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 수호 : 오빠입니다
EP2. 세훈 : 오! 마이 로미오!
EP3. 종인 : 무지개같은 머스마
무지개같은 머스마 : 무지 개같은 머스마
평화로운 일요일 아침, 정신은 깨어났지만 아직 몸이 안깨어난 관계로 눈만 감고 침대 위에 누워있는데 덕수가 자꾸 내 이불을 끌어당긴다. 저 놈 자식 병원에서 영양제 맞춰주고 집에 와서도 영양제 먹더니 힘이 남아도나.. 인상을 쓰며 덕수야... 하지마.. 하고 손을 휘적거리자 더 세게 이불을 잡아당기는 녀석. 지금 밥달라고 시위하는 건가보다.
그래 우리 덕수 또 아프면 안되지.. 어젯밤까지 자지않고 핸드폰만 하느라 팅팅 부은 눈으로 허리를 일으켜 세우자 이게 웬일, 방구석에서 찹찹거리며 사료를 먹고있는 덕수.
뭔가 싶어 고개를 돌리자 한껏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있는 오세훈이 보였다.멍하니 올려다보는데 내 얼굴을 향해 에푸롹챠!!! 재채기를 하는 오세훈에 으엉, 이상한 소리를 내자 내 어깨를 힘을 주어 민다.
" 으엉은 무슨 으엉이야,빨리 일어나라고 "
" 아 왜 아침부터 지랄이야 "
" 니 종인이랑 약속했다며!! "
... 내가? 뭔 소리? 갑작스러운 김종인이란 이름에 눈을 억지로 치켜뜨자 아 존나 못생겼네, 하며 고개를 돌려버리는 오세훈. 너무하네...
" 내가 걔랑 무슨 약속을 해 "
" 종인이 개 데리고 밑에서 기다리고있대 "
" 그니까 내가 걔랑 무슨 약속을 하냐고 "
" 같이 개들 산책시켜주기로 했다며!! "
그리고는 답답한 년! 하며 방을 나가버린다. 저새끼 누나한테 하는 말본새 좀 보소... 킁, 코를 들이마시다 화장실이 급해 방을 나가니 거실 쇼파에 누워있던 오세훈이 자꾸 재촉한다.
" 빨리 준비하고 나가라고!! "
" 근데 내가 언제 걔랑 약속했냐? "
" 저번에 덕수 아플 때 "
...
' 자고로 스트레스는 친구들이랑 놀면 풀리잖아요 '
' 근데 '
' 우리 강아지들이랑 놀게해요, 우리 몽구,짱구,짱아랑 '
' 우리 같이 산책해요 '
.. 그랬구나... 이제야 그때의 기억이 떠오른 나는 강한 납득을 하며 화장실에 들어갔다. 막 일어나서 산발을 한 상태로 거울을 보니 진짜 더 못생긴 것 같다. 같은게 아니라 더 못생겨진건가... 남자애 만나려면 세수도 하고 썬크림도 바르고 비비도 바르고 틴트도 바르고 눈썹도 그리고, 해야할 게 천지인데 그걸 언제 다하나.. 맞아, 나 밥도 못먹었지. 게다가 지금 밑에서 김종인이 기다리고 있다고하니 마음만 조급해진다.
야성미 넘치게 씻고 거실로 나오자 엄마가 얼른 밥 먹으라며 내 찰진 엉덩이를 치고간다. 수건으로 얼굴을 슬슬 닦으며 차려진 밥냄새를 맡는데 고문이다 고문, 엄마가 기껏 차려줬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
" 산책 갔다와서 먹을게 "
" 웬 산책? "
" 덕수, 그리고 지금 밑에 애 하나 기다리고있어 "
" 애? "
엄마의 물음에 차마 오세훈 친구라고 박력넘치게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 서있자 건방진 자세로 누워있던 오세훈이 낄낄 거리며 웃었다. 제발 헥토파스칼킥 한 번만 날리게 해줘
" 내 친구 "
" 아들 친구??? 네가 어떻게 세훈이 친구하고 산책을 해? "
" 걔도 개 기른다고 해서, 덕수 친구 만들어줄겸 "
대충 얼버무리자 너무 가볍게 설득당한 엄마는 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빠릿빠릿하게 방안으로 들어가 얼굴에 치덕치덕 기초부터 바르는데 문뜩 이게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든다. 김종인이 뭐라고했지, 내츄럴? 내츄럴한 게 좋다고 했지 아마? 김종인이 했던 말을 곱씹으며 빤히 거울 속의 나를 바라보는데 이건 내츄럴함이 아니라 그냥 자연 속에 풀어놓은 야생마 같다.
도대체 김종인이 말하는 내츄럴함이 뭔지 가만히 서서 생각하는데,
내가 왜 그런 걸 신경쓰지? 한낱 고등학교도 졸업 못한 고삼 남자애의 말인데?
제기랄 내가 그런 고삐리한테 휘둘리다니. 또 그렇다고 풀메이크업을 하고 나갈 수도 없는 일. 혼란스러움에 무섭게 거울만 노려보던 나는 머리만 대강 묶고 츄리닝으로 갈아입었다. 됐어, 내가 걔한테 잘보일게 뭐가 있어. 바닥에 앉아 양말을 신으며 사료를 다먹고 뛰노는 덕수를 불렀다.
덕수야, 하고 부르는 내 목소리에 쫑쫑 달려오는 하얀 솜뭉치. 영양제 살 때만해도 좋은 사료라는게 있는 지도 몰라서 안샀는데 그날 김종인이 집으로 돌아가면서 추천해주고간 고급 사료를 먹이니 애가 더 윤이 도는 것 같다.
우리 집 식구들도 덕수를 어느정도 받아들인 모양인지 내가 밖에 있을 때는 알아서 시간 맞춰서 사료까지 챙겨주니 더더욱 보내주기 싫어진다. 어떻게 보내 이걸... 안타까움에 덕수만 애타게 쓰다듬다가 이내 바닥에 뒹굴고있던 목줄을 채워주었다.
" 가자, 누나가 친구 만들어줄게 "
.
.
.
" 너 지금 나한테 끼부리니? "
" 네 "
덕수를 데리고 밖으로 나오자마자 갈색빛이 도는 커다란 푸들 한 마리만 데리고 나온 김종인이 금세 나를 발견하곤 누나, 하며 끼를 부린다. 어줍잖은 끼는 무시하고 김종인네 개를 보는데 얘 세마리 키운다고 하지 않았나? 왜 한 마리만 있을까. 아무 생각 없이 김종인에게 다가가자 다리를 바닥에 딱 붙이고 좀처럼 움직이지않는 덕수.
" 왜 그래 덕수야, 친구야. 가서 안녕 친구야! 해 "
" 형인데, 몽구형아 "
" 거참, 그럼 덕수야, 가서 안녕~ 몽구형아~ 해 "
하지만 덕수는 여전히 내 뒤에 숨어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얘 우리 집 처음 왔을 때에는 방방 뛰놀더니 개한테는 낯을 가리네. 강제로 얼른 친해져야지!!! 하고 몽구 옆에 붙여놨다가 또 스트레스 받아서 위염이라도 걸리면 큰일이니 곤란한 표정만 지어보였다. 몽구는 눈을 반짝거리는게 덕수랑 친해지고 싶은 모양인데...
내 뒤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 덕수를 빙그레 웃으며 내려보던 김종인이 말했다.
" 그럼 누나 먼저 걸어가봐요, 내가 뒤따라서 걸을게 "
" 덕수랑 몽구는 언제 친해져 "
" 다 방법이 있다니까? "
은근히 김종인이 말을 놓는 것 같지만 저쯤이야.. 맨날 야! 돼지야! 라고 부르는 오세훈보다는 양반이다. 다 방법이 있다며 호언장담하는 김종인에 떠밀려 먼저 걷기 시작하자 덕수도 나를 따라 발을 떼었다. 한 대여섯 발자국 쯤 걷고나서 뒤를 힐끔 쳐다보자 그제야 천천히 나를 따라오는 김종인.
사이에 약간의 틈이 있지만 말은 어느정도 들릴 만한 거리라 야, 하고 먼저 김종인에게 말을 걸었다.
" 너 개 세 마리 키운다며 "
" 네, 몽구,짱구,짱아 "
" 근데 왜 몽구만 데려왔어? "
" 다 데려오면 내가 끌려다닐 것 같아서요 "
아하, 인정. 그리고 덕수도 더 무서워 하겠지, 몽구 하나 뿐인데도 이렇게 무서워 하니까. 더이상 진전되지 못하는 대화에 입을 닫고 보도블럭을 따라 걷는데 덕수의 긴장이 풀려 걸음 속도가 조금 더 빨라질 때 즈음 김종인이 슬금슬금 내 옆으로와 발을 맞추었다. 다행히 덕수는 몽구를 피해 조금 옆으로 피해가긴 했지만 발을 멈추지는 않는다.김종인 얘 좀 똑똑한데?
" 오, 야 너 대박이다 "
" 그쵸, 얘네 이제 곧있으면 서로 막 뛰어다니면서 잘 놀 걸요 "
" 너가 확실히 개를 키워봐서 뭘 좀 안다 "
내 칭찬같지도 않은 칭찬에 괜히 제 뒷덜미를 긁적거린다. 부끄러워하는 거 보니까 좀 고딩같다. 오세훈이랑 쌍으로 키만 큰데다가 세게 생겨서 오빠같았는데. 앞에서 덕수에게 은근슬쩍 장난을 거는 몽구를 뿌듯하게 쳐다보고 있으니 작게 내게 말을 거는 김종인.
" 누나 오늘 좀 이쁜 거 같아요 "
" 작업 걸지 마 "
" 왜요, 딱 내가 말한 내츄럴함이야 "
어디서 주워들은 멘트로 사람을 후려칠려고...단호하게 작업 걸지 말라고 대답했지만 사실 나는 쉬운 여자라서 어디서 주워들은 멘트로도 내 심장 박동수를 올릴 수 있는 능력자다. 얘가 어디서 누나 심장 때리는 방법 좀 배웠나본데...
달아오르려는 얼굴을 손등으로 한 번 매만지고 목줄 손잡이를 고쳐 잡았다. 하지만 붉어진 얼굴은 감출 수 없는 모양인지 김종인은 내 얼굴을 보고 푸훗하고 웃음을 터뜨린다.
" 빨개졌다, 이쁘다는 소리 해주면 좋아할 거면서 "
" 야 진짜 너 오세훈이랑 같은 학원 다니냐? "
" 네? 무슨 학원? "
쳐맞는 방법을 알려주는 학원.
나를 지긋이 바라보는 김종인의 시선을 쳐내고 됐다 됐어, 하며 고개를 저었다.
오늘따라 왜 이리 덥지, 봄이 짧다 짧다하니까 아예 사라져버리고 벌써부터 여름인 것 같다. 후덥지근한 공기에 후, 심호흡을 하자 생글생글 웃으며 걷던 김종인이 난데없이 어, 하고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그러면서 걸음을 멈추고 자신의 볼을 한 번 쓰는데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 왜? "
" 아니, 오늘 저녁부터 비온다고 했는데 "
" 뭐? "
" 물방울 떨어져요 "
물방울? 하고 하늘을 올려다 보자 하늘에는 그저 말간 구름만이 동동 떠다닐 뿐이다. 습기가 차긴하는데 딱히 비 올 것 같지도 않고, 새똥 아니야? 하고 농담을 치자 으악!! 괴성을 지르며 제 손바닥을 내 팔뚝에 문지른다.
" 미친! 뭐하냐!? "
" 새똥이라면서요!! "
" 농담이지!! "
농담이라는 말에 김종인은 아 뭐야, 하며 뻔뻔하게 다시 걸음을 옮긴다. 얘 순 개에 대해서만 많이 알지 백치미 넘치는게... 왜 오세훈 친구인지 알겠다.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먼저 걸어나가는 김종인의 뒤통수만 노려보았다.
서서히 김종인이 멀어질 때 나도 한발짝 발을 떼는데 톡, 하고 무언가 팔뚝에 떨어지는 느낌이 든다. 혹시 진짜 새똥? 하며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새는 커녕 아무것도 없다. 뭘까, 하고 한참동안 하늘을 올려다보자 멀리서 김종인이 누나 뭐해요! 하고 나를 불렀다.
" 야 종인아! 진짜 저녁부터 비온대? "
크게 외치자 내쪽으로 돌아오는 김종인
" 네, 오늘 아침 일기예보에서 그러던데. 왜요? 누나도 새똥 맞았어요? "
" 물방울 떨어지는 거 같아서 "
" 기상청이 저녁부터 비 온다고 했는데... "
" 세상에서 믿지 말아야 할 10가지 중에 하나가 기상청이야 "
" 나머지 9가지는? "
" 몰라 "
가끔가다보면 진짜 구름도 한 점없이 맑은 하늘에서 소나기가 쏟아지는 때가 있어 산책은 나중에 할까, 하고 김종인에게 말을 하려던 찰나, 톡토톡 하고 얼굴 위로 물방울이 수차례 떨어졌다. 김종인도 그를 느꼈는지 맹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 본다.
" 비오네요 "
" 그니까 "
" 누나 말이 맞아요 "
" 뭐 "
" 세상에서 믿지 말아야 할 10가지 중에 하나가 기상청이라는 거 "
그래, 그럼 비가 오면 맞지만 말고 피해야되지 않겠니..? 정신없이 걷다보니 어느새 우리 집에서 꽤나 멀리 떨어진 곳 까지 와버렸다.
조급한 마음이 들어 김종인의 팔을 잡고 집쪽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는데 빗방울의 수가 점점 눈에 띄게 늘어갔고 톡톡 거리던 빗소리는 어느새 솨아아 하는 거센 소리로 바뀌었다.
겨울이면 후드라도 쓰고 걸어갔을텐데 반팔 차림인 나머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발이 붙잡힌 우리는 세차게 내리는 비사이로 허둥지둥 거리다가 임시방편으로 근처에 있는 아파트 공동 현관으로 몸을 피했다.
" 와 진짜 대박 "
" 너는 비가 오는데 기분이 좋냐? "
" 나 하늘이 이렇게 푸른데 비오는 건 처음 봐요 "
하늘에 신경 좀 써라. 나도 모르게 친해진 덕수와 몽구는 따로 놀게 두고 하늘만 쳐다보는데 내리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소나기인 것 같다.
" 금방 그치겠네 "
" 진짜요? 어떻게 알아요? "
" 그거야, ... 됐다. 그냥 여자의 감 "
" 기상청보다 더 정확해요? "
" 지금은 그럴 듯 "
비에 젖은 머리를 풀어 싹싹 쓸어 넘기는데 그런 나를 지켜보던 김종인이 오, 하고 감탄을 한다.
" 왜 "
" 매력터져서 "
" 됐거든 "
입에 발린 소리는 이제 넘어가지 않는다고 boy♂. 오세훈을 때리듯이 주먹으로 어깨를 툭 때리자 축축히 물기가 가득 묻어나온다. 나도 그렇고 얘도 그렇고 물에 젖은 생쥐꼴이 따로 없다.
" 너 이 아파트에서 안 산다고 했지 "
" 네 "
" 그럼 비 그치고 우리 집 좀 들렀다가 "
그러자 김종인은 아리송한 얼굴로 눈을 크게 떴다. 우리 집 좀 들렀다 가라는게 그렇게 놀랄 일?
" 누나 왜 이렇게 저돌적이에요? "
" 뭐? "
" 우리는 아직 아무런 사이도 아닌데, 아니 내가 누나를 좋아하긴 하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
...
뭐라는 거야 이 음란 마귀 새끼가... 이제서야 김종인의 말 뜻을 이해한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지 혼자 머릿속으로 진도 나가고 지랄이야...
" 웃기는 소리 하지 마, 우리 집에 오세훈이랑 엄마 다 있거든? "
" 아, 그래요? 그럼 내가 왜 가요 "
" 옷 갈아입고 가라고, 너 다 젖은 채로 집에 가면 감기 걸려 "
" 지금 나 걱정 해주는 거에요? "
얘는 걱정을 해줘도...꼭. 막상 아니라고는 할 수가 없어 쯧, 혀를 한 번 차주자 한걸음 정도 떨어져있던 거리를 슬금슬금 좁혀온다. 훅 끼쳐오는 온기에 징그러워! 하고 한걸음 옆으로 피하니 울상을 하는 김종인.
빨리 비가 그치기만을 바라며 인상을 찌푸린 채 매섭게 떨어지는 빗줄기만 응시했다. 소나기인데 그칠 생각을 안하네...
뻘쭘한 분위기 속, 김종인에게 뭐라고 말을 걸어야할지 모르겠다. 그저 습한 공기만 들이마실 뿐. 허공에 시선을 놓고 멍을 때리자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던 김종인은 내 얼굴 가까이 기웃거렸다.
" 누나 "
" 어, 누나 좀 부담스럽다 "
" 솔직히 말해봐요 "
" 뭐 "
" 내가 내츄럴한게 좋다고 하니까 이러고 나온거죠 "
히에에에에엥? 내가???? 아니고둔???????? 하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주둥이는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진짜 나는 너무 양심적이라서 문제라니까
뭐라고 대답해야 잘 대답했다고 소문이 날까 곰곰이 생각하던 나는 자연스럽게 눈을 깜빡거리며 말했다.
" 뭐? 너 내츄럴한 거 좋아해?? 나는 몰랐는데? "
" ... "
" ... "
누나가 미안. 머쓱히 코밑을 문지르자 하하하하핳 소리 내어 웃으면서 나를 퍽퍽 밀친다. 남자새끼라서 그런가 꽤나 악력이 강하다. 이것은 마치 오세훈에게 풀파워로 맞았을 때의 고통..!
" 아파! "
" 아 미안, 누나가 너무 웃겨서, 그러게 왜 그런 농담을 해요 "
" 됐어, 그리고 나는 네 말때문에 이러고 나온게 아니라 그냥 이게 편해서 이러고 나온 거거든? "
뒤늦게 김종인의 말에 또박또박 반박을 하고보니 나 엄청 쪼잔해보인다.... 눈에 힘을 주고 김종인을 올려다보자 계속해서 움찔거리는 입꼬리를 꾹꾹 누르고 내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려버린다.
" 그래요? 아니면 말고... "
" ... "
" ... "
뭐지?
너 때문에 이러고 나왔다고 해야했나? 아니그러기엔 내 자존심이.. 아니야 김종인이 실망했으면 어쩌지? 왜 고개를 돌리는 걸까? 내가 이 소년의 여리디 여린 쿠크다스에 침을 뱉은 건 아닐까?
...
근데 난 왜 얘한테 밀당을 당하는거지?
" 야 너 나하고 밀당하냐? "
은근히 끓어오르는 빡침에 계속해서 고개를 돌리고 있는 김종인을 쳤지만 여전히 내게 시선을 던질 기미도 보여주지 않는다. 야,야 하고 성의없이 여러번 치던 나는 오기가 생겨 검지로 김종인의 옆구리를 공략하기 시작했다.
" 야, 야! "
" ... "
" 대답 안 해? 대답 안 해? "
갈비뼈를 뚫어버릴 기세로 파고들자 그제서야 아아아!! 타임타임!! 하며 몸을 움츠리는 김종인
" 왜요. 왜 "
" 너 나하고 지금 밀당하냐고 "
" 밀당? "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는데 그 얼굴이 여간 뻔뻔한게 아니다. 그냥 내가 과대 해석한 건가.. 하며 이유없이 시무룩해지는데 김종인이 제 팔꿈치로 나를 한 번 툭 친다.
" 궁금해요? "
그러더니 귀 좀 대보라며 살랑살랑 손짓을 하는데 나도 모르게 김종인에게 귀를 가까이 가져다댔다. 정말 나도 모르게. 하지만 10초정도가 지나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녀석에 뭐야! 왜 말을 안해!! 하고 성질을 내려던 찰나
" 누나 샴푸 냄새 좋다 "
...
" 이거 완전 변태아니야!!!! "
변태 중 상변태같은 멘트에 육성으로 경악을 내지르며 김종인에게서 멀리 뒷걸음을 치니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는 녀석. 저 상변태 새끼.. 오세훈 친구라고 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저번에 덕수 데리고 병원으로 갈 때 너무 듬직해서 그만..!
괴한이라도 본 것 마냥 양팔로 가슴을 가리고 있자 또다시 이리오라는 손짓을 한다.
" 장난이에요 장난, 동생한테까지 이렇게 놀림 받아서야 누나, 이 험한 세상 어떻게 살아가려고 "
" 꺼져, 너는 진짜 변태야, 위험해 "
" 다 누나가 좋아서 그러는 거지 "
요즘 연하들은 다 이렇게 불도저같나? 왜 이렇게 들이대? 저런 말을 어떻게 저렇게 서슴없이 할 수가 있지? 고작 나랑 한 살 차이밖에 안나는게 말하는 건 꼭 스물 대여섯 먹은 것 같네. 여전히 김종인에게 다가가지 않고 구석에 쳐박혀있자 자기가 먼저 성큼성큼 걸어온다.
" 가! 가! 너 진짜 위험해!! "
내 위협해도 안들린다며 대놓고 귀를 후벼판다. 등뒤는 비밀번호로 꼭꼭 잠겨진 자동문이고 피해서 현관 밖으로 달려나가면 소나기라니, 머릿속으로 별 생각을 다하며 김종인의 명치를 때릴 준비를 하는데 코앞까지 다가와 난데없이 한 손바닥으로 내 뒤에 있는 문을 박력 넘치게 쾅 친다.
뭐하는 짓인가 하며 김종인을 올려다보자 똑같이 멀뚱히 나를 내려다본다.
" 뭐하냐? "
" 안 설레요? "
" 뭐가 "
" 여자들이 벽치기 좋아한다던데 "
와 진짜 얘는 알 수가 없다. 내가 아무런 반응을 보여주지 않자 머쓱히 벽을 쳤던 손을 뗀다.
" 좋아하기는 개뿔이, 벽만 불쌍하다 "
" 진짜 안 설레? "
" 안 설레!! "
안 설레!! 하고 단호하게 대답하니 변백현이 좋아한다고 했는데.. 하고 중얼거리며 옆에서 몽구와 잘 놀고있는 덕수만 건드린다. 변백현은 또 누구야... 해봤자 오세훈,김종인 친구겠지, 걔도 왠지 똑같을 거 같은 스멜이 난다.
낯선 섬에서 배를 놓쳐 표류된 커플마냥 묘한 기류 속,나란히 서서 갑자기 말이 없어진 김종인을 힐끔 쳐다보자 반짝거리는 눈으로 하늘만 올려다보고있다. 생각해보면 알고지낸지 정작 얼마되지도 않았는데 어쩜 이렇게 편할 수 있을까, 그래, 이것도 매력이라면 매력이지.
김종인 모르게 피식피식, 실없는 웃음만 내뱉으며 함께 하늘을 올려다보니 어느새 비가 많이 멎어있다.
손을 현관 밖으로 쭉 내밀어보니 비 맞는 느낌도 안나는 게, 이정도면 그냥 바로 집까지 뛰어가도 될 것 같다.
" 가자 "
" 네? 비 아직 안그쳤는데? "
" 이정도는 맞아도 돼 "
" 에이, 그래도 다 그치면 가요. 아쉽다 "
" 뭐가 아쉬워, 빨리 가자니까? 이러다 비 또 온다 "
" 그러면 또 여기서 그칠 때까지 기다리면 되지 "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나는 안돼,안돼, 하며 몽구와 서로 꼬리 잡기 놀이를 하며 놀고있는 덕수를 안아들었다.
" 나 진짜 누나네 집 가요? "
" 젖은 티셔츠로 집 가고 싶으면 여기서 바로 집 가던가 "
" 그럼 오늘 산책 이걸로 끝? "
" 어쩔 수 없지, 옷도 젖었고 애들 털도 말려줘야 되잖아 "
" 뭐야, 나 진짜 기대했는데 "
" 뭘 또 기대해 "
우리 집 쪽으로 앞장 서서 걷자 등뒤에서 나를 졸졸 따라오며 궁시렁거리는 김종인. 뭐 산책 가기 두시간 전부터 일어나서 준비했다나 밥도 못먹었다ㄴ... 잠시만 밥을 못 먹어?
" 너 밥 못 먹고 왔어?
" 엄마랑 아빠는 어디 나가고, 형이 늦잠 자서 밥을 안 차려줬어요 "
" 너가 차려서 먹으면 되잖아 "
" 있는게 밥이랑 김치밖에 없어서 "
어이고 저런, 품에 안고있던 덕수를 다시 바닥에 내려놓고 목줄 손잡이를 잡았다. 덕수는 땅에 발이 닿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몽구를 향해 뛰어갔지만 목줄의 한계에 부딪혀 왕왕 짖기만 했다. 대체 언제 이렇게 친해진거야... 이러다가는 걸음 속도도 못낼 거 같아 덕수를 다시 품에 안아드는데 옆에서 배고프다며 찡얼거리는 김종인이 신경쓰인다.
" 너 그러면 우리 집에서 밥 먹고 갈래? "
" 네? "
" 어? "
그렇게 생각 좀 하고 말하자고 나 자신에게 다짐했건만 또 생각 없이 말이 튀어나와버렸다. 너무 편해서 그만..
" 혹시 그거 라면 먹고 갈래 진화 버젼이에요? "
" 뭐래 "
" 아 맞아, 아주머니랑 오세훈도 있다고 했지 "
그리고는 뻔뻔한 표정으로 좋아요 좋아, 밥 먹고 갈게요. 하는데 이제는 경악도 못하겠다. 아까까지만 해도 잘 치던 진저리도 안나는 걸 보면 아무래도 김종인의 변태미에 적응한 거 같다. 하도 다채로운 무지개같다고 해주니까 김종인이 변한건가 아니면 내가 변한건가.
옆에서 콧노래를 부르며 걷는 김종인을 흘겨보는데 애가 좀 짖궂은 장난을 쳐서 그렇지 덕수 아플 때 생각해보며는 마냥 동생같은 것만은 아닌것 같ㅇ...내가 대체 고등학생들 상대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거람... 정신 차리라는 의미로 머리를 한 번 털자 김종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왜 그래요? 하고 묻는다.
" 그냥 "
" 누나 방금 되게 개같았어요 "
" 뭐? "
" ... 아니 그 나쁜 뜻 말고, 진짜 멍멍 강아지, 물 묻으면 강아지들은 막 머리 털잖아요... ... 어.. 알죠 제 말? "
" 알았어, 무슨 뜻인지 "
자기가 말해놓고 혼자 당황해한다. 처음 보는 녀석의 모습을 내심 흥미진진하게 관찰하니 별 말실수도 아닌데 어쩔줄 몰라하며 계속해서 시선을 피하는 김종인. 한참을 그러고 눈만 굴리다가 갑자기 어!! 하고 소리를 지른다.
" 무지개!! "
무지개!! 하고 외치며 하늘에 삿대질을 하길래 속아준다치고 고개를 돌리자 진짜 김종인의 말 그대로, 푸른 하늘에 비록 색깔은 옅지만 은은하게 빨주노초파남보를 이루고 있는 무지개를 볼 수 있었다. 확,하고 불어오는 바람에도 굴하지 않고 줄곧 하늘을 올려다보니 김종인이 나를 툭툭 친다.
" 왜 "
" 나 "
" 뭐? "
돌연 나, 하며 자신을 향해 삿대질을 해보이는데 머리가 딸려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한 내가 뭐? 하고 되묻자 씨익 입꼬리를 올린다.
" 누나가 나 처음봤을 때, 무지개 같다고 했잖아요 "
" ... "
" 무지개, 나 "
어... 그건 말이지 종인아? 누나가 말하자면 정말 긴데...
어... 그래...
" 그래.. 너다...하하 무지개, 우리 종인이네 "
대놓고 꺼름칙한 미소와 함께 긍정을 해주었지만 은근히 봄잠바같은 김종인은 내 미소의 진정한 의미를 알아채지 못하고 그쵸? 그럼 얼른 밥 먹으러 가요!! 하며 좋아할 뿐이다.
기상청보다 뛰어난 여자의 직감으로, 얘는 평생 무지개의 의미를 알지 못할 것 같다.
*
열두시가 넘어서야 겨우 일어난 종대는 몽구와 함께 사라진 종인이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아침에 밥 차려달라고 조르지도 않아서 편하기만 할 뿐. 아무도 없는 집안, 익숙하다는 듯이 홀로 상을 차려놓고 밥을 먹던 종대는 곧 필이 충만한 바운스를 추며 몽구와 함께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종인이에 그만 젓가락을 짤그랑, 놓쳤다.
" 미친놈 "
종대는 옆에 맴돌고있던 짱구를 쓰다듬으며 너네 형 왜 저러냐고 물었지만 짱구는 제 혀로 코만 핥을 뿐, 대답이 없다.
" 김종인, 밥 먹어 "
" 먹고왔어 "
" 어디서 아침부터 밥을 먹고 와 "
" 무지개한테서 "
?
무지개가 언제부터 무료 급식을 했었나... 하늘에서 밥이 무지개를 타고 내려오나... 기분이 얼마나 좋은지 연신 노래를 흥얼거리며 방으로 들어가버리는 종인이를 바라보던 종대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젓가락을 주워들었다.
하지만 다시 문을 쾅! 열고 방에서 나오는 종인이에 또 젓가락을 놓치고 말았다.
" 아!! 깜짝이야!! 아침부터 왜 이래!! "
" 형 "
" 왜, 밥 먹게? 무지개한테 무료 배급 받고왔다ㅁ, "
" 내 매력이 뭐가 더있을까? "
바닥에 떨어진 젓가락을 핥으려고하는 짱구를 밀어내며 미간을 찌푸리는 종대.
" 뭐? "
" 내 매력말이야. 섹시하다거나, 지적이다라거나... "
평소에 두 형제의 성격상 대화가 적었는데 오늘따라 기분이 좋은지 자꾸만 말을 거는 종인이다. 어때? 하며 문턱에 서서 도도하게 팔짱을 끼는 종인이를 보던 종대는 난생처음보는 동생의 모습에 당황한 것도 잠시. 젓가락 주울 생각도 못하고 입을 열었다.
" 너는 "
" ... "
" 개같아 "
" 칭찬이야? "
물론 아니지. 사실 개같다는 말에는 수많은 의미가 내포되어있다. 개와 함께 잘 노니까 개같다. 성격이 개같다. 형한테 대드는 게 개같다 등등. 그러나 여기서 욕이란다! 이랬다가는 피튀기는 하극상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이기에 조용히 고개만 끄덕여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형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은 종인이는 오, 하며 내적감탄을 했다. 나한테 그런 개같은 매력이 있을 줄이야. 예전부터 개같다는 말이 욕으로 쓰이는게 마음에 들지않았던 종인이였기에 조금은 형이 미심쩍지만 개같다. 라는 말도 칭찬으로 인정해주기로 했다.
뭐 어때, 나도 아까 산책하면서 누나한테 개같다고 했는데, 나쁜 뜻으로 한 건 아니잖아?
.
.
.
" 아 개같네, 수행평가 망했다 "
물리 쪽지시험에서 세 문제나 틀린 백현이는 칠판에 붙여진 점수표를 보고 자리로 돌아와 분한 마음을 가득 담아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정시로는 희망이 없어 내신 관리가 절실한 백현이에 비해 물리 쪽지시험 점수가 나오거나 말거나 핸드폰만 내려다보던 종인이는 '개같네' 라는 대목에서 움찔거렸다.
" 야 개같다는 말 함부로 쓰지 마 "
" 왜.. "
" 개는 소중하니까 "
...
백현이는 종인이의 헛소리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전에는 자기를 몽구 애비말고 몽구,짱구,짱아 애비로 불러달라고 하지를 않나. 전체적으로 말수는 적지만 가끔 말할 때마다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정도로 이상한 소리만 한다니까.
" 개ㄱ "
" 씁 "
" ㄱㅐ "
" 쓰읍 "
" ㄱ "
" 하지 말랬지 "
넝담인가 하고 몇번 찔러보니 거리낌없이 단번에 정색을 하는 종인이. 너무 어이가 없어서 장난인 줄 알았는데 진심이었나보다.
" 너 앞으로 내 앞에서 개같다는 말, 욕으로 쓰면 한 대씩 쳐맞을 줄 알아 "
" 개같다는 말을 욕으로 쓰지 뭘로 써 "
" 칭찬 "
????
개같다는 말에 대단한 의미라도 담겼는지 자꾸만 집착을 하는 종인이에 백현이는 슬금슬금 뒷걸음을 쳤다. 때마침 뒷문을 열고 들어오는 세훈이가 보여 잽싸게 옆으로 달려가 붙는 백현이.
" 왜 이래 "
" 종인이 오늘 제정신 아닌 거 같아 "
제정신 아니지, 좋아할 사람이 없어서 누나년을 좋아하는 걸 보면. 이라는 말에 턱끝까지 차올랐지만 초인적인 힘으로 겨우 말을 참아낸 세훈이는 응,하고 싱거운 대답만 해주었다. 그런 대답에도 빈정은 커녕 기분도 안상하는지 백현이는 자리로 가는 세훈이 뒤를 따르며 일일히 고자질을 해 바친다.
" 아니, 내가 이번 물리 수행이 망해서 개같네,라고 했거든? 근데 갑자기 화를 내면서 개같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거야 "
" 종인이 원래 개 좋아하잖아 "
" 아무튼 나보고 앞으로 개같다는 말을 욕으로 쓰면 한 대씩 쳐맞을 줄 알라고 협박이란 협박은 다하는데 오줌 지릴 뻔 "
" 개 좋아하는 앞에서 개같네를 욕으로 쓰면 당연히 욕 쳐먹지 "
애초부터 개같네라는 말을 욕으로 쓰면 안된다는 듯이 당연한 반응을 보이는 세훈이에 백현이는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생각해보니 개같네가 동물모욕적인 발언같기도 하고.... 개한테 사과해야 될 것 같기도 하고..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는 백현이를 뒤로하고 끄적끄적 핸드폰을 보던 세훈이는 아참, 하며 창문가 맨 뒤에 앉아있던 종인이에게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오늘 오케이!
오케이.
*
" 누나, 안녕 "
...
" 야, 너는 고삼인데 집에 가서 공부 안하니? "
" 안 해요 "
학교에서 조금 일찍 돌아온다치면 집에는 항상 오세훈과 함께 김종인이 기다리고 있다거나 학교에서 돌아오는 오세훈과 함께 김종인이 들어온다. 내 시간표는 어떻게 알아가지고... 우리 집 식구인줄... 오늘은 조금 늦게 돌아와 없겠거니 했는데 내 예상을 부셔버리듯이 거실 한중간에 덕수와 함께 떡하니 앉아있는 김종인.
" 누나랑 산책할건데 "
" 뭔 놈의 산책을 맨날 해, 집으로 좀 꺼져라. 가서 몽구,짱구,짱아랑도 놀아줘 "
" 집에 가면 맨날 같이 놀아주는데 "
저게 한 마디도 안 지려하지. 오늘은 피곤해서 도저히 안된다며 고개를 젓자 왜요~ 하며 따라붙는다.
" 오세훈이랑 조용히 놀다가 집에 들어가라, 부모님 걱정하신다 "
" 별로.. "
불효막심한 놈.. 어디서 꼬박꼬박 말대꾸나며 타박하고 싶었지만 나도 썩 훌륭한 효녀는 아니었기에 반갑게 꼬리를 흔들어주는 덕수만 안아들었다.
" 덕수야, 이리와. 저런 애랑 노는 거 아니야 "
" 누나 진짜 개 키울 생각 없어요? 덕수 잠깐 맡아준 거라면서요, 이제 곧 보내겠네 "
" 왜 자꾸 키우래 "
" 산책.. "
김종인은 산책...하며 작게 말꼬리를 흐렸다. 그러고보니 맨날 덕수보러 온다고 놀러오고 덕수랑 같이 산책하자고 놀러오고, 덕수 가고 나면 김종인도 안오려나, 아니 못오는건가.
그렇게 생각하니 또 아쉽다. 이제 친구가 돌아올 때까지 한 일주일 남았나? 덕수 가는 것도 아쉬운데... 그새 쓸 때없는 정만 들어가지고 감수성만 자극하네.
" 야 그거 산책, 어? "
... 산책따위라고 차마 말을 할 수가 없다. 그동안 김종인과 산책이라 치고 같이 걸으면서 적지않은 시간을 보내왔으니까.
...
" 덕수 가면 몽구,짱구,짱아 다 데리고 나와,산책 도와줄테니까 "
" 진짜?? "
" 대신 일주일에 한 번 "
" 에이 , 두 번 "
" 한 번 "
" 세 번 "
세 번이라는 말에 왜 갑자기 세 번이야? 하고 따지고 들자 자기 혼자 네 번, 다섯 번, 여섯 번 더 늘리더니 결국에는 매일매일은 어때요? 하고 묻는다. 당돌한 김종인의 발언에 쇼파에 누워있던 오세훈만 의미심장한 얼굴로 나를 쳐다본다.
" 뭐야, 그럼 나 너랑 산책 안 해 "
" 안돼, 그럼 두 번! "
" 두 번? "
" 평일 저녁에 한 번, 주말 아침에 한 번. 더이상 양보 못해요 "
나름 합리적인 김종인의 제안에 눈동자를 굴리며 가만히 서있자 초조한 눈빛으로 앉아서 나를 올려다본다.
...
이건 솔직히 인정해줘야한다.
연하남의 매력으로.
기대하는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김종인을 아무생각 없이 내려다보다가 심장이 덜컹 내려앉을 뻔했다. 어디서 없던 매력도 막 샘솟는 것 같다고 해야하나, 그래 개같은..ㅇ..아니 주인을 기다리는 대형견같은 모습에 솔직히 좀 설렜다.
처음 산책하던 날, 벽치기라며 했던 별 거지같은 짓보다는 가만히 앉아 나를 올려다보는 김종인이 훨씬 더 설레는 건 내가 변태라서일까, 내 흑심 가득한 마음을 알아차린 덕수가 정신차리라는 듯이 귀에 대고 왕왕! 짖었다.
" ... 그래 두 번 "
" 콜! "
" 그러니까 오늘은 이제 집에 좀 들어가라 "
" 알았어요. 오늘은 기분 좋으니까 말 들을게 "
기분 좋으니까 말 듣는다는 건 뭐야, 기분 나빴으면 하루종일 우리 집에 죽치고 있겠다는 건가.
쇼파에 누워있는 오세훈의 발치에 있던 가방을 서둘러 멘 김종인은 내 품에 있던 덕수를 한 번 쓰다듬고 누나, 안녕! 하고 현관으로 달려나가버린다. 열아홉, 나와 한살 차이로 십자리 숫자가 다른 아이지만 그거 차이난다고 아직까지 한참 애같은 모습에 피실피실 웃음이 난다.
내가 살다살다 산책 메이트를 다 두고 별 일이야
.
.
.
" 잘했어 덕수야!! 다시 한 번 더!! "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공터 저 멀리 공을 던져주니 뽀르르 장난감을 향해 달려가는 덕수. 처음 볼 때보다 마냥 작아서 톡 치면 부셔질 것 같은게 벌써 덩치가 많이 커져있다.
친구가 덕수를 다시 데려가기로 했던 날에서부터 일주일이 더 지났다.
사실 친구는 충청도에서 일찍부터 서울로 올라왔지만 지금 자취방 구하느라 덕수를 데려갈 상황이 되지않아 아무말 없이 내게 삼십만원을 또 건네주는게 아닌가. 물론 덕수와의 의리가 있는 나는 받지않았고 한 달만 맡아주는 걸로 알고있는 집에서도 그렇게 정 안붙일 것처럼 굴더니 어느새 덕수와 많이 친해진 건지 아직까지 그 친구는 언제 개 데려갈꺼냐는 둥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뭐 덕수를 더 맡아주는 데에 나보다 더 좋아한 사람은 따로있지만
" 오, 덕수 사료 좀 먹었나본데, 막 날아다니네 "
잽싸게 공을 물고온 덕수 앞에 쪼그려앉아 잘했어용~ 우리 덕쑤~ 하며 혀짧은 칭찬을 해주니 일찍부터 짱아랑 놀아주느라 기진맥진한 김종인이 말했다. 덕수가 가기 전까지는 한 마리,한 마리 번갈아 산책 데려온다고 했으니 다음에는 몽구가 나오겠지
" 우리 덕수는 이제 종합 영양제도 먹고 짱짱맨이거든 "
" 누나 덕수만 너무 이뻐한다 "
그러더니 입을 밉지않게 비죽거리며 개하고 경쟁심 붙어보기는 처음이네..하며 중얼거리는 김종인. 나도 어느정도 체력이 고갈된 것 같아 짱아와 함께 놀라며 손짓을 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쌩 달려가버리는 덕수.
뒤쪽에 있는 벤치 위에 올려둔 물병이 생각나 터덜터덜 벤치쪽으로 걸어가니 멍하니 땅바닥에 앉아있는 김종인이 거슬린다.
" 야 더럽게 왜 바닥에 앉아, 벤치 있는데 벤치 가서 앉아 "
김종인은 내 말에 아무말없이 잡아달라는 듯이 손을 내민다.
" 너 혼자 일어나면 되잖아 "
" 힘들어서 안돼 "
힘들어서 안돼... 하며 지친 목소리를 내보이는데 일부러인 걸 알면서도 빨리 일어나라는 식으로 그냥 손을 잡아주었다. 이제 일어나라며 한쪽 손을 양손으로 붙잡고 위로 힘을 주려는 찰나, 김종인이 무지막지한 힘으로 나를 제쪽으로 끌어내렸다.
덕분에 흐아악!! 괴성을 지르며 김종인의 품에 머리를 박고 무릎을 꿇은 나는 쪽팔림에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이 스끄....
" ㅋㅋㅋㅋㅋㅋ이러니까 누나 나한테 다시 한 번 더 만나달라고 매달리는 것 같다 "
" ... "
" 알았어요. 만나줄게요. 만나주지 뭐 "
그러면서 내 머리를 개마냥 쓱쓱 쓰다듬는데 자존심 상하게도 기분이 묘하다. 분명 나보다 어린 놈한테 이딴 취급을 받는 것에 일백번은 더 화가 나야지 정상인데 말이다. 조심스레 고개를 든 나는 바로 코앞에 있는 김종인에 뒤로 나자빠지듯이 마주앉았다.
벤치고 뭐고 다 필요없다 싶어 그대로 힘을 빼고 앉자 아빠다리를 하고 앉아있던 김종인이 개구진 미소를 띈다.
" 누나 오늘도 샴푸 냄새 좋다 "
" 헛소리한다, 진짜 개같ㅇ... "
" 개같은? "
" 아니 무지개같은 "
" 무지 개같은? "
..., 평생 무지개같다의 의미를 모를 것이라고 예견한, 기상청보다 뛰어난 여자의 직감이 빗나갔다. 아니 그건 그렇다치고 내가 그동안 무지개,무지개같다고 했는데 이렇게 갑자기 알아차리면...
" 아니 그게 아니라 "
" 장난, 그러고보니 무지 개같다도 말이 되네 "
심장이야... 나는 처음부터 몰랐던 것처럼 아하하하하핳 그렇네!! 하며 맞장구를 쳐주었다.
" 그럼 나는 무지, 개, 누나는 무지개해요 "
" 뭐야 갑자기 "
" 애칭 "
애칭?????????? 뭐????하고 되묻자 김종인은 방글 입꼬리를 올려보인다.
" 누나, 오세훈이랑도 이런 애칭은 없을 걸 "
" 오세훈이랑도 없는 애칭을 내가 왜 너랑 하냐 "
" 나니까 "
이건 또 무슨 근거없는 자신감이야. 할 말을 잃은 내가 빤히 얼굴을 바라보자 으쓱거리며 말한다.
" 내가 진짜 스무살만 돼봐 "
" .. "
" 맨날맨날 산책하자고 조를 거야 "
" 그럼 난 맨날맨날 학교 도서관에 쳐박혀 있어야 겠다 "
장난기서린 내 한마디에 에이, 하며 앙탈을 부리는 김종인. 멀리서 강아지들이 잘 놀고있는지 한 번 둘러보다가 말없이 다시 나를 빤히 바라본다. 아무래도 남자애다보니 가끔씩 찾아오는 어색함은 어쩔 수 없다.
괜히 쑥스러워서 시선을 돌렸지만 김종인은 여전히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무릎에 팔을 받치고 턱을 괴었다.그리고 빨리 스무살 됐으면 좋겠다... 하고 중얼거리는데, 나도 어느정도 공감을 하고 있다는 건 함정. 교복입고 우리 집에 찾아오면 한 살차이임에도 어김없이 드는 죄책감은 어쩔 수가 없단 말이야...
" 스무살 그거 얼마 남았다고, 교복 벗고나서 다시 교복 입고싶다고 후회하지 마 "
" 그래도 누나 열아홉살 남자친구 있다고 하면 쪽팔릴 거 아니에요 "
" 뭐? "
" 한 살차이라도 어 다르고 아 다르다고, 적어도 스무살은 되야지 "
또또 헛소리 한다며 나무라자 헛소리 아닌데~ 하며 빙구같이 웃는다. 그래, 사실 반응은 이렇게 하지만 김종인에 말에 뼈저리게 공감을 하고 있는 건 부정하지 못하겠다. 불도저같은 평소보다는 직설적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어느정도 의미를 알 것같아 그저 쑥스럽게 땅바닥만 바라보며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 진짜 나 스무살 되면 "
" ... "
" 누나랑 매일매일 산책하고 싶은데 "
" ... "
" 학교 도서관 보다 내가 더 재밌을텐데 "
김종인의 작업같지않은 귀여운 작업에 어떻게 안넘어갈 수 있을까. 열번찍어 안넘어가는 나무 없다고 김종인은 나를 벌써 열번은 넘게 찍은 거 같은데 이제 그만 넘어가줘야지.
" 그래 학교 도서관 보다 너가 더 재밌긴 하겠다 "
" .. "
" 그러니까 얼른 스무살 되던가 "
내 대답을 들은 김종인은 아~ 하며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 역시 누나, 이러니까 안좋아하고 배겨? "
" 됐거든 "
" 내가 누나 많이 좋아하는 거 알죠, 몽구,짱구,짱아 좋아하는 거 만큼 "
" 많은거야? "
" 엄청 "
비아냥 거리듯이 고맙다. 라고 답해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딱딱한 곳에 앉았더니 엉덩이가 아프다. 이제는 진짜 일어나라며 김종인이 내민 손을 잡고 힘을 주자 아까처럼 궂은 장난없이 고분고분하게 일어나준다. 해도 어느정도 져가고 이제 집에 들어가야지
덕수를 안아든 나는 짱아의 목줄 손잡이를 잡은 김종인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 들어가 "
" 아쉽다 "
" 아쉬운 것도 많아 "
가볼게요. 하며 등을 돌리는 김종인을 자리에 서서 한참을 보다가 나도 이만 가봐야되겠다 싶어 걸음을 옮기려 고개를 돌리는데 때마침 뒤에서 커다란 외침 하나가 들려온다.
" 누나!!!! "
" ... "
" 다음에 또 봐요!!!!! "
또 보자며 이번에는 양손을 위로 파닥파닥 크게 흔든다.
스무살이 되어도 지금이랑 다를 건 없어보이지만 그래도 얼른 커서 거대한 무지개가 되렴
내가 키워서 잡아먹든 키워서 내가 잡아먹히든 너는 아무리해도 내 무지개야.
칠색빛깔 매력이 찬란한 무지개.
무지개같은 머스마 Fin
+
쇼파에 누워서 뿌리를 내린 세훈이는 도어락이 열리는 소리에 시선만 내리깔았다. 뭐 지금 들어올 사람이라면 누가 있겠어, 누나 밖에 없지. 줄 관심도 없다는 듯이 다시 시선을 티비로 돌린 세훈이는 이내 덕수를 품에 안고 들어온 누나에게 들어왔냐는 소리조차 하지 않았다.
고맙다는 말을 듣기 전까지.
방에 들어가기 전, 던져놓듯이 세훈이에게 고맙다. 딱 이 한마디만 하고 쌩하니 방에 들어가버린 누나에 세훈이는 소름이 돋았다.
뭐야, 저게 미쳤나?
나중에 학교 가서 줄리엣한테 이야기 해줘야지, 우리 누나가 드디어 미쳤다고.
사담 > 웬만하면 읽어주세용
하이 여러분 리히터예요.
드디어 단편 시리즈가 막을 내렸네요. 이게 이렇게 시간을 잡아 먹을 줄은...OTL 도부자 번외까지 완결 지은게 3월 21일이구만 벌써 5월이 훌쩍 넘어버렸네요.
네. 이제 저도 아쉽고 독자여러분들께서도 아쉬운 대망의 휴재 기간입니다. 수많은 분들께서 연재 공지를 보시고 응원을 해주셨는데 감격해서 눙물이... ☆★ 거기다 텍스트 파일을 보내드리면 간간이 감사합니다 하고 답장 보내주시는 분들도 계시더라구요. 저 그거 다 별표 체크해놓고 보관중입니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헤헷 여러분 응원은 정말 잘 받았습니다. 너무 감사드립니다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ㄷ ㅏ사랑해여 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
제가 공지에 슬럼프라고 했는데 사실 저는 슬럼프를 이기려면 오히려 무언가를 더 해야하거든요. 그래서 블로그에 끄적끄적 거려놓은 글이 있는데.
로맨틱 코미디를 쓰다가 슬럼프가 오면 그 반대의 섹시하고 어두운 글을 써서 풀고 어두운글을 쓰다가 슬럼프가 오면 로코를 써서 푸는 제 특성상, 경수가 주인공인 요상한 글을 싸놨습니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글은 사람들이 봐줘야 비로소 의미가 생기죠 그래서 휴재기간이라고는 하지만 그걸 한 번 올려볼까 하는데 괜찮겠죠?? 괜찮다고 해주세여!!!!!!!!!!!!!!!!!!!!!!!!!!!!!!!제발료!!!!!!!!!!!!!! 근데 이게 차기작이 될지 아니면 그냥 짧게 딱딱딱 하고 끝낼지는 모르겠네요.. 無계획... 그래도 여러분 저 아시죠? 웬만하면 한번 본 스토리 끝까지 끌고가는거ㅎㅎ 도부자도 사실 시작할 때 무계획이었는데 이렇게 완결지었쟈나옇ㅎㅎㅎㅎ
어쩌면 휴재아닌 휴재기간이 될지도 모르겠네요...ㅎ.. 슬럼프 중 계획해놓은 글 중 프롤로그는 이미 작업을 완료했습니다!!! 분위기는 준면이 나를~하는 시리즈보다는 덜퇴폐적이지만 나른섹시...? 퀄리티는 아마 더 좋을겁니다.. 아마?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너무 기대하지마세옄ㅋㅋㅋㅋㅋ 분위기가 갑자기 바뀐만큼 좋아하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싫어하시는 분들도 계실거라고 생각해서 프롤로그는 포인트 음슴니다 음승!
오늘 저녁즈음에 올릴 예정이구요. 도부자때의 암호닉은 아쉽지만 오늘까지! 그동안 단편에서도 암호닉 신청해주신 분들은 많이 계셨지만 이미 마감되었던 터라 받지 못한 점 사과드립니다 ㅠㅠ
저녁에 오는 글에서 암호닉 다시 받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들 정말 감사드리고 사랑합니다!!
+ 아쉽게도 단편 시리즈는 텍파 제작 계획이 없습니다 ㅜㅜ
너구리걸님/면하트님/우비님/망고님/카페알바생님/아메리카노님/정수정수연님/바닐라라떼님/굔듀님/뽑뽀님
됴됴륵님/종순이님/몽구님/복숭아님/핫초코님/첸스님/모나리자님/쀼님/2평님/맴매맹님
꽯뚧쐛뢟님/이웃집여자님/제인님/베이비파우더님/데후니님/안녕님/안열님/랭거스님/6002님/사랑둥이님
부릉부릉님/전봇대님/딸기님/설렘사님/소녀님/제이너님/경수하트워더님/민속만두님/시카고걸님/모카님
찬효세한님/마름달님/세시님/로운님/스누피님/언어영역님/모찌님/블리님/도즈님/SH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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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푸치노님/으니님/고구마님/툐툐님/세젤빛님/율스루님/뽀로로님/시나몬님/청담동앨리스님/우럭우럭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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