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
- 영화 '건축 학개론' 中
'양
아
치
의
순
정'
04
선
"그러니깐 이 부분은 뭐다?"
"……"
제게 던져진 질문에도 순영은 뭐에 홀린듯 말없이 여주의 얼굴을 빤히 바라볼 뿐이였다. ...왜, 뭐 묻었어? 제 시선을 느꼈는지 손으로 얼굴을 더듬거리며 묻는 여주의 말에 순영은 살랑살랑, 고개를 작게 저었다.
"공집합?"
"오! 맞아."
제가 맞춘것도 아닌데 작게 손뼉을 치며 좋아하는 여주의 모습에 순영은 그만 히죽, 하고 웃어버리고 말았다. 아 귀여워. 도서관에 도착했을때, 여주와 순영 사이를 맴돌던 어색함은 어디갔는지, 한층 편해진 분위기 속에서 둘은 간간히 작은 담소를 나누기도 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어느새 자신과 여주. 두 사람을 포함해 10명 밖에 안되는 도서관 내부에 순영은 크게 몸을 늘리며 기지개를 폈다. 그리고선 제 앞에서 잔뜩 집중을 헀는지 미간을 찌푸린체 문제를 풀고 있는 여주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이게 뭐가 무섭다고 난 그 동안 피했던걸까. 혹여 자신의 마음이 들키기라도 할까봐 교실에 발 한번 디딜지 않았던 과거의 자신에 순영은 픽- 하고 웃음을 흘렸다. 새삼 믿기지 않았다. 순영 제겐 특별하지만, 남들이 봤을땐 그저 평범한 여주와 정말 남들이 봤을때 특별한 자신이 이렇게 나란히 앉아 있다는게 믿기지 않았다. 게다가 목적도 같았다. 순영은 여주를 위해, 다른 의미이지만 여주 또한 순영을 위해 도서관에 발을 내밀은 것이다.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 책상에 늘어지면서 순영이 작게 중얼거렸다. "…진짜 멈췄으면 좋겠다."
"사실 아직도 무서워."
담담하게 내뱉는 여주의 마지막 말에 순영은 가슴 한구석이 욱씬거리는걸 느꼈지만, 애써 태연한 척 나란히 발걸음을 옮겼다. 밤 11시. 적게 나마 돌아다니는 사람들 속에 순영과 여주가 나란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약간의 정적속에서 시작된 발걸음 중에 여주가 대뜸 순영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나 처음 봤을때 너 되게 무서웠는데. …그리 순한 인상은 아니지만 무섭다는 소리는 못 들어봤는데(누가 권순영 앞에서 대놓고 무섭다는 말을 꺼낼까.) 여주의 말에 순영은 빠르게 축- 쳐졌다.
"근데."
"……"
"나쁜애 같진 않아."
그리고 누구보다 빠르게, 축 쳐졌던 몸이 무섭도록 히죽 거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맞아, 나 좋은애야! 신나서 말하는 순영의 말에 여주는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개웃긴다 너. 별로 듣기 좋지 않은 은어지만 여주의 입에서 나온 말이 뭔들 안좋을까. 순영은 자신을 향해 웃고있는 여주에 심한 가슴 떨림을 느꼈다. 근데 너 왜 갑자기 공부하겠다는 거야?
"…어?"
"아니 요즘 들어 이상하기도 하고, 교실도 잘 안들어오던 애가."
…눈치 챈건가. 묘하게 굳어진 순영의 표정에 여주는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입을 삐죽였다. 아님 말고. 앞서 나가는 여주의 발걸음에 그제서야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심한 순영이였다. 황급히 발걸음을 옮겨 여주를 따라 잡은 순영이 다시 그 옆에서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냥,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이유가 생긴 것 같아서. 알쏭달쏭한 순영의 말에 여주는 그래? 하며 고개를 기웃거렸다. 그럼 제대로 할래?
"…어?"
"내기 하자."
"뭐?"
"점수 내기."
상대가 안되는 게임이였다. 하지만 그런건 순영에게 문제가 되지 않아보였다. 그저 여주와 함께, 그것도 단 둘이 무얼 한다는거에 대한 벅참에 순영은 빵빵한 볼살과 함께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무슨 양아치가 저래. 애 같은 순영의 모습에 여주는 너털웃음을 뱉었다.
"진 사람이 이긴 사람 소원들어주기."
"소원?"
"응."
"좋아, 좋아."
"대신, 내가 너 공부도 가르쳐 줄게."
이참에 걍 성적이나 올려. 인중을 긁으며 태연하게 뱉었을 뿐인 여주의 말에도 순영은 감격에 벅차 고개를 돌려 입을 틀어 막음으로써 환호성을 간신히 삼켰다. 큼, 진정시킨 감정의 순영이 이번엔 힐끗힐끗, 옆에서 말 없이 걷고 있는 여주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아 맞아."
"…어?"
들키기라도 한걸까. 뭔가 생각났다는듯 뱉은 여주의 말에 순영이 다시 긴장을 하기 시작했다.
"너 담배 피지."
"……"
꿀 먹은 벙어리였다. 제 친구들과는 아무렇지도 않게 주고 받았던 담배인데 왜 그 단어가 소중한 여주의 입에서 나오는게 그렇게 수치스러운지. 어느새 새빨게진 순영이 아무말도 못하고 그저 입술을 꾹, 깨물고 있었다. 끊어.
"…어?"
"너 들어올때마다 냄새 나."
미친 권순영. 너는 살아갈 자격도 없다. 굳어진 여주의 목소리에 순영은 애꿎은 입술만 특특, 깨물며 자신도 표정을 굳혔다.
"…몸에"
"……"
"안좋기도…하고."
"…어?"
"…아이 그러니까 피지 말라고."
…새하얀 가로등 조명에 비춰진 너의 귀가 살짝 빨개진 것 같은 건 내 착각일까. 누군가에게 걱정 비슷한 감정을 받는건 참 벅찬 기분이구나. 여주야 너는 날 하루에 몇 번이나 울고 웃게 만든다. 빠르게 앞서 지나가는 여주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순영은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한체 결국 바보처럼 웃음을 흘리며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야! 여주야! 짝꿍! 같이 가!
"아 시끄러 지금 오밤 중이야!"
"여주야 너 집 어디야? 데려다 줄게."
"됐네요, …누가 누굴 데려가 줘."
"왜! 데려다 줄래. 어? 어?"
"와 너 성격 원래 이랬냐?"
"말했잖아 나 좋은애라니까?"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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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최고로 대오글. 새벽에 보길 추천. 폭풍연재는 끝난듯 싶소. 이제 좀 천천히 달리겠소. |