츤데레 남사친과 능구렁이 남친 사이 2
23 (내 하루의 전부)
"이 사진은 다섯 살 땐가? 하여튼 그맘때쯤 사진이야. ○○이가 이 치마를 되게 좋아했었어."
오물오물- 노오란 오렌지 조각을 씹으며 리모콘으로 TV 채널을 돌렸다. 지금 우리 집은 두 개의 세상으로 갈려 있었다. 뭐가 그리 재밌고 즐거운 건지 거실 바닥에 둘러앉아 내 어릴 적 사진을 꺼내보고 있는 부모님과 그걸 흥미롭게 지켜보며 조심스레 허락을 받은 뒤 제 주머니 속에 사진들을 쏘옥 챙겨넣는 김종인이 있는 세상, 묵묵히 오렌지를 오물거리며 TV와 데이트 중인 내가 있는 세상으로 말이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아마 녀석의 바지 주머니 속엔 서너 장의 사진들이 챙겨져 있을 듯했다.
"아, 오렌지 맛있다…!"
"이건 왜 울고있는 거예요? 젤리를 길바닥에 다 쏟아버려서?"
"아마 그랬던 걸로 기억해. 이 젤리를 엄청 좋아했거든. 하나만 달라 해도 절대 안 주고…."
"뭐야, 애기 때도 귀여웠네요."
엄청난 소외감이 느껴졌다. 다른 세상에 있는 그들은 아예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건지, 내 말을 일체 무시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괜한 서운함이 치밀어, 보고 있던 TV를 끈 뒤 소파에 등을 기댄 채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바꾼 지 얼마 되지 않은 휴대폰은 역시 아직 흠집 하나 없는 새 것이었다. 휴대폰에 껴진 분홍색 케이스를 만지작거리며 슬쩍 김종인을 바라보았다. 역시나 싱글벙글. 녀석의 입가엔 웃음이 떠날 줄을 몰랐다. 잔뜩 긴장을 해 굳어있던 아까의 모습과는 차원이 다른 모습이었다. 그리곤 얼마 안 있어 부르르- 떠는 휴대폰에, 다시금 시선을 옮겨 환해진 화면을 바라보았다. 지금쯤 제주도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오세훈에게서 온 카톡 메시지였다.
역시 예상대로 영양가 없는 내용의 메시지였다. 그저 내게 자랑을 하고자 보내온 카톡 메시지에 은근한 부러움이 샘솟긴 했지만, 아무렴 상관은 없었다. 나중에 나도 가면 되지 뭐-. 방학은 아직 많이 남았을 뿐더러, 아쉽게 이 시기를 놓치게 된다면 겨울방학에라도 가면 되는 거니까. 오세훈이 자꾸 자랑질을 해대는 게 보기 싫으니 우리도 꼭 여행을 갔다 오자며 언젠간 김종인에게 말을 꺼내 봐야지, 생각하며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그리곤 다시 고개를 돌려 김종인 쪽을 바라보았다. 녀석은 여전히 방긋방긋 웃고 있었다. 뭐가 그리도 좋은지-.
"……."
입술을 삐죽 내민 채 김종인을 바라보고만 있을 무렵, 녀석의 시선이 내게 꽂혀왔다. 의도치 않게 마주쳐진 시선에 작게 놀란 채 멍하니 까만 눈동자를 응시하고만 있자, 녀석이 사진 속의 내 모습과 지금의 내 모습을 비교해 보기 시작한다. 시선을 내렸다, 올렸다 사진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며 비교를 해보던 녀석이 이내 고개를 살짝 갸웃해 보였다. 저 반응은 뭐지- 싶어 살짝 인상을 찡그린 채 녀석을 바라보자,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몸을 돌려 사진들을 수집하기 시작한다. 그 모습에 더욱 심통이 나 몰래 헛웃음을 내뱉었지만, 이런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녀석은 그저 사진 삼매경이었다. 어느새 녀석의 주머니 속엔 제법 여러 장의 사진들이 들어있었다.
*
이쯤 되니, 김종인은 우리 집 제 2의 자식이 된 것도 같았다. 집을 들어설 때와 나설 때가 이리도 차이가 날 줄은 전혀 몰랐다. 그런 녀석에게 괜한 섭섭함과 서운함이 느껴지긴 했지만, 딸인 나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김종인에게만 모든 안부를 물으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던 부모님에게는 더욱 큰 서운함이 느껴졌다. 어째 고등학교를 다닐 때보다 훨씬 키가 커진 것 같네. 더 잘생겨진 것도 같고-. 녀석에게 연신 칭찬의 멘트를 건네던 엄마의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그녀의 칭찬에 어쩔 줄을 몰라하며 꽤나 수줍어하던 김종인의 낮은 웃음소리도 덩달아-. 그러나, 사실 서운함보단 고마움이 더욱 앞섰다. 녀석을 마음에 들어 하실 거라는 확신은 이미 예전부터 있었던지라 걱정은 조금도 없었지만, 내 예상보다도 녀석을 아껴주던 부모님의 모습만 봐도 그랬다.
'그래서, 결혼은 언제 하겠다고?'
'… 아빠….'
'… 내일이라도 식 올릴까요.'
서로 장난도 주고받던 그들의 입가엔 웃음이 떠날 줄을 몰랐다. 헤어질 시간이 되자 유난히 아쉬워하던 엄마는, 여러 반찬들을 챙겨주며 나와 김종인을 번갈아 한 번씩 꼬옥 끌어안아 준 뒤에야 잘 가라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에 덩달아 아쉬워 하는 듯한 표정을 내비치던 김종인은, 현관 문이 닫힘과 동시에 내 손을 꼬옥 잡아왔다. 그런 녀석을 멍하니 바라보다 살며시 손을 놓은 채 먼저 걸음을 떼자, 같이 가자며 조금은 다급한 투로 말을 건네온다. 그 모습이 꽤나 웃겨 웃음을 지어보였다.
얼마 걷지 않아 도착한 김종인의 차 앞. 아까와 동일하게 먼저 조수석의 문을 열어주는 녀석의 행동에 잠시 멈칫한 뒤 천천히 차에 올라탔다. 차 안의 공기는 제법 묵직하고도 건조했다.
"또 안전벨트 안 매지."
이내 운전석에 올라탄 김종인이 내게 시선을 옮겨놓더니 딱딱한 어투로 말을 뱉었다. 제법 단호한 목소리에 황급히 안전벨트를 착용하곤 녀석을 흘끗 바라보았다. 옳지-. 마치 어린아이를 다루듯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어오는 손길에 미소를 지어보이기도 잠시, 집에서 있었던 일들이 불현듯 또다시 떠올라 표정이 절로 굳혀졌다. 그런 내 모습에, 차의 시동을 걸 생각도 않은 채 그저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고만 있던 녀석이 손을 뻗어 내 뺨을 어루만져왔다.
"왜이리 심통이야, 아까부터."
"아닌데."
"손도 안 잡고."
"아닌데?"
"맞는데."
"아니거든요."
"어쭈."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던 김종인이 살며시 가까이 다가왔다. 고개를 살짝만 돌려도 시선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와버린 녀석에, 애써 창밖으로 시선을 옮겨놓았다. 그리곤 얼마 안 있어 녀석의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오랜만에 부모님도 만나고 왔는데 왜이리 심통이 났을까."
"……."
"어머님이랑 아버님이 나 많이 챙겨주셔서 기분 좋았어."
"……."
"이렇게, 네 어릴 적 사진도 몇 장 얻고."
"……."
"네가 왜이리 예쁘고 착한 건지 전부터 궁금했는데, 이제 알겠어."
"……."
"두 분이 너무 좋은 분이셔서 그런 거야."
피식 웃으며 운전대에 팔을 기대고 엎드린 김종인이, 여전히 내게 뜨거운 시선을 건네오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아까 어머님이 나한테 뭐라 하셨는지 알아?"
"……."
"별다른 말씀 없이 그냥 너 잘 부탁한다고, 잘 책임져 달라고 하셨어."
"……."
"많이 예뻐졌다고도 하시더라."
"……."
"원래 예뻤는데, 그치."
"… 오글거려…."
괜히 치미는 민망함에 입술을 꾸욱 깨물곤 유심히 창밖을 바라보았다. 전봇대에 아슬아슬하게 붙여진 광고 전단지의 내용을 모두 외워버릴 기세로 말이다. 왠지 창피해 김종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 마음속을 온통 지배하고 있던 섭섭함과 서운함이, 녀석의 몇 마디로 인해 깨끗이 사라져 버린 것만 같았다. 왜이리 어린아이처럼 굴었지. 왜 혼자 삐져가지고 입을 꾹 다문 채 시무룩해 있었지, 나. 방금 전까지의 내 모습이 휘리릭- 하고 머릿속을 빠르게 스쳤다. 쥐구멍이 있다면 쏘옥 들어가 숨어버리고 싶을 만큼, 창피했다.
"기분 좋아."
"……."
"너희 부모님이랑 진지하게 대화도 해보고, 맛있는 집 밥도 먹고, 네 어린 시절 얘기도 듣고."
"……."
"오래 알아온 만큼 너에 대해선 모르는 게 없을 줄 알았는데, 아직 난 모르는 거 투성이더라."
"……."
"그래도 오늘 많이 알았어. 네가 어린 시절 어떤 옷을 좋아했고, 어떤 음식을 좋아했고, 어떤 동화책을 즐겨 읽었는지까지."
"……."
"… 축구팀 만드는 걸 꿈꾸고 있을 줄은 전혀 몰랐는데."
"… 아, 그건…!"
괜한 민망함에 제법 발끈해 보이자, 뭐가 그리도 웃긴 건지 연신 웃음을 짓기만 한다. 그 모습에 더욱 큰 창피함이 밀려와 고개를 푸욱 숙였다. 그리곤 얼마 안 있어 김종인이 말을 덧붙였다.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모르는 게 없었음 좋겠어. 내가 너에 대해서-."
나지막하게 들려오는 말을 묵묵히 듣고만 있다 침을 꿀꺽 삼키곤 제법 새침하게 말을 건넸다.
"… 난 김종인에 대해서 모르는 게 없어."
"무슨."
"진짜야."
내 말을 쉽게 믿지 못하는 모습에 작게 발끈하며 녀석을 바라보았다. 운전대에 팔을 기대 엎드린 채 푸스스 웃고있는 녀석의 모습은 필요 이상으로 멋있었다. 그렇게 웃을 때마다 난 몇 번이고 네게 또다시 반한다는 걸 알까, 네가.
"……."
예쁜 곡선으로 휘어진 눈매를 하염없이 바라만 보다 애꿎은 클러치백을 꼬옥 쥐었다. 그리곤 얼마 안 있어 다시금 녀석의 목소리가 내게 닿아왔다.
"무슨 생각해. 얼굴은 왜 빨개져."
"어? 아니, 그…"
"야한 생각했지."
"… 아니거든."
적잖이 당황한 듯한 내 모습에 그저 웃음을 짓던 김종인이, 운전대에 기대 엎드리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이내 차에 시동을 걸며 유연히 핸들을 돌리기 시작한다.
"종이야, 창문 열어도 돼?"
"그런 건 안 물어봐도 돼."
"… 그래도 혹시나 해서…."
"마음대로 해. 내 차가 네 찬데 뭐."
아무렇지 않게 말을 내뱉곤 피식 웃어버리는 김종인을 흘끗 바라보다 조심스레 창문을 열었다. 열린 틈새로 시원한 바람이 솔솔 들어와 머리칼을 이리저리 흩뜨려 놓았다. 상쾌한 바람에 기분이 좋았다. 달리는 자동차의 조수석에 가만히 앉아 차창 너머를 바라보는 건 정말이지 재밌었다. 키 큰 나무들이 빠르게 휙휙 지나가 버리는 것도 재미있고, 하늘 높이 떠있는 노오란 달이 나를 따라오는 듯한 착각이 이는 것도 재미가 있었다. 그러나, 누구는 피곤함을 무릅쓰고 열심히 운전을 하고 있는데 또 누구는 밤의 광경을 감상하며 재미를 느끼고 있다는 게 조금은 씁쓸하다는 생각이 들어, 슬쩍 고개를 돌려 녀석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천천히 입술을 뗐다.
"종인아, 피곤하지."
"조금."
"집 가자마자 바로 씻고 코오- 자. 알았지?"
"재워 줘."
"내가? 뭘 어떻게 재워 줘, 내가…."
"전화통화로 자장가 한 번 불러주면 돼."
"김종인 완전 애기네, 애기."
"그건 아니고."
"맞는데요."
"들어가기 전에 뽀뽀도 한 번 해주고."
"뽀뽀 귀신이야?"
"응."
"……."
"뽀뽀가 부담스러우면, 키스로 바꿔도 된다."
"… 응큼하네."
아무렇지 않게 짓궂은 말을 건네오는 김종인을 바라보며 살풋 웃음을 지었다. 몰랐는데, 김종인은 은근 응큼한 면을 지니고 있는 것도 같았다. 분명 녀석에 대해 다 알고 있다며 자부를 하던 나지만, 이렇게 새로운 모습이 발견될 때면 왠지 모르게 묘한 감정이 들었다. 김종인한테 이런 면도 있다니-. 다 알고 있다 생각했는데, 역시 아직은 아니구나. 아직 차근차근 알아갈 게 많구나, 싶었다. 그러나 오히려 기분은 좋았다. 녀석의 새로운 모습들, 녀석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던 부분들을 발견하면 발견할수록 그에 비례하듯 기쁨은 크게 다가왔으니 말이다.
"고마워."
"뭐가."
"그냥, 다. 부모님이 널 정말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 같아."
오늘은 왠지, 쉽게 잠이 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하루종일 기분 좋은 일들의 연속이었던 오늘처럼, 내일도 모레도 그런 하루가 되었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졸리면 자. 도착하면 깨울게."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에 쏘옥 박혀왔다. 김종인의 시선이 향해있는 앞 유리엔, 젤리를 길바닥에 몽땅 쏟아버린 채 엉엉 울고있는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이 담긴, 살짝 색이 바랜 사진 하나가 놓여있었다.
*
시간은 흘러흘러 잘만 갔다. 종강을 한 지 얼마 된 것 같지도 않은데 언제 이렇게 시간이 흘러버린 걸까, 싶을 정도로 빠르게….
방학이라 해서 특별히 무언갈 하는 건 아니었다. 어느 누군가는 방학을 맞아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다이어트를 하거나, 소중한 사람과 함께 여행을 떠나는 등 알찬 나날들을 보내고 있겠지만, 난 아니었다. 그저 학교만 안 가고 있을 뿐이지, 평소와 다를 것 하나 없는 지루한 날들의 연속이었다. 방학 기간 동안만이라도 다시 아르바이트를 시작해 볼까- 하는 고민도 수없이 했지만, 결국 실천에 옮기진 않았다. 김종인을 만나지 않는 날엔 그저 집에 코옥 틀어 박힌 채 침대를 뒹굴거렸고, 잠을 잤다. 마치 폐인과도 같은 내 모습이 한심하게 느껴지긴 했지만, 아무렴 상관은 없었다. 하루종일 뒹굴거리기만 하던 지루한 나날들보단 김종인과 함께 하던 행복한 나날들이 훨씬 많았으니 말이다. 참, 어젠 김종인과 신발 매장에 들러 커플 운동화를 한 켤레 구입했다. 나는 빨간색, 김종인은 파란색-. 아까워서 신지도 못할 것 같긴 하지만, 이렇게 커플 아이템이 하나씩 늘어가고 있다는 게 정말이지 기쁘게만 느껴졌다.
[아나.. 손님이 끝없이 오냐, 왜. ㄹㅇ 바쁨.. 너 일할 때도 이랬냐?]
내 소개로, 오세훈은 내가 아르바이트를 하던 빵집에서 얼마 전부터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게 되었다. 제 딴에는, 겨울방학 때 홀로 갈 유럽 여행을 대비해 지금부터라도 미리 돈을 벌어놓기 위함이라고 하는데…, 아마 PC방비를 벌기 위함인 것이 분명했다.
텍스트로도 짜증이 가듣 묻어나는 메시지였다. 바쁜 와중에도 문자는 잘만 보낸다니까-. 작게 미소를 짓곤 답장을 입력하기 시작했다.
[지리적 위치가 좋아서 그래. 그 빵집 장사 완전 잘 돼. 고생 좀 하셔.]
그리곤 얼마 안 있어 답장이 도착했다. 이렇게 바쁜 와중에도 몰래 휴대폰 하는 모습이 점장님 눈에 띄면 분명 싫은 소리를 듣게 될 텐데-.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시금 화면을 터치해 방금 전 도착한 메시지를 확인했다.
[약올리냐? 다시 내 놔, 돌하르방 미니어쳐.]
얼마 전 제주도 여행을 만족스럽게 다녀온 오세훈은 기념품으로 돌하르방 미니어쳐를 두어 개 사왔다. 엄지손가락만 한 게 더럽게 비싸다며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해대던 녀석은 내게 하나, 김종인에게 하나를 선물로 주었더랬다.
'잔 말 말고 가져, 인마들아.'
좋게 주면 될 것을 굳이 틱틱거리며 던져주던 오세훈의 모습에, 김종인은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저어보였다.
돌하르방 미니어쳐로 협박을 해오는 녀석이 그저 웃기기만 해, '화이팅'이라는 세 글자를 입력한 뒤 메시지를 전송했다. 그리곤 다시 바빠지기 시작한 건지, 한참이 지나도 녀석에게선 답장이 오지 않았다.
"……."
지금은 오후 4시 55분. 김종인을 마지막으로 본 건 어제 오후 10시 경. 연락도 몇 시간 전 점심 먹을 때 한 게 마지막. 오늘은 하루종일 녀석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사촌동생이 군대에서 휴가를 나왔다며 오랜만에 가족끼리 모여 식사를 하기로 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기차 타고 가, 기차. 오랜만에 타보는 기차라며 제법 무심히 말을 해오던 김종인의 목소리가 귓가에 아른거렸다. 아마 기차 안에서 곯아떨어졌겠지. 기차의 덜컹거리는 움직임에도 깨지 않고 있다가, 목적지에 도착하면 비몽사몽한 상태로 내리겠지. 안 봐도 비디오인 녀석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 보았다. 꽤나 먼 거리를 달려야 한다며 한숨을 내쉬던 녀석의 모습이 다시금 떠올랐다. 지금쯤 뭘 하고 있으려나-. 아직 기차 안일까. 자느라 연락도 안 되고…. 진짜 잠만보, 졸음쟁이야. 미워.
은근히 샘솟기 시작하는 섭섭함에 마음속으로 김종인에 대한 불만을 표출해내고 있을 무렵, 잠잠하던 휴대폰에서 짧은 진동이 울렸다. 문자 메시지가 도착한 것이었다. 그러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들여다 본 화면엔 반짝이는 하트 세 개가 아닌 딱딱한 다섯 글자가 떠있었다. 도경수 선배.
[잠깐 볼까.]
*
얼마 안 있어 도착한 학교 앞 카페는 제법 많은 사람들로 차 있었다. 간단히 할 말이 있다며 이 장소에서 잠깐 만날 수 있냐는 도경수 선배의 메시지에 왠지 모를 불안감이 물밀듯이 밀려온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유리 문을 당겨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보여오는 북적북적한 광경에 잠시나마 치밀었던 불안감이 조금은 해소가 되는 것도 같았다. 작게 심호흡을 하곤 한 발짝 한 발짝 걸음을 떼며 주위를 훑어 보았다. 그리곤 얼마 안 있어, 구석 자리에 앉아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그의 모습을 쉽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 안녕하세요."
턱을 괸 채 휴대폰을 만지고 있는 그에게 작게 인사말을 건넸다. 그런 내 모습에 슬쩍 고개를 들어 눈을 맞춰오던 그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스레 그의 맞은 편 자리에 앉곤 머쓱히 미소를 지어보였다. 오랜만에 보는 거라 그런지, 조금은 어색함이 감도는 것도 같았다.
"잘 지내셨어요?"
"나름."
무뚝뚝하게 대답을 내뱉은 그가 잠시 뜸을 들이는 듯싶더니, 천천히 입술을 떼기 시작했다. 제법 망설이는 듯한 그의 모습이 괜히 내 마음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박찬열, 지금 병원에 있어."
"… 네?"
"아직 정신을 못 차린 것 같더라고. 계속 말리고 심한 말도 해봤는데 나아지는 게 없어서, 그냥 병원에-."
"……."
"안 가겠다는 거 억지로 끌고 가느라 고생한 것도 있는데, 나도 마음은 편해."
"……."
"찬열이 휴대폰에 있던 네 사진이랑 SNS 캡쳐본은 내가 다 지웠으니까 안심하고."
"……."
"너희 집 화장실 내부를 찍은 사진도 있던데. 칫솔이랑 치약, 샴푸, 비누, 바디워시… 뭐, 이런 거."
"……."
"같은 걸 쓰고 싶었나 봐. 집에 한가득 쌓여 있더라, 같은 종류로."
다시금 치밀기 시작하는 두려움에 몸을 움츠렸다. 역시 불안감이 싸악 달아난 건 아니었다. 그의 이름을 듣는 것조차도 난 아직 무서웠다. 잠시나마 잊고 있던 그를 떠올리면 또다시 소름이 끼치는 게, 저 깊은 곳에 불안함이라는 감정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을 자각시켜 주는 것만 같다.
"부모님한테도 다 말씀 드렸어. 그동안 본인 아들이 어떤 짓을 해왔고, 무슨 생각을 가져왔는지."
"……."
"심리치료 받고 있어. 그 기간이 얼만큼이 될진 아직 미지수지만."
"……."
"그냥, 이 말 해주려고 불렀어. 더이상 불안해 하지 말라고."
말을 마친 그가 작게 웃어보였다. 환한 웃음이 아닌 희미한 웃음이지만, 그의 웃는 얼굴을 보는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하트 모양의 입술은, 예쁜 호선을 그리며 웃어보일 때 더욱 큰 하트가 되었다. 그게 조금은 신기하면서도 독특해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만 있다, 덩달아 미소를 머금은 채 그에게 말을 건넸다.
"고마워요."
무심히 제 할 말을 끝낸 그가 다시 휴대폰 화면으로 시선을 옮겨놓았다. 고맙다는 내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이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듯했다. 꽈악 막혀있던 속이 뻥- 하고 뚫린 것도 같았다. 병원에서 심리치료를 받고 있다는 박찬열을 떠올리면 나도 모르게 답답한 감정이 치밀긴 했지만, 일단 마음은 편안했다. 이제 된 건가, 이제 마음을 편히 가져도 되나, 이제 해결된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안심하라는 그의 말에 안심이 되었다. 불안해 하지 말라는 그의 말에, 이젠 정말 불안해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좋은 예감이 들었다.
"……."
묵묵히 그를 바라보다 의미 없는 손가락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한 차례의 대화가 끝이 나서 그런지, 그와 나 사이엔 무거운 정적만이 감돌았다. 뭐, 좋은 화젯거리가 없을까…. 찬찬히 머리를 굴리며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리곤 이내 떠오른 생각에, 그를 향해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선배는 여자친구… 안 만드세요?"
"응."
"왜요?"
"별로 생각 없어."
"… 아…."
"좋다는 생각이 드는 여자도 없고,"
"……."
"나 좋다는 여자도 없네."
아무렇지 않게 건네오는 말엔 그 어떠한 감정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 애당초 '여자친구'라는 존재에 별 관심이 없어 보이긴 했지만, 그는 그것에 관해 생각보다 더욱 무신경했다.
"오늘은 남자친구 안 만나나."
"아…, 남자친구가 오늘은 좀 바빠서요."
"그래."
고개를 끄덕이던 그가 제 휴대폰 시계를 확인하는 듯싶더니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그를 바라보려 고개를 들자, 이내 그가 내 어깨에 제 손을 얹어온다.
"조심히 들어가."
진부한 인사말 대신 조심히 들어가라는 한 마디를 내뱉은 그가 천천히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개강 하고 봐요, 선배. 그의 뒷모습에 대고 말했다. 그가 문을 엶과 동시에 문에 달려있던 종이 딸랑- 하며 경쾌한 소리를 냈다.
*
카페에서 도경수 선배를 만나 간단히 대화를 나누고, 집으로 돌아와 밥을 먹고 씻고 나오기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김종인에게선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늦은 저녁 시간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잠잠하기만 한 휴대폰이 이렇게 원망스러울 순 없었다. 도대체 지금쯤 어디서 뭘 하고 있을지…, 너무나도 궁금했다.
"……."
마침 할 일도 없고 무료한데, 오이 마사지나 하자 생각하며 냉장고에서 남는 오이를 하나 꺼내 얇게 썰었다. 그리곤 한 조각을 입에 쏘옥 넣어 오물거리며 거실 소파에 풀썩 누웠다. 얼굴 위로 오이 조각을 하나씩 올려놓을 때마다 냉기가 돌았고, 제법 촉촉해진 얼굴이 꽤나 시원하게 느껴졌다. 기분이 별로일 때마다 오이 마사지를 하며 기분 전환을 해야지. 지그시 눈을 감곤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얼마 안 있어 바로 옆에 놓여있던 휴대폰에서 긴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누구지, 이 시간에-. 고개를 갸웃하곤 힘겹게 휴대폰을 들어 밝아진 화면을 확인하였다. 발신인은 김종인이었다. 영상통화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있던 녀석에 대한 섭섭합이 싸악- 사라져 버리는 순간이었다. 절로 번지기 시작하는 미소에 큼큼 목을 가다듬곤 버튼을 꾸욱 눌렀다.
"여부세여."
- 여보세… 뭐야? 오이 귀신이다….
"아니거등."
얼굴에 오이를 다닥다닥 올려놓은 탓에 발음이 잔뜩 뭉개졌다. 그런 날 바라보며 크게 웃음을 짓던 김종인이 이내 다시금 입술을 떼기 시작했다.
- 얼굴 보려고 영상통화 한 건데 오이가 다 가리고 있어.
"놀랐어?"
- 웬 오이 마사지야. 안 해도 예쁘잖아.
"… 지금 뭐 해?"
- 방금 씻고 나왔어. 오늘 연락 안 돼서 답답했지.
"조오금."
- 여기 통화가 잘 안 터져. 지금 이것도 어렵게 신호 잡아서 성공한 거야.
"… 진짜?"
- 응. 밥은 먹었냐. 뭐 먹었어.
"그냥 간단히 먹었지. 된장국에 말아서 냠냠."
- 냠냠했어?
"응…. 너는? 맛있는 거 많이 먹었어?"
- 많이 먹었지.
"잘했네."
- 보고 싶다.
부드럽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배싯 웃음을 지어보였다. 내일까지 어떻게 기다려. 투정 섞인 말을 덧붙이는 녀석의 모습이 여간 귀엽게 느껴지는 게 아니었다. 딱 몇 시간 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하루가 길게 느껴질 줄이야-. 정말이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 뽀뽀.
낮게 한 단어를 내뱉은 김종인이 화면에 대고 입술을 쭈욱 내밀어 보였다. 하여튼, 뽀뽀 귀신이었다. 그 모습이 웃기면서도 귀여워 살풋 웃음을 터뜨려 보이자, 왜 웃냐며 제법 정색을 해온다. 그런 녀석의 모습에 마지못해 화면에 대고 입을 맞추는 시늉을 해보였다.
- 귀여워.
그런 내 행동에 피식 웃음을 짓던 김종인이 낮게 읊조리듯 말했다. 괜히 마음속이 간질간질, 기분이 좋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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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륵.. 전 결국 개강을 했답니다.. 사실 원래 목표는 여름방학이 끝나기 전에 시즌 투 완결을 내는 거였는데.. 거창한 목표였네요, 이제 보니까.. 다들 학교 열심히 다니고 계신가요? 전 아직도 실감이 안 나네요.. 쨰증냬여.. 하지만 우리 모두 힘을 내요. 힘을 내요 슈퍼빠월~☆ 그나마 한가할 때 조금이라도 글을 써둬야겠져.. 그래야만 해..
참, 주인공은 종인인데 세훈이가 더 많이 나오는 것 같다면.. 그건 여러분 착각이에요.. 사실 저도 가끔 혼란이 올 때가 있어요.. 주인공이 세훈이였나..? 하며.. 종이야 고멘나사이..
제가 이번 주는 시간이 좀 많아요! 다들 궁금한 거 없으신가요? 글을 읽으면서 좀 이해가 안 됐던 부분이라든지.. 부분이라든지.. 부분이라든지.. 특별히 바라는 점이 있으시다면 주저 말고 뱉어내 주세요! 여러분의 의견을 적극 반영하고 싶네요. 하지만, 아무도 없다면 조용히 소금이 되겠습니다.. 사적인 것이어도 좋으니, 발 사이즈라도 물어봐 주세요..
* 암호닉 *
[ㄱ/ㄲ] 가글 /가락 /가지 / 거꾸로해도정수정 / 거뉴경 / 건망고 / 검은콩두유 / 고기만두 / 구글조닌 / 구사일생 / 규규 / 귤껍질 / 귬귬 / 근댕 / 글잡캡틴미녀 / 기적 / 김종이ㄴ / 까까 / 까리까리 / 깜종인 /꺄 / 꽃이된다 / 꿀꿀 / 꿀잼 / 꿍야슈슈 / 뀨룽
[ㄴ] 나노 / 나니꺼 / 나무 / 냠냠 / 냥냥 / 네네스노윙 / 녹차라떼 / 니나노
[ㄷ/ㄸ] 다래 / 다예 / 다원 / 다이아 / 단이 / 단팥 / 달달이 / 도도토 / 도비 / 도어엉 / 도토도 / 됴깡 / 독자17 / 듀바 / 듀퐁 / 디보 / 따따 / 또해 / 똥잠 / 뚜더지 / 뚜뚜 / 뚱바 / 뚱이
[ㄹ] 라온이솔 / 라인 / 라코 / 랑우 / 런웨이 / 럽미베베/ 레몬사탕 / 로리나 / 로운 / 로이 / 롯데월드 / 루피뚜 / 리리 / 리찌 / 릴리
[ㅁ] 마시멜롱 / 만떼 / 말랑 / 망고 / 망고빙수 / 맥듀 / 맴매맹 / 메론빵 / 메리미 / 멜리멜랑 / 멜팅 / 모별 / 모서리 / 모찌 / 몽글몽글 / 몽디 / 몽이 / 뭉이 / 미리별 / 민럽 / 민석쀼쀼 / 민소쿠쨩 / 민툽 / 밍뿌 / 밍쏘쿠
[ㅂ/ㅃ] 바나나 / 바나나킥 / 바자다가 / 바카 / 바퀴 /박보 / 밤비 / 밥 / 배리 / 배큥아리 / 백현모양처 / 벚꽃너굴이 / 별다방커피 / 보노보노보 / 보스 / 복숭아 / 봄봄 / 봄비 / 분무기 / 불가 / 불꺼진방 / 비비빅 / 빵 / 뽀뽀뽀 / 뿅아리 / 뿌꾸빰 / 쁌쁌
[ㅅ/ㅆ] 삼디다스 / 샤니빵 / 서쥬니 / 설레미 / 설렘사 / 셜록 / 숑숑이맘 / 수박마루 / 슈둥슈둥 / 슈팅스타 / 스누 / 스무살의봄 / 스윗펌킨 / 스파게티 / 스폰지밥 / 슨니야 / 시동 / 시매니저 / 시카고걸 / 썬다운 / 쑤우쑤우 / 쓔쓔
[ㅇ] 아가야 / 아야어여 / 아이스크림 / 안녕내게다가와 / 알콩/ 애를도라도 / 얍스 / 어린왕자 / 어화둥둥 / 여니 / 열럽 / 영쓰 / 예헷 / 오빠설렘사 / 오세훈의각시 / 올봉 / 왕 / 요거트 / 요맘때 / 용이 / 우유퐁당 / 우주최강 / 윋드유 / 윌리웡카 / 윤슬 / 윤천사 / 은하수 / 이과생 / 이레네 / 이야핫 / 일루와
[ㅈ/ㅉ] 자몽이제일조아 / 젤라 / 종달샘 / 종대마님 / 종스팸 / 종이니니 / 종이인형 / 종종걸음 / 지블리 / 짝짝 / 짱구여친 / 쫑니 / 쮸쀼쮸쀼 / 찌개 / 찐빵
[ㅊ] 찬샤 / 찰떡 / 체리 / 초코 / 초코붕 / 초코파이 / 쵸파/ 치드봉봉 / 치즈돈가스 / 츤데레
[ㅋ] 카프 / 콩부인 / 쾌지나첸첸나네 / 큥쓰큥쓰 / 큥큥 / 키엘 / 킴벌리
[ㅌ] 타니 / 털ㄴ업 / 테라피 / 툭툭
[ㅍ] 퓨어 /핑구
[ㅎ] 핫초코 / 해피 / 햄버거 / 행쇼 / 허니잼 / 형광등 / 호이호잇 / 훈훈 / 희망 / 히밤
[영어] DB /dprth8391 / HaMo / YUNE
[숫자] 0408 / 0616 / 0618 / 0622 / 1226 / 3관왕센 / 500원 / 84니니
[특수문자] #두근
분명 암호닉을 신청한 것 같은데 목록에 내가 없다, 하시는 분들 몇몇 계실 거예요. 그런 분들은 아마 암호닉 정리할 때 자기 암호닉 언급을 안 해주신 분들이거나, 제 실수로 누락되신 분들입니다.
난 분명 15화에 암호닉생존신고or신청을 했는데 누락됐다, 하시는 분들 계시다면 꼭 말해주세요 :)
당분간 암호닉 신청은 받지 않을 생각이에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