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눈 앞에 이 얼굴이 지금 순간만큼 부담스러운건 처음이었다. 이런 반응은 처음이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다. 학창시절부터 내 성적 기호가 남다르단걸 알고 있었고, 그 때문에 함부로 사람을 만날 수가 없었다. 물론 얼굴에 티가 너무 나는 탓에 멀어져간 사람은 많았다. '더러운 새끼.' 욕하고 때린 사람도 있었다. 아팠지만, 왠지 그게 마땅한 반응이라 생각하여 내가 더 미안하곤 했었다. 근데 이건 뭐야? "저 좋아하죠?" 얼떨떨하고, 민망하고, 어색하다. 그래, 사실 고맙고 벅찬 것 같기도 하다. 이런거, 처음인데. 나는 어떻게 해줘야 할지 모른다. 때리면 맞고, 욕하면 들을텐데. "울어요?" 놀랐어요? 하고 걱정해주길래 더 울컥하는 느낌이다. 차라리 도망치자 하는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냅다 뛰었다. 뒤에서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지금은 그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 생각해보니 날 놀리는 걸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따지면 처음인 것도 아니지. 내가 고딩 때 좋아하던 사람이 있었는데, 좀 질이 나쁜 사람이었다. 멋모르고 빠져서 결국 그 사람한테 들키기 까지 했는데, 그 선배가 웃어주고 다독여주는거에 넘어가서 첫경험이 날아갈뻔 했다. 그 뿐이랴, 하마터면 영상까지 찍혀 인터넷에 게이포르노로 얼굴이 둥둥 떠다닐뻔 했지. 아, 갑자기 옛날 생각하니까 우울해지네. 그리고 그 때 만난게 창섭이 형이었다. 동성애자 카페에서 설움을 토해내는데 유달리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해주는 사람이 있었고, 사정을 들어보니 비슷한 일을 경험한 사람이었다. 나중엔 둘이 따로 만나 여자애들 마냥 몇 시간씩 이야기꽃을 피우곤 했다. 내가 욕을 먹거나 맞고 들어올때마다 위로해주던 형이고, 좋은 사람이다. 생각난 김에 형이나 불러야겠다. [왜, 그지야.] "혀엉..." [너 또 이상한 짓 했지?] "형, 이번엔 좀 달라.." [아, 나 지금 밥 먹을라 했단 말야!] "형, 꽃집청년이 자기한테 관심있냐고 그랫어" [꽃집청년이 아까 니 초코우유냐? 그래서 뭐, 어쨌어.] "도망쳤어." [어유, 빙신.] 그러고 전화가 끊겨버렸다. 폰만 붙잡고 자리에서 얼어있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베란다 쪽으로 얼굴만 내밀어보는데 아예 의자를 바깥에 끌어다가 우리집 쪽을 쳐다보고 있다. 눈 마주칠뻔 했네. 그렇게 독 안에 든 쥐마냥 쿠션만 끌어안고 소파에 파묻혀 있는데, 도어락이 삑삑 하더니 열린다. "나 왔다, 바보야." 혀엉..엄청 반갑다. 진짜 창섭이 형이 이렇게 반가운건 첫만남 이후로 처음인 것 같다. "꼴이 이게 뭐야? 아, 됐고. 일단 뭐 좀 시켜봐. 배고파 죽겠네." *** "근데 갑자기 나한테 자기한테 관심있냐고 물어보는거야." "거참, 이상한 놈일세. 보통 첫만남에 그런얘길 하나?" "그게 문제가 아니라, 왜 그걸 알면서 나한테 잘해주지?" "걔가 자긴 노멀이래?" "게이라고도 안했어." "게이일 수도 있지." "보통은 아닐 확률이 높으니까." 에이, 그 놈의 확률. 너 그렇게 확률 따지다가 평생 동정도 못떼보고 흑마법사 되는 거야. 피자 한판을 거의 혼자 다 먹고 마지막으로 콜라로 입가심을 하더니 창섭이 형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싸나이 이창섭! 이 문제는 내가 해결해주겠다!" "어떻게..." "내가 그 자식을 꼬신다!" "뭐?!" "내가 살살 꼬셔보겠다고. 그 초코우유! 내가 노멀인지 아닌지 확실히 다 까발려주겠어!" "뭘 꼬시고 뭘 어떻게 까발리게." "여기서 딱 기달려." 그러고는 기세 좋게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전화를 해도 안 받고 문자를 해도 답장이 없다. 조바심에 거실만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리기에 얼른 화면을 확인했는데, 타이밍 참 그지같지. "네, 정일훈입니다." "내일 오시는 것 때문에 전화드렸는데요." "아, 안그래도 내일은 가려고 했습니다. 이렇게 확인전화까지 안하셔도 됩니다." "그게 아니라, 사정이 생겨서요. 내일은 어려울 것 같네요. 제가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아, 저 그러면 노래는..!" 이 놈이고 저 놈이고 다 지 멋대로들이야! 내가 지가 오라면 오고 오지말라면 안가고. 내가 똥개야? 어? 이 연극만 끝나면 나도 다 때려칠거야! *** "안녕? 니가 초코우유야?" "예?" "이창섭이라고 해." 하여튼. 옛날부터 눈은 높아가지고. 새끼, 제대로 물었네. 기세좋게 내려간 창섭은 사실 아무생각이 없었다. 그냥 얼굴구경이나 해볼까 하고 내려온거지, 따지고보면 제 취향도 아닌데다가 그저 동생 놀리는재미 보려고 먹던 밥도 포기하고 달려온거라 될대로 되라 식이었다. "너 게이야?" 창섭은 그저 눈 앞에 있는 파릇파릇한 병아리들 둘이 짹짹거리는게 귀여워 죽겠을 뿐이었다. "글쎄요." 근데 이 키 큰 초코우유는 병아리는 아닌 것 같다. 능글거리는게 꼭 구렁이같은 놈이다. 창섭은 갑자기 구렁이한테 사로잡힌 병아리생각이 나서 자기 집에 숨어있을 동생이 가엽게 느껴졌다. "말 안해줄거면 나도 협조 안해주고." "협조?" "하여튼 정일훈도 참 바보야? 딱 봐도 촉이 오는구만." "아는 사이에요?" "알다마다. 내가 정일훈의 어디까지 알고있게?" 아 찡그린다. 아직 뽀송뽀송 애기구만 "장난치려고 저 만나러 오신겁니까?" "내가 도와줄까? 저 병신새끼 잡아먹게?" 꼬리 아홉 달린 여우와 구렁이가 손 잡은 걸 꿈에도 모르고 병아리는 그저 집 구석에 파묻혀 울분을 터뜨리고 있었다. 짧아서 미안해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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