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예린-혼자 두지 마
백현맘 씀
사실 뭐라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정신을 차려보니 하얀 베개에 얼굴이 푹. 처박혀 있었다는 것만 문득 기억이 난다. 찡하게 머리가 아파왔다. 오세훈 때문에, 나는 짧은 기간동안 두 번을 앓아 눕는다.
나에게 무슨 원한이 있길래, 왜 나에게.
왜 나는 오세훈과 사랑했을까. 아니, 오세훈을 사랑했을까. 지금의 오세훈은 내가 사랑했던 오세훈이 아니다.
정신 없이 오는 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현관문은 어떻게 열었는지, 또 어떤 기분으로 침대에 누워 잠이 들었는지. 정확하게 기억나는 게 하나도 없다. 당장 내일이면 다시 학교에 나가야 하겠지만, 그런 건 안중에도 없었다.
눈을 뜨고 났을 땐 창밖으로 노을이 빨갛게 타고 있었다. 미련하게 일어나자마자 열었던 휴대폰에는 선배의 연락이 한가득 와 있었다. 걱정을 잔뜩 담아. 메신저 창을 나가기 하자 아래로 오세훈이 보냈던 문자가 떴다. 의문스러움을 느꼈다.
나한테 문자도 보내 놓고 왜 다시 휴대폰을 내민 걸까. 애꿎은 전화기만 침대에 던지고 거실로 나섰다. 오세훈에게 더 감정 소모하는 건 정말 쓸모 없는 짓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거실 등이 나갔나보다. 스위치를 누르자 어둑어둑하게 불이 가까스로 들어오더니 툭 꺼진다. 아예 어두워지기 전에 전구를 갈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던지면서 잘못 눌렀던 건지 무음 모드가 해제된 전화기에서 문자 알림음이 울렸다.
-너 괜찮은가 싶어서. 뭐 하고 있었는데?- 대충 보냈던 답장에 다시 답장이 돌아왔다. 거실 등이 나가서 갈아야 하기 때문에 곧 나갈 거라고 답장을 보내고 채비를 했다. 문자에 더 답장은 오지 않았다.
“서프라이즈.”
악! 단말마의 비명을 뱉자 선배의 손이 내 입을 가로막았다. 놀란 마음에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봤다. 노란 엘리베이터 앞 전구가 켜지면서 선배의 얼굴이 보였다. “왜 여기 있어요?” 선배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한 손은 주머니에 꽂고 내 입을 막은 손을 내리며 대답했다.
“너 전등 갈 줄 아냐?”
“어... 어렵진 않다던데.”
“어려워.”
“안 어려울 수도 있죠.”
망설이며 요지를 빙빙 도는 선배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래서 괜히 더 모르는 척 했다. 선배가 신고 온 운동화 앞코를 툭툭 찼다. 선배의 뒤로 손을 뻗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후, 선배가 뱉은 한숨에 앞머리가 나풀나풀 날렸다.
“인마. 괜찮아?”
“내가 너무 감정적이라는 생각을 해요.”
“무슨.”
무드 없이 환한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런 말을 했다. 부정하는 선배의 어조가 생각보다 단호했던 탓에 입술을 일자로 다물고 묵묵히 내려가는 층 숫자만 보았다. 기다렸다는 듯 변백현이 말을 이어 나간다.
“화가 안 나는 게 병신인 상황인 거지.”
“나는 이미 마음 정리 끝났어요.”
“깔끔해서 좋네.”
“예상하지 않았던 것도 아닌데요.”
“네가 걔 때문에 속 앓이 하면서 마신 술만 몇 병이냐.”
“다음 사랑에 대한 경험 정도로 쌓아 두면 유용하게 쓰일 때가 있겠죠.”
마음보다 말은 훨씬 덤덤하게 튀어 나갔다. “기특하네.” 마치 아이를 칭찬 하는 것처럼 그가 내 머리를 툭툭, 무심하게 쓰다듬었다. 근래 생각과 예상에서 벗어난 행동들을 우리가 많이 한다고 느꼈다. 아파트 앞 상가까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걸었다.
“선배는 이런 거 많이 갈아 봤어요?”
“너보단 낫겠지, 인마.”
“이런 데에 내가 숨겨진 재능이 있을 수도 있잖아.”
“슬슬 말 까려고 드네. 이게.”
입 가로 새어나오는 웃음은 막을 수가 없다. 언제부터인지 선배는 무뚝뚝한 얼굴로 나를 많이 웃기곤 했다. 다정과는 거리가 먼 말투를 하고, 선량한 얼굴과는 정반대의 성격으로 모두를 대했으면서 내 앞에서는 의외의 면모를 보여주곤 한다. “의자 가져와 봐.” 그 말에 컴퓨터 앞에 있는 의자를 끌고 왔다.
“바퀴 달린 거라 넘어질 수도 있으니까 제가 잡고 있을게요.”
“어어.”
꾹 팔걸이에 힘을 줘 의자를 고정 시켰다. 안정적인 자세로 그 위로 올라간 뒤 끼릭대며 능숙하게 전구를 간다. 입으로 휴대용 손전등을 물고 고치는 폼이 멋드러진다. 번쩍, 번쩍. 곧 깜빡대다 전구가 방 안을 환하게 밝힌다. 와.
“됐냐?”
입에 물고 있던 손전등을 한 손에 잡은 그가 나를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며 말한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봤다. 변백현은 개구지고 뿌듯하게 웃고 있었다. 그게 너무 신기해서 한참을 바라보고 있었다.
묘한 상황이 됐다. 나는 위로 고개를 처 들고, 변백현은 나를 아래로 응시한 그 상태로 우리는 몇 초를 몇 시간 같이 서로를 바라봤다. 크음, 그가 헛기침을 크게 하며 의자 아래로 발을 내렸다. 나는 그제서야 팔걸이를 쥐고 있던 손을 풀었다. 팔걸이 모양 따라 손에 빨간 자욱이 났다.
“손. 얼마나 세게 잡고 있었으면 그러냐, 인마.”
“아파요.”
“그거 살살 잡고 있어도 나 안 넘어졌어.”
“미연의 사고를 내가 방지한 거라고 하죠.”
“그러던지.”
변백현이 손을 홱 채간 건 한 순간이었다. 자국이 움푹 패인 내 손바닥을 제 손가락으로 쓸었다. 파인 결대로. 어쩐지 간지러운 기분에 주먹을 콱 쥐었다. 그의 손가락이 미처 빠져나가지 못하고 내 주먹 쥔 손 사이로 잡혔다.
“여주야.”
“...... .”
나는 한평생 나 나름 지조 있는 여자라고 생각하며 스무 년 이상을 살아왔다. 분명 지금 주책 맞게 뛰고 있는 건 내 심장이 아니라, 그저 일방통행인 그의 마음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나에게 이렇게 잘 들릴 리가 없다.
“너도 모르는 거 아니잖아.”
“...... .”
“고작 전등 하나 갈아주려고 내가 너 기다린 것 같아?”
정말로, 그때는, 오세훈의 ‘오’ 도 생각나지 않을 만큼. 그렇게 변백현만 머릿속에 과부하처럼 가득 차버려서... 고개를 저었다.
“잘 아네.”
나에 대한 배려인건지, 뭔지. 변백현은 그렇게 가버렸다. 전등 하나 갈아주려고 기다린 게 아니라면서 전등 하나만 갈아 주고서. 내 마음에 전등 하나를 새로 갈아 주고서.
두남자
지독하게도 가기 싫은 가정과 결혼 수업이 들은 날이었다. 아침부터 느적거렸다. 시리얼에 우유를 말아 먹으면서, 쨍한 바깥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가을이 다가오고 있었다. 몸을 에워싸는 한기에 두꺼운 니트를 입었다.
여전히 선배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꾸벅 고개를 숙이자 턱으로 버스 정류장 쪽을 가리킨다. 잠자코 가자는 뜻이다.
점심은 학교 식당에서 대충 때우고, 도서관을 찾았다. 전공 관련 책을 빌려야 하는 나와 도경수 선배 그리고 빌렸던 연애 소설을 반납하려는 변백현이 도서관 정예 멤버가 되었다. 은수 언니는 이미 남자친구를 만나러 간지 오래, 박찬열 선배는 중국어가 싫다며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변백현 선배는 혀를 츳, 차며 걔는 언제 철 드냐고 극딜을 했다. 도서관 안으로 들어서선 서로 갈라졌다. 전공 관련 서적은 찾는 사람도 많을텐데 왜 저렇게 위쪽 구석에 박혀 있는 건지. 디디고 올라갈 수 있는 계단 형 발판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김여주.”
찾은 발판을 들어 옮기려 고개를 숙이는데 오세훈은 귀신 같이 나를 찾아낸다. 나는 그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하고 발판을 들었다. 얼굴을 마주치면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 괜히 숙인 허리를 들지 않았다.
“이거.”
오세훈이 숙인 내 눈 앞으로 내민 건 내가 방금 발판을 딛고 올라가 뽑았어야 했던 서적이었다. 나는 숙였던 허리를 들어 잠자코 그 책을 받아 들었다.
“오해가 있었던 것 같아.”
“그런 거 없어.”
“길게 얘기를 좀 하고 싶어.”
“난 싫어.”
“여주야, 진짜 왜 그래.”
“...... .”
“내 말도 한 번만 들어 줘.”
그때와 같은 허울만 좋은 말인지 뭔지 분간조차 가지 않는 말의 변명은 듣고 싶지 않았다. 고개를 강하게 저었다. 흔들리는 게 병신 같은 거란 생각이 확신을 굳혔다.
“나 네 번호 알았어.”
“...... .”
“너랑 변백현 형, 둘만 같이 있는 게 너무 화가 났어.”
“...... .”
적막 속 소음 같은 말들을 들었다. 헛웃음이 튀었다. 그는 지금 그랬던 사실이 질투의 일종이라고 해명하고 있었다. 나는 오세훈이 건네준 책을 손아귀에 꽈악 쥐고 대꾸했다.
“그런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
밤 내내 수십 번 되뇌였던 말을 오세훈에게 그대로 말했다. 한 번 건너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강이라는 게 존재한다. 주워 담을 수 없는 말도 그것과 같다. 이미 어그러진 오세훈에 대한 내 마음은 더 이상 오세훈에게 자리를 내어주려 하지 않았다.
그대로 오세훈을 지나치면서도 들지 않는 미련이 그 단적인 예였다. 그 책장을 나서자마자 조금 멀리서 벽에 기대어 책을 살피고 있는 선배의 모습이 보였다.
“책 빌렸어요?”
“아. 끝났어?”
“뭐가요?”
내 말에 선배는 답하지 않았다. 나는 그러나 짐작할 수 있었다. 끝났냐고 물었던 대상이 오세훈인 것을. 선배는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다. 어쩌면 오세훈이 내게로 가는 걸 목격했을 수도.
오세훈은 가정과 결혼 수업을 듣지 않았다. 편하게 영화를 보고, 감상문을 제출할 수 있었다. 수업은 느리고 여유로운 편이었다. 막판에 있을 과제에 중점을 두는 듯 했다. 과제... 과제만 생각하면 그저 한숨 밖에 나오질 않았다.
“과제 어떡하죠.”
“뭘 어떡해.”
그냥 망쳐. 제 일 아니라고 쉬운 소리를 한다. 나는 그런 선배를 밉지 않게 흘기며 툭 쳤다. 선배는 다시 도서관으로 간다고 했다. 공부가 잘 된다나 뭐라나, 이미 다 알고 있는데. 혼자 재롱을 피운다. 고생 시키고 싶지 않아 말하기로 했다.
“선배 도서관에서 공부 제대로 못하는 거 알아요.”
“누가 그래.”
“그러니까 그냥 집에 가요.”
“박찬열이 그랬어?”
“왜 자꾸 기다리고 그래요...... 나 미안하게.”
당장이라도 박찬열 선배를 죽이라면 죽일 것 같이 얼굴이 벌개져 있었다. 많이 부끄러운가보다. 내게 몰래 재롱을 피운 사실이. 박찬열 선배는 힌트만 준 거고, 내가 눈치를 챘다고 말해도 박찬열 선배는 죽을 운명인 것이니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신기하게도 변백현과 함께 있으면 오세훈의 생각이 잘 나질 않는다.
“알았어...”
그가 말꼬리를 늘린다. 신기하다. 나는 그런 모습을 보자니 웃겨 웃었다. 그러자 벌개진 얼굴은 가라 앉을 생각을 않고, 제 머리만 신경질적으로 흐트린다.
“그럼 기다리던지.”
어째 여왕이 된 기분이다. 변백현이 “장난 하냐?” 하며 버럭했다. 그래서 맘대로 해요, 하며 도서관 앞에서 도망치듯 헤어졌다. 기다릴 것을 안다. 아마 내가 기다리지 말고 가라고 해서 알았다는 대답을 했어도 기다렸을 것이다. 도서관이 아니라 그보다 더 쌀쌀하고 외로울 버스 정류장 앞에서.
-포기 안 해.-
질척이는 문자가 휴대 전화 속 고이 잠들어 있는 것도 모른 채로 나는 하루의 마지막 수업을 들으러 떠났다.
♡암호닉♡
[우동동우] [세훈맘] [콩콩]
[승승장구] [닥구] [윤윤]
[요염] [큥에리] [빛나는 밤]
[하얀레몬] [됴됴륵]
항상 열려 있어줍니다.
어... 제가 말하고 싶었던 게 있어요.
사랑한다는 거. ㅎㅎ
농담이구요,
전등을 갈다에서 전등은 여주의 마음입니다.
여주의 마음을 새로 갈아 끼운 사람이 누굴까요? (5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세훈이 미안해......
세훈이 번외를 쓰고 싶습니다. 글을 전부 마치구요.
그리고 세훈이 분량 짠내난다... 여주는 왜 백현이랑 맨날 붙어 있는 것이냐...
엄... 그리고 조만간 1월 내로 이건 다 적을 것 같습니다.
암호닉 제가 거절할 이유가 없줍미다.
댓글 달아 주셔서 늘 감사하구요, 초록글 알림이 매번 뜨는데 정말 감사해요.
1 페이지 초록글까지 가고 싶은 마음도, 욕심도 없는데... 히히
그런 알림만으로 영광스럽습니다.
오늘도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