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
- 영화 '건축 학개론' 中
'양
아
치
의
순
정'
prologue
행운을 빌어요~
…내가 왜 여길 와 있는거지. 정신 사납게 별이 여러개 박힌 새 하얀 양말을 신은 발이 뭐가 그리 불안한지 달달달 떨리기 시작했다. 짙은 회색깔 가정통신문을 쥔, 왼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눈앞에 펼쳐진 현관문을 바라보곤 마른 목에 억지로 침을 삼켜 보냈다. 검지손가락 하나 펴서 초인종을 누르는게 뭐가 그리 어렵다고 여주는 도착한지 40분이 지났음에도 그 조그만한 초인종 하나 건들지 못했다. 침착해 김여주. 권순영은 그냥 같은 반 친구일 뿐이야. 좀 특이한.
애써 긍정적인 마인드로 생각을 마친 여주가 심호흡을 크게 한번 하더니 조그만한 초인종과 마침내 접전했다. 띵동. 경쾌하게 울리는 종소리가 마치 저를 저 세상으로 보내버리는것 같아 여주는 마른 입술을 애써 혀로 축였다. …. 뭐지. 초인종을 눌렀음에도 불구하고 한참이 지나도 인기척이 들리지 않자 문득 궁금증이 생긴 여주가 현관문에 귀를 바짝 갖다대고 미세한 잡음이라도 놓치지 않겠다는듯 온 몸의 신경을 기울였다.
"……"
"……"
"…어, 저기 그러니까."
"김…여주?"
솔직히 좀 놀랬다. 저런 양아치가 내 이름을 알고 있을 줄이야. 매일같이 아침 조회가 끝나면 그 날 하루의 종례가 끝날때까지 교실을 들어오지 않는, 그냥 말 그대로 밥먹으러, 친구보러 학교오는 권순영이 내 이름을 알고 있을 줄 누가 알고 있었겠는가. 아프다는 담임선생님의 목소리가 거짓말이 아니였는지 나를 빤히 바라보는 그 몸은 땀에 흠뻑 젖어 왠지 더 쇠약해져보인 모습이였다. 가뜩이나 말랐는데 말이다. 한참 동안이나 벙찐체 나를 바라보던 녀석이 말똥말똥. 자신을 바라보는 내 눈에 이내 눈이 왕따시만하게 커지더니 그대로 현관문을 닫고 들어가버렸다. 뭐? …잠깐만 그대로 들어가버려?
"저ㄱ, 야! 권순영!"
오, 뭐 이런 새끼가 다 있어. 차마 대놓고 욕을 할 깡은 없어 마음속으로 욕을 읊으며 당황함에 빠져있었을까, 이내 다시 열리는 문엔 왠 곱상하게 생긴 여…자? 분이 서 계셨다.
"어머, 순영이 친구니? 들어와."
아. 아마도 녀석의 어머니되시는 분 같아보였다.
…내가 왜 여길 와 있는거지. 어디서 많이 본 레파토리같지만 나의 눈을 마주보시며 생글생글 웃어오시는 권순영의 어머니 탓에 차마 얼굴에 철판 깔고 "가보겠습니다!" 하고 현관문을 박차고 나올 순 없었다. …하긴, 누구 집인데. 어색하게 치마 자락만 만지작 거리는 나를 말없이 바라보시던 권순영의 어머니가 뭐가 그리 좋으신지 웃음을 지우지 못한체 입을 여셨다.
"아가, 이름이 뭐야?"
"아…. 김여주라고 합니다."
이름도 예쁘네. 하하. 둘 사이에 맴도는 어색함이 보이시지도 않으신지 기계적으로 웃어오는 나를 보며 권순영의 어머니는 더욱 환하게 웃어보이셨다. 한참을 무슨 형사가 범인을 취재를 하듯 코치코치 캐묻는 질문에 입이 아프도록 대답해 드리고 있었을까, 굳게 닫혀있던 방 문중 하나의 문이 벌컥 하고 열렸다.
"어, 아들 아픈건 어때?"
"……"
"……"
"…너 아직 안갔냐."
아까와 달리 뽀송한 모습을 한 권순영이 젖은 머리를 털며 나에게 물었다. 어,어. 가야지. 어색하게 일어나는 나의 모습에 섭섭하다는 표정을 짓는 권순영의 어머니 뒤로 그제서야 손에 쥐고 있던 가정통신문이 생각이 나 이쪽으로 저벅저벅 다가오는 권순영에게 말없이 내밀었다. 내 눈을 한번 내 손에 들린 가정통신문을 한번 바라본 권순영이 이내 무슨 벌레 만지듯 가정통신문 모서리를 검지와 엄지를 이용해 살짝 건네 받았다. …아니 이 새끼가. 아까 말했듯 난 깡없는 사나이라 차마 욕설은 목구멍으로 흘려보내야 했다.
"…그럼 가 볼게요."
"…너무 아쉽다. 아들, 여주 좀 데려다 주고 와."
"엄마아들 아픈데요. 그리고 대낮이구만 뭘…." 참아라 김여주. 진저리 난다는듯 인상을 찌푸린체 고개를 젓는 권순영에 애써 올라가지도 않는 입꼬리를 올리곤 권순영의 어머니께(만) 허리 굽혀 인사를 드린 뒤 빠른 걸음으로 권순영의 집을 빠져나왔다. 현관문을 닫자 마자 벽에 기대고 있는 권순영의 자전거를 차버리고 튈까? 하다가 다음날 사라질 내 목숨이 훤히 보이는것같아 애꿎은 벽만 서너번 찼다.
…미쳤어. 미쳤어, 미친거야 권순영. 제 엄마께 인사를 드리고 황급히 자신의 집을 빠져나가는 그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순영의 눈이 한순간 탁- 하고 풀리는 순간이였다.
미쳤다는 말만 반복하며 넓은 거실을 정신없이 왔다갔다 거리는 제 아들의 모습에 그녀는 안쓰럽다는듯 혀를 끌끌 찼다. 아들 쟤가 여주야? 그런 저에게 정신차리라는듯 들려오는 제 엄마의 목소리에 순영은 고개를 서너번 끄덕였다. 어, 겁나 이쁘지. 여주의 앞에서 차가움을 넘어서 싸가지가 없었던 제 행동을 자책하던 아들의 모습이 한 순간 사랑에 빠진 소년의 모습이 되자 그녀는 못말린다는듯 웃음을 지었다. 누구 아들인지 보는 눈은 있네.
"근데 아들 이건 뭐야?"
"아! 건들지 마!"
탁자위에 놓인 가정통신문을 집어들려는 제 엄마의 행동을 재빨리 막은 순영이 겨우 종이 한장을 소중하다는듯 검지와 엄지로 들어 올렸다. 여주의 손길이 닿았다는 것만으로도 좋은지 순영은 종이 한장을 바라보며 싱글벙글 웃었다. 아 진짜 오늘 잠은 너 때문에 다 잤다. 여주야.
…이 정도면 병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