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落花)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낙화 - 이형기
커다란 사각 테이블 위엔 덩그러러니 캠코터 하나만 놓여있었고,
그 테이블을 중간에 둔 채 한 여성과 남성이 마주보고 앉아있었다.
캠코더를 만지작거리며 카메라가 남자의 모습을 잘 찍을 수 있도록 돌려놓은 여성의 손은 세월을 삼킨 듯 일그러져 있었고,
나이가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고품있게 아름다운 향을 풍기는 그녀의 얼굴이 남자를 향해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어디, 불편한 데는 없죠?
퍽이나 다정스러운 목소리에 유독 부산스레 시선을 떨던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불안한 기색을 감추려는 듯 등 뒤로 숨겨진 그의 손엔 차가운 수갑이 채워져있었다.
죄수번호 1306번. 얼마나 들었다고, 자신의 이름보다 더욱 익숙해진 이름이었다.
석진씨, 그럼 촬영 시작할게요?
여성의 말에 괜히 울컥하려던 감정을 억누른 남자가 붉어진 얼굴로 하염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김석진. 분명 몇년 전엔 하염없이 듣던 이름이었는데, 이제 저 여자 말곤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이 없었다.
석진은 바보같이 감성에 빠져드려는 자신을 붙잡았다. 저 이름을 마지막으로 들은 게 언제였더라.
석진이형, 정말 미안해. 이 곳에 들어오기 전, 눈 오는 바닥에 주저앉은 태형이 자신을 보며 그렇게 울었으니
아마 약 5년만인 듯 했다.
찰칵찰칵- 언제 들어도 듣기 싫은 수갑 소리를 내며 붉어진 눈시울을 벅벅 닦아내자,
여자의 손길을 따라 테이블 위에 놓인 캠코더가 그런 석진의 모습을 담아내기 시작했다.
긴장할 거 없고, 그냥 평소대로 석진씨 얘기 조금만 들려주면 돼요.
요즘 잘 지내고 있는 건지, 어디 불편한 점은 없는지, 더 들려주고 싶은 얘기는 없는지.
나긋한 여성의 목소리에 풀린 눈동자로 카메라만 응시하던 석진이 그녀를 바라봤다.
진짜, 그냥 아무 얘기나 해도 되는 거에요? 조심스런 석진의 목소리에 여성이 웃는 약간 놀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석진이 죄수복을 입은지 5년이 된 만큼, 그녀가 석진을 본 것도 5년이 지나있었다.
아무 얘기나 좀 해달라는 애원에 매번 석진은 그늘진 얼굴로 고개를 숙였었다.
제가 죽였어요. 제가, 제가 다 죽였어요. 죄송해요.
그 말을 5년 동안 몇번이나 들은지 몰랐다.
석진은 여느 살인자들과 조금 달랐다.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것도, 그렇다고 자신의 삶을 포기한 것도 아닌.
석진은 매번 눈물 섞인 눈으로 자신을 보며 빌고 또 빌었다.
자신이 다 죽였으니, 제발 나 좀 죽여달라고.
여느 때와 조금 다른 석진의 모습에 당황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에,
괜히 죄수복 소매 끝을 매만진 석진이 마른 침을 삼켜냈다.
요새 악몽을 꿔요.
캠코더에 석진의 불안한 시선이 고스란히 담겼고,
추운 겨울에 다 터버린 손을 습관처럼 만지작 거리던 석진이
카메라가 어색한 듯 결국은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똑딱똑딱 흘러가는 시계바늘만이 조용한 공기를 울렸다.
꿈에 두 남자가 나오는데,
자꾸 한 남자가 죽어요. 피를 흘리면서 살려달라고 하는데,
살려줄 수가 없어요. 다가갈 수가 없어, 무서워요.
그의 떨리는 손을 바라보던 여자가 석진이 편안하게 이야기를 풀어갈 수 있도록 적당한 반응을 보이며,
앞에 두었던 종이에 검은 글씨를 적어내려갔다.
어쩌면 5년 동안, 석진을 처음 본 순간부터 애써왔던 그 노력이 마무리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석진이 자신이 죽이지 않았다고 조금만 용기를 내 말해준다면,
그녀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석진을 이 곳에서 꺼내 줄 자신이 있었다.
석진을 처음 본 순간부터, 그녀는 석진이 살인자가 아닐 거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죽은 남자 앞에 있는 남자는,
붉어진 손으로 하염없이 울어요.
피로 물든 손을 옷에 닦아내면서 미친 듯이 울음을 터뜨리는데,
결국 나는 그를 안아줄 수도, 손을 잡아줄 수도 없어요.
석진이 부산스레 뜯어내던 손톱에서 결국 피가 나자 마자,
석진의 볼 위를 타고 눈물이 뚝- 떨어져 내렸다.
그가 온 이래로 처음보는 눈물이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 재빨리 손을 올린 석진이 자신의 눈물을 닦아내고,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다시금 푹 숙인 고개 덕에 보이지 않는 그의 얼굴에 여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울고 있는 남자는 석진씨 본인이에요?
여자의 말에 석진의 눈이 곧바로 그녀를 향했다.
네?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찡그려진 순수한 얼굴이 왠지 모르게 안타까웠다.
이런 곳에 있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앞의 남자를 죽인 사람이 석진씨가 맞냐구요.
조금 더 강단있게 뱉어진 말에 그제서야 이해한 듯 석진이 주먹을 꽉 쥐었다.
경계 어린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석진의 모습에도 더 이상 그녀는 물러나고 싶지않았다.
이제는 마침표를 찍을 때가 왔다.
석진씨가 그 남자를 죽인 게,
정말 확실해요?
석진을 이 곳에서 내보내줄 마침표를.
*
5년 전 겨울, 차가운 겨울 바람 속에서 한 남자가 생을 마감했다.
눈 위로 붉게 흩어진 핏방울은 그의 죽음을 더욱 확고하게 만들었고,
그 잔인한 현장에 있는 남자는 조금 앳되다 싶은 어린 남자였다.
바람에 휘날리는 눈과 함께 싸늘히 식어가는 남자와 조금 떨어진 구석에서
온 몸을 웅크린 채 다리를 끌어안은 남자의 온 몸에는 붉은 피가 한가득했다.
피 비린내가 진동하는 곳에서 남자에게 다가가 괜찮니? 하고 물은 경찰에게 처음으로 남자가 꺼낸 말은
제가 죽였어요. 였다.
뭐? 하며 놀란 목소리를 뱉어내는 경찰의 목소리에,
불안한 시선을 한 남자아이는 그 경찰의 바지 끝부분을 붙잡고는 하염없이 울음을 터뜨렸다.
제가 죽였어요, 죄송해요. 제가, 진짜 제가 죽였어요.
눈물에 막혀 억눌린 소리를 뱉어내는 아이를 경찰은 당황스런 얼굴로 응시했다.
눈물에 젖어 헝크러진 머리 밑으로 붉게 물든 하얀 얼굴이 드러나있었고,
아이의 하얀 옷에 묻은 피가 인조적이게 여기저기 손자국이 나 있었다.
튀기기는 커녕 일부러 묻힌 듯 상체 쪽에만 가득한 피.
경찰 생활 몇년 하다보니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 이 아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얘야, 거짓말 하지 말고 사실대로 얘기 해.
살인이란 거, 가볍에 흘러가듯 풀려나는 죄 아니야.
너 이거 잘못되면 네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무서운 일 겪을 수도 있어.
제법 무서운 목소리로 아이를 어깨를 꽉 붙잡고 타이르는 목소리에,
아이는 더욱 큰 울음을 터뜨려 냈고,
자꾸 벅차오르는 눈물에 숨을 쉬기가 힘든 듯, 끅끅- 하며 숨을 고르던 아이가
젖은 속눈썹으로 남자의 팔을 꽉 붙들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제가 죽였다구요.
제발, 믿어주세요. 제가 죽였어요.
제가, 제가 다 죽인거에요.
고집스레 힘을주어 남자의 팔을 흔드는 아이의 모습에 그가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쓸어내렸고,
끊임없이 내리는 눈 속에 피 비린내가 점차 잠식되는 사라져갔다.
죄수번호 1306의 시작이었다.
*
과자봉지를 흔드는 어린 석진의 얼굴이 흥겨운 콧노래를 불렀다.
자신의 집으로 가는 좁은 골목은 어쩌면 조금은 힘겨운 길이었지만,
그 길에 익숙해진 석진의 발은 비탈진 길을 아무렇지 않게 옮겨 다녔다.
과자를 먹고싶다며 징징거리던 여동생이 얼굴이 떠올랐고,
눈 위를 걷는 석진의 걸음이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가난한 집에서 동생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건 없어도,
이렇게 자그마한 선물이 석진을 기쁘게 만들었다.
비탈진 골목의 끝, 거의 무너져가는 허름한 집 한 채.
자신의 집에 도착한 석진이 익숙하게 녹슨 문고리를 잡았고,
석진이 고리를 잡아당기기도 전에 먼저 벌컥하고 열린 문에서,
한 여성이 뛰어나와 석진의 품으로 곧바로 안겼다.
탄아?
신발도 신지 안은 채 불쑥 튀어나와 자신에게 안긴 동생의 모습에 놀란 석진이
품에 안긴 아이를 바라봤고,
그에 부들부들 떨리는 얼굴로 눈물을 터뜨려내던 아이가
석진의 품에 안겨 억눌린 목소리를 뱉어냈다.
오, 오빠. 아빠가, 아빠가.
아이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석진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갔다.
추운 겨울 바람에 교복만 달랑 입은 몸이 시려서인지, 아님 두려워서인지.
쉴새없이 떨려오는 동생의 몸을 괜찮다며 토닥토닥 두드린 석진이 어두운 집 안으로 들어섰고,
역한 냄새가 난다고 생각하자마자 자신의 어린 동생 한 명이 피투성이가 된 채 아비의 발길질을 받아내고 있는 모습이 시야 속에 가득 찼다.
태형이었다.
금새 달려가 술에 취해 미친듯이 발을 놀리는 남자를 밀어낸 뒤,
동생을 끌어안자 피투성이가 된 몸이 차갑게 자신의 품에 안겨왔다.
콧노래를 부르며 사 왔던 과자는 이미 저 멀리 버려져 처참하게 부숴진지 오래였고,
지긋지긋하게 반복되는 상황이 석진을 미친듯이 괴롭게 만들었다.
...제발, 아빠. 제발 좀!!!
결국 붉어진 눈으로 눈물을 터뜨리며 자신을 노려보는 석진의 모습에
비틀거리며 낄낄거리는 웃음소리를 뱉어내던 남자가,
아무렇지 않게 부들부들 떨고있는 여동생의 어깨를 거세게 친 다음 집 밖으로 벗어났다.
남자가 남겨둔 상황은 처참했다.
몇번이나 피로 얼룩진 벽지가 이젠 검은 자국을 드러내고 있었고,
병원비가 없어 병원조차 가지 못하는 자신의 동생들은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억눌린 울음을 토해냈다.
괜찮아? 괜찮아, 태형아?
석진의 울먹이는 목소리에 피가 엉겨붙어 떠지지 않는 눈 사이로
애써 석진을 바라본 태형이 탄이는? 하며 낮은 목소리를 끌어냈다.
탄이는, 탄이는 괜찮아?
지독하게도 처참했다.
태형의 얼굴에 붙은 피자국들을 떨리는 손으로 닦아내며 그의 얼굴을 품 속으로 끌어당기자,
힘없이 딸려온 태형이 울음을 참는 듯 입술을 꾹 깨물었다.
내가, 내가 죽일거야. 형.
실핏줄이 터져 붉어진 눈동자가 똑바로 석진을 응시했다.
내가, 내가 죽일거야. 저 쓰레기 새끼. 내가 죽일거라고.
태형의 악에 받친 목소리에 여동생의 우는 목소리가 거세졌다.
조그마한 방 안이 금세 울음소리로 가득 찼다.
내가 죽일거야...
내가 꼭,
내가 죽일거야.
주문을 외우는 듯 끝없이 늘어지던 태형의 목소리가 잦아들었고,
결국 쓰러져버린 듯 두 눈을 감은 태형의 얼굴을 그렇게 한참을 끌어안고 있었다.
어쩌면 그 때부터 예상했는지도 몰랐다.
이 추악함의 끝을.
*
알 수 없는 침묵의 끝에
석진씨가 죽인 게, 아니죠? 여성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더 석진을 재촉했고,
...아뇨, 제가 죽였어요.
형, 나 사람을 죽인 것 같아.
또 다시 들려오는 떨리는 석진의 목소리에,
그녀가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또 반복이었다.
제가,
아무리 흔들어도 움직이질 않아. 피가 자꾸 나와, 나 무서워 형.
제가 그 남자를 죽였어요.
나 어떻게 해야 해, 형...?
마치 무엇에 홀린 듯 뱉어내는 그의 말이 자꾸만 공기를 아프게 찔렀다.
이제 좀 밝아질 때도 됐는데, 석진의 하루는 매번 추운 겨울이었다.
정말, 이렇게 나올 거에요? 제발 좀 사실대로 말해주면 안돼요?
내가 살려줄게요. 내가 석진씨, 살려줄테니까. 제발, 좀...
결국 감정이 터진 듯 들고있던 볼팬을 내려놓은 여자가 두 손에 얼굴을 파묻으며 말했고,
그를 담담하게 바라보던 석진이 묶인 자신의 두 손을 들어,
테이블 너머로 그녀의 손을 꽉 붙들었다.
그러니까, 제발 나 좀 포기해줘요.
담담한 표정 뒤로 나오는 목소리는 한없이 애처로웠다.
제발, 나 좀 살려줘요. 응?
눈물을 뚝뚝 떨구는 석진의 얼굴에 그녀는 결국 입술을 꾹 깨물었고,
그녀 또한 눈물을 뚝 떨궈냈다.
그제야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자신이 석진을 살리는 방향이, 자신이 생각하던 쪽이 아니라는 것을.
허탈하게 웃음을 터뜨린 그녀가 캠코더를 끄며 5년동안 그의 모습을 담아낸 그것을 손에 들었고,
그는 결국 그의 죄수번호가 붉게 바뀌고 나서야 젖은 웃음을 터뜨렸다.
비로소, 봄이왔다.
어딘가 내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꽃처럼 웃고 있는
너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번 눈부신 아침이 되고
어딘가 네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풀잎처럼 숨쉬고 있는
나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번 고요한 저녁이 온다
가을이다, 부디 아프지 마라
멀리서 빈다 - 나태주
*
그냥 I Need U 뮤비를 오랜만에 다시 돌려보다가, 끄적여봤네요.
아무리 생각해도 I Need U 뮤비는 좀 대단한 듯.
다시 보고 다시 봐도 질리는 감이 없어요...ㅎ
암호닉 정리 글을 올리자 마자 무슨 단편이야? 하시는 분들이 계실 수도 있겠지만...ㅎ
쉬어가는 길이라고 생각해주세요!!
단편이라니, 조금 불안하긴 한데.
그래도 쉬는 겸 겸사겸사...ㅎ
근데 생각해보니까 저는 매일 글이 어둡고 침침한 듯.
다음엔 조금 더 밝은 글을 써보고 싶다는 욕구가 생기네여ㅎㅎㅎ
오늘이 마지막 휴일인데ㅠㅠㅠ
모두들 마무리 잘 하시고 오늘도 즐거운 하루 보내시길!!
그럼 안녕히계세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