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na Del Rey - Young & Beautiful (The Theorist Piano Cover)
전편 못보신 비회원 분들은 이번화 올린 후 곧바로 올라오는 불마크 텍파 멜링 공지로 ㄱㄱ
도작가의 은밀한 취미W.Richter
취미
1. 전문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 즐기기 위하여 하는 일
2. 아름다운 대상을 감상하고 이해하는 힘
" 나한테 하루만, 하루만 더 허락해줘 "
하루만. 도경수가 내게 부탁한 시간은 일주일도, 한 달도 아니었다. 딱 하루. 나를 삼켜버릴 듯이 강하게 끌어안고 있는 팔에 비해 너무나도 소박한 그의 바람은 내 가슴을 후벼팠다. 내가, 혹은 도경수 자신이 어디론가 떠나버릴 것이란 걸 알고 있는 사람처럼 도경수는 내게 부탁 아닌 부탁을 해왔다. 거부할 수 없도록 감미롭게 잠긴 그의 목소리에 나는 내 옷자락을 꼭 쥐어잡고 있는 그의 손 위로 내 손을 겹쳤다. 오히려 어디론가 떠나갈까, 나를 버릴까, 걱정해야 할 건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나인데.
마주 보지 않아도 곤히 눈을 감고 있을 도경수에 나는 한참을 입을 열기 망설였다. 공허하다. 뒤에서 나를 끌어안고 있는 도경수도 내 살결에 배어든 도경수의 체취도 모든 것이 그토록 바라왔던 것뿐인데도 공허하다. 내가 원해왔던 것들뿐인데 단 하루만 더 허락해달라는 도경수의 말에 그가 금방이라도 날 풀어줄 것만 같은 느낌에 짙은 공허함이 온몸을 덮쳐온다. 아무 일도 없을 거라, 그의 규칙적인 숨소리에 내 호흡을 맞추며 속을 달랬지만 은근한 공허함은 끊임없이 밀려와 울연한 기분을 자아냈다.
도경수의 손등 위에 검지로 원을 수십 번도 더 그리던 나는 숨을 깊게 들이쉬길 반복했다. 누군가에게 내 속마음을 여과 없이 드러내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그 누군가가 나와 심리적으로도, 육체적으로 가까운 사람일지라도. 항상 나를 붙잡아왔던 도경수였기에 그를 붙잡고자 하는 말을 내뱉는 것은 내게는 꽤나 벅찬 일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머릿속, 온갖 헛생각들이 풀 수도 없게 엉켜버려 시선을 흐리던 와중 문뜩 한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이기적인 사람이었던가.
매번 도경수가 날 잡아주기만을 원했다. 내가 떠나갈까 조마조마하는 그의 모습이 좋았다. 나를 원하고, 필요로 하고, 안고 싶어 하는 그가 좋았다. 오직 그가 나만을 원하길 바라왔다. 나에게 있어 그의 의미, 도경수의 의미를 생각지도 못하고.
어쩌면 지금껏 도경수의 불안감을 증폭시켰던 존재는 김준면, 박찬열이 아닌 나의 비중이 가장 컸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이제는 확신할 수 있다. 내가 도경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익숙할 정도로 많이 보였던 도경수의 위태로운 눈빛이 뇌리를 파고든다. 도경수, 본인이 위태로운 것이 아니었다. 도경수에게 있어 감당할 수도 없게 의미가 커져버린 내가 사라질까, 등을 돌릴까, 잃게 될까, 온전히 나를 향한 눈빛이었다.
일순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도 그를 안심시켜주지 못하고 그저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역할을 다 했다 생각한 나 자신이 한심스러워진다. 동시에 울컥 미안한 마음이 치솟아 눈시울이 뜨거워져간다. 도경수의 앞에서 절대로 우는 모습은 보여주지 않았던 나였는데 이번에는 속절없이 눈물이 터져 나온다. 훌쩍거리는 소리조차 내지 않고 조용히 옆으로 눈물을 굴려보내니 한쪽 볼과 맞닿은 베개가 뜨겁게 젖어간다. 살짝 떨리는 손으로 그의 손 위에 겹쳐올려두었던 손에 힘을 주었다.
미안하다고 분명 말을 꺼내야 하는데 풀로 붙여놓은 듯 도저히 열리지 않는 입에 아랫입술만 깨물던 나는 사근 사근 거리는 도경수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눈을 지끈 감고 도경수의 품 안에서 몸을 돌려 그를 마주 보니 곧바로 그의 또렷한 이목구비가 눈동자 가득히 들어찬다. 매일같이 보는 도경수의 얼굴이지만 시시때때로 풍겨오는 낯선 느낌은 지울 수가 없다.
차분히 감겨있는 눈과 이어져있는 긴 속눈썹이 오늘따라 창문으로 새어들어오는 햇살을 받아 유난히도 두드러진다. 지금 당장 두 눈을 떠 나를 바라볼 것만 같은데 어느새 다시 깊게 잠에 빠져든 모양인지 내 움직임에도 속눈썹만 작게 흔들릴 뿐이었다.
도경수의 품 안에 묶여있듯이 갇힌 손을 올려 그가 깨지 않을 정도로 조심스럽게 볼을 쓰다듬었다. 손이 닿을 때만 해도 바로 눈을 뜰 것처럼 파르르 떨리던 속눈썹은 이내 손길에 익숙해진 탓에 잠잠하게 가라앉았고 내 손은 계속해서 그의 뺨을 매만졌다. 지금은 아득하기만 한 위태로웠던 새벽, 도경수가 내 눈, 코, 입 하나하나를 소중하게 매만졌던 것처럼 이번에는 내가 그의 눈, 코, 입 하나하나를 부서질까, 재가 되어 날아가 버릴까 너무나도 소중하게 어루만졌다.
손끝을 아슬아슬하게 스치는 촉감마저 잊고 싶지 않을 정도로 소중했기에 속눈썹을 쓰는 손길만 해도 한참이 걸릴 정도였다. 부드럽게 올라가있는 콧대와 시선을 빼앗길 만큼 곱게 굴곡진 입술까지 완벽히 손끝에 담은 내가 볼에 손을 올려놓으려 하니 한동안 미동 없이 있던 도경수의 눈의 천천히 트였다.
사람을 홀려버릴 듯이 새까만 그의 눈동자는 햇볕이 담겨 찬연한 갈색이 되어 예쁘게 빛났고 갑자기 눈을 뜬 그에 놀란 내가 소리 없이 움직이던 손을 허공에 멈추자 도경수는 미소도, 인상도 짓지 않고 꽤 오랫동안 나와 눈을 마주치는가 싶더니 다시 잠에 빠져드는 듯 눈을 감았다. 그제야 허공에 멈춘 손을 그의 볼 위로 올려놓을 수 있었고 도경수는 약하게 힘이 풀려버린 날 안고 있는 팔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는 울지 마, 하고 가슴에 파고 들도록 낮게 속삭인다.
울지 말라는 도경수의 말이 기폭제가 되어버린 듯이 조금씩 흘러떨어지던 눈물 줄기는 내 양손으로는 막을 수도 없이 굵은 방울이 되어버렸고 그를 향한 미안한 마음만 더 커져간다.
하고 싶은데. 해야 하는데, 꼭 해야 하는데, 미안하다는 말이 도저히 나오지 않는다.
도작가 의 은밀한 취미 . 너의 의미
내가 느꼈던 불안감과 공허함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며칠의 시간이 흘렀다. 이제껏 그래왔듯이 도경수는 '순결한 타락'의 차기작이자 절필 전, 마지막 작품인 '비꽃 지는 밤'을 이어서 집필했고 나는 어느새 막바지로 달려가는 '무제'의 마무리를 위해 말간 하늘이 비치는 창문 앞, 하얀 화면이 띄워진 노트북을 마주 보고 멍하니 초점을 놓았다. 무제의 초반 부분은 어떻게 시작을 했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감추어야 할 부분, 감추지 말아야 할 부분 구분 없이 나의 모든 것이 담겨있었고 또 이걸 보고 내가 문하생이 될 수 있도록 허락해준 도경수의 세세한 속마음이 궁금하기까지 하다.
하루에 서너 페이지 쓰기 조차 힘들었는데 모아보니 장장 삼백 페이지 가까이 되는 무제의 짧다란 스크롤을 이리저리 올리고 내려보던 나는 천천히 초반부터 살펴보기 시작했다. 잠만 자던 작은 자취방에서 폐인처럼 썼던 일흔 장을 지나쳐 도경수가 옆에서 지켜보며 '쓸데없을 정도로 많은 표현'이 있다고 정정해주었던 부분, 그리고 읽기 힘들 정도로 길었던 문장을 '평온함에서 오는 권태로움'이라는 한 문장으로 축약해주었던 부분을 보니 지금은 내 글에 일말의 관심조차 가져주지 않는 도경수 같을지 몰라도 초반 부분에서는 꽤나 그의 손길이 많이 닿아있다.
눈으로 글을 빠르게 훑어나가며 초반 부분을 지나니 점점 줄어드는 도경수의 손길과 굳이 도경수의 손길이 닿지 않아도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와 비슷하게 닮아가는 나의 필체를 보니 희미하게 입꼬리만 올라간다.
마우스를 잡지 않은 손 손끝으로 소리가 나도록 책상을 두드리던 나는 모니터 오른쪽 아래에 있는 시계를 곁눈질했다. 점심이 지나고 별다른 말없이 잠깐 나갔다 오겠다는 도경수가 돌아올 때쯤 된 것 같은데 어쩐 일인지 조금 늦는다. 저번에 비를 맞고 돌아온 도경수가 생각나 내심 조마조마한 마음이 들었지만 아직 완전히 해가 지지 않은데다 비도 오지 않으니 괜찮을 거라 두근거리는 마음을 억지로 잠재웠다.
그렇게나 쉬고 싶다고 말했던 도경수였는데 무슨 일로 나가냐고 한 번쯤 물어볼걸. 뒤늦은 후회를 하며 중간까지 살펴보았던 무제의 스크롤을 마저 내리는데 내리면 내릴수록 내 필체는 도경수의 필체와 비슷하다는 말로도 부족할 만큼 닮아가는 게 눈에 보인다. 그렇게 원하는 도경수의 필체와 닮아가니 기뻐해야 할지, 아니면 나만의 독특한 필체가 없는 것에 슬퍼해야 할지, 픽, 힘없이 웃던 나는 턱을 괴고 도경수가 올 때까지 이 따분한 시간을 어떻게 알차게 보낼지 터무니 없는 고민에 빠져들었다.
도경수가 와야 무제의 마무리를 진행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
경수는 삼십분 전부터 쉴 틈 없이 울려대는 핸드폰을 무표정하게 내려다보았다. 가만히 두면 알아서 끊기리라는 생각은 대단한 착오라는 듯이 계속 이어지는 핸드폰의 진동은 글을 쓰던 경수의 인상이 자연스럽게 구겨질 만큼 신경을 건드렸다. 웃음도, 경멸도, 아무런 감정도 없는 경수의 눈동자에는 까만 핸드폰 화면 한중간에 찍힌 세 글자가 틀어박혀왔다. 김준면, 그 일이 있고 나서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이렇게 연락을 하는지, 경수에겐 웃기지도 않을 일이었다. 가만히 핸드폰을 내려다보는 동안 한차례 울리던 전화는 끊겼고 혹시나 하며 경수가 계속해서 핸드폰 화면에 시선을 꽂고 있자 역시나 끊긴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김준면의 이름이 또다시 핸드폰 액정 한 중간에 띄워졌다.
경수는 입 밖으로 나오려는 깊은 한숨을 삼키고 핸드폰을 잡아들었다. 오늘도 나한테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자신의 충견 노릇을 시키겠지. 항상 행동 패턴이 똑같던 준면이었기에 경수는 전화를 받자마자 왜 전화를 이렇게 늦게 받았냐며 화를 낼 준면에 미리 마음 준비를 하고 초록색 수락 버튼을 끌어당겼다. 소리라도 칠까 핸드폰을 귀에서 살짝 떨어지도록 잡은 경수는 익숙지 않은 정적에 눈동자를 굴렸다.
준면과의 통화에서 이토록 긴 정적은 처음이었다. 가끔 경수가 말을 끊거나 준면이 한숨을 쉴 때아니면 통화 중에 정적이 흐르는 일은 절대 없었다. 또한 전화를 받자마자 전화를 건 목적부터 무섭도록 늘어놓던 준면이었는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정적이 길다. 끊어진 건가 싶어 경수가 핸드폰을 귀에 가까이 가져다 대고는 나직이 여보세요, 하며 말을 트자 깊게 숨을 내쉬는 소리인지 들이쉬는 소리인지 모르게 상대방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 견우 출판사 기획편집 1팀 팀장, 김준면입니다
다른 누군가가 들으면 상투적이라고 느낄 정도로 틀에 박힌 형식적인 인사였지만 경수에게는 더없이 낯선 준면의 인사였다. 더군다나 경수에게는 준면만큼의 천연스러움이라든가 뻔뻔함이 없었기에 저번 일이 있고 나서는 인사조차 받아주기 힘든 상황이었다. 인사에 대한 대답을 기다리듯이 김준면입니다, 하고 말을 끝낸 준면은 아무런 말도 먼저 꺼내지 않았다. 또다시 이어지는 정적에 무슨 대답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 경수는 숫기없는 목소리로 아, 네... 하고 작게 대답했다.
- 이번 계약건에 대해 드릴 말씀이 있어서 이렇게 전화 드렸습니다
" 계약건? 이번 글은 아직... "
- 아뇨, 그런 부분이 아니라 직접 만나봬서 진중하게 이야기해야 할 부분이라 작가님께서 출판사로 찾아와주셨으면 합니다
찰나 출판사로 찾아와주었으면 한다는 말에 이유 없는 불안감을 느끼곤 눈썹을 움찔거리던 경수는 곧 적응되지 않을 정도로 담담한 준면의 목소리에 구겼던 인상을 폈다. 준면으로부터의 존댓말도, 이런 차분한 대화도 모든 것이 경수에게는 낯선 것 투성이었다. 또한 항상 말속에 담겨있던 명령조가 오늘따라 들리지 않을 만큼 희미했기에 경수는 준면에게서부터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위화감을 느낄 수 있었다.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준면이었기에 지금 이것도 혹시 자신을 충견으로 길들이기 위한 간악한 뱀의 꾀는 아닐까 하며 경수가 선뜻 대답하기를 망설여하자 조용히 대답을 기다리던 준면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 오시기 좀 그러시면 저희 쪽에서 작가님 댁에 찾아가 할 수 있는 이야기니 가능한 시간대 말씀해주시면 시간에 맞춰 직원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 ...직접 얼굴 보고해야 할 이야기면 제가 가겠습니다 "
경수의 대답에 준면은 또 짧은 정적을 흘렸다. 언제나 무섭도록 당차던 준면의 태도가 평소답지 않게 많이 신중해져있다. 아, 네,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죠. 준면의 말을 끝으로 통화를 끊으려 하니 매번 대화가 끝나기가 무섭게 먼저 통화를 끊어버리던 준면의 작은 숨소리가 전화 너머로 들려온다. 경수에겐 지금 겪는 이 상황이 설마 꿈은 아닐까, 환상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익숙하지 않아 또렷한 제 두 눈만 감았다 뜨기를 반복했다.
경수가 먼저 끊기를 바라는 듯 끝끝내 준면이 먼저 통화를 끊지 않아 느리게 귀에 가져다 대었던 핸드폰을 내리던 경수는 무언가의 끝을 직감할 수 있었다.
언젠가는 다시 발을 들여놓을 것이라 대충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빨리 오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한 출판사에 도착한 경수는 프레센티아 인터뷰 사건 때와는 또 다르게 어수선한 사무실 분위기를 읽어냈다. 경수가 사무실 내로 발을 들여놓자마자 무슨 이야기인지 들리지 않게 속닥거리는 모습부터 경수를 힐끔거리는 눈빛까지, 하나같이 이유 모를 것들뿐이었다.
경수의 얼굴을 보자마자 한쪽 구석에 앉아있던 익숙한 남자 사원 한 명이 채도 높은 하늘색 파일철을 들고 의자에서 일어나 어색하게 인사를 건넸다. 언뜻 기억 날 듯한 얼굴에 미간을 좁히자 안경을 추켜올리는 본새가 프레센티아 인터뷰 사건 때 경수에게 정말 절필하냐고 물었던 바로 그 사원이다. 스쳐 지나가는 기억에 가벼운 목례로 인사를 받아주자 머뭇거리는 걸음으로 자기를 따라오라는 손짓을 해 보인다.
여전히 신경 쓰이는 어수선한 사무실 분위기를 뒤로하고 남자 사원을 따라 팀장 실로 들어간 경수는 서류에만 집중한 채 눈도 마주치지 않고 말로만 인사를 건네는 준면을 바라보았다.
" 안녕하세요 도 작가님, 근래 자주 보는 것 같네요 "
" 그렇게 됐네요. 대체 어떤 이야기이길래 직접 얼굴까지 보고 이야기해야 하는지 궁금한데, "
경수의 정중한 재촉에 준면은 서류에서 눈을 떼고 눈치채기 힘들 정도로만 옅게 입꼬리를 올렸다. 준면이 팀장실 한쪽에 마련돼있는 유리 테이블과 베이지 빛 소파로 눈길을 돌리자 경수의 옆에 서서 눈치만 보고 있던 사원은 곧게 핀 손으로 소파를 가리키며 앉으라는 눈짓을 주었다. 준면과 소파를 번갈아보던 경수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소파를 향해 발을 옮겼고 곧이어 책상 위에 어지럽게 흩어져있는 서류를 정리한 준면이 깔끔하게 금장이 되어있는 검은 펜 하나를 쥐어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자신도 중간에 마련된 소파에 앉으며 펜을 경수에게 건네는데 대략 계약 내용이 변경되었다던가 계약에 추가 사항이 생겼다라고만 짐작 해왔을 뿐, 계약서 한 장도 보여주지 않고 무작정 펜을 쥐여주는 준면의 행동은 경수를 당황케했다. 경수가 펜을 받아들고 당혹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자 경수의 맞은편에 앉아있는 사원이 서툰 손길로 들고 왔던 파일 두 개 중 하나를 열어 내밀었다.
파일을 받아든 경수의 눈에 가장 먼저 박힌 건 종이 가장 윗부분에 자리 잡은 일곱 글자.
계약 해지 합의서
뜻밖의 서류에 경수가 눈을 크게 떠 보이자 준면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 도 작가님께서 이번 프레센티아 인터뷰에서 절필을 하겠다는 발언을 하시는 바람에 견우 입장이 곤란해진 건 잘 아실 테죠 "
" ... "
" 그 외에 작가님과 의견이 엇갈리고 지속적으로 갈등이 발생하는 등, 저희 견우에서는 더 이상 도 작가님과 정상적인 계약 관계를 유지하기 힘들다는 판단이 내려졌습니다 "
마치 계속해서 곱씹어보고 되뇌었던 말이었던 듯 막히지 않고 매끄럽게 나오는 준면의 말에 경수는 아무런 반박조차 하지 못하고 입을 굳게 닫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상하게도 기분이 나쁘다는 생각은 일말도 들지 않았다. 또 다른 파일 하나를 들고 똑같은 서류를 내려다보는 준면은 말을 하면서 단 한 번도 경수와 눈을 마주치는 일이 없었고 해지 사유를 읊는 준면의 어조에서는 분노도, 멸시도 느낄 수 없기 때문이었다.
" 이건 우리 견우의 일방적인 계약 파기입니다 "
" ... "
" 현재 도 작가님께서 마주 보고 있는 저희 팀 김대리가 도 작가님 이번 작품 다른 출판사로 인계해드릴 거고, 그쪽 출판사와 합의하에 견우보다 더 좋은 조건으로 작가님 이번 작품 출간해드릴 테니 거절할 이유도 없을 것 같네요 "
" ... "
" 계약 파기에 대한 위약금은 빠른 시일 내로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
깔끔하게 말을 끝낸 준면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똑바로 경수를 바라보았다. 황급히 마주한 눈을 서류로 내린 경수는 눈을 여러 번 깜빡이며 미숙한 손길로 펜의 뚜껑을 열었다. 여전히 갑과 을로 명시되어있는 계약서지만 이번 계약서만은 다른 계약서와 대단히 달랐다. 다른 계약서는 서명을 하게 되면 갑, 을 관계로 묶여 벗어날 수도 없었다면 지금 경수의 손에 쥐여진 계약서는 서명을 하게 되면 갑, 을 관계에서 풀려나는, 꿈으로만 꿔왔던 그런 계약서나 다름이 없었다.
그토록 꿈으로만 꿔왔던 지금인데, 웬일인지 경수의 손은 순순히 움직여주지 않았다. 항상 벗어나고 싶어 했건만, 언제쯤 끝일까 보이지 않은 끝을 향한 남은 날을 매일매일 세어 왔건만. 알 수 없는 감정이 서서히 경수의 가슴속부터 피어 올라왔다. 경수가 시원스럽게 손을 움직이지 않자 준면은 의문스러운 눈으로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여 경수의 서명을 기다렸고 경수는 바짝바짝 말라가는 입안을 억지로 축여가며 한참 동안이나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서늘하지도 그렇다고 딱딱하지도 않은 기류가 팀장실 안을 맴돈다. 준면이 어서 하라고 재촉하기 위해 입을 열 때 즈음 경수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실없는 웃음을 내비쳐 보였다.
" 허무하다 "
" ... "
" 이 종이 한 장이면 해결될 일이었는데 "
" ... "
" 왜 여기까지 왔을까, 우리가 "
경수는 툭툭 던지듯이 말을 뱉어가며 비스듬하게 잡았던 펜을 고쳐 쥐고는 (을) 성명 : 도경수라고 적힌 글 옆에 빠르게 자신의 이름을 흘려 써넣었다. 경수가 서명을 하는 걸 바라보고만 있던 준면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파일도 마저 내밀었고 경수는 더 이상 망설일 것 없다는 듯이 그 서류 위에도 똑같이 제 이름을 흘려 써넣었다. 경수가 뚜껑을 닫지 않은 펜을 내밀자 준면은 펜을 받아들며 대답했다.
" 그러게. 왜 여기까지 왔을까 "
" ... "
" 나, 네 문하생 글도 보고 싶었는데 "
" ... "
" 경수 네 글이랑 많이 닮아있을 것 같아서 "
(갑) 대표자 : 김준면, 그리고 두 번의 서명을 끝으로 삼십분도 채 안되는 짧은 시간은 그동안 둘을 지겹도록 엮어왔던 관계의 고리를 끊었다. 두 개의 파일 중 하나를 받아든 경수는 재차 서류를 위, 아래로 훑어보다 해지 합의 조건 중 한 문장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 다른 출판사로 인계는 내가 포기해도 되는 거지 "
" ... 네가 그러고 싶으면 "
준면의 미적지근한 대답에도 만족스러운지 경수는 썩 자연스럽지는 못하지만 나름대로의 웃는 낯으로 파일을 들고 일어섰다. 그러는 동안에도 준면은 이제는 돌이킬 수도 없이 완벽해져버린 서류에서 시선을 떼지 못 했다. 경수는 더 이상 만날 일이 없을 대리에게 형식상 잘 있으라는 인사를 하며 팀장실 문을 향해 걸어나갔다. 문을 열기 전까지 조차 준면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차가운 문 손잡이를 힘주어 잡은 경수는 머리를 살짝 돌려 준면에게도 마지막 인사를 건네주었다.
" 우리 앞으로 보지 말자, 형 "
준면의 입장에서는 건방지다고 느낄만한 경수의 인사임에도 불구하고 준면은 들릴 듯 말 듯이 깊게 한숨을 뱉으며 의미 모를 웃음이 섞인 목소리로 인사를 받아주었다.
" 그래 "
" ... "
" 우리 앞으로 보지 말자 "
서류는 갑, 을 관계로 맺어진 둘의 관계를 끊었다면 둘의 마지막 인사는 형제로 맺어진 둘의 관계를, 아니 둘의 모든 관계를 완전히 끊어놓았다. 지겹다고, 벗어나고 싶다고만 생각했던 관계의 끝을 본 경수의 마음속에는 시원함과 더불어 생각지도 못 했던 섭섭함이 번져나갔다. 상상만 해도 몸서리가 쳐질 정도로 지긋지긋한 견우부터, 어머니가 아버지를 따라 이 세상을 떴을 때도 끊지 못 했던 인연의 끈이 한순간에 녹아 사라지는 기분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게 엉켰다.
견우의 로비를 지나 빌딩에서 완전히 벗어난 경수는 말간 공기를 한번 들이쉬고는 고개를 돌려 높이 솟아 오른 빌딩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견우만의 딱딱하고도 답답한 분위기는 여전했지만 완전히 모든 것에서 풀려난 경수에게 그런 분위기를 느낄 겨를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오랜 시간 동안 경수를 괴롭히고 옥죄였던 모든 인연의 끈은 오랜 시간이 덧없을 정도로 찰나의 순간에 모조리 재가 되어 날아갔다.
***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몇 발자국 걸어들어오는 소리가 들려온다. 가만히 거실에 앉아 티비를 보던 나는 고개를 내밀어 현관 복도를 응시했고 역시나 기다려왔던 도경수가 한 팔에는 하늘색 파일을 끼고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한 얼굴로 거실로 걸어 들어왔다. 집에 들어오는 도경수를 향해 은근한 미소를 띠며 눈으로 인사하니 흘기듯이 나를 보고 제 방을 향해 지나쳐가버린다.
" 작가님 "
조금 냉담한 도경수의 반응에 시끄러운 티비를 꺼버린 나는 발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그의 방 문턱에 서서 작게 그를 부르자 눈으로 하는 간단한 대답도 없이 곧바로 방 안에서 나와 거실 테이블 한 중간에 펼쳐져 있는 자신의 노트북 앞에 주저앉는다. 이윽고 검은 화면만 띄워진 노트북 모니터를 닫아버리더니 옆에서 앉지도 못하고 어색하게 서있는 나를 올려다본다. 애매한 기류에 왜 그래요? 하고 물어보려 하니 다소 경직된 얼굴을 한 그가 먼저 내 말을 막아선다.
" 나 이제 작가님 아닌데 "
" 네? "
" 글 안 쓰니까, 이제 더 이상 글 안 쓰니까 "
" ... "
" 그전에도 과분했지, 작가라는 호칭은 "
갑자기 집에 돌아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도 해주지 않고 무작정 자신이 작가가 아니라는 말만 하니 나는 더없이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알 수 없는 도경수의 말에 눈살을 찌푸리자 죄를 지은 사람처럼 맞닿아 있는 손끝을 향해 푹 고개를 숙인다. 나는 그저 갑작스러운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이 애매한 기류를 읽으려 노력했고 도경수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 했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처음부터 말해달라 하려던 순간, 도경수가 입을 열었다.
" 견우랑 계약 해지해서 지금 쓰는 글도 포기하려고 "
" ... "
" 평생 못 벗어 날 거 같았는데 진짜 순식간에 다 사라지더라고 "
" ... "
" 허무하다 "
허무하다, 하며 몸을 일으킨 도경수는 나와 눈을 똑바로 마주쳤다. 도경수가 그토록 벗어나고 싶어 했던 견우 아니었던가, 그토록 쉬고 싶어 했었는데 갑작스럽게 찾아온 끝은 그에게 꽤나 큰 충격이 되어버린 모양이다. 그의 눈을 피하지 않고 가만히 마주하고만 있자 한걸음 가까이 다가와 묻는다.
" 너도, "
" ... "
" 너도 순식간에 사라지겠지? "
" ... "
" 사라질 거지? "
" ... "
" 사라질 거예요? "
그에게서 오랜만에 듣는 존댓말에 그만 턱 끝까지 차오른 눈물을 억눌렀던 힘이 그만 풀려버리고 말았다. 그를 처음 만났던 때 같아서, 내게 굳게 마음을 닫은 그를 다시 보는 것만 같아서, 겨우 열어버린 그의 마음이 다시 닫혀버리는 것만 같아서. 얼마나 내가 위태롭게만 보였는지 벌써부터 나를 떠나보내려는 도경수의 태도에 죄책감만 마음 가득 들어찬다.
서슴없이 붉어지는 눈시울을 막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주체할 수 없이 굵게 떨어지는 눈물방울을 닦아내지 못하고 흐린 시야 사이로 그의 옷자락을 애타게 잡아 쥐었다. 그가 보기에도 내게서 도경수라는 사람의 의미는 그다지 커 보이지 않았었나 보다. 나 또한 미련하게도 내 삶에서 도경수라는 사람의 의미가 다른 그 어떤 것으로도 채우지 못할 만큼 얼마나 커진지 깨닫지 못하고 그저 그를 내가 보듬어주어야 할 대상으로만 인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태껏 수많은 시간을 지내오면서 나는 그를 보듬어주지 못했고, 오히려 불안감에 푹 젖어버리도록 만들었다.
도경수를 이렇게 만든 건, 바로 나였다.
양손으로 그의 옷자락을 잡아 쥐고는 이전까지만 해도 입 밖으로 내뱉지 못 했던 미안하다는 말을 이제야 수없이 되뇔 수 있었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가지 말라고 말해야 할 건 바로 나였는데.
미안해요. 가지 말아요.
사담 |
도부자보다 도작가에 정이 좀 덜붙었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나봐요. 아무리 흑역사라도 다들 너무나 소중한 제 글이기 때문에 할애한 시간과 쏟아부은 애정은 어쩔 수가 없나보네요. 네? 제가 왜 갑자기 이런 말을 꺼내냐구요?
예상하셨다시피 도작가 정식 완결은 다음편인 18화입니다. 사실 15화 완결이었다가 편수를 연장할 때 내심 계획 해두었던 것이 18화 완결인데 어떻게 그게 딱 맞아떨어지네요. 아마 조금은 갑작스러우실 거에요. 저도 쓰면서 스토리를 끊어보니 다음 화가 완결이라는 것에서 꽤나 놀랐답니다..ㅎㅎ 휴...벌써 마지막 화를 쓴다고 하니까 섭섭하네요.
터무니없이 과분한 사랑을 받아온 도작가였는데... 제 주말을 호로록 하는 가장 큰 주범인 도작가였는데... 완결이 실감이 안나요...
다음편 완결 후, 꽤나 많은 분들이 요청해주셨던 준면이 과거, 외전 한 편으로 도작가는 공식으로 막을 내리게 됩니다.
...
그럼 유종의 미를 위해 마지막 화를 쓰기 위해 저는 이만 총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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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작가 소장본은 비회원 독자님들도 구매 가능하도록 공지사항을 이용해 진행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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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호닉★☆/ 반짝 암호닉 신청 받습니다! 반짝 이번 화만!!! / 암호닉 가지고 계신 분들에 한해서만 도작가 텍파 메일링 합니다 'ㅂ' |
* 특수문자(#,^,☆ etc.) #두근님 / #두밍님 / #우왕굳#님 / #꿀애정님 / ( ͡° ͜ʖ ͡°)님 / ^ㅅ^ 님 / ★요다★님 / ♡님 / ♡라즈베리님 / ♡축구공녀♡님 * 0~9 01112됴님 / 0112님 / 0309님 / 0324님 / 0326님 / 0328님 / 0412님 / 0618님 / 0622님 / 0626님 / 1004님 / 1226님 / 1228님 / 1226112님 / 1등급님 / 1월의봄님 / 1시25분님 / 2424님 / 2465님 / 28님 / 31님 / 3관왕센님 / 5511님 / 60002님 / 6002님 / 779님 / 7942님 / 9301112님 / 937님 * A~Z abc님 / coke님 / cy님 / D.O.님 / EL님 / Gellemdal님 / Joboo님 / Melrani님 / Mercy한양갱님 / PEACE님 / Syoung님 / s130님 / * ㄱ,ㄲ 가가나나님 / 가득찬님 / 가락님 / 가젠님 / 간장녀님 / 간절한님 / 갈대영님 / 갈비님 / 감귤님 / 감님 / 감자님 / 감자님 / 같이의 가치님 / 개님 / 개복치님 / 거뉴경님 / 거부는거부해님 /건도윤님 / 건빵님 / 게이쳐님 / 겨울님 / 경수해님 / 경슈님 / 경순님 / 고고싱님 / 고고싱님 / 고라니님 / 고라니님 / 고리님 / 곤듀님 / 곰돼지님 / 곰탱님 / 공일일이님 / 곶감님 / 과고여신님 / 관대님 / 관짜주세여님 / 굥님 / 굥뚜님 / 굥숭이네 도담로님 / 공듀님 / 굥숭이님 / 구글조닌님 / 구님 / 구사일생님 / 구운달걀님 / 군만두님 / 궁금이님 / 규규귝님 / 규니니님 / 규야님 / 그리다님 / 그문하생이나일세님 / 글잡캡틴미녀님 / 기린뿡뿡이님 / 긴토키님 / 길손님 / 길피수님 / 김까닥님 / 김꽝꽝님 / 김민덕님 / 김쎄쎄님 / 김작가님 / 까까님 / 까망콩님 / 까푸님 / 깐초님 / 꺄뀨님 / 꺼우져님 / 꼬깔이님 / 꼬깔콘님 / 꼬냑님 / 꼬르륵님 / 꼬꾸미빙님 / 꽃님 / 꽃물님 / 꽃이된다님 / 꽃잎님 / 꽯뚧쐛괣님 / 꾱님 / 꾸덕님 / 꿀곰님 / 꿀귤님 / 꿈꾸는나님 / 꿍스님 / 꿁꿁까까님 / 뀨읭뽀읭님 / 뀨쮸쀼님 / 뀰님 / 끄왕님 / 끈풀린운동화님 / 낑꽁끙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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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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