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누스 w. 채셔
전날 밤의 열기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제 품에서 스러져간 작은 몸을 끌어안고 윤기는 오열했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수면제 통과 여기저기 흩어진 약들. 윤기는 어릴 때를 제외하고는 꿔본 적도 없는 꿈까지 꾸며 잠들었다. 완전히 무너졌다며 제 속에서 엉엉 우는 여주에게 제 모든 열기를 다 나누었기 때문이리라. 힘없이 스르르 빠져나가기만 하는 손을 부여잡아 윤기는 제 뺨에 갖다댔다. 나를 좀, 쓰다듬어줘….
윤기는 다시 이불 속으로 제 몸을 누였다. 그리고 서서히 딱딱해지는 몸 밑으로 제 팔을 넣어 껴안았다. 말라 비틀어져 바스라지는 심장은 곧 부서질 듯이 아파왔다. 왜 나를 떠나가고 말아. 윤기는 간호사가 들어올 시각까지 제가 여주를 부둥켜안고 있으리라 다짐했다. 내 몸의 온기가 다 빠져나가도 좋으니, 제발 눈을 뜨고 나를 바라봐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허망하게 여주를 떠나보낼 수는 없었다.
눈을 감은 윤기의 머릿속에는 곧 과거의 선명하고 강렬한 기억들이 녹아들었다. 왜, 나를 이리도 아프게 해….
야누스
여주의 유골을 뿌리면서 윤기는 다시금 엉엉 울었다. 유골은 시리도록 파란, 남색에 가까운 바다에 뿌려졌다. 이렇게나 추운 곳에. 윤기는 제 핸드폰을 꺼내어 여주가 마지막으로 남긴, 음성 메시지를 들었다. 메시지에는 노인이 연신 미안하다는 말을 내뱉고 있었다. 세경이를 양녀로 들이라는 여주의 말에 윤기는 주저앉아 심장을 부여잡았다. 저와 멀리에서, 그리고 여주와 멀리에서 지켜보며 뻘개진 얼굴로 울고 있는 노인이 바로 이 사단을 만든 사람이었다. 원망은 하지 않았다. 그러한 감정은 이미 오래 전에 사라지고, 체념만 남았을 뿐.
처음부터 좋아했다. 어린 윤기는 세경이 친구라며 보여주었던 사진 속 여주를 처음으로 보았을 때부터 좋아했다. 그래서일까, 괜히 마중도 나가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한 번은 세경의 학교까지 찾아가 기다려본 적도 있었다. 여자 아이들에 어떠한 관심도 가지지 않던 윤기는, 시종일관 슬픔과 절망이 가득 담긴 얼굴이 세경을 보며 행복한 미소를 짓는 것을 보고 왠지 심장이 두근거리는 느낌을 받았었다. 여주가 돌아간 뒤에 세경이 너스레를 떨며 오빠와 제 친구가 결혼해서 세 명이서 같이 살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을 때도 그랬다. 왜 그런지 윤기는 여주를 훔쳐보았던 그 날 밤, 잠을 쉽게 이루지 못하고 뒤척거렸다. 순수하던 소년 윤기의 첫사랑은 바로 여주였다.
그러나 윤기는 곧이어 너덜거리며 집에 돌아온 세경을 보고 세상을 잃은 듯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동생의 순수함의 상실, 첫사랑의 상실. 밖에 나가려고 하지도 않고, 밤마다 악몽을 꾸고, 한껏 예민해진 동생을 보며 윤기는 분노했다. 그리고 전화를 받았다. 제가 잘못했다고, 평생의 실수라고, 병원비는 얼마가 들어도 좋으니 입원시켜주겠다고, 1인용 병실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윤기는 노인에게 걸려온 전화를 들고 허탈하게 웃었다. 돈만 있으면 다 해결되나보네…. 그러나 빌빌 기듯 용서해달라는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더 이상 세경을 이런 집구석에 놔둘 수 없고, 윤기 저는 세경을 지켜낼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결국은 세경을 지킬 수 있는 것은 돈과 권력 뿐이었다.
세경을 병원에 입원시켜두고 다짐했다. 당신이 세경이를 아프게 만들었으니, 나도 당신의 제일 소중한 사람을 아프게 하겠다고. 그렇게 해서 노인의 권력을 이용해 윤기는 손쉽게 여주가 다니는 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학교에 들어가 윤기는 또다시 분노했다. 너는 어쩜 그렇게도 행복할 수 있지. 세경은 병원에서 나오지도 못하게 제 청춘을 허송세월로 보내고 있는데, 여주는 너무나도 밝았다. 아이들은 여주를 천사 반장이라 칭하고 있었다. 한결같이 웃고 있는 얼굴이 절망으로 일그러지는 것을 상상하며 윤기는 만족한 듯 웃었다. 그 때부터 윤기 저는 괴물이 되었다.
여주를 제 세계로 끌어들이면서 윤기는 깨달았다. 환한 웃음이 모두 가면이라는 것을. 빛나는 모습 뒤에 그 속은 이미 썩어 문드러져 있음을. 저에게 사랑 확인을 하며 매달리는 여주를 보며 윤기는 환멸을 느꼈다. 그러나 여주를 안을 때마다 왜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는지 윤기 저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미쳐버린 것이라, 생각했다. 혹은 너무 분노해서 그것이 그대로 나타나는 것이라 치부할 뿐이었다.
윤기는 이내 제 마음을 알아차렸다. 정국과 붙어 지내는 여주를 지켜보면서, 알 수 없던 감정의 근원지가 사랑에 있음을 인지하게 되었다. 윤기을 보며 저만큼 나쁘다며 노려보는 여주를 보고, 심장이 멎기라도 한 듯이 그대로 한참을 서 있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 상관이 없다며 윤기 저를 도발하는 것임을 알았지만 괜히 화가 나서 거칠게 여주를 가졌던 이유. 정국의 옆에 앉아 웃고 있는 그 얼굴에 심장이 저릿하게 아파왔던 이유. 공주와 기사 명단에 뻔하니 적혀있는 그 이름들을 보고 짜증이 확 났던 이유. 그래서 여선생 하나를 잡아와 키스를 하던 장면을 일부러 보여준 이유. 손을 잡고 시시덕거리며 대놓고 지각하는 정국과 여주를 보며 화가 끓어올라서 다짜고짜 여주를 찔러대며 서둘러 키스했던 이유. 그것은 모두 윤기가 여주를 사랑했기 때문에였다. 담담한 어투에 이끌려버린 것인지, 절망을 가린 얼굴이 못내 안타까워 연민하는 것인지.
재빨리 무너뜨려야 했다. 무너뜨려서 세경이의 앞에 갖다놓아야 했다. 절망적으로 다, 뺏아가야 했다. 그것은 모두 우리의 애틋한 사랑을 위해서였다. 전정국에게 구원을 받으면 안 돼. 세경이가 망가진 만큼 여주는 무너져야 했고, 그렇게 무너진 여주는 윤기만이 구원해야 했다. 지금 여주를 가지는 것은 세경의 오빠인 저로서도, 세경을 망가뜨린 여주도 세경의 미움을 받으며 아프게 사랑해야 했다. 복수의 끝에 종이 조각처럼 바스라진 우리는 그제야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서글픈 운명이었다. 그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확고해졌고, 하루 일과를 읊는 윤기에게 '오빠, 여주 좋아하지….' 하고 서글프게 묻는 세경의 뒷말로 더욱 굳어졌다. 세경은 입을 달싹이며 말했다. 다 무너뜨리고 그 때 사랑해…. 그럼 용서할게.
그래서 편지를 보냈고, 고백에서 차인 김태형에게 우리의 단면을 보여주었고, 어느 아이에게 우리가 깊은 사이라고 말을 했다. 김태형을 시켜 몸을 섞는 사진을 찍는 것은 어렵지 않았고, 퍼뜨리는 것과 정국이라는 그, 그 새끼에게 전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그 와중에서도 네 볼을 서툴게 쓸고, 울면서 너를 가지고, 너를 괴롭히는 새끼들을 혼냈던 것은 그래도 사랑하는 네가 아파하는 것이 안쓰러웠기에. 전정국에게 빨리 버림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여주가 찾아온 이후로 매일 밤마다 발작하는 세경의 손을 잡아 쥐며 계속 그렇게 되뇌였다. 무너지라고. 얼른 무너지라고. 그러나 세경의 자살 시도는 윤기 저도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오빠가 되어서, 동생을 망가뜨리는 것을 방관하고 있던 친구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에 윤기는 무한한 죄책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 죄책감도 여주가 내뱉은 '잘못했어요.', '미안해요.'와 같은 말들에 옅어져버리고 마음은 온통 이그러져 찌그러진 사랑의 감정만 남아버렸다. 여주의 무릎에 누워 고백하면서, 윤기는 제가 이미 무너져 괴물이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세경은 입원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깨어났지만, 윤기는 도저히 어떻게 세경을 대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세경아, 나는 죽일 놈이야. 세경은, 저의 동생은, 윤기의 손을 꽉 잡아주기만 했다.
'우리 이제… 행복해지자, 오빠.'
울먹이며 그렇게 말하는 세경의 등을 꽉 끌어안은 채 윤기는 울었다. 그것이 허락의 말임을 단번에 알아챘으므로. 허락하기 위해 자살 시도를 한 거였다, 제 하나뿐인 동생 세경이는. 제 안의 미움을 다 끊어내기 위해 차에다 제 몸을 맡긴 세경의 머릿결을 윤기는 거듭 쓸었다. 눈을 감고 희미하게 웃는 세경을 보며 윤기는 따라 웃었다. 이제, 이제 드디어…. 세경이 정상으로 돌아오고 며칠 지나지 않아 윤기는 출근했음에도 여주를 볼 수 없었다. 우리가 사랑할 수 있게 됐는데. 정국 옆에 덩그러니 비워진 책상을 보며 윤기는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 날 밤 윤기는 여주의 전화를 받았다. 연신 무섭다며 울먹이는 여주의 병실에 미친듯이 뛰어갔다. 그리고 병실에 도착해 간이 의자에 털썩 앉았다. 망가진 표정. 윤기는 그것을 보며 정국에게 비로소 버림 받았음을 직감했다. 윤기는 거듭 괜찮다고 중얼거렸다. 괜찮아, 이제는 내가 너를 구원해줄게. 이제는 우리 사랑하자. 윤기는 서글프게 여주를 안으며 다짐했다. 이제는 제 모든 것을 주겠다고. 제 모든 사랑을 주겠다고. 너무 느렸고, 아팠고, 힘들었고, 비참했던 시간들은 모두 지났다. 남은 것은 너와 나 둘 뿐이었다. 그러니까, 이제, 나에게….
장례식이 끝나고 노인이 실신해 응급실에 실려가고, 남은 유골이 들어있는 상자를 검은 정장의 무리가 들고 간 이후에도 윤기는 멍하게 바다를 쳐다보았다. 이제 막 바다 색깔과 하늘의 색깔이 비스무리해지고 있어다. 유서는 없었다. 윤기 제게도 남긴 것은 달랑 음성 메세지 밖에는 없었다. 윤기는 바다에 시선을 고정했다가, 다시 음성 메세지를 틀었다. 노인의 목소리. 윤기는 허망하게 휴대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아아, 하고 신음을 내뱉고야 말았다. 휴대폰의 구석에 숨겨진 1/2를 보지 못했고, 그것을 재빠르게 넘겨 메세지를 읽은 윤기는 절망했다.
「사랑했어요, 야누스」
왜 나를 떠나가고 말아, 사랑아. 남은 페이지는 우리가 사랑할 일 밖에 없었는데….
윤기는 그대로 바다로 추락했다. 소용돌이 치는 바다에 윤기는 끝도 없이 빠져들었다. 그제서야 윤기는 희미하게 웃었다. 여주에게로 가는 길을 윤기는 겸허하게 받아들였다. 손에 꼭 쥔 휴대폰과 함께 바스라질 대로 바스라져 가루가 되어버린 심장을 간직한 채로.
야누스
윤기는 깨지 않을 꿈을 꾸었다. 여주와 윤기가 손을 잡고 아무런 걱정도 아픔도 없이 웃고 있는 꿈을. 윤기는 작은 손에 깍지를 껴 고쳐 잡았고, 여주는 윤기의 손을 조금 더 힘주어 잡았다. 윤기는 여주에게 고개를 돌려 '사랑해.' 하고 말했다. 곧 온화한 입술이 작은 입술을 찾아들었다. 눈부시게 예쁜 봄이었다. 여기저기 널린 복숭아 나무가 몸을 흔들려 잎을 이리저리 날렸다. 입술을 떼고 여주를 지긋이 바라보는 윤기의 머리에도 꽃잎이 붙어있었다. 여주는 잎을 떼고 다시 목을 끌어당겨 키스했다. 여기저기 반짝이는 보석들이 길 위에 뿌려져있고 언덕 위로 올라가면 구름이 거기에 있었다. 몇 번을 해도 아쉬울 키스를 미뤄두고, 여주와 윤기는 손을 꼭 잡고 언덕 위로 올랐다. 기분 좋은 봄바람을 맞으며.
야누스 w. 채셔
정국은 부둣가에 앉아 허탈하게 픽, 하고 웃었다. 여주와 함께 했던 날들이 아무 것도 아닌 날들처럼 느껴졌다. 정국 제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정국은 손을 들어 제 뺨을 쓸어보았다. 아무 것도 아닌 날들로 치부해버리기에는 여주와의 기억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느껴졌다. 정국은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썼을 글자들이 정국의 눈 속에 박혀들었다.
정국은 여주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여주는 강하게 제 속에 녹아들었고, 짧은 시간이었기에 더 애절했고, 애틋했다. 처음에는 제게 다가오는 여주가 귀찮고 짜증이 났다. 반장에다 인기가 많은 여주의 옆에 있다보면, 자연스레 눈길이 이쪽으로 몰렸으니까. 정국은 제게 눈길이 오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이렇게 눈길을 받다보면 제 머릿속에 악몽이 떠올랐다. 죽어가는 아이의 모습. 숨이 턱 막히는 그런 악몽. 결국은 태형에게 맞았다. 거봐. 한껏 짜증이 나서 맞았다고 괜찮냐고 물어오며 피딱지를 만지려는 여주의 손을 거칠게 쳐냈다.
어딘가에 갔다와서는 갑자기 아프다고 칭얼거리는 여주를 쳐다보았다가 정국은 고개를 돌려버렸다. 엮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울음기 가득 섞인 목소리로 아프다며 눈을 감는 모습에 왠지 정말 이대로 죽을 것만 같다는 불안감에 여주를 업어들었다. 아프면 양호실을 가라고 명령하듯 차갑게 말하는 내 말에 여주는 정국 밖에 없다고 답했다. 그 말이 자꾸 정국을 흔들어놓는 느낌이었다. 정말 저 밖에는 없는 듯한 버려진 목소리. 정국은 여주가 일어날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눈을 뜨자마자 정국은 일어섰다. 이걸로 끝난 거다, 하고.
그러나 또 이 생각은 여주에 의해 멈춰졌다. 공주와 기사에 제멋대로 정국과 나가겠다며 미소를 짓는 여주를 보며 정국은 다시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나서고 싶지 않은 저를 자꾸 끌어들이고 있는 여주의 저의가 궁금했다. 멋대로 종목에 제 이름을 적어놓고 다가오는 여주는 정국 제 눈치를 살피며 괜찮다고 말해왔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기분 나쁨이 사그라들었다. 이 모든 나쁜 감정들이 모두 불안감에서 나온 것이었으니 당연할 법도 했지만. 제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것만 같은 여주에게 자꾸만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정말 엮이고 싶지 않았는데.
그렇게 여주와 점점 가까워졌다. 학교에 들어와 처음 웃기도 하고. 웃게 될 줄을 몰랐는데. 여주가 시간이 꽤 흘렀는데도 오지 않아 양호실로 향했을 때, 정국은 이상하게 안도감이 자꾸만 들었다. 왜인지는 저도 몰랐다. 눈은 잔뜩 눈물로 범벅을 해서는 입을 맞춰오는 여주를 밀치지 않고 그대로 키스했다. 고맙다고 말해오는 여주의 익숙한 말 뒤에 당연하게 따라붙는 말을 한 번 따라해보았다. 그 순간 나는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여주에게 그대로 키스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저밖에 없다고 말해주는 존재는 여주 밖에 없었기 때문에 당연하게 사랑하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키스로 나는 여주를 받아들였고, 정말 자연스럽게 여주를 좋아하게 되었다. 세상 밖으로 나갔을 때 내 손을 따스히 잡아주는 여주를. 그 날 제 얘기를 담담하게 말하다 울음을 참는 여주를 꽉 안아주면서 정국은 생각했다. 제 여자로 만들고 싶다고. 뒤가 어떻게 되든 상관 없었다. 태형에게 다시금 맞을 때에도, 끔찍한 트라우마가 밑에서부터 올라왔지만 꾹 참아냈다. 여주의 얼굴을 제 머릿속으로 섬세하게 그려내며.
어떤 편지를 받고 난 여주는 갑자기 불안감에 떨었다. 쓰러지고 난 이후에 병원에서도 정국의 말은 들리지도 않는지 편지를 사수하듯 낚아채는 모습에서 불안함이 뚝뚝 묻어나왔다. 나는 몇 시간이 흐른 뒤에도 같은 모습에 한참 낯설어 내 얘기를 꺼냈다. 처음 말하는 비밀이었다. 묵은 비밀을 꺼내기는 참 힘들었다. 손을 잡아주는 여주가 아니었다면 저는 정말 꺼내지 못하고 평생을 비관주의자처럼 살았을지도 모르겠다. 괜찮다고 말해주는 여주의 따스한 목소리를 들으며 간절하게 소망했다. 나는 네 것이 되고 싶다고.
다음 날에 지친 표정으로 학교에 온 여주를 제 머리에 기대고, 민윤기의 -이상하게 여주에게만 집착하는- 히스테리를 막아냈다. 정국은 거기에 희열을 느꼈다. 내가 너를 지켜냈어. 김태형에게 안 봐도 뻔한 고백을 받고 온 여주를 불안하게 쳐다보며 너는 말했다. 나 좋아하지, 라고. 정국은 당연하게 대답했고 곧 여주는 사귀자고 말해왔다. 몇 번이고 꿈꿔왔던 순간이었다. 내 손을 잡아 이끄는 작은 그 손에 얼마나 설레였는지 너는 모르지. 정국은 도착한 곳에 들어가 키스했다. 절대 한 눈을 팔지 말라는 약속을 내걸고, 정국은 그 약속을 굳게 믿었다.
곧 생각지도 못한 소문이 돌았다. 민윤기와 여주가 사랑하는 사이라고. 처음에 그 말을 들었을 때는 분노했고, 나중에 들었을 때는 불안했다. 여주를 믿는다고는 했지만 커지는 불안감과 의심은 줄어들지 않았다. 그 때 너를 온전히 믿었으면 지금과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까. 항상 버려질 것 같은 것은 정국 저였는데, 오히려 여주는 항상저를 버리지 말아달라 말했다.
정국 저를 버릴 것 같다는 현실은 곧 찾아왔다. 학교에 오지 않은 여주를 보고 불안감이 증폭되어 문자를 몇 개씩이나 보내고 전화를 몇 통을 했는데도 연락은 없었다. 나는 지쳐서 양호실로 들어가 여주처럼 누웠다. 보고 싶어. 그렇게 생각하자 거짓말처럼 여주에게 병원에 있다는 문자가 왔다. 나는 망설임 없이 전화했다. 곧 여주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정국은 그 목소리에 한없이 안심했다. 체육대회에 오라는 말을 하고, 다시 교실로 들어섰다. 자리에 앉는데 옆자리에 태형이 앉아왔다. 정국은 맞을 것을 각오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태형은 때리지 않았다. 대신 정국 제게 말을 건넸다. 제가 여주와 민윤기가 양호실에서 자는 것을 봤다고. 진실을 말하는 것만 같은 진지한 눈에 나는 또다시 불안해졌다.
하루를 불안함에 보내고, 그 다음 날에 민윤기의 차에서 내리는 여주를 보고 불안감은 더욱 커졌다. 남자 화장실로 이끈 여주에게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말을 들어도 불안감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여주의 위태로운 말을 들었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교복 단추를 풀어오는 여주의 행동을 보며 정국은 참을 수가 없었다. 부드럽게 움직이는데, 곧 들려오는 '선생님….' 이라는 단어에 정국은 세상 밑으로 추락하는 기분이 들었다. 정리해, 라고 말을 툭 던지자 여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회는 한 번 뿐이야…. 제발. 제발……. 그 날, 얼마나 마음속으로 많이 빌었는지 모르겠다.
며칠 후 정국은 아이들에게 둘러싸인 여주를 발견했다. 여자 아이는 사진 한 장을 건넸고, 사진에는 민윤기와 여주가 몸을 섞는 장면이 들어있었다. 심장이 쿵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꾹 참아내다가, 폭발할 것만 같은 자신을 다시금 꾹 참아내고, 조례 시간에 여주의 손목을 잡고 강당으로 향했다. 저를 좋아하냐는 물음에 여주는 좋아한다고 대답했지만 자꾸 허전한 마음은 애정을 달라고 강요했다. 자꾸 집착하게 되는 정국 제 자신이 두려워서 정국은 울었다. 자꾸만 혼자가 될 자신의 모습이 상상되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교실에 돌아와 계속되는 여자 아이의 괴롭힘에 확 짜증이 나 진리의 손목을 막아냈고, 여자 아이의 남자친구라던 아이에게도 주먹을 날렸다. 그리고 여주를 데리고 나와 한껏 괴롭혔다. 집착하고, 키스하고. 이제는 돌이킬 수 없었다. 집착을 해서라도 여주를 제 옆에 두고 싶었다. 민윤기가 들어와 뭐라고 해도 정국 저는 이미 미쳐있었다. 여주는 당신과 사귀지 않아. 여주는 제 여자친구였다. 이미 제가 소유하고 있는, 여자친구.
그러나 우습게도 버려졌다. '세경이'라는 단어 하나에. 정국은 여주의 손목을 잡았지만 여주는 발을 동동 굴렸다. 언제까지 세경이, 세경이, 하면서 살 거냐고 물어도 이미 여주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민윤기와 얽혀있는 삶에서 벗어날 것을 한없이 눈으로 말하고 있었다. 손으로 말하고 있었다. 가지 말라고, 나를 버리지 말라고, 혼자 두지 말라고, 얼마나 외쳤는데. 그러나 여주는 제 손을 놓고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민윤기를 따라나섰다. 그리고 3일 동안 여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동안 나는 버려졌다는 생각과 버려지지 않았다는 생각의 싸움으로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다는 허무한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문자를 보내도 답이 없었다. 전화를 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곧 많은 생각들은 이게 끝이구나, 하는 생각으로 그렇게 끝맺음했다. 나를 버리지 않는다고 했잖아. 정국은 여주를 원망했다. 그리고 저를 원망했다.
여주가 돌아와 아련하게 불러와도 바라보지 않았다. 보고 싶었다는 말에 마음이 저려서 아파왔지만 바라볼 수가 없었다. 우리 그만 아프자. 헤어짐의 말을 건네면서 결국은 울먹였다. 이별의 순간은 언제나 힘들다. 보고 싶었다며 안기는 여주를 차마 안아주지 못했다. 차가운 말을 받아내며 떠는 여주를 안아주고 사랑한다 말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이제 벗어나고 싶었다. 곧 이별의 공간에서 벗어났다.
심장이 쪼개지는 느낌이었다. 가방을 두고 여주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정국 또한 그냥 학교에서 나와버렸다. 마음이 너무 아파서 수업을 들을 수가 없었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누워버렸다. 곧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무시해버렸다. 보고 싶어서 죽을 것 같았다. 정국은 이불을 머리 끝까지 올리고 목놓아 울어버렸다. 너는 나를 사랑했을까. 나는 너를 사랑했는데. 아니, 정국은 지금도 여주를 사랑하고 있었다.
정국은 핸드폰을 닫고 들썩이는 바다를 조용히 쳐다보았다. 문구가 정국의 앞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미안해, 카르데아. 여주에게 야누스는 윤기, 카르데아는 정국 제 자신이었다. 문구 하나로 정국은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결국 로맨스의 윤리학에서는 아무도 행복할 수 없다. 다른 세상으로 떠나버린 윤기와 여주도, 스러져버린 심장을 간직하며 다시 살아갈 정국도, 그리고 세경도. 정국은 바닷가에 가까이 가 바닷물을 제 손에 담았다. 그리고 거기에 입을 댔다. 여주의 웃는 얼굴이 희미하게 떠올랐고, 정국은 맥없이 웃었다.
거기에 있다면 말해봐.
이제는 행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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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