록 한빈이 분노했는지 알 것 같았다. 아무런 잘못 없는 동혁의 평판이 쓰러지는 것을 처음부터 지켜본 사람이다. 화내지 않는 게 이상하다.
동혁은 천천히 일어났다. 그는 굳은 얼굴로 나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동혁화 함께 이 곳으로부터 멀어지려는 곤에게 준회가 귀를 잡아 짧게 무언가를 속삭였다. 궁의 사람들은 이내 소란에 흥미를 잃고 각자 하던 일을 마저 하기 시작했다. 곤은 준회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고 이내 동혁의 곁을 지키며 멀어졌다.
"…가자. 준회야."
"세자빈."
"…응?"
"많이 보아두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준회가 그렇게 말하면서 점이 되어버린 동혁의 뒷모습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나는 말 없이 준회를 쳐다봤다. 그는 아주 천천히 등을 돌아 자선당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그 뒤를 따라갔다. 그의 말을 헤아리려고 애썼다.
"마지막일지도 모릅니다."
"뭐?"
"열흘 전, 내전마마로부터 궁의 출입을 금지 받으셨습니다."
"……."
특별히 칭하고 있는 사람이 없었지만 그게 누군지는 쉽게 알 수 있었다. 준회가 말하고 있는 이는 동혁이다. 그를 보는 게 지금이 마지막일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나는 왕비가 참 여러 의미에서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그토록 잔인하게 사람을 싫어할 수 있는지 존경스러울 지경이었다. 준회는 걸음을 계속하면서 말을 이었다.
"저하께서 그 사실을 아시고 크게 노하시어 오늘 직접 그 분을 궁으로 데려오셨습니다."
한빈은 왕비에게 대적할 마음이 있다. 그는, 동생을 지키려는 소신이 있다. 어느 정도는 마음이 놓였다. 한빈마저 동혁을 미워했더라면 나는 정말로 이 곳을 버텨낼 자신이 없었을 것이다.
"세자빈."
"…응."
"어제에 이어, 석빙고에 가시겠습니까."
그는 자선당에 도착해서 물었다. 나는 느리게 저물기 시작하고 있는 태양을 바라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차가운 바람을 쐬고 싶었다. 동혁에 대한 연민의 감정을 지우고 싶었다.
준회는 이후로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인적이 드문 석빙고 앞에 도착해서, 내가 그 안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 그는 나를 붙잡았다. 의아함에 뒤를 돌자 뚜렷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는 그가 보였다. 그는 내 팔을 붙잡고 한참 아무 말이 없었다. 팔을 붙든 손아귀가 거세서 나는 인상을 썼다. 그는 아프게 내 팔을 쥐고 있었다. 준회의 눈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없었다.
"…보여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뭔데?"
"……가서, 알려드리겠습니다."
"…어딜 가?"
그는 말 없이 석빙고 뒤로 뻗은 무성한 숲을 쳐다봤다. 나는 준회의 속셈을 알 수 없어서 혀로 입술을 축였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해가 저물 것이다. 밤이 찾아오고 있을 때 숲을 잃어버리면 그대로 미아가 되어 길을 찾지 못할 확률이 컸다. 나를 바라보는 준회의 두 눈이 아득했다. 복종하게 만드는 눈빛이었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저기에 뭐가 있는데? 뭘 보여주겠다는 거야?"
"사과를 드리고 싶습니다."
"……."
"사과를 드릴 때…. 함께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준회가, 선을 지우겠다고 했다. 나에게 사과하겠다고 했다. 나는 이미 일기의 대부분을 준회로 기록한다. 굳이 그의 말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해가 지기 전에는 돌아올 수 있습니다."
그가 분명하게 말했다. 나는 준회가 숲으로 걸음을 틀어 움직이는 것을 지켜보다가 가만히 그 뒤를 따라갔다. 작게 빠진 샛길을 이용해 숲을 오르는 그의 움직임이 능숙해 보여서 딱히 마음이 불안할 건 없었다.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밟히는 치맛단이 불편했다. 약간씩 걸음이 늦어지는 나를 준회가 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문득 내게로 손을 내밀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 손을 잡았다. 단단하게 손을 잡아 이끌던 그가 문득 중얼거렸다.
"정말로 마지막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슨 뜻이냐는 의미로 준회를 바라봤지만 그는 그런 내 시선을 무시했다. 어느덧 해는 아까보다 훨씬 기울어졌고 그에 따라 하늘은 점차 검붉게 변했다. 해가 지기 전에는 돌아갈 수 있다. 준회가 그렇게 말했다. 나는 그를 믿고 싶었고, 실제로 아주 오래 전부터 그렇게 하고 있었다.
숲의 정면을 향해 나아가던 걸음은 예쁜 색깔의 버섯 덩어리를 보고 멈췄다. 나는 생전 보지 못한 생물체가 신기해서 잠시 무릎을 굽히고 앉아 그것들을 구경했다. 늙은 나무 밑에 자라난 버섯은 방대한 양을 자랑하고 있었다. 손 끝으로 그걸 찔러보다가, 무심코 준회를 불렀다.
"준회야, 이것 봐. 신기하……."
나는 주변이 싸늘한 냉기를 뿜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급히 몸을 일으켰다. 준회가 없었다. 그가 보이지 않았다. 그가, 사라졌다. 나는 불안한 기색으로 숲의 사방을 둘러봤다. 손을 모아 크게 준회를 불렀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준회가 보이지 않았다. 겁이 나서 눈물이 핑 돌았다. 본격적으로 해가 지고 있었다. 서둘러 내려가지 않으면 틀림 없이 길을 잃고 말 것이었다. 나는 쿵쿵 울리는 심박을 애써 진정시키며 숨을 내쉬었다. 침착해야 한다. 왔던 길을 그대로 따라가면 무사히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준회가 밉다. 하지만 머릿속은 그걸 부정하고 있었다. 내 몸 속 누군가가 그가 나를 일부러 이런 상황에 놓이게 한 것이 아니라고, 그렇게 믿게끔 등을 떠밀고 있었다. 마음이 조급해져 급하게 걸음을 옮기다가 발을 헛디뎌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저절로 앓는 소리가 나왔다. 나는 금방 아무렇지 않게 일어났다. 서둘러야 했다. 아프다고 징징거려도, 이런 내 상황을 알아주는 사람은 지금 아무도 없다.
이상하게 같은 곳을 반복적으로 돌고 있는 느낌이었다. 나는 잠시 굵은 나무 옆에서 벅찬 숨을 토해냈다. 이미 주변은 캄캄해졌다. 태어나 처음 마주친 숲을 단숨에 헤쳐서 나가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눈물이 흐르는 걸 손등으로 닦아내었다. 울어도 나아질 건 전혀 없는데 자꾸만 눈물이 나왔다. 솔직히 말하자면 겁이 났다. 그러면서 처음으로 떠오른 게 한빈이었다. 처음으로, 그가 보고 싶어졌다.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준회인 줄 알고 재빠르게 등을 돌렸지만 아무도 없었다. 불안은 순식간에 증폭됐다. 나는 느리게 주변을 살폈다. 아무 것도 없었다.
그랬으면 좋았겠지만, 저 멀리 나무 뒤에서 무언가가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암흑 속에서 두 개의 눈동자가 살벌하게 빛나고 있었다. 짐승이다. 송곳니를 가진 맹수였다. 호랑이였다. 흉흉하게 번뜩이고 있는 눈이 내게로 고정되고 있었다. 두려워서 숨이 멈췄다. 도망칠 수 없었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 짐승은 입을 벌려 혓바닥을 내밀고 있었고, 그건 나를 먹겠다는 일종의 신호와도 같은 것이었다. 여기는 조선이다. 해가 저문 숲에 맹수가 나타나는 건 그렇게 특별한 일이 아니다. 그 거대한 털북숭이가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마음 속으로 한빈의 이름을 계속해서 외치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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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자: 결혼하지 않은 여자를 높이 부르는 말.
*화각함: 쇠뿔에 그림을 그려 나무 종이를 붙여 장식한 공예품. 주로 옷이나 예물 등을 담는다.
*석빙고: 얼음을 저장하기 위해 만든 창고.
*일전: 며칠 전.
*석강: 저녁 공부.
안녕하세요 독자 님들~
새해가 시작되고 벌써 일주일이 넘었네요! 저는 신년 계획으로 다이어트를 결심했지만...
오빠가 어제 피자를 시키는 바람에 깔끔하게 관뒀답니다. ㅎㅎ
글이 진짜 너무 심각하게 재미가 없어서 중간에 사진을... 한번... 넣어봤는데... 어떤가요...? (소심)
사진은 초록창에서 가져왔는데 혹시나 문제가 된다면 즉시 내리겠습니다 댓글로 알려주셔요...☆
감사해요!!!!!!!!!!! (큰절)!!!!!!!!
항상 달아주시는 댓글은 모두 정독하고 있답니다...
보면서 가끔... 눈물도 흘려요 엉엉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감사합니다 항상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바나나킥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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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비니 님
콩기름 님
뽀로로 님
준회 님
외에도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은 러브(찡긋)
힘들게 댓글 남겨주시는 비회원 독자 님들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안녕!!!
사랑해요!!!!!!!!!!!!!!!
진심으로!!!!!!!!!!!!!!!!!!!!!!!!!!!!!!!! ㅠㅠㅠ
한양 15편 감상평 예상 : 찬우야 도망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