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 베이빈
- 본가에 갔었던 모양인데 내가 도착했을 땐 없었어. 그 주위 상가며 골목이며 다 찾아봤어.
씨발 오세훈 그러게 내가 말했지. 끝까지 책임 못질거면 시작도 하지 말라고.
전화기 너머로 격앙된듯한 목소리가 귓전에 꽂혔다. 뭐라 대꾸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결국 집에서 봐. 하곤 끊긴 전화를 조수석으로 아무렇게나 던진다.
자꾸만 안좋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점령한다. 유난히 차분했던 경수의 목소리와 닮아있는 준면의 말투, 흰 살결, 자그맣던 몸.
가뜩이나 약해졌을 몸으로 누구하나 도와주는 이 없이 이 차가운 거리를 전전할 모습을 상상하니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두번이나 잃을 수는 없어.어떻게 찾은 사람인데, 어떻게 만난 사랑인데...
세훈이 운전석에 기대어 몇번 숨을 고르고는 애써 정신을 집중했다. 너무 먼 곳에 있는게 아니라면...
뿌옇던 머릿속에서 점점 선명해지는 잔상. 피딱지가 덕지덕지 붙어있는 발. 축 늘어진 어깨. 초점없는 눈동자. 옆은 차들이 달리고 있는 도로.
가슴높이의 난간 너머 새까맣게 흐르는 깊은 강물. 별안간 뚝 멈추는 발걸음. 마른 손이 차디찬 난간을 쥔다.
"...!!!"
눈을 뜬 세훈이 당장 비명이라도 지를 것 같은 얼굴로 급하게 시동을 걸었다.
* * *
시린 겨울 바람에 검은 머리칼이 이리저리 흩날렸다. 난간을 붙잡은 손끝이 깨질듯 시려온다.
천천히 내려다 본 강물은 검은색인지 파란색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새파랗다.
"....아."
발등이 뜨거워 내려다 봤더니 사타구니부터 흐르던 피가 발등을 덮고 있었다. 희던 바지는 잔쯕 붉어져 있었고, 본능적으로 직감한다. 아이는 죽었어.
어쩐지 그렇게나 아프더라니. 점점 거칠어지는 숨을 시작으로 어깨가 들썩일 때까지 울었다.
이름도 없고, 이들인지 딸인지도 모르는 내 아이, 나중에라도 만나게 되면 예쁜 이름을 지어줄게. 서툰 엄마를 원망해도 돼. 일그러진 얼굴로 울음을 뱉으며 휘청이다
폭이 좁은 난간 위에 걸터 앉는다. 언제부턴지 허리 아래로는 감각이 없다. 나와 가족을 버리고 떠난 어머니를, 나를 버린 아버지를, 나를 난도질한 이들을,
내가 오메가라는 사실을 저주한다.
실핏줄이 터져 빨개진 눈으로 올려다 보는 하늘이 구름한점 없이 화창하다.
"김준면!!!"
차들이 무서운 속도로 지나다니는 도로를 사이에 두고, 세훈이 흥분한 얼굴로 목에 핏대를 세우고 있었다.
세훈의 시선이 준면의 하체에 못박힌듯 꽂혀있다가 천천히 내려가 핏방을이 뚝뚝 떨어지는, 허공에서 흔들거리는 발끝으로 내려갔다.
미안해, 당신 아이는 이제 없어요.
"뭐하는짓이야! 거기서 내려와! 미쳤어 너?!"
준면이 고개를 두어번 저어보였다. 세훈은 세상이 무너진듯 창백해진 안색과 흔들리는 눈빛이었다.
"허튼생각 말고 내려와!"
나는, 나는 이러려고 널 데려온게 아닌데. 이러려고 널 안은것도, 네 집안을 몰락시킨것도 아닌데.
처음부터 너에게서 옛연인의 모습을 보려고 한 잘못인걸까.
기억할게요 당신.
이 작은 목소리가 그만치 들릴리가 없을텐데도 그의 얼굴이 돌처럼 굳었다. 털썩 주저앉는 무릎.
내가 죽은 뒤에 누구라도 좋으니 한명이라도 울어줬으면. 날 기억하는 사람이 하나라도 남아 있었으면.
살아서 비극이던 인생이 죽어서는 해피엔딩이기를.
준면이 은하수같은 수면속으로 잠겨들었다.
* * *
우리는- 결코 고인의 죽음을 잊어서는 안될것이며- 그의 혼과 넋을 기리고-...
장례식이 한창인 성당의 맨 뒤. 우중충한 검은색의 수트를 입은 찬열이 표정이없는 얼굴로 기다란 의자에 앉아있다가 손목의 시계를 확인하더니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빠져나간다. 성당의 입구에는 故오세훈. 준면의 시체는 찾지 못했다.
희끄무레한 꽃이 질서없이 장식 된 화환을 잠시나마 멍 하니 보다가 쓰게 웃으며 고개를 돌린다.
차에 올라타자 마자 울리는 전화에 살짝 표정을 구기다 부재중이 5통이었던걸 기억해내곤 하는 수 없이 받아든다.
운전석에 올라
-여보세요? 닥터 박? 지금 병원 바쁜데 외출시간이 그리 지체되면 어떡해! 응급환자 밀려들어오고 있는거 몰라?
"지금 갑니다."
-최대한 빨리 와!
대답없이 전화를 끊은 찬열이 핸들을 쥐었다.
세훈은 전처럼 오열하지 않았다. 그저 사나흘 감정을 잃은 사람처럼 있다가 잠든듯이 죽었을 뿐.
혈통이 혈통인지라 쉽게 죽지는 못했을 것이다. 침대에서 발견된 그의 머리엔 총알이 지나간 자국이 남아있었으니까.
운전대에 앉은 찬열이 마른세수를 했다. 세훈은 경수가 뿌려졌던 바다에 뿌려질 예정이다. 강물이 흐르다 보면 준면을 만날 수도 있겠지.
세상을 보지 못하고 사라진 안타까운 두 생명도.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